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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금나라 및 송나라와 싸우면서 고려를 침공!

작성자가흥1|작성시간26.06.07|조회수96 목록 댓글 0

 

몽골 12 - 몽골이 금나라 및 송나라와 싸우면서 배후의 안전을 위해 고려를 침공하다!

 

*** 몽골 11편은 베트남을 침공한 내용인데 베트남 편에서 상세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막강한 기마군단인 세계 최강 몽골군을 맞아 굴복하지 않고 오랜 기간 끈질기게 투쟁해 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나라는  45년간이나 처절하게 싸운 중국 송나라이며... 그외에  베트남과 고려가 있으니 몽골은

1257년에 쿠빌라이 휘하 우량하타이가 송나라를 우회공격하기 위해 5만대군으로 베트남을 1차 침공합니다.

 

 

베트남 침공이 실패한 이후 1259년에 고려의 항복을 받고 이어 1278년에 남송을 멸망시키자.... 1284년에 

구 송나라 군대를 포함해 30만 대군이 토건왕자의 지휘아래 참파를 정복해 남북에서 협공했고

1287년 10만의 몽골군과 20여만 구 송나라군을 합쳐 30여만 대군으로 3차 침공을 했으나 끝내 실패했습니다.

 

 

다음은 29년간 침공 사이 휴전으로 실제 전투는 11년간버틴 고려 왕국 이니.... 전 세계는 작은 나라임에도

1차에서 9차 침공 까지 29년간이나 끈질기에 항전하며 버틴 고려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칭송합니다.

 

 

1차 몽골 고려 침공 :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

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낸후 잘라이르부 출신 장수

살리타가 이끄는 3만 몽골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와 철주를 함락시켰는데 몽골군은

이때 투항한 고려 장수인 홍복원 군사들과 함께 박서와 김경손이 지키는 귀주성을 공격합니다.

 

 

20만명 몽골군 주력은 금나라로 진격했고고려를 침공한 3만 기병은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니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 1만은 안주에 머물고북로군 1만은 북쪽 귀주성으로 보냈으며 남로군 1만은 개성으로

남진시켰는데.... 대월(베트남을 침공한 5만 ~ 30만에 비하면 적은 숫자니 고려의 정복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9월 황해도의 황주와 봉산이 함락되자 고려 조정은 채송년이 이끄는 중앙군인 3군을 출격시키게 되는데 9월 13

몽골 남로군 8천과 고려 중앙군 2만이 야전에서 처음으로맞붙는 장소는 교통의 요지 동선역이었으니 중간에

마산의 초적 3천명이 몽골군 측면을 습격하자 몽골군이 후퇴하니 고려군은 적 선봉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동선역에서 패배한 몽골 남로군은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가 있는 안주까지 퇴각했고 채송년이 이끄는 고려군은

안주의 안북성까지 진출하자 몽골군은 청천강을 건너 안북성 서쪽과 동북방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 안북성을

포위하니 총사령관인 대장군 채송년은 몽골군의 핵심이 기병인 것을 아는지라 공성전을 대비할 것을 주장합니다.

 

 

좁은 고개에서 싸워 이긴 동선역 전투와 달리넓은 평야에서 싸운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며 패망할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으니..... 곽주성(郭州城과 힘을 합쳐 몽골군의 전면 공세를 막아낸후몽골의 힘이

좀 빠지면 곽주성 병력이 몽골군의 퇴로를 막고안북성 병력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강경파가 반대하고 나섰고 우군진주(右軍陣主대집성(大集成이 "우리는 야전에서 몽고군

을  이겼는데 뭐가 무섭냐웅크리지말고 싸우자!"  라고 주장하니.... 목소리 큰 그의 말에 따라

고려군은 성 밖에 나가 진을 치게 되는데다른 진주(陣主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는 성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고.... 이를 본 대집성은 병사들을 나두고 혼자만 성 안으로 되돌아 가니 탁월한 선택이라?

 

 

1만 5천 몽골군은 고려군 2만이 성 밖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하자

지도부가 없는 고려 3군은 몽골군을 맞았는데몽골군은 말에서 내려 부대별로 대열을 지은후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고 있던 고려 우군에게 말에서 내린 몽골군 사이로 갑자기 기병들이 돌격해 오자 고려군은 우왕좌왕 합니다.

 

 

우군을 구원하려던 중군도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고려군은 겁에 질려 너나 할것 없이 황급히 성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몽골군은 기세를 타고 추격해 공격했으니 이 때문에 절반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났고,

장군 이언문(李彦文), 정웅(鄭雄), 우군판관 채식(蔡識등도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니 전투가 아니고 학살이라?

 

 

고려 중앙군은 궤멸되어 전투수행 능력을 상실하니 살리타이는 극소수 병력만 안북성에 주둔시켜 동태를

살피게 하고 병력은 개경으로 내려보내자.... 고려 고종은 스님 3만명을 개경으로 불러모아 밥을

먹이며 기도를 시켰습니다.(親飯僧三萬 凡三日하지만 간절한 기도에도 부처님은 응답이 없고

개경에 도착한 몽골군은 흥왕사 등에 방화를 저지르며 약탈을 일삼았습니다아니 부처님은 뭐하는 거야?

 

 

아무것도 할수 없던 고려 조정은 회안공 왕정을 보내 살리타이에게 보물을 바치고 몽골과 강화조약

을  맺는데.... 채송년이 대집성의 말을 무시하고 성 안에서 버티며 저항만 했더라도 베트남을

침공한 몽골군이 30만인데 비해,  고려를 침공한 병력은 3만이라는 아주 적은 숫자라....

귀주성도 버티고 있었으니 안북부와 곽주성이 건재했다면 제1차 몽골의 침공은 막았을 것입니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백성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몽골군이

철수한후 돌아온 관리들은 계면쩍은지라 오히려 집에 은그릇이 없어졌다며 성을 지킨 노비들을

처벌하자 반란이 일어났으나..... 몽골격퇴의 공을 평가한 조정은 반란을 용서하는데조정이 강화

맺자 귀주성 박서도 항복했고, 몽골군은 개경과 평안도에 감독관 다루가치를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합니다.

 

 

2차 몽골 고려 침공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하였으나 무사정권의 최우는 재추회의 (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고 1232년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로 옮기고 장기 항전의 각오를

다지니 몽골에 대하여 적의를 보인 것이므로 살리타는 7개월 만에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침공해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하고 남경(한양)을 공격한 다음 한강남쪽을 공략합니다.

 

 

수군이 없는 몽골군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다시

남하해 처인성 (處仁城 용인을 공격하다가 살리타는 소수 기병으로 순찰 도중 고려의 김윤후

스님에게 화살을 맞고  전사하니... 대장을 잃은 몽골은 사기를 잃고 철수하는데 최우는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 (家兵) 3천을 주어 반역한 홍복원을 토벌하고 북부 주현(州縣) 을 거의 회복합니다.

 

 

3차 몽골 고려 침공 : 1235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면서 따로 당올태 (唐兀臺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치니 개주(介州 개천)· 온수(溫水 온양)· 죽주(竹州 죽산)· 대흥(大興 예산등지에서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으니 유명한 황룡사 9층 목탑” 도 이때에 파괴 되었습니다.

 

 

몽골은 육지에 화를 입혔으나 강화도는 침공치 못하니 조정은 부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재조(再彫)를 시작하는데... 1238년 김보정(金寶鼎보내 강화를

제의하였고몽골은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이듬해 봄에 철수했는데,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다가 왕족인 신안공 전을 왕제 (王弟라고 칭하여 대신 몽골에 보냅니다.

 

 

4~5차 몽골 고려 침공 귀위크(구육칸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며 아모간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나 이때 몽골은 칸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철군하였으나..... 그후 몽케 칸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 예케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니 동주(철원)· 춘주(춘천)· 양근(양주)· 양주(양양을 공격한후 충주성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예케는 병으로 귀국하는 중에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 (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하니 완전히 철병합니다.

 

 

6차 몽골 고려 침공 몽케 칸은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며 1254년 7월 자랄타이(車羅大

정동원수로 5천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니 전국을 휩쓸고 남하해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몽케칸의 명으로 군을 돌리는데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때 보다 심해 몽골에

잡혀간 포로가 무려 20만 6천 8백여명살상자는 부지기수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라고 했습니다.

 

 

7차 몽골 고려침공 이듬해 몽케 칸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

하여 대군을 보내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지만....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여 몽골은 고려에서 철수합니다.

 

 

8차 몽골 고려 침공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였으며 더욱이 1257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으니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

알현케 하여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킵니다.

 

 

9차 몽골 고려 침공 몽골은 끈질기게 고려왕의 입조·출륙을 요구했으니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등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다가,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김준 (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돌변하여 몽골에 대한 강화의 기운이 생기게 됩니다.

 

 

1259년 3월 박희실(朴希實을 사신으로 자랄타이와 회견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

40여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게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끝에 고려는 항복하였으며 그해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습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는데 이후 원나라가

고려에 원종의 입조와 군대파견을 요구하자 고려내에서 반원세력이 크게 힘을 얻고 임연을

중심으로 1268년 원종을 폐위시키지만원나라가 군대를 파병하니 고려는 원나라 위세에

굴복하고는 1270년 원종이 복위하면서 고려는 몽골에 90년 가까이 내정간섭을 받는 지배를 당합니다.

 

 

1270년에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는 완전히 복종했으며 무신정권 임유무가 처형

고 무신정권이 붕괴되었으니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킨지 100년만으로 1259년에

원종이 몽골에  입조할때 몽골에는 몽케 칸이 급서하고 왕위 계승을 놓고 아리크부카

가 이끄는 유목계 본지파와 쿠빌라이가 이끄는 농경계 한지파 (漢地派가 대립하였습니다.

 

 

이때 원종이 쿠빌라이를 찾아가서 항복하였고 이것은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아리크부카를 물리치고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한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 (不改土風)"  라는 명을 내리니.... 이후 몽골이 고려

를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고려는 이 세조구제” 를 들어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그런데 다 같이 몽골의 침략을 받았지만 베트남과 고려는 차이점이 존재하니.... 하나는 베트남은

점령을  목표로 한지라 몽골이 대월(베트남을 침략한 병력은 1차 5, 2차 항복한

남송 병사를 포함해 30만명, 3차 역시 남송 병사를 포함하여 30~4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입니다.

 

반면에 고려는 몽골이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지방으로 들어가서 금나라나 남송과 싸우는 중에 후방에서

고려군이 금나라(또는 남송)와 손을 잡고 몽골의 후방인 만주지역을 침공하는걸

방지하기 위해 예방 전쟁의 선격이니, 점령이 아니라 굴복시키는게 목적인지라 병사의 수가 작았습니다.

 

 

몽골이 아홉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병력은 1차 3, 6차 5그 외는 1~2만 정도로 보는데 월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으니...... 베트남을 침공한 군대에 비교하자면 10분지 정도의 소수 병력 입니다.

 

또 베트남 침공은 몽골의 왕자들이 정예병인 중앙군을 이끌고 간데 비해 고려에는 중앙에서 달랑 장군

한명만 임명하고병사들은 옛날 징기스캉의 세명 동생들에게 분봉한 만주의 지방 병사

들이라 정예군은 아니니 전투력은 못한데, 반면에 거주지가 만주인지라 자주 침략하는게 용이했습니다.

 

이처럼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아주 적은 숫자 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앙군은 1차 때 안북부

전투에서  졸렬한 대응으로 대패한 이후로는.... 아예 강화도에 숨어서 내륙으로

나오지도 않았으니 몽골군과 전투는 전혀 없었고 지방군이나 백성들이 성에 웅거해 항전했습니다.

 

 

대월 (베트남은 국왕과 왕족에 귀족이며 장군등 지도층이 솔선 수법해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했고  특히 황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에 나타나 원나라군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로하게 하고..... 이후 적이 지치면 월남군이 기습하는등 모범을 보였습니다.

 

 

반면에 고려왕과 최씨 무신정권과 귀족들은 강화도에 숨어서 전투라고는 모른채 격구를 즐기고 팔관회등 화려한 불교

행사에다가 귀한 향신료 후추를 뿌리면서 기생들을 동원한 연회와 잔치를 벌이는등 편하고 안락하게 보냈습니다.

 

고려는 정부가 항복 역속을 어기고는 강화도 섬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항전하였으나 몽골 군은 강화도를 내버려두고

전국을 초토화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고려 정부가 고립되는 사태가 초래되었는데.... 즉 고려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했지만 기본적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나라 유지가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몽골군이 2~9차 여덟차레 침공해 올 때 고려 중앙군이 강화도에 숨어서 나오지 않으니 혼자

힘으로  몽골군과 피터지게 싸워야 했고.... 항복 약속을 받은 몽골군이 철수하면 이번에는

고려 중앙군이 육지로 나오니, 바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함이니 전시나 평시 모두 시달렸습니다.

 

고려는 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국왕이 몽골로 친조하겠다는 항복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에는 항복하였고장기간에 걸친 항쟁과 원종의 뛰어난 판단력

으로 쿠빌라이를 지지함으로써...... 세조구제” 를 통한 최소한의 자율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이후 공민왕때 까지 속국으로 금은과 식량에 말과 토산품 그리고 나라에서 양가집

처녀들을  잡아다가 바쳤으며..... 몽골이 일본을 원정할 때는 식량과 말에 배를 900척이나

만들고 선원에다가 군사 까지 내어 몽골의 앞잡이로 침략 전쟁에 끌려가 화살받이가 되었습니다.

 

원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내정에 간섭하고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조공은 물자 징발에 그치지

않고 공녀 · 환관(宦官)의 차출로 이어졌으니.... 공녀 요구는 1274(원종 15)에 새로 군대에 편입된 남송

(南宋의 군인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 준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부녀를 보내도록 요구한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결혼도감 (結婚都監을 설치하여 민간에서 과부역적의 처승려의 딸 등 140명을

색출하여  보냈는데..... 이로 인해 당시 고려의 민가에서는 곡성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1275(충렬왕 1) 에는 원의 세조가 조서를 보내와 왕국의 통혼과 미녀의 헌납을 요구하여 10인의 동녀

(童女를 보냈으며 이후 원나라는 적게는 2년에 한 번많게는 1년에 두 번꼴로 공녀를 요구합니다.

 

 

한 번에 공녀로 끌려간 숫자는 대개 10명이었는데많을 때는 40~50명에 육박하였으며 원이 공민왕 초기

까지 80여년 동안 공녀 징발의 문제로 사신을 보내온 것이 50여회나 되었고 또 개인적으로 양가

(良家여인과의 혼인을 요구하는 몽골인들도 있어실제로 이루어진 공녀 선발 횟수는 그보다 많았습니다.

 

고려는 공녀의 선발을 위해 결혼도감은 물론 과부처녀추고별감 (寡婦處女推考都別監

설치하였고때로는 나라 안에 금혼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또한, 1287(충렬왕 13)

에는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먼저 관에 보고한 뒤에야  혼인을 하록 하는 왕명을 내립니다.

 

 

공녀의 신분은 처음에는 과부나 역적 · 승려의 딸이었으나.... 점차 왕족 · 귀족 · 관료의 딸들도

선발 대상이 되었는데원나라가 선발 기준을 처녀 · 동녀 및 동녀절미자(童女絶美者)

등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하자공녀의 나이도 점차 어려져 13~16세의 여인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처녀들을 잡아다가 바치는 일로 인해 민간에서는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키는 조혼

(早婚이나 사위를 미리 들이는 예서제 (豫壻制의 풍습이 생겨났으며..... 그것마저

못한 여인들은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도 하였고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폐단으로 인해 공녀 선발은 양국 사이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었으니 고려에서는 이곡(李穀이 공녀의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써서 원의 어사대(御史臺)에 올렸고원에서는 소천작(蘇天爵이 합법적인

공녀 이외에 개인적으로 처첩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원나라에 간 공녀들은 고된 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며 고단한 생활을 하였고때로는 노비로 전락해 매매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데..... 물론 고려의 공녀 중에 특별한 지위에 올라 호사를 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몽골 사회의 상층부에서 황제 · 황후 및 귀족들의 궁인 또는 시녀가 되어 큰 활약을 펼쳤는데원나라

순제(順帝의 제 2황후 지위까지 오른 기자오 (奇子敖의 딸 기황후 (奇皇后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 몽골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려왕을 폐하고 아들이나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가.....  새 왕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세운 왕을 폐하고 전에 폐했던 왕을 다시 왕에 앉히는 등 온갖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 보면 몽골과 고려군과의 전투는 1차 고려가 4승 3패한 것을 시작으로 9차까지 합계 40승 23

라고 나오니.... 그럼 종합하면 여몽 전쟁은 고려가 승리한 전쟁입니다? 고려 천지가 어육이

되고 더욱 6차 전쟁때 몽골에 잡혀간 고려인들이 무려 206,800명인데도 종합적으로는 고려가 승리한 전쟁이라?

 

이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점을 간과한 것이니... 농경민족은 쌀 농사를 짓는 정주민족이니 땅이 중요한데다가

보병이라 진격과 후퇴가 어려우니 어떻게든 성과 마을을 사수해야 하는지라 후퇴는 금물이니

김유신은 아들 김원술이 석성전투에 후퇴한 일로 죽일려고 했으며 왕까지 나서 만류하자 쫓아내고 평생 의절했습니다.

 

 

하지만 유목 민족은 전투 목적이 땅을 점령하는게 아니고 오로지  "재물 약탈" 인지라.... 적이 강하거나

성이 튼튼하면 희생을 무릎써 가며 공격하는 갓은 절대로 삼갔으며전투에서 불리하면

기마부대라 진퇴가 쉬우니 바로 달아나는걸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적이 추격해 오면 복병

숨겼다가 돌아서서 공격했으며 이번 달에 후퇴하면 다음달 혹은 다음해 다시 쳐들어 오는걸 반복합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목적은 점령해서 다스릴려는 것이 아니고 유목민족은 인구가 적은지라 그 적은

병력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가서 인구가 많은 금나라나 송나라와 싸울

때 고려가 후방인 만주를 공격하는걸 방지 하기 위함이니 그럼 오직 고려를 굴복시키는게 목적 입니다.

 

 

아홉차례 공격에서 몽골군은 모든 성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소수의 성만 공격하니 공격당하지 않은 성은 사는 것이고

또 성을 공격할 듯 해서 항복하면 재물을 얻으며 그리고 기마부대는 성을 공격하는게 유리하지 않으니 공격

하다가  함락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지나가며 싸우다가 함락된 성은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서 끌고 갑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성을 공격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지나쳐 가면 이걸 승리로 쳐서 40승이라는데.....

그럼 저 승리했다는 성의 군민들이 몽골군을 추격했느냐아니면 몽골군이 다른 성을 공격

때 출동해 배후를 들이쳤느냐아니면 몽골군이 다른 성에서 얻은 약탈품을 가지고

회군하면 그 앞을 가로 막았느냐?   전혀 아닙니다.  성에 숨어 있기만 했는데도 승리로 치네요?

 

 

이후 오랫동안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에서 들어온 풍습이 많이 있으니 그중에서

으뜸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애환이 서린 한국인들의  술인  "소주"  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제주마결혼식때 신부가 하는 족두리나 연지와 곤지 그리고 만두와 소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에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 만든 타락죽과 순대 및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등 음식문화가 있습니다.

 

 

일부 남자들이 변발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결혼식에서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무관들이 주로 입고 나중에는 사대부들도 널리 입게 된 철릭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며 경번갑과 두정갑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과 환도가 곡도 형태가 된 것도 몽골풍의 영향 입니다.

 

언어생활에서는 당시 몽골어와 원나라 시대 중국어가 어원인 단어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임금님의 밥상을 부르는

수라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를 붙이던 것과 무수리(궁녀등도 몽골어에서 왔습니다.

 

 

궁중 용어인 마노라와 마마가 몽골풍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에 널리

퍼졌으나 이는 잘못된 가설이니..... 마노라(마누라)는 우리말 말루와 下 의 합성어인 말루하

(抹樓下가 변한 것이고  또 마마는 중국어 媽媽 (마마)  에서 유래된 표현이라는 것이 통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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