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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인물전

이향란

작성자zappa|작성시간09.10.03|조회수731 목록 댓글 0

 

<▲ 상해에서 가수로 활약할 당시의 이향란>

 

이향란(李香蘭)

일본인이지만 1930~40년대 중국의 저명 가수이자 영화배우로 그리고 일본에서는 참의원 의원과 후지TV의 방송진행자로 활동했었던 인물이다. 1920년 2월 21일 요령성(遼寧省) 봉천(奉天, 오늘의 瀋陽)의 북연대(北烟臺)에서 태어났으나 12살까지 탄광지대인 무순(撫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滿洲)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문화적으로는 전형적인 만주인이었지만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혈통상으론 완전한 일본인이었다. 원적은 일본의 佐賀顯 杵島郡 北方村(현재 武雄市) 출신으로 조부는 한학자였고 부친은 그런 조부의 영향으로 한학에 능하여 러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으로 이주해 만철(滿鐵, 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 근무하며 일본인 직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던 중국통이었다.
1932년 평정산(平頂山. 3000 여명의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도륙된 사건)사건에 연루된 부친이 구류를 살고 이 사건 후 이향란 가족은 심양으로 이사간다. 심양은행 총재인 퇴역장군 이제춘(李際春)이 부친의 친구였다. 이제춘은 일본인 친구의 어린 딸을 귀여워해 수양딸로 삼았다. 향란(香蘭)이라는 중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향란은 리의 필명이었다. 그녀는 일생동안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외에 이향란(李香蘭), 반숙화(潘淑華), SHIRLEY YAMAGUCHI 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재원이었다.

 
13살 때 무순을 떠나 봉천여고에 전학했다. 이때부터 이향란이라는 이름을 썼다. 음악과 미술에 소질이 있었고 중국어 작문은 전교에서 2등을 했다. 우연히 친구 소개로 봉천에 와 있던 이탈리아 성악가를 알게 됐다. 이향란에게 이탈리아 민요, 독일 가곡, 러시아 민요를 3개월간 집중적으로 가르친 후 전당포에서 빌린 기모노를 입혀 무대에 세웠다. 처음 입어보는 일본 옷이었다. 독일 가곡과 러시아 민요를 불렀다.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만주국은 이 어린 소녀에게 국책가요인 ‘만주신가곡’을 취입하게 했다. 그러나 부친은 딸이 정치가의 비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 정객을 의부로 삼아 학업을 계속하게 했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다.

천진(天津)시장인 친일정객 반유규(潘毓桂)가 이향란의 의부가 됐다. 그의 집에 살며 반숙화(潘淑華)라는 이름으로 북평익교여자중학(北平翊敎女子中學)에 입학했다. 봉천을 떠날 때 부친은 중국인 전용 열차표를 사주며 “오늘부터 중국인으로 행세해라.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을 익혀라”고 말했다. 반씨의 집은 10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사는 대저택이었다. 일본인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천안문 서쪽의 전형적인 북경 골목에 살며 이향란은 점점 중국인이 되어갔다. 음식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오리구이보다 동래순(東來順)의 양고기를 더 좋아했고 인사를 나눌 때도 고개만 까딱하고 마는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이 여학교는 초등부터 고교과정이 모두 갖춰진 비교적 큰 규모의 학교로 이향란은 여기서 양질의 인문교육과 후일 자신의 연예활동에 도움이 되는 기초적인 수양을 닦게 되다. 당시를 회고한 그녀의 수기인 '나의 전반생'에 적기를 "동북에서 와 부친의 친구집에 의탁해 그의 수양딸로서 반숙화 라는 이름으로 익교여자중학을 다녔다. 등교시에는 3사람이 같이 갔지만 하교시에는 종종 나 혼자 였다. 그러때면 가끔 북해공원(北海公園. 자금성 후문 앞의 호수공원)으로 가서 사람이 없는 작은 섬을 찾아 거기서 중국어 발음연습을 했다." 라 하였다.    

 

<▲영화 금병매의 주인공을 맡은 이향란의 포스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군부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국무원은 만주영화협회설립법안을 통과시켰다. 만주국과 만철이 반씩 출자해 신경(新京, 오늘의 長春) 황룡(黃龍)공원 건너편에 만주영화제작소(만영)를 설립했다. 약 160만㎡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영화제작소였다. 만주인이 보는 영화를 만주인이 만든다고 했지만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선전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을 미화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정확한 중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고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스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만주영화제작소의 대표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일본 사회주의 사상가 오스기 사카에를 살해한 우익 테러리스트였고 만주영화제작소의 제2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순종 일본인 소녀를 중국인으로 둔갑시켜 중일우호의 아이콘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의도에 의해 캐스팅된 것이 바로 이향란이었고 이 때문에 그녀는 아마카스의 각본에 맞춰 철저히 중국인으로 행세해야만 했다.

만영의 첫 번째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된 이향란은 ‘백란의 노래(白蘭之歌)’와 ‘지나의 밤(支那之夜)’에 연달아 출연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하는 애정물들이었다. 주제가를 직접 불렀고 부르는 노래마다 크게 유행했다. 80년대 대만가수 등려군(鄧麗君)이 불러 대륙을 열광시킨 ‘임은 언제 다시 올까(何日君再來)’와 ‘밤이 오는 향기(夜來香)’를 처음 부른 것도 이향란이었다. 위문공연에도 수시로 동원돼 일본 군인들의 향수를 달랬다. 어디를 가나 중국인 이향란으로 소개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중·일 친선의 상징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1940년대 초까지 이향란(李香蘭)은 중국, 한국, 일본 모두에서 각광받는 동양권의 유명한 스타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국민정부는 상해에서 이향란을 체포해 일본에 부역한 한간(漢奸)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 친구 류바의 도움으로 부모님의 일본인 호적이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되면서 일본인임을  인정받게 된고 결국 풀려난 이향란은 고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946년 4월이었으며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에 그녀가 소유한 이채로운 경력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서 이향란이 아닌 일본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는 일본에서도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했다. 1950년에는 'SHIRLEY YAMAGUCHI' 라는이름으로 헐리우드 진출까지 했다. 1951년에 조각가와 결혼했지만 5년만에 이혼했고, 이후 1969년에 외교관과 재혼한다. 그리고 1992년에는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뮤지컬 이향란'을 공연한다.

외교관인 남편과 재혼으로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된 그녀는 1974년 참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1978년에는 환경청 차관까지 지냈으며 대동아 전쟁 여성희생자와 정신대 문제에 적극 나서며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활동을 하게 된다.

 

<▲ 예술적 재능 뿐만아니라 미모 자체도 이향란은 매우 뛰어났다>


이향란은 한국과도 인연이 많았다. 경성(京城)에서 공연을 했고 명망가들이 베푼 만찬에 한복을 입고 참석해 자태를 뽐내기도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남편과 서울에 몇 년 머물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는 날까지 그가 왕년의 이향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소설 '지리산' 으로 유명한 소설가 故 이병주氏 같은 분도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이병주는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별이 차가운 밤이면' 이라는 소설에 아예 이향란(李香蘭)을 모델로 한 이채란이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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