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업 작가다
오십이 넘어서야 나는 비로소 내 삶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업 작가입니다.”
이것은 직업이 아니라, 선택에 관한 문장이었다. 이 말을 처음 입 밖으로 꺼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자부심이 아니라 망설임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이 나이에, 아무도 증명해주지 않은 직업을 스스로에게 붙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 질문을 가슴에 안은 채 나는 지금도 글을 쓴다. 화려한 명함 하나 없이 전업 작가라 소개해야 했던 시간 속에서, 그 말은 늘 설명과 변명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이보다 더 솔직한 자기소개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나는 지금 글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그 불안까지 포함한 선택을 매일 살아가고 있다.
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수기 공모전’ 소식을 문학카페에서 보았다. 공모전 소식이야 늘 올라오는 것이기에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공모전 이름이 왠지 눈길을 끌었다. 살펴보니 응모 자격이 만 50세 이상이라고 적혀있었다. 요즘은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도 적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찰나, 공모주제 중 하나가 여타 공모전과 달리 특별했다. 대개의 공모전에서 자기 자랑은 경계의 대상이다. 겸손이 미덕처럼 요구되는 자리에서, 자랑은 종종 감점 요인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 공모전은 아예 대놓고 묻고 있었다. 당신이 살아오며 자랑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그 문장을 읽는데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나는 곧바로 지난해 당선작을 찾아 읽어보았다. 이미 책을 여러 권 낸 현직 소설가의 작품이었다. 글뿐만 아니라 삶의 궤적도 단단했다. 페이지를 덮을 때는 부러움과 함께 묘한 열등감이 올라왔다. ‘나는 아직 저 정도는 아닌데.’ 아직 내 이름이 찍힌 책 한 권 없는 내가, 과연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나이에, 이 길을 선택해 여기까지 버텨온 시간만큼은 말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전업 작가로 불리기까지 팔 년의 시간을 버텨온 것 자체가 내 삶의 큰 성과였기에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마음껏 자랑해 보고자 한다. 다만 내가 자랑하고 싶은 순간은, 상을 받았던 날도 아니고, 등단 소식을 들었던 순간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십을 앞두고 사표를 내던 날이다. 그날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 순간이었으니까.
마흔아홉까지 나는 여타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유통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받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삶을 살았다. 막내였지만 집안 형편상 장남 역할을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결혼 시기도 놓쳤다. 미혼으로 혼자 살면서도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 발목을 잡았다. 어느 집이든 한두 가지쯤은 문젯거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특별히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않은 삶이었다. 하루하루는 무사히 흘러갔지만,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누구라도 한 번쯤은 문학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텐데,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 마음이 더해만 갔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원룸 불을 끄고 누운 밤에도 나는 늘 글을 생각했다. 스마트폰으로 문학카페를 기웃거렸고, 남들이 쓴 시와 소설을 보며 마음속으로만 부러워했다.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다. 그냥 가까이에 두고 싶었을 뿐. 그저 문학 언저리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문학카페의 한 회원에게서 쪽지가 왔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새로 카페를 만들어 함께 글공부를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누군가가 나를 문학도로 바라봐 주는 것 같아 적잖이 설렜다. 그렇게 알게 된 열 명 남짓한 우리는 새로 만든 카페에서 방장이 매주 시제를 내면 같은 제목으로 시를 써 올렸고, 방장이 보기에 가장 잘 썼다고 평가한 작품을 선정하면 회원들이 댓글로 칭찬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내가 밤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모임도 가졌고, 회원 중 전라도 광주에 거주하는 이들이 많아 주말이면 용산역으로 향하곤 했다.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지만, 갈수록 문학에 대한 허기는 커져만 갔다. 매주 시제에 맞춰 시를 쓴다지만, 무엇이 잘 쓴 글인지, 무엇이 부족한 글인지 짚어주는 설명이 없었다. 취미로 글을 쓰는 거라면 충분했겠지만, 제대로 된 작가를 꿈꾸던 나로서는 이 모임이 동호회에 머무르는 건 아닌지 점점 조바심이 났다.
마침, 그 무렵의 나는 직장 생활에서도 회의감이 일던 시기였다. 어찌 됐든 미혼인 나로서는 삶에서 즐거움을 느낄 만한 구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통장에 돈을 모으는 재미조차 누리기 어려웠고, 하루하루가 그저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점점 나이도 들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문학이라도 마음껏 해보고 싶었다. 어쩌다 감명 깊은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면 본 적도 없는 작가의 삶이 부러웠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퇴근 후 원룸에서 잠들 때조차, ‘이대로 늙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새벽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무언가를 시험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던 어느 날, 내 문학적 재능을 가늠해 볼만한 계기가 찾아왔다. 문학카페에서 우연히 ㅇㅇ 수필 공모전 공고를 보게 된 것이다. ㅇㅇ 문학상처럼 거창하지도 않고, 신춘문예도 아닌, 그저 흔한 백일장 수준으로 보였다.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외에도 입선으로 서른 명을 뽑는 공모전이니 내심 아무리 못해도 입선에는 들겠거니 하며 자신만만하게 응모했다. 그동안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인으로부터 글 좀 쓴다는 소릴 들어서 더 그랬을 것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컴퓨터 화면을 몇 번이나 새로고침해봐도 입선자 명단 어디에도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내가 실망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정리되지 않은 글로는 결코 좋은 글이 될 수 없으며,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종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에서 수상자 소감을 읽을 때마다 문창과 출신이 압도적이었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도 단골 레퍼토리였다. 문예창작학과,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밤낮으로 문장을 생각하는 그들과 나는 애초에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문창과에서는 도대체 뭘 배우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직장에 매인 몸으로 다시 대학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그렇게 좌절감에 빠져있을 무렵 인터넷 강의로도 다닐 수 있는 사이버대학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가오는 학기에 맞춰 입학원서를 제출한 그날은 얼마나 설렜던지 마치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어설프지만, 그때부터 나의 문학 여정은 첫발을 뗀 셈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말할 수 없는 상처나 안타까운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때마다 일기를 써 내려가듯 한 줄 문장을 적으며 견뎌왔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쉽게 보일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은 술을 마신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었다. 음악이나 영화적 감을 통해, 그리고 문학적인 문장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짧은 명구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 2막의 시금석이 되었다. 우선 퇴근 후 동료들과 습관처럼 가지던 술자리를 줄여나갔다. 또 헌책방에 들러 고교 문학 참고서를 사서 수험생처럼 새벽 늦게까지 읽어나갔다. 이육사, 신석정, 박목월, 조지훈, 김광균의 작품들은 고교 시절 배워 다 아는 작품이지만, 서른 해를 훌쩍 넘기고 다시 읽는 작품은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전해주었다. 내 삶에 있어 자음과 모음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모여 이처럼 아름다운 시구를 만들어낸다는 게 내겐 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였다.
그전에도 직장을 관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문제는 현실이었다. 직장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고, 매달 나가는 돈은 줄지 않았다. 글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 말로는 낭만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특히 나 혼자가 아닌 집안 사정은 늘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나이 오십을 앞두고도, 여전히 ‘장남 역할’에 묶인 삶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중국 한나라 명장 한신의 이야기에서 나온 ‘물을 등지고 친 진’이라는 배수진이었다. 그야말로 퇴로를 남기지 않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싶다는 내 마음을, 그 말만큼 정확하게 대변하는 표현은 없었다.
새로 만든 문학카페를 탈퇴하고 사이버대학 문창과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조금씩 문학의 맛을 알아갔다. 주말마다 밤을 새우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문장을 읽어나가는 시간만큼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시구 한 줄을 쓰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지만, 그 시간이 글쓰기의 튼튼한 기초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다. 그럼에도 나이가 주는 강박감만은 어쩔 수 없었다. 늘 비교하거나 비교당하며 살아온 삶 속에서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 밤에 이러고 있나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수차례였다.
그러던 차에 결국 그날이 왔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접어 봉투에 넣던 날 아침, 종이의 각이 유난히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접으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봉투보다 내가 먼저 구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패하면 되돌아갈 길도 없다는 생각에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었다. 사표를 놓는 내 손은 책상 위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상사는 한참 동안 봉투를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이미 돌아갈 길을 스스로 끊고 있음을 알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를 해고한 셈이었다. 퇴근길에 회사 건물을 나설 때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물러설 곳을 끊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그날만큼은 정말로 배수진을 친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오십을 앞둔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내려놓는 일은 무모함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막내였지만 가장에 가까운 역할, 그리고 ‘이 나이에’라는 말은 늘 나를 제자리로 돌려세웠다. 우리는 참고 버티는 쪽이 성숙하다고 배워왔고,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것이 책임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나 역시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사표를 내던 날, 내가 내려놓은 것은 직장이 아니라 그 오래된 믿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비로소 내 삶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사표를 낸 이상, 우선 본가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온 정신을 쏟아도 가능성이 희박한 분야에서 예전처럼 한가롭게 왕래하면서 공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직장까지 그만둔 상태라면 더더욱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만 했다. 서울의 원룸 보증금을 빼서 무작정 여수로 내려가 터를 잡았다. 당시 여수 밤바다가 유명해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 여수라는 지명이 마음에 들었다. 고향 친구들이 있는 경상도와, 문학카페 지인들이 있는 전라도의 중간쯤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만날 수는 있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거리는 아무 연고도 없는 여수에서 지내는데 심적으로 적잖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살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선지 전세로 얻은 아파트는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비어 있었다. 첫날 밤, 라꾸라꾸를 펴고 빛바랜 벽지를 올려다보며 누웠다. 절벽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웬 비가 그렇게 내리던지. 빗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아무리 아껴도 이 돈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못 쓰면 어떻게 하지’가 아니라,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 질문 앞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학교 졸업 후 줄곧 서울에서만 생활해 온 내가 뜬금없이 여수로 내려와 빈 아파트에서 자는 것도 그렇거니와, 내일모레면 오십인 내가 글공부하겠다고 직장까지 그만뒀으니, 누가 봐도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가정을 꾸린 것도 아니고, 벌어놓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 출중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직장을 그만둘 때도 모두가 말렸고, 친한 친구들도 우스갯소리처럼 ‘정신 차려라’며 타박했다. 그럼에도 내가 배수진을 치게 된 건 행복에 관한 나만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살면서 한 번도 남한테 아쉬운 소릴 해본 적이 없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말이다. 직장인들의 그 흔한 주식투자조차도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피해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아니라, 두들겨 보고도 건너지 않았다. 그런 내가 문학에 올인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혼자 사는 내가 훗날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다 해도, 돈만으로는 내 삶이 행복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번 살다가는 게 인생인데, 누구 말마따나 돈 싸 짊어지고 죽을 게 아니라면, 더 늦기 전에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설마 딸린 처자식도 없는데 내 입에 풀칠이야 못할까, 하는 낙천적인 생각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끼고 아껴서 2~3년을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돈만 있다면, 그 안에 어떻게든 실력을 쌓아 글밥을 먹겠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불안은 늘 곁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만큼 마음이 분명했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었다.
지금도 여수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 도서관과 집만 오가며 책과 함께 살았던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주말이면 여수에 관광객이 10만 명이나 몰린다지만, 그 유명한 여수 밤바다 한 번 나가보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책과 씨름했다. 그렇게 글공부를 이어가며 시나브로 문학공모전에도 눈을 뜨게 됐고, 문학상에 당선되기 위해 어떤 작품들을 읽어야 하는지도 조금씩 알아갔다. 당시 내가 시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건 다른 장르에 비해 분량이 짧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토록 소망하던 시인이라는 ‘네임밸류’ 때문이었다. 더불어 더는 소속감이 없어진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스무 줄 남짓한 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훗날 소설로 등단하고도 시인으로 등단하기까지 무려 4년이 더 걸린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문학상과 등단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등단의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이름을 얻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고, 단순히 상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목받는 작품들을 읽다 보니, 내가 익숙하던 방식만으로는 더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그때 이미 나는 오십을 넘긴 상태였고,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피해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외면하기보다 제대로 공부해보는 것. 그렇게 나는 낯설고 어려웠던 시들을 다시 펼쳐 들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결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 세계 안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정말이지 고3 시절에도 하지 않던 밤샘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만큼은 견딜 만했다. 직장인이었을 때를 돌아보면 그토록 원하던 글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정식 소설이라고는 말할 순 없지만, 긴 글을 써나가는 훈련도 병행했다. 나는 애초에 문장이라는 걸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특정한 장르에 매이고 싶진 않았다. 누군가는 한 우물을 파야 대성할 수 있다지만, 솔직히 내 나이쯤에 대성해봐야 얼마나 하겠나 싶은 생각도 있었기에, 문장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썼던 것 같다.
문창과 수업을 들으면서 문예창작학과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차츰 사라졌다. 문학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지, 학교에서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만 문학을 늘 머릿속에 두고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글을 써나가는 데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게 공부를 이어가던 중,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문학상은 기성 문인들도 도전하는 2018년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현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이었다. 상금은 오십만 원이었고, 나로서는 2018년 한 해 동안 글로 벌어들인 유일한 수입이었지만, 글을 써서 돈을 벌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둘 당시의 연봉에는 비할 수 없었지만, 어떤 돈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결과에 매달리기보다, 쓰는 생활 자체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장 눈에 띄는 성취는 없어도, 하루를 문장으로 채우는 일이 나를 버티게 했다.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를 거듭하며 그야말로 쉬지 않고 써나갔다. 도전하는 공모전마다 조금씩 이름이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 문예지 『동리목월』 신인 소설상에 응모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한 번 만에 당선되었다. 짬날 때마다 소설이랍시고 썼던 글을 퇴고해 응모했는데 당선된 것이다. 정말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는데 낯선 번호로 걸려온 수상 소식에 그야말로 혼자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당시 통화 녹음본을 갖고 있는데 글을 쓰다가 막힐 때면 그때를 회상하며 힘을 얻는다. 문제는 시였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상을 받는 것과 이름을 얻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몇 해를 더 머물러야 했다. 중앙지와 지방지를 오가며 최종심에서만 언급될 뿐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하길 반복했다. 최종심에 오르면 다음 해에는 당선될 것 같지만, 현실은 달랐다. 다시 최종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고, 결국 최종에서만 언급되고 사라지는 문청들도 부지기수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몇 줄로 요약될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내 마음은 원고보다 먼저 닳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시가 짧다는 이유로 금방 되겠지, 하던 애초의 계획은 무지막지한 착각이었다.
그렇게 다시 맞은 2024년 신춘문예,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도전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늦어도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연락이 없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울린 낯선 번호.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기차역 앞이었지만, 사람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내가 정말 멀리까지 왔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전업 작가다.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지만 오십의 어느 아침 사표를 낸 순간부터 나는 매일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 불안은 여전히 곁에 있지만 두려움은 나를 멈추지 못한다. 글을 쓰는 매 순간 나는 나 자신과 삶에게 이렇게 외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두려운 선택 앞에서 작은 용기를 믿고 한 걸음 내딛으라고 말하고 싶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2026 제2회 ‘브라보 마이 라이프’ 수기 공모전 -나의 브라보! 순간. 행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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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채율이정애 작성시간 26.06.09 몇 년 전 글 한 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는 사이버상에서 최형만이라 고유명사를 따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시인님은 바라보기입니다. 시작하는 문인에게 영감을 주는 이로 남은 분입니다. 전업작가 그 글자가 여럿을 숨 쉬게 합니다. 문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열정을 읽게 되서 정말 좋습니다.
최형만시인님은 세상이 선택하고 선택 받은 시인입니다.
좋은 작품 기다리는 독자 이채율 드립니다 -
작성자정하나로 작성시간 26.06.09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창과 수업을 들으면서 문예창작학과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차츰 사라졌다. 문학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지, 학교에서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만 문학을 늘 머릿속에 두고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글을 써나가는 데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울랄라! 최형만 작가님 늘 고맙습니다.
전업 작가의 길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
작성자프라다 작성시간 26.06.10 울랄라!
문학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홧이팅!
입니다^^ -
작성자초록물결 작성시간 26.06.12 우와!
대단하십니다~
나의 브라보! 순간. 행복상
수상을 축하 드립니다~~^^ -
작성자그후로도 작성시간 26.06.12 읽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많이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