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우 4 - 우마제 거리를 걸어서 상징인 말이 끄는 마차를 구경하다!
2025년 3월 13일 푸저우에서 저장성 (절강성) 의 원저우(온주) 남역에 도착해 온주군정주점
공우 (温州君廷酒店公寓)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온주남역에서 S1 전철을
타고 융중(永中 영중) 역에 내려 영창성(永昌城) 으로 가려고 했더니 택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비가 쏟아지려는지 날씨도 수상하니 다시 전철을 타고 룽사루(龙雾路 용무로) 역에 내려 택시로
우마제 五马街 (오마가) 에 도착하니 비가 퍼붓는지라 맥도널드로 들어가 음식을 시켜 비를 피합니다.
비가 좀 잦아진 것 같아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는데..... 여기 저기
오래된 멋진 거리를 구경하니....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가 봅니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두워진 밤거리를 걸어서 도로 끝까지 가니 여기 우마제
五马街 (오마가) 거리의 상징인 다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발견합니다.
이 잘 생긴 말들이 끄는 수레는 크기도 크거니와 참 멋진 모습인 데.....
마치 서안에 진시황릉의 갱도에서 나온 말 처럼 늘름합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熱河日記) 에서 드넓은 만주 벌판을 보고는 꺼이꺼이 크게
울었다는데.... 사내 대장부가 한번 울 만큼 넓은 들판이라고 했으며, 중국
여행에서 부러운게 두가지가 있으니 하는 수레요, 두 번째는 벽돌이라고 했습니다.
열하일기 (熱河日記) 는 조선 사신이 북경에서 밤을 새워 달려간 승덕의 당시 이름인 열하(熱河) 에서 따왔으니
1780년에 건륭제 70세 생신 사절에 따라가 열하(승덕)에 도착해 황제를 배알했는데, 중국 4대 정원으로
북경의 이화원 (颐和园), 승덕의 피서산장 (避暑山庄) 그리고 소주의 졸정원 (拙政园) 과 유원 (留园) 을 듭니다.
박지원이 쓴 여행기 열하일기 (熱河日記) 는 내용이 아주 정확하고 지성적이며 논리적
이고 역사 분석에다가... 벽돌과 수레의 이용 등 실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유학자인 정조는 문체가 단정치 못하다고 트집을 잡았었지요?
북경 이화원 (颐和园) 은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황실 정원으로 곤명호 (昆明湖), 서호(西湖),
남호 (南湖) 3개 인공 호수와 인공산인 만수산 (万寿山)이 있으니 제2차 아편전쟁 패배후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에 모두 타버리는 비극을 겪은 후에 서태후 (西太后) 가 재건 했습니다.
만리장성 북쪽 승덕 피서산장 (避暑山庄) 은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휴양지
이니.... 세계에서 가장 큰 왕실 정원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 되었답니다.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 치세기에 조성되었으며 각지의 명승지들을 압축해 놓았다고 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데 온천이 나기로 熱河(열하) 라고 했으니 황제들이 단오 부터 추석 까지 머물렀다고 합니다.
중국은 벽돌을 구워서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말이 끄는 수레나 마차로
화물을 실어나르는 외에 멀리 여행하는 사람들이 타고 다녔으니 아주 편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고구려 시대의 기록과 그림에 보면 말이 끄는 수레가 많이 나오는데....
통일 신라나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수레나 마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중국 대륙이나 만주 벌판과는 달리 한반도는 산이 엄청 많으니.... 조선은 구한말 까지도
전국에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해서 만드는 돌로 된 포장 도로를
단 하나도 건설하지 못했고, 그 많은 강에 단 한 개의 돌로 된 다리를 놓지 못했습니다.
평야지대에는 도로가 있긴 했는데 흙으로 된 길이니 장마철은 말할 것도 없고 홍수가 지거나 비만 좀 와도
저 흙길이 없어지고 진창으로 변했으며.... 맑은 날에도 평야지대를 지나면 금방 험한 산이 나타납니다.
해서 부산에서 조령을 넘어 서울로 가는 영남 대로라는 것도 산을 만나면 꼬불
꼬불 험한 산길이니 수레라는 것은 전혀 있을수가 없고...... 화물은 사람이
머리에 이거나 등에 잚어지고 옮기니 이런 상인들을 "보부상" 이라고 했습니다.
한반도만 산이 많은게 아니고 여기 원저우도 중국 치고는 산이 많으니.... 염해구에 두타사
( 頭陀寺) 는 밀인사라고 불리던 황해구 남백상 진두타산 자락에 있는 관광지 입니다.
두타사 절은 5.2만㎡ 의 부지가 있고 산 옆에 세워져 있어 산마루는 둥글고 아래로는
산들이 내려다 보이니 그것은 승려가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합니다.
조용한 산간에 딱 맞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사원은 관광에도 딱 좋습니다.
개산은 당나라의 고승 현각에 의한 것으로 나중에 후한 건우에 건립되었습니다. 송나라와 명나라 때
재건되었고, 청나라 때 수법당이 세워졌습니다. 원주의 남부 두타산에 세워진 한적한 사찰입니다.
'원저우시 기독교인 성서당' 과 '원저우 성수선사' 등 종교 관련 시설이 많은
저장성, 원저우...... 신앙심이 깊은 성실한 인품도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해낼 수 있는 원저우인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너저우 상인들은 유대인들과 공통된 것이 있을까요! 시가의 중심부에는
'오마보행가' 등과 같은 번화가도 있어 관광이나 생활하기에도 편리합니다.
저장성에는 유명한 저장 재벌이 있고 진화햄으로 알려진 진화라는 마을도 있는 등 비교적 부유한
지역인데..... 중국 유수의 금융· 경제 도시인 상하이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원저우와 주변 지역과 함께 여행 플랜을 짜면 사실적인 중국 경제의 모습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저우는 중국 동남부 저장성의 항구 도시로 고대에는 영녕, 영가 등으로 불리다가 따뜻한 기후
덕에 온주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취안저우와 함께 남송시대 대표적인 항구 중 하나였습니다.
푸젠성과 접하고 있으며 월나라와 민족적으로 유사한 국가인 동월의 수도였는데 동월은 동구라고도
불렸으며 푸젠성에는 민월이 있었고(기원전 191 ~ 138년) 당나라 시대 성벽이 남아있습니다.
중국 경제 발전의 중심지로 거듭나며 원저우 상인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으며 현재는 귤, 차, 대나무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며 산업 도시로서 발전하는 인구 920만명의 지급시인데, 참고로
중국 최고 부자들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있으며 원저우 출신이라면 돈많은 갑부로 보기도 합니다.
天不怕地不怕, 就怕温州人说鬼话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안 무섭지만 원저우
사람들의 귀신 같은 말은무섭다) 라는 말이 있으며..... 많은 원저우
사람들이 서양에 이민을 갔는데, 특히 원저우 이민자 대부분이 유럽으로 이주했습니다.
지역 방언이 어렵기로 유명하니 중국 방언중 난이도 3톱을 달리는데, 중일전쟁 때 중국인들이 일본인이
자기들 말을 번역 혹은 도청할까 이 지역 사람들을 시켜 말을 전달하게 했고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는
것에서 유래했고 여기서 귀신 같은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뜻하니.... 마치 아메리카 나바호어 입니다.
총 면적의 78% 가 산악지대로, 동북 ~ 서남 방향으로 동궁산 (洞宮山), 괄창산 (𢬸蒼山), 안탕산 (雁蕩山)
세 산맥이 지나고 있으며 절강성 내륙 산지 최남단에 위치하여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형입니다.
동중국해에 면해 예로 부터 무역항으로 유명하며.... 중요한 강으로는 구강 (甌江; 어우 강) 과 함께
비운강(飛雲江; 페이윈강) 이 있으며 대부분의 인구는 이들 강 하류의 충적 평야에 거주합니다.
138년 후한 순제 시기에 구강 (甌江) 북안에 설치된 영녕현 (永宁縣)에서 유래하는데....
도시가 발전한 것은 남북조 시기에 북방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부터 였답니다.
323년 동진 명제 시기에 영가군 (永嘉郡) 이 설치되었고, 수나라 때까지 이어졌는데, 수나라 시대 및 당나라
초기에는 행정구역이 변동되다가 675년 당나라 고종때 처음으로 온주 (温州) 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758년 당 숙종 원년에 이르러 원저우라는 이름이 정착되었고 동진 이후 산업과 무역, 학술이 발전하였으며,
특히 송대에는 중국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주요 무역 중심지로 기능했으니 동중국해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산악 지형 덕분에 내륙의 혼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점이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득 이준식의 한시 한수 돈독한 불심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동산의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전하노니,
꿈속의 밀회로 초 양왕을 유혹한 무산 신녀를 좋아하시나 본데,
불도 닦는 이 몸은 이미 진흙에 적셔진 버들솜,
봄바람 따라 마구잡이로 흩날리진 않는다오.
(寄語東山窈窕娘, 好將幽夢惱襄王. 禪心已作沾泥絮, 不逐春風上下狂.)
―‘즉흥적으로 읊은 절구(구점절구·口占絶句)’ 도잠(道潛·1043∼1106)
시 한 수 읊어주셔요. 한 연회석에서 주빈 격인 스님을 향해 아리따운 아가씨가 부탁인지 유혹인지
추파를 던진다. 스님은 설핏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초 양왕이 꿈속에서 무산 (巫山) 의
신녀(神女) 와 밀회를 나눈 사례를 연상했다. 송옥의 ‘고당 부(高唐賦)’ 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가씨가 그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지금 그 시늉을 하며 말을 걸어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데 스님의 응수는 결연하다. 유혹이 제아무리 달콤하대도 내 마음은 요지부동. 진흙탕에 빠진
버들솜이 어찌 바람에 흩날리겠는가. 장난삼아 스님의 마음을 슬쩍 집적대 본
여자도 연회를 마련한 주인도 스님의 돈독한 불심(佛心), 순발력 있는 재치에 탄복했을 게 분명하다.
스님의 방문을 맞은 이는 서주 (徐州) 태수로 있던 소동파. 평소 시문으로 교분을
쌓은 터라 동파는 스님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예쁜 가기 (歌妓) 까지 동원했다.
스님에게 즉흥시를 요청한게 흥을 돋우려는 가기의 자발적 행동인지, 아니면 스님과
허물없이 지낸 동파가 장난기를 발동해 가기를 부추겼는지는 알 수 없다.
청정수행 (淸淨修行) 의 고귀한 의지가 누군가의 악취미로 꿈쩍하기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