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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東廠)

작성자zappa|작성시간09.09.21|조회수1,665 목록 댓글 0

 

<▲ 금의위 군사의 군복>

 

동창(東廠)

 

중국 명나라의 정부기관으로 정식명칭은 동집사창(東緝事廠) 이다. 황제직속의 관리감찰기구로서 요인의 감시, 정보수집 등 비밀경찰기구로 존재하였다. 명나라 영락제 18년(1420)에 설립되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는 환관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위치가 북경의 동안문(東安門)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일설에는 東華門 근처 라고도 함)

황제의 친위군인 금의위(錦衣衛)에서 군사를 차출하도록 했으며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지고 사법기관의 비준을 받지않아도 감시, 구금이 가능해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1. 설립배경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황제이자 조카인 건문제를 제압하고 정권은 연왕 주체(이하 영락제)가 잡게 되었지만 정작 황제였던 건문제의 행방에 대해 계속 죽지않고 살아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고, 그만큼 아직 새로운 황제인 영락제를 따르는 신료들의 마음이나 이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마음은 불신의 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기구를 만들기로 영락제는 결심을 한다. 그는 이 기구의 책임자로 환관을 임명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난의 와중에 정화(鄭和) 같은 환관이나 도연(道衍) 등의 승려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으며 특히나 환관의 경우 늘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지라 영락제 자신의 신임이나 업무의 편리성면에서 환관은 맞춤한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인 태조 주원장이 환관은 정사에 관여하지 말게 하라는 유훈을 남겼으나 영락제는 그들을 중용하였고 이것은 그 후대 명나라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1420년 12월 영락제의 명에 의해 동집사창(이하 동창)이 만들어 지고 그가 총애하는 환관이 그 책임자로 임명되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공히 하며 황제의 친위부대인 금의위를 통제하고 강력한 중앙전제주의를 뒤받침 하게 된다.            

  

2. 조직기구

동창의 책임자는 장인태감(掌印太監) 또는 창공(廠公), 독주(督主)라 하였으며 그 지위는 황궁내 환관중 두번째 서열 쯤 되었다. 즉, 최고위 환관기구인 사례감의 수장은 사례감장인태감(司禮掌印太監)이며 이 장인태감 밑에는 병필태감(秉筆太監)이 3~4명 존재한다. 대게는 이 3~4명의 병필태감 중에서 최고서열자를 동창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수장의 정식명칭은 '흠차총독동창관교판사태감(欽差總督東廠官校辦事太監)" 이며 줄여서 '제독동창(提督東廠)' 이라고 했다.

제독동창 밑에 장형천호(掌刑千戶), 이형백호(理刑百戶)를 각 1명씩 두었는데 이들은 금의위의 장교인 천호(千戶), 백호(百戶)를 임명했다.  그밖에 설장반(設掌班), 영반(領班), 사방(四房)에 40며명을 배치하였다. 이 역시 금의위에서 차출하였으며 12간지를 따라 12개로 나누어 원형의 모자를 씌고 검은새 신발을 신고 베적삼으로 된 옷을 입게 하였다.      

일선에서 실무를 집행하는 기구는 역장(役長)과 번역(番役)이 있었다. 역장은 당두(檔頭)라고도 했으며 약 100여 명이 있었다. 이들역시 12간지에 따라 12개로 나눠 뾰족한 모자에 흰색 신발, 베옷을 입혔다. 이 역장은 각기 수명의 번역(番子, 干事 라고도 했음)을 통솔했는데 이들 또한 금의위의 정예군사들중에서 차출하였다.   

황제의 비호아래 이들의 조직이나 업무는 본연의 영역을 벗어나 점점 확대되어 갔으며 심지어 초법적인 자체의 감옥도 갖추게 된다.

 

                                     <▲ 동창의 관원들이 착용한 신분증으로 허리에 차던 요패> 

 

3. 기능

초기 동창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역모를 꾀하는 경우,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경우, 사회의 풍속을 심히 훼손시키는 경우에 주로 대응을 하였다. 이을 위해 정탐을 하거나 미행, 감시, 체포의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혐의자나 관련 사안에 대한 (법적인)심문 및 조사권은 없었다. 따라서 혐의자를 체포하여 금의위의 북진무사(北鎭撫司)에 넘겨 심문을 받게 하였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동창은 심문은 물론이거니와 자체의 감옥도 구비하여 혐의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동창의 주요한 감시대상은 황족, 정부관리, 사회명사, 학자 등 소위 사회적 영향력이 큰 자들이었고 그 감시결과는 황제에게 직보되었다. 보고 결과에 따라 하위직의 관리나 민간인 신분인 자들은 동창이 체포하여 심문을 하였고 고위직이나 황족 등은 황제의 제가를 얻은 후 체포하여 심문을 하였다. 이러한 동창의 기능은 점차 그 본연의 범위를 벗어나 조정내 모든 기관에 걸쳐서 기생하게 되는데 조정에서 논의되는 큰 사건이나 금의위의 북진무사가 다루는 중요안 사안에 대해서도 동창은 참석하여 심문에 참여하였다. 또한 조정의 각 아문(衙門)에 동창의 사람들을 파견하여 해당 부서의 관원들의 일거수일투적을 감시하였다. 이렇게 파견된 이들은 병부와 같은 중요한 아문의 문서를 볼 권리도 있어서 조정의 핵심정보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동창의 감시망은 비단 조정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는데 가령 시장의 소금, 땔감, 쌀, 기름의 가격도 동창은 파악하고 있었다.

 

                                        

4.  동창, 서창, 금의위의 관계

명나라에는 이미 형부(刑部), 도찰원(都察院), 대리사(大理寺)의 감찰기구가 존재하였다. 즉, 국가 법무기관, 검찰기관, 최고재판소의 기능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황제직속의 금의위, 동창, 서창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황제 1인에 의한 전제정치가 자행되는 것이다.

금의위는 황제를 경호하는 친위부대로 애초 주원장이 공위사(拱衛司)라는 이름으로 만들었고 다시 1369년에 친군도독부(親軍都督府)라 했고 1382년에 다시 금의위로 고쳤다.

서창(西廠)은 명 헌종(재위 1464-1487)이 한관 왕직(汪直)을 시켜 만들었다가 5개월만에 폐쇄하고 다시 살리기를 반복하였다. 무종(재위 1505~1521) 시절 권력을 잡은 환관 유근(劉瑾)이 서창을 다시 부활시켰으나 그가 부패혐의로 처형되자 무종은 서창을 폐쇠시킨다. 서창은 비록 단명은 하였지만 그 존재 시기에는 동창과 맞먹는 권력을 휘둘렸다고 한다.

금의위의 우두머리는 지휘사(指揮士) 또는 지휘동지(指揮同知), 지휘첨사(指揮僉事)라고도 했다. 대게 황제가 신임하는 무관(武官)중에서 임명되었고 드문 경우지만 환관이 임몀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의위는 다른 관직과 달리 비교적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무이지만 그 정도는 밤낯으로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동창이나 서창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금의위는 보고할 사항에 대해 문서를 통해 상주한 후 가능하였지만 동창(서창)은 자유로이 황궁을 출입할 수 있는 환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손쉽게 황제에게 구두로 직보하였던 것이다.

하여 본시 금의위는 동창(서창)과 동등한 지위였지만 점차로 동창에 그 지위가 처지게 되며 황제는 급기야 동창에게 금의위를 감시하는 권리도 부여하면서 그 서열은 분명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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