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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고려를 앞잡이로 일본을 두차례 침공!

작성자가흥1|작성시간26.06.18|조회수61 목록 댓글 0

 

중국38(몽골13) - 원나라는 속국 고려를 앞잡이로 일본을 두차례 침공하다!

 

 

이 글의 제목을 중국 38 로 해야 할지 아니면 몽골 13 으로 해야할지 고민했는데.... 여진족의 거란족의 요나라

와 금나라 및 청나라는 중국사가 맞지만..... 몽골은 현재 독립국이니 몽골사로 하는게 옳은데,

하지만 중국 본토를 다스린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중국사로 보는게 맞겠다는 생각에 이중 제목을 붙였습니다.

 

 

몽골은 금나라와 이후 송나라를 침략해 중국 내지에서 전쟁 중에 배후인  만주에서의 안전을 위해 과거

거란족과 여진족이 그러했던 것 처럼 고려를 복속시킬 필요성이 있으니 오고타이칸은  1231

8월에 살리타이에게 3만을 주어 침공했는데.... 제 9차 침공은 1258년 4월부터 1259년 3월 이었습니다.

 

 

1259년 8월에 몽골의 몽케 칸(툴루이의 장남)이 붕어하고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서 칸위 계승

전쟁이 벌어질 시점에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 왕전이 제5대 대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 (講和 항복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고 태자는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됩니다.

 

 

고려 조정의 의견 불일치로 개경 환도(還都가 지연되는데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 복속을 거듭 표시

했으나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으며 1268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즉위시킵니다.

 

 

그러나 몽골의 압력으로 왕창은 11월에 물러났고,  임연도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죽었으며 임유무는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했고강화(항복) 를 맺은지 10년만에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이후 배중손과 김통정등 일부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히 반대하며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으나

고려군과 몽골군이 손을 잡은 여몽연합군에 의해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1273년 제주도에서 김통정이 살해된후삼별초가 전멸당하면서 끝이 납니다.

 

 

1254년 지랄타이가 이끈 몽골군의 제6차 침공을 보면....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6,800여 명이다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수 없다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라고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에 기록외었습니다.

 

 

훗날의 원종이 되는 태자가 항복하러 갔을 때 동생 아리크부카와 칸위 내란중이던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위세가 높아

진다고 기뻐했는데고려 공략에 동원되었던 만주 지역의 징기스칸의 동생의 후손들인 동방 3왕가로  대표

되는 초원 이남 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니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원종으로 부터 은혜를 입은 셈인 쿠빌라이 칸은 이후 원종이 임연에 의해 강제 폐위되자 원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곧 짐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것"

이라고  천명하며 개입해서 원종이 복위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고려 측의  요구인 "고려 고유의 전통과 체제를 바꾸지 않는다"  는 불개토풍 (不改土風조항을 내립니다.

 

 

이후 훗날의 충렬왕이 되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보르지긴 쿠툴룩켈미시 (제국대장공주

결혼하면서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는데훗날 일본 원정을 위해 몽골 측에서 전진 기지격으로

세웠던 정동행성이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과 식민통치 기구로 변질되면서 고려를 더욱 옥죄는 계기가 됩니다.

 

 

몽골의 입김에 따라 고려 국왕이 폐위되고 시간이 지난후 다시 복위되는 이른바 중조 현상도 2번이나 있었으며 처녀

들을 바치야 했고 또 홍다구를 비롯한 매국노들에 의해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1233년에 고려의 홍복원이

귀주를 비롯한 서경 도호 40여 성을 들어다가 몽골에 갖다 바치니 몽골은 고려땅을 심양로(瀋陽路 )에 편입시킵니다.

 

 

1258년 조휘와 탁청이 화주 일대를 몽골에 갖다 바쳤고,  식민지배를 위한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으며

1270년에는 최탄과 이연령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후 서경의 부진 60개 성을 들어서 몽골 제국에

갖다 바치니그 탓에 자비령에서 고려와 몽골의 국경이 형성되어 식민통치를 위한 통치기구인 동녕부를 설치합니다.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후 1273년에 몽골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경영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이 강제로 빼앗았다기 보다는 고려 매국노들이 스스로 갖다바친 경우라고 할수 있으니 동녕부는 1290년에

고려로 반환되었고탐라 총관부는 1301년에 반환되었으며 쌍성 총관부는 공민왕 때인 1356년에 다시 되찾아옵니다.

 

 

고려인들이 자진해서 땅을 몽골에 바친게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지만 1차 침공시 고려군 3만이 안북성 앞에서 2만 5천

몽골군에게 일반적으로 학살된후 2~8차 침공시 고려군은 강화도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았고 몽골군이 물러가면

그제사 나와 피폐혜진 백성들을 등골을 벗겨 세금을 거두니 몽골 에 귀부하게되면 평화를 누릴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부원배 매국노들인 권문세족이 출현했으니 문벌 귀족의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성장한 가문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관계를 통하여 새로 등장한 유력

가문이자 호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고위급 관직들을 독점하고백성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면서 양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면서 노비로 삼는등 폐단을 일삼았습니다.

 

 

몽의 침공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지는 와중에 1차를 뺀 2차에서 9차까지 정예부대는 강화도에 주두한채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체계적인 방어 전략도 없었는데.... 일단 국왕이 친조해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한후 몽골군이

물러가면 고려군이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오는데,  전란으로 목숨만 간신히 건진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함입니다.

 

고려를 손에 넣은 원나라 쿠빌라이는 바다 건너 일본에 복속 할 것을 요구하는데.....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단호히

거절하니 바다건너 떨어져있다는 지리적 이점외 쇼토쿠태자가 섭정일때 중국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 해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소식을 전하노니 그간 무양하신가?”  라고 적었듯이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 입니다.

 

 

천하를 다스린다는 중국 황제에게 이런 오만불손한 국서는 전무후무한데 수양제는 노했지만 다음해에

고구려를 친공할 예정이라 꾹 참고는 사신을 보내 답서를 전하는데... 쇼토쿠 태자의 스승인

고구려승 혜자가 고구려 영양왕의 사주로 일부러 수나라 황제를 도발케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으로 부터 수없이 침략을 당하기만 했지 우리가 침략한 일은 없으니 우리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만그러나 몽골군과 길잡이로 두차례나 일본을 침략하여 그들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우리는 옛날에 다 잊어버렸지만 일본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고 몽골에 강요되었다고 말할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예로 부터  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는 말도 있던가요?

 

 

몽골은 일본의 사정(군사적 정보을 고려로 부터 들었으며 고려가 만든 9백척 함선과 수로를 잘 아는 고려인

선원에다가 고려 병사를 길잡이로 세워 일본 침략에 나섰으니일본의 입장에서는 고려가

몽고의 앞잡이로 더 괘씸했던 것입니다몽골군 혼자서는 먼 섬나라 일본을 침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1266년 부터 보낸 공물을 바치라는 국서에 화답이 없자,   1270년에 원나라의 쿠빌라이 황제는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는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인들을 채찍질해서 900

선박을 건조하고 무기를 제조하며.... 말과 식량등을 모으게 하는등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미나모토씨 장군 가계가 단절되고 호죠씨의 집권이 실력자였는데이 무렵

18세의 대담무쌍한 도키무네가 새 집권으로 취임하였으니...... 가마쿠라 막부도 원나라

몽골군과의 일전을 각오하고는 혼슈의 세토나이카이의 사누키와 규슈의 방비에 착수하게 됩니다.

 

 

원나라 쿠빌라이 는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인들을 채찍질 해 5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900척의 배를 건조 해서는 홀돈의 원나라군

25,000명에 김방경의 고려군 8,000고려인 사공 7,000명 등 도합 4만 대군 을 출진시킵니다.

 

 

1차 원정군은 고려 원종때인 1274년 음력 10월 3일에 마산을 출항해 쓰시마와 이키도

(壹岐島를 점령한후 북규슈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의 마쓰우라를

짓밟고 하카타만에 도착서해 하카타·  하코사키(箱崎)·  이마쓰(今津등지에 상륙합니다.

 

 

초원의 사자인 세계제국 몽골은 여분의 말을 이끌고 쉬지않고 달려서 유럽까지 정복했지만

먼 바다를 건너 일본을 침략하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니..... 함선 건조와

바닷길 안내등 고려가 침략자 몽골의 앞잡이가 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유사이래 대 사건이니 일본 NHK 는 2001년 이즈미 모토야를 주연으로 기용한

"대하드라마 호조 도키무네에서 여몽전쟁을 다루는데 소리나는 화살 카부라야 

쏘아 위협하고 무사가 자기 내력을 외치는 나노리” 도 문화가 다르니 전혀 소용없이 몰살당합니다?

 

 

기습당한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여몽연합군에 대전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

(철포 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데도 일본군은 강력히 저항하는데....

마침 태풍이 불어왔으니 연합군은 30~ 40% 에 달하는 많은 함선과 1만 3천의 병사를 잃고 맙니다.

 

 

 

일본은 분에이 文永 전쟁” 이라 부르는데 여몽 연합군을 위협한 태풍을 일본인들은 바다의

신이 외적을 막아주는 바람이라 하여 카미카제(神風 신풍)" 라 불렀는데 후일

2차 세계대전 때 전사상 희대의 사례인 자폭 전투기 특공대의 이름 으로 붙이기도 했습니다.

 

 

고려군은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왔는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절반인 1만 3500명이나 되는 피해를 입었는데도 원나라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탐라

(제주도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중서성 이라는 관부를 고려에 다시 설치합니다.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막부의 도키무네 에게 사신들이

살해되자 마침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1281(충렬왕2차 일본 정벌을 하니

고려도 적극적으로 원정에 참여하여 충렬왕이 머나먼 마산까지 직접 내려와 전선 건조를 독려 합니다.

 

 

충렬왕 은 일본 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고려인 홍다구 등의 부원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던

것인데.... 동로군은 마산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  정해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정수일본행중서성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전쟁물자는 물론 정복후 사용할 농기구와 곡식

종자까지 준비시켰으며, 1281년 동로군은 여· 원 연합군으로 편성되어 총병력 4만명에 함선

9백척이니..... 그 중에 원나라가 3만 명고려가 1만 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역시 고려의

부담이었고,  중국 강남 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총병력이 약 10만 명에 함선은 3,500척 이었습니다.

 

 

원나라의 1차 침공시 고려는 강요에 의해 참가했지만, 2차 침략에서는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니...

1281년 5월 3일 1천척 몽고~고려 연합군 4만명 대함대는 1차와 마찬가지로 같은 고려의

남단인 합포(마산를 출발하여 대마도이키섬을 함락한 후에 시가섬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해안을 수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쉽게 육지에 상륙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는 몽고 군선에 접근하여 햇불로 공격을 하였으니 고전을 면하기

어려워진 몽골군은 히젠의 다카시마섬으로 철수해서는.....여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리게 됩니다.

 

 

일본 ‘소우기’ 에 따르면 고려 군선들은 돌에 화약을 넣어 적선을 부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입화석정(入火石打)’ 이라는 해군 화포가 등장한 것이고주화 (走火)’ 라고 부르는

불화살도 있었으나 비바람에 활의 아교가 녹고 불이 붙지 않아 제대로 활용되지는 못합니다.

 

 

이키섬에서 합류하기로 한 강남군은 항로를 변경하여 히라도로 향하니 상호간에

연락이 끊겨 7월 하순에야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날자가 엄청 지체되어 또다시 태풍의 계절을 맞이하게 된 것 입니다!!!

 

 

합세한 연합군은 하카다만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7월 1일 밤중 부터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하여 대선단은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간신히 다카시마섬에 상륙한 생존자도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모두 살해되니 살아서 귀환한 자는 15만 중에 3만에 불과했습니다.

 

 

두차례의 전쟁에서 천황(일왕은 일본 동쪽 태평양 바닷가에 자리한 이세 신궁에서

내 목숨을 국난과 바꾸고 싶다” 고 기원하였으며.... 가마쿠라의 집권은 혈서로

불경을 베끼는 등 두려움에 떨었으나 결국은 승리하자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은 때마침 불어준 태풍 가미카제(神風때문이니 이는 하늘이 우리

일본을 도운 것이라 선전하여 전국에서 신과 부처에 대한 외경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고려를 앞세운 원의 침공은 일본에 큰 상흔을 남겼으니... 전투에 동원하기 위해 징집했던 병사에

보상을 해야했는데 적을 격퇴했다고는 하나 적국의 땅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리품을 챙기지도 못했으니 돈이 없는지라... 궁여지책으로 보상할수 없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사무라이들과 막부 관계는 약화되고 이 틈을 타 고시라카와 일왕(천황)에 의한 막부 타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이로 인해 결국에는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高氏)

와 닛타 요시사다 (新田義貞)  등에 의해 수립 150년 만인 1333년에 망해서 결국 문을 닫게 됩니다.

 

 

한편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침공한 고려에게는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일본 침공 목적으로 설치된 정동행중서성은 공민왕때 철폐하기 까지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과 수탈을 자행하던 식민기구로 기능했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도 파탄 나기에 이릅니다.

 

 

더욱 이런 침공과 패배 과정에서 고려인들이 겪은 재산 착취와  수탈 및 강제 노동 과  원정군

징집및 전사상자등 인명손실은 국가적 치욕이었으니...... 나라 잃은 아픔인데 이후

공민왕과 우왕때 왜구가 무려 400회나 침공해 고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등 대규모로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 했으니,  그들은 일본 침략의 "앞잡이 고려에 대한 원수"  를 갚는다나요?

 

 

정작 몽골의 원나라는 상당한 병력을 소모했지만 원나라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으니 남송군을 동원해 소진케 함으로써 중국 내에서 원나라에 저항할 수 있는

씨앗 을제거한 것 이니 쿠빌라이로서는 체면은 구겼지만 크게 밑지는 사업은 아니었던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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