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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2025~

옌타이 5 - 서양풍 조양가를 보고 소청리를 찾아가다!

작성자가흥1|작성시간26.06.17|조회수81 목록 댓글 2

 

옌타이 여행5 - 서양풍 조양가를 구경하고 걸어서 소청리를 찾아가다!

 

 

2025910일 산동성 옌타이역 (烟台站) 에 도착해 호텔 贝壳酒店 을 찾아 체크인

을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 펑라이거 (蓬莱阁 봉래각 Penglai Pavilion )

가다가 한시간이 되도 도착하지 못하는지라 중간에 차를 돌려서 옌타이로 되돌아 옵니다.

 

 

엔타이산징구 (烟台山景區 연태산경구) 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 옌타이 개항 진열관을 보고 더

올라가  엘리베이터로 등대에 올라 시가지며 바다를 보고는 내려와 걸어서 서양풍의

거리 조양가 (朝陽街)를 구경하는데.... 젊은이들이 대부분이고 유럽의 거리를 걷는 것 같습니다.

 

 

산둥성의 북쪽에 자리한 옌타이는 웨이하이와 함께 한국인들이 자주 오가는 도시

이기도 하고, 항공편 외에도 평택에서 선편으로도 쉽게 오가는 것이

가능한, 한국 기준으로 접근이 쉬운 도시이니 한국인들도 많이 여행오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중국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질린지라 맥도널드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어 문을 닫은지라

몇군데를 고르다가 피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피자와 맥주를 마시고 나옵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 조양가 거리를 좀 더 구경한 다음에 다시

행인에게 길을 물어서...... 소청리 (所城理 소성리) 를 찾아갑니다.

 

 

어느 여행기에 보니 소청리 (所城理 소성리 Suochengli Community )

는 중국인 다운 거리로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면 좋다나요?

 

 

본다 - Wanda Plaza 万達廣場 쇼핑몰 - 광장 Wanda Piaza - Haigang Rd. -

南大街 건너 - Beima Rd. 北馬路 72號 芝栗區 - 호텔

 

 

밤이 되어 사위는 캄캄하지만 이 거리에는 조명이 휘황찬란하니 사람들의 넋을

뺐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미어 터지는 거리는 한마디로 먹자 골목 입니다.

 

 

여기 중국풍의 개성이 있고 독특하며 아기자기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은지라

복잡해서 정신이 없는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구경거리가 많으니 즐겁습니다.

 

 

거리를 구경하다 보니끼 조금 전에 펑라이거 逢萊閣 (봉래각) 를 못보고 도중에 돌아온게 아쉬워 다시

생각이 나는데.... 저 봉래각은 중국 4대 명루 중 하나로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중국 관광지 랍니다.

 

 

산동반도에 펑라이(逢萊) 는 옛날부터 仙境 (선경) 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니 한무제가

펑라이를  보러 몇번이나 산동반도에 와서 보하이 (渤海 발해) 중에 돌출된

산에 올라 선경을 찾았으니, 후손들은 단야산 丹崖山 (단애산) 을 펑라이라고 했습니다.

 

 

펑라이거(逢萊閣) 는 중국 전설에서 불사의 섬으로 알려진 펑라이섬에 있는데 아름다운

바다 경치와 역사적 유적지를 탐방할수 있는 곳이니 중국의 전설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로,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느낄수 있는 바다와 하늘의 경치는 장관입니다.

 

 

만리장성 처럼 긴 성벽이 섬을 에워싸고 있으며 펑라이거에 오르면 앞 바다를

조망할수  있고, 기념품은 초로 만든 수공예품, 진주목걸이

에다가 새우, 구운 생선, 물고기 마른 오징어, 가리비와 전복이 유명하답니다.

 

 

옌타이 烟台 (연태) : 지아오둥반도 膠東半島 (교동반도) 북쪽에 위치하며 삼면이 바다로

해안선은 1300km 에 이르며 서쪽 라이저우완 萊洲灣 (래주만)에서 동쪽 라이하이

지아오 蓬萊海角 (봉래해각) 까지 백사장은 끝을 볼수 없이 길며 산이 많고 기세가 웅장힙나다.

 

 

해발 500m 이상의 뤄산(라산), 애산(애산), 아산, 쿤위산, 더산등이 서쪽에서 동쪽

으로 뻗어나가 반도의 지붕을 이루는데....... 쿤위산이 923m

가장 높다. , 당나라때 산 위에 많은 절을 지어 선산의 조상 ( 仙山之祖) 라고 불린다.

 

 

시내버스는 옌타이에서의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으로 요금은 이동거리 불문하고 1

탑승시 1위안이고 옌타이 종합버스터미널과 옌타이 서부버스 터미널이

있으며 칭다오, 웨이하이, 지난, 웨이팡 으로 가는 중장거리 버스를 탑승 할수 있습니다.

 

 

옌타이역(烟台站) 은 고속열차와 일반열차를 모두 취급하니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대도시로 향하는 일반열차와 고속열차의 시발점이다. 옌타이항에서 가까운 역입니다.

 

 

옌타이난역 (烟台南站) 은 고속열차만 취급하는 역이라고 하는데..... 웨이하이와

칭다오로  향하는 도시 고속열차와 대도시로 향하는 고속열차들이

다닌다고 하며 시내 남쪽 외곽지역에 있으나 공항 에서 연결하는 시내버스가 있습니다.

 

 

옌타이항 여객 터미널에서는 바다 건너 랴오닝성 다롄시로 가는 카페리를

탑승 할 수 있으며 옌타이항 국제여객터미널은 인천항 국제여객

터미널과 평택항 국제여객터 미널로 향하는 화객선을 탑승 할수 있답니다.

 

 

그리고 항공편으로는.... 옌타이 펑라이 국제공항은 중국 각지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과 인천으로 향하는 국제선 항공편을 탑승 할수 있습니다.

 

 

웨이하이시와 더불어서 제일 가까운 중국 도시인지라, 대한민국 기업들도 옌타이 현지에  활발하게

진출했으며...... 한국인과 조선족들이 꽤 살고 있기 때문에 코리아타운도 형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옌타이 대외투자국가의 수는 홍콩에 이어 2번째로 기록되는데, 홍콩은 엄밀히

말해서 중국기준 외국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한국이 제1 투자국 입니다.

 

 

여기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좁은 골목길에서 더구나 음식점의 냄새와 화려한 조명 불빛에

취했다가 문득 경희대 강인욱 교수가 동아일보  강인욱의 세사안사의 기원’  칼럼에

쓴 암각화에서 내비게이션까지... 국가 흥망성쇠까지 좌우한 공간 언어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현대인들은 운전을 하거나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화 살표를 따라 움직인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공간을 추상화하고 길을 그려내며 생존해 왔다. 반구대 같은 암각화에서 고대

목판 지도까지. 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인간의 두뇌가 진화한 흔적이자 역사를 움직인 도구였다.

 

 

인간은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종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해 먼 길을 떠났다. 때로는  약도

만으로도 수백 km 떨어진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능력 뒤에는 인간 진화의 과정이 숨어 있다.

 

 

인간의 두뇌는 주변 환경과 동물의 움직임을 그림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기호나 텍스트로 바꿔

이해했다. 한정된 두뇌에 더 많은 정보를 넣고 꺼내기 위해 압축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할 때 사진이나 영상보다 텍스트 파일의 용량이 훨씬 작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 결과 이태백

시 한 줄을 읽으면 곧장 서역을 향하는 나그네와 그 위를 밝히는 달이 떠오르는 유추 능력이 발달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과 타인의 움직임을 패턴으로 추상화해 대응하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지도와  같이 선과 점을 긋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거대한 자연과 지리 환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장기나 체스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지형과 전략을 이해하는 훈련의 장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점토판 지도 이마고 문디(Imago Mundi

라틴어로 세계의 이미지라는 뜻)’ . 이마고 문디는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주변 도시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신화 속 바다와 상상의 장소까지 함께 그려 넣었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까지 담아낸 것이다.

 

 

인류의 공간 인식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나 세계 곳곳의 신석기 암각화는

주변 지형을 이해하고 익히는 역할을 했다. 최근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반구대 암각화도 마찬가지다.

바다에서는 고래가 뛰놀고, 그 위에는 배가 지나가며 이어지는 강과 육지에는 담장과 동물들이 묘사돼 있다.

 

 

이는 주변 환경을 추상화한 하나의 지도다. 이마고 문디처럼 실제 지리와 신화를 아우른

세계지도는 결국 인간이 공간을 이해하고 세계를 설명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중국에서 지도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점은 만리장성을 쌓는 시기와 겹친다. 그전까지 중국의 제후국은 성을

중심으로 거점만을 점유하는 식이었지만 장성을 쌓는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국경을 긋는 일이었다. 이때

부터 국가는  거점의 집합만이 아닌 영역을 가진 존재로 인식됐고, 국경과 전쟁에는 정확한 지도가 필요했다.

 

 

실제로 지도는 유명한 진시황의 암살 사건에 등장한다. 기원전 227년에 연나라 태자 단이 진시황을 암살

하기 위해 형가 라는 자객을 보냈다. 진시황을 가깝게 알현하기 위해 진나라에서 망명한 장수 번어기

의  목과 연나라를 정복하는 길이 그려진 독항 (督亢· 허베이 남부) 지역의 지도를 바쳤다고

정사에 기록돼 있다. 형가의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지도가 빌미가 돼 연나라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형가가 품고 있었던 지도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고학은 당시의 지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진시황과 형가의 이야기가 등장한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 실크로드의

입구인 중국 간쑤성 팡마탄 지역의 진나라 무덤에서 목판에 새겨진 지도 일곱 점이 발견됐다.

 

 

해당 지도들은 정치도(행정구역), 지형도(산천), 경제도(마을, 자원) 등으로 나뉜다이는  당시

목적에 맞게 지도를 만들었음을 뜻한다. 또 각 지도는 서로 맞물려 이어 붙일 수 있게 제작돼

지형과 경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고대의 지리정보 시스템  (GIS) 이라 부를 만하다.

 

 

같은 무덤에선 휴대가 가능한 2.55cm 크기의 약도도 발견됐다. 비록 사이즈는 작아도 꼭 필요한

지명과 강들이 간략하게 표시돼 있다. 이 지도는 시신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발견됐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여행지였는지 고향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에 품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음은 분명하다. 팡마탄에서 출토된 이 지도는 휴대용 약도의 기원인 셈이다.

 

 

한국사에서 지도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그러나 한나라와 고조선의 전쟁

기록을 보면 지도와 같은 수단이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는 산동반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검성을 향해 진군했는데, 수군과 육군으로 나눠 같은 시각에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군은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섬들을 따라 항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육군은

요서 지역을 지나 광대한 늪지대인 요하유역을 건너야만 했다. 이처럼

험난한 경로를 동시에 조율했다는 것은 이미 정밀한 지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에도 봉역도(封域圖)’ 라는 지도가 존재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도

지도와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이들 국가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곳곳에 요새와 교통로를 건설했는데, 이는 체계적인 지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특히 고구려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해 백제의 수도를 압박하던 흔적은 지도

활용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현재 서울 광진구 아차산, 경기

구리시  일대의 여러 요충지에는 규모가 다른 여러 군사거점이 구축돼 있었다.

 

 

다양한 병력이 전략적으로 주둔하며 관리됐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고구려는 만주 전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했다. 지도 없이는 이 복잡한 행정과 군사적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시작된 뒤 10년 만인 1402년 만들어진 세계지도 혼일강리도’. 한반도를 거대하게 표현

했다.  고조선에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도는 땅을 지배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이 전통은 조선 건국과 함께 세계관을 담아내는 작업으로

확대됐다. 그 상징적 결실이 바로 1402년에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였다.

 

 

혼일강리도는 명나라의 대명혼일도를 참고했지만 조선과 일본을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지도였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한반도를 거대하게 표현하면서 그 안의 지리를

자세히 표현했다. 겉으로는 소중화(小中華) 를 표방했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조선의 욕망이 드러난 셈이다. 지도 위에 담긴 것은 신생 왕조가 품은 자신감과 미래였다.

 

 

조선이 쇄국의 길을 걷게 되면서 전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구한말에 서구 열강과 일본은 우리 땅을 경쟁적

으로 측량하며 지도를 만들었고, 그 지도는 식민지배의 증거로 변했다. 1402년에 자신만의 세계를 그렸던

조선은 500여 년 만에 나라와 함께 지도마저 빼앗겼다. 지도는 자부심의 기록이자 동시에 국권 상실의 증거가 됐다.

 

 

지도는 인간이 공간을 인식하는 가장 정교한 도구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점점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매일 다니는  길 조차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야 안심할 수 있을 정도다. 사피엔스의 본능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인공지능(AI)이 대체하는 시대를 우려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지도를 읽는 능력부터

잃어가고 있다. 그 자리는 인공위성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꿰찼다. 오늘날 전쟁은 드론으로

치러지고, 국경은 위성으로 감시된다. 어쩌면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지도의 주도권’ 인지 모른다.

 

 

최근 한미 관세협상 과정에서 구글이 한국의 5000 1 고정밀 지도 자료의 반출을 요구하며 벌어진 논란

이를 잘 보여준다. 반도체 관세 만큼이나 지도 정보의 주권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안이다.

 

 

비록 지도를 보는 인간의 능력은 약해졌지만 지도의 위력은 과거 보다도 더 강해졌다.

지도를 잃어버린 시대에 지도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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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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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태사공 | 작성시간 26.06.17 혼일강리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흥1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8 new 조선인들이 건국 초기에는 꿈이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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