이란 3 - 메디아 왕국과 문명 세계를 거의 정복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신바빌로니아와 함께 당시 메소포타미를 비롯 최초의 제국이라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이란의
메디아 왕국은 기원전 678년에 이란계 고대 민족이 이란의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했습니다.
엘람에 뒤이은 "메디아" 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영어로는 Medes/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였고..... 왕국의 중심지는 엑바타나 였으며,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를 믿으며 번영을 구가했는데 기원전 549년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에 망합니다.
성경에서 표기는 “메대” 인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였으니
현대 지명으로는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 입니다.
메디아인들은 이란 고원에 살면서 좋은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때 북방 기마 유목민인 스키타이인들의 침공을 당했지만, 키악사레스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키악사레스왕은 영토를 이란고원 너머로 확장하고, 신바빌로니아와 함께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해 수도 니네베를
함락해 멸망시켰으며, 동쪽으로 인더스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에 있던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휴전하니 메디아는 터키 리디아 및 바빌로니아와 3국 정립을 이룹니다.
키악사레스왕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 왕은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 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으니 리디아와는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신바빌로니아는
신아시리아 멸망 때 부터 계속 우방이었기 때문에.....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 까지 가담하니
기원전 549년에 아스티아게스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러 나섰지만 패배해
아스티아게스왕 본인은 포로로 사로잡히니 메디아 왕국은 멸망하고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로 대체됩니다.
왕조의 명칭이기도 한 창시자 아케메네스는 그리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와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의 아들로 제우스의 손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는 후대인 다리우스 1세의 대에 이르러 창작된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
페르시아가 소아시아 서부 이오니아를 점령하려던 때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되자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나라를 조사하라는 명까지 있는 것을 보면 사실이 저 신화는사실이 아니지만
그리스인들은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을 자기네 세계관에 끼워맞춰 이해하려 들었다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는 그리스인만의 행위가 아니니 고대에는 낯선 이민족을 자기네 세계관에 끼워맞추는 일이
많았는데... 중국만 해도 사마천은 흉노를 하(夏) 나라의 후손으로 기록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 최초 발상지는 이란 서남부 '파르스' 지방이며, 이 지명에서 '페르시아' 가 나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원래 유목 민족으로 그 발상지는 이란 서남부 파르스 지방이니, 기원전
1000년경 파르스 지방에 정착했는데 당시 같은 이란계 국가인 메디아가 칼데아의
신바빌로니아와 손잡고는 패권국인 아시리아를 무너뜨린후 새 패권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아케메네스가는 처음에는 안샨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 세력이었는데 뒤를 이어 테이스페스,
키루스 1세, 캄비세스 1세 등이 연달아 즉위했지만 큰 업적은
남기지 못했고 메디아 왕국의 속국에 불과했는데 키루스 2세 때에 대제국으로 성장합니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의 마지막 군주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이자 안샨의 왕 캄비세스 1세의 아들로 559년
부왕이 서거하자 키루스 2세는 안샨의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하지만 안샨은 메디아
왕국의 일부였고...... 메디아는 서쪽의 대국 리디아와 대립하며 근동 지방을 다스리는 대제국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키루스 2세가 과감하게 메디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안샨과 메디아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메디아왕 아스티아게스는 심복 하르파고스에게 대군을 주어 키루스 2세를 제압하도록 했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보낸 아시카가 장군 처럼 오히려 하르파고스가 키루스 2세에 붙어버리면서 전세가 역전됩니다.
두 나라 사이에서는 기원전 553년 부터 550년 까지 전쟁이 계속됐고, 결국 엑바타나 전투에서
아스티아게스 왕이 키루스 2세에게 사로잡히면서 메디아는 멸망하는데,
키루스 2세는 아스티아게스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의 딸 아미티스(이모?) 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에 의하면 제 외손자가 메디아를 멸망시킨다는 불길한 예지몽을 꾼 아스티아게스가
어린 키루스를 죽이라고 명하니 하르파고스가 아이를 바꿔치기해 살려냈고, 그후 키루스를
소치기에게 맡겨 키웠다는데....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 설화와도 유사하지만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인과 파르스인은 언어, 문화,
인종 그리고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메디아 - 페르시아인으로 하나가 됩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르시아 제국을 최초로 건설한 왕조이자 기원전 550년 부터 기원전
330년 까지 무려 220년 동안 존속한 이란의 고대 왕조로, 오리엔트 문명권 전체를
최초로 통일해서는, 중동 문명의 기본틀을 제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 이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엄청난 부를 기반으로 발행한게 유명한 페르시아의 금화와 은화인데, 그러나 명성이 무색하게도
페르시아 지방은 본디 금화라는 개념이 생소한 지방이었으니... 키루스 2세가 나라를 넓히던중
리디아를 정복했는데 리디아는 왕이었던 크로이소스의 지시로 세계 최초의 금화를 주조해 쓰던 나라였습니다.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금화가 그럴듯해 보이자 곧바로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화폐 주조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리디아가 쓰던 사자와 황소 문양을
그대로 새겨넣었고, 금화의 중량 역시 10.7g 으로 리디아의 것을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터키 아나톨리아 (소아시아) 정복을 완료한 키루스 2세는 서부의 핵심 대도시 사르디스에 조폐창을
설치하고, 수많은 금화와 은화들을 찍어냈으며 물물교환이나 기껏해야 은덩어리로
거래하던 당시로서는 혁신적 기술이었던 화폐 덕에 페르시아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동쪽으로 북인도, 북쪽으로 중앙아시아, 서쪽으로 불가리아와 그리스 동북부, 남쪽으로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달하는 대제국으로 영토 면적은 로마 제국 보다도 넓은 엄청난 제국
이었으니, 조로아스터교 신앙의 전파, 페르시아 정체성의 확립, 중동 패권국들의 틀을 잡은 왕조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Achaemenid Dynasty) 라는 이름은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2세의 가문 시조 이름인
'하하마니쉬'(Haxāmaniš) 를 고전 그리스어로 음차한 '아카이메네스' (Akhaiménēs) 에서 유래했습니다.
'페르시아' 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파르사' (𐎱𐎠𐎼𐎿, Pārsa) 이니, 파르사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로 이란의 파르스 주에 해당하는데, 왕가와 지배 종족의 고향땅으로 속주들 가운데 으뜸
대접을 받았지만, 지방과 출신 종족의 이름이었을뿐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국호로 쓰인 적은 없습니다.
제국이 멸망한후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인도인 등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국을
파르사에서 유래한 이름들로 기록하면서 “페르시아” 가 이 제국의 대표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라고 하면 아케메네스 왕조를 떠올리며, 이란, 아프가니스탄(북부), 타지키스탄의 시조가
되는 나라 라고 할수 있으며,《성경》에도 나오는 키루스(고레스왕) 대제,
다리우스 1세, 그리스와 전쟁으로 유명한 크세르크세스 1세, 불사 부대 (이모탈) 등으로 유명합니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엘람 등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며 페르시아 영토를 일구어
냈고,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며 세계 최강국 지위를 다졌으며
명군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메디아 왕족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박트리아, 파르티아 등 기존의 메디아 봉신국들도 평화롭게 흡수할수
있었다고 하며, 메디아 지방 전체가 키루스 2세의 손에 들어왔지만 이제 새로운 적수 리디아가 등장합니다.
아나톨리아 서부의 강대국 리디아가 메디아 지방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영토를 넓히고자 국경을
넘어왔는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도시 프테리아를
침공해 함락한 후에는 시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아 끌고 가니 키루스 2세는 보복을 결심합니다.
리디이왕 크로이소스는 대국 페르시아를 공격할까 말까 갈등하다가 그 용하다는 델포이 신탁에 답을
구하니 델포이는 “거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다” 라는 답을 보냈고, 기뻐한 크로이소스 왕은
군대를 몰고 페르시아로 진격했지만 결과는 크로이소스의 패배였는데..... 델포이에서 말한
'거대한 제국' 은 페르시아가 아닌 리디아 왕국을 말했던 것이라? 신탁이니 점이니 하는게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리디아의 속국인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대군을
이끌고 직접 크로이소스와 격돌했는데.... 키루스 2세와 크로이소스는 프테리아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승세가 갈리지 않은채 서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자 크로이소스는 군대를 수습해 수도 사르데스로 후퇴합니다.
사르데스로 후퇴한 크로이소스는 동맹국들에게 군대를 보내줄 것을 호소했지만 겨울이었던지라 군대를
채 모으기도 전에 키루스 2세가 사르데스로 밀고 들어오는데, 사르데스의 기병 부대와
끈질긴 방어 때문에 쉽게 성이 함락될 것 같지 않자 키루스 2세는 낙타를 내세우는 기발한 전략을 씁니다.
낙타의 냄새에 익숙지 않았던 리디아 군마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전략을 썼던 것이니 이
전략은 잘 먹혀들어갔고, 결국 팀브라 전투에서 크로이소스가 대패하며 기원전
546년에 리디아의 수도 사르데스가 함락되니 리디아 마저도 페르시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팍티아스 라는 리디아인에게 명을 내려 크로이소스의 황금을
페르시아로 보내도록 시켰지만 팍티아스는 오히려 키루스 2세가
돌아가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분노한 키루스 2세는 장군 마자레스를 보내 이를 진압합니다.
팍티아스가 이오니아로 달아나자 마자레스는 이를 추격하였지만 중도에 사망하자
앞서 메디아 정복 당시에 키루스를 도왔던 하르파고스가 원정을
이어갔으니 이 원정으로 리키아, 킬리키아, 페니키아 등이 페르시아에 편입됩니다.
메디아에 리디아 까지 정복한 키루스 2세는 메소포타미아의 강대국이던 신바빌로니아에 눈길을 돌렸는
데, 메디아와 리디아를 정복함으로써 국력은 커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농토와 막대한
재물, 바빌론을 방어하는 거대한 이슈타르의 문과 성벽, 해자 역할을 하는 유프라테스강에 애를 먹습니다.
신바빌로니아를 완전히 공략하지 못한다면 페르시아는 언제든지 측면을 공격당할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너뜨려야만 했으니,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40년에 엘람과 수사를 함락했고,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강의 오피스 전투 (Battle of Opis) 에서 대승을 거두며 신바빌로니아를 꺾는 데 성공합니다.
오피스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페르시아 군대는 유프라테스강의 물줄기를 통째로 돌려 수위가 낮아진 틈을 타
바빌론으로 진격했으니, 바빌론의 높은 성벽도 페르시아 군대를 막을수는 없었고 그해 10월에
함락되자 나보니두스왕도 보르시파에서 돌아와 항복했고.... 키루스 2세는 10월 29일 바빌론에 입성합니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왕' 으로 칭하면서 기존의 바빌로니아 신앙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점령군이
의외로 제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니 바빌론 시민들이 크게 반항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입니다.
심지어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대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자신을 마르두크의 대리자로 포장
하면서 최대한 반발을 완화시켰는데, 바빌론 함락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서쪽
으로는 소아시아, 동쪽으로는 인더스강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을 이룩합니다.
바빌로니아 정복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바빌론에 잡혀와 있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갈수 있었기 때문으로,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 가 바로 이 키루스 2세
이니..... 다니엘서에 보면 벨사자르왕 (나보니두스의 아들) 이 페르시아군이 쳐들어
오는 줄도 모르고 성대한 연회를 벌이고 있다가 연회가 끝나자마자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평소 관용을 중시했던 키루스 2세는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이스라엘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그동안 바빌론에 갇혀살면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맛보고 있던 유대인
들은 키루스 2세의 은혜에 엄청나게 감복했으며 게다가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사업에 국고를 지원해주자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 라고 쓸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극히 배타적인 민족인지라 성경에서 이민족 출신으로 이정도의 극찬을 받은 인물은 키루스
2세가 유일하며 그 후에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으니 그정도로 키루스 2세의 위업이
엄청났다는 것이며 그외 '(유대 민족에) 빛을 가져온 자', 즉 '샛별(헬렐)' 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야이사야서 45장 1절에는“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그러니까...... 아전인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키루스 2세가 유대인을 풀어주었던 것은 신의 예정된 뜻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더 크니, 키루스 2세는 대제국
의 통치자로서 수많은 민족을 거느렸기에 관용을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족과 분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심지어 정복한 바빌론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약탈과 파괴를 최소화했습니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 정복한후 제작한 키루스 원통에서 스스로를 세계 사면의 왕이라고 칭하며 그동안 바빌론에
노역을 강요당하던 여러 백성들을 해방시켰고, 바빌론이 약탈해온 여러나라 종교 신상과 상징물을 원래 있던
성전에 되돌려 놓았으며 황폐화 되어 비어있는 가나안 땅에서 세금을 거두자면 거기에 사람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0년 7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는 트란스옥시아나
서부에 살던 마사게타이를 상대로 원정을 치르다가 죽었다는데, 키루스 2세는 마사게타이를
상대로 선전했고 계략을 써서 마사게타이족 여왕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를 붙잡는데 성공합니다.
토미리스 여왕은 스파르가피세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 전에 스파르가피세스가 먼저 자살했고, 아들의
죽음에 격분한 토미리스가 마사게타이족 전군을 이끌고 나가 결국 키루스 2세를 꺾었다는 것입니다.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 2세의 목을 잘라 피가 든 항아리 속에 넣고 ' 그렇게 좋아하는 피를 마셔라!' 며 일갈했다는
데.... 키루스 2세가 전사한건 맞지만 시체가 능욕당하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고, 그가 스키타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했다는 말도 있으며 페르시아 역사가 크세노폰은 아예 그가 수도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썼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등 그리스군에 패한 전투들이 유명하기 때문에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 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으니.... 페르시아군이 약골이었다면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에 인더스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페르시아군은 키루스 2세 시절 부터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는 지중해 세계 최강의 군대들
중에 하나였고, 키루스 2세 이후 대제국으로 거듭나자 바빌로니아인,
시리아인, 아시리아인, 페니키아인등 수많은 다민족들을 포괄한 혼성 군대로 변모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민족 구성이 다양해 명령체계가 섞이거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지휘 체계가 엉성졌는데
페르시아인에다가 페니키아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메디아인, 파르티아인, 리디아인,
심지어는 마케도니아인이나 그리스인 까지 지나치게 많은 민족들이 잡탕처럼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보병은 '불사 부대', '스파라바', '타카바라' 3개로 나눴고 후대에 '카르다케스' 라고
하는 제4의 병종이 생기는데, 영화 300에서 유명세를 탄 불사 부대는 '이모탈'
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니 살아 있는 오크 처럼 생긴게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불사 부대' 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전사나 기타 사유로 결원이 생기면 그만큼만 새로
채워넣어 정확히 정원 1만명을 유지했기 때문인데, 나무껍질이나 갈대를 엮어 만든 방패에
짧은 창, 칼, 그리고 단검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밖에 걸치는 로브 아래에 미늘 갑옷을 입었습니다.
불사 부대의 장교들은 계급을 표시하기 위해 창날에 도금을 했고 일반 병사들은 은으로 만든 창날을
썼으니, 페르시아 자타공인의 최정예병이었고, 황제 직속의 부대라 황궁 경비나 황족 호위
등을 맡았는데, 웬만한 무예는 통달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려 뽑았으니 그 전력은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의 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와 격돌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맥을 못추고 쓸려
나갔는데, 이는 불사 부대가 호플리테스와 비교해 무장이 가벼운 편이었던 탓이 컸습니다.
페르시아 불사부대는 기껏 흉갑만 걸쳤기에 머리 부터 발끝 까지 갑옷으로 도배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인데,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의 창을 부러뜨리려고 페르시아 군사들이 맨손으로 달려
들었다는 헤로도토스 저서《역사》의 서술을 볼때 정예병 답게 충성심과 사기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사 부대 외에 스파라바와 타카바라가 있었는데, 스파라바는 앞에서 방패벽을 세우고 최전방에서
적과 가장 먼저 충돌하는 병사들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페르시아 군대의 척추를 맡았습니다.
다만 불사부대가 무예가 뛰어난 귀족 자제들만을 가려 뽑은 상비군인데 반해 스파라바는 모병제를 통해서 징발
된 일반 농부나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훈련 정도는 불사 부대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파라바는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으니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방패를 들고 킬트 장식이 들어간 가벼운
리넨 망토를 둘렀는데, 2m 가 넘는 거대한 창을 든 그리스 중보병을 막는건 불가능했으니....
스파라바의 방패는 화살 정도만 막아내는 정도였지 그리스군의 창에는 뚫렸고 팔랑크스 진영도 못 막았습니다.
스파라바 보다도 더 가벼운 경무장을 했던 타카바라는 대규모 전투에서 싸우기 보다는 요새를
방비하거나 초소를 지키는게 주 목적이었을 거라 여겨지는데 무장은 물론 복식도 통일되지
않아 각각 출신 부족들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손도끼 '사가리스' 와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말기에 제4의 병종 '카르다케스' 는 그리스 중보병 호플리테스에서 영감을 얻어 중무장 보병대를 만들었는데,
주로 그리스 출신 용병들로 구성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이 침공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탓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창설되자마자 나라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전술이나 의복에 대해 알려진게 없습니다.
다스려야할 땅덩어리가 커서 군대의 빠른 기동성을 중시하던 페르시아였던지라 기병대도 중요한 병종
이었으니..... 페르시아 기병은 전차 부대, 말을 탄 기병대, 낙타 부대, 코끼리 부대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주된 전력은 전차 부대로 페르시아 제국 성립 초창기에 많이 쓰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줄었고, 말기에는 예식용이나 퍼레이드 용으로나 썼지만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대규모의 전차가 투입된 것을 보면 그래도 실전성은 유지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말기에는 전차 부대 대신에 말을 탄 기병대가 많아졌는데, 말에게도 기수와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혔고 기수는 짧은 창, 미늘 갑옷, 활 등을 썼으며.....독특하게도 낙타
부대가 있었는데, 키루스 2세가 리디아와 벌인 팀브라 전투에서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리디아의 강력한 군마들 때문에 전쟁에 차질이 생기자 키루스 2세는 말들에게는 생소한 낙타를
전장에 투입했고, 리디아 군마들이 생전 처음 낙타의 냄새를 맡고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이후에도 쭉 쓰였으며 전쟁용 코끼리의 경우 인도 지방에서 도입합니다.
코끼리가 전장에서 미쳐 날뛰면 웬만한 사람이 멈추기는 불가능했으니 단연 그 효과 하나만큼은 압도적
이었는데, 문제는 눈이 돌아간 코끼리가 아군도 짓밟을 수 있으며 그리스와 전쟁에서도 코끼리가
투입됐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그리스측 기록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 동원된 15마리 정도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