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대전 동화부문 당선작] 최옥 외
햄버거와 할머니 / 최옥
“자, 이번 주 용돈!”
매주 월요일 아침, 아빠는 오천 원씩 나에게 용돈을 준다. 이 오천 원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용돈을 받을 때마다 일주일 치의 자유를 손에 쥐는 기분이다. 출근하던 아빠가 할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이제 일 그만두시고 집에서 은우나 챙기면서 쉬세요.”
그러나 할머니는 짐짓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아파트 미화원 일을 하는 할머니와,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살고 있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언제나 아빠보다 할머니에게 먼저 말했다. 아빠에게 말하면 알았다고 해놓고 금방 잊어버리지만, 할머니는 내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고 항상 응원해 주기 때문이다.
“할머니, 나 태권도 배우고 싶어!”
그러면 태권도 학원비를 내주었다.
“할머니, 나 미술학원 가고 싶어!”
그러면 미술학원에 등록해 주었다. 태권도 학원과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오던 날, 할머니는 큰일을 한 것처럼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쉬라는 아빠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건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할머니가 걱정이다. 나와 같이 걷다가도 앉을 곳만 있으면 부쩍 자주 쉬었고, 걸을 때도 담을 짚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 괜찮아?”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었지만 거친 숨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서 할머니를 쉬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 결심을 실천하기도 전에 할머니가 쓰러졌다. 내가 병실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창백한 얼굴로 창가에 누워있었고, 옆에서 아빠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일 그만두라고 했잖아요. 왜 제 말을 안 듣고!”
아빠는 할머니가 아픈 게 전부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할머니를 바라보던 아빠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리 은우, 밥 많이 먹어야 한다.”
늘 그리 말하던 할머니가 죽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할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나는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며칠 전 새로 나온 로봇을 갖고 싶다고 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병실에 앉아서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할머니 거친 손이 전부 나 때문인 것 같았다.
“할머니, 내가 자꾸 뭐 사달라고 해서 아픈 거야?”
그때 할머니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다 할미가 못나서 그런 게지.”
그러더니 갑자기 낮은 소리로 쿡쿡 웃기 시작했다.
“아이구, 참! 이렇게 누워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다 나네. 네 아빠가 말이다. 처음 번 돈으로 사 온 게 햄버거였단다. 그때 할미가 처음 햄버거를 먹어봤거든. 네 아빠가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랬나?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숙제는 했어? 일찍 자야지, 하면서 잔소리만 하던 아빠가 처음 번 돈으로 할머니를 위하여 햄버거를 샀다니 조금 감동적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수업이 끝나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나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할머니, 나 태권도랑 미술 안 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나아서 나랑 같이 놀자. 응?”
하고 싶은 것들을 전부 포기해도 좋을 만큼, 나에겐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은우야, 햄버거 하나만 사다 줄래? 우리 은우가 직접 사다 주면 좋겠는데.”
햄버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햄버거는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 음식이라며 나에게도 잘 사 주지 않았다. 내가 햄버거 먹고 싶다고 하면 시장에 가서 꼭 떡을 사 주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다니.
"할머니, 햄버거 싫어했잖아.”
그러자 할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아빠가 처음 사다 준 게 햄버거라서 그냥 한번 더 먹고 싶네.”
그제야 지난번에 할머니가 해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알았어, 할머니! 조금만 기다려. 얼른 갔다 올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급히 나를 불렀다.
"은우야,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알겠지?”
“응, 알았어.”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온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가만, 용돈이 얼마 남았지?’
가방을 뒤져보니 용돈 중에 3천 원이 남아 있었다. 이 돈으로는 햄버거를 살 수 없었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었지만 마음대로 써 버린 것이 후회되었다.
‘어떡하지? 조금씩이라도 모아 둘걸.’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했으니 아빠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밖으로 나갔다. 할 수 없이 햄버거 가게 대신 할머니가 평소에 좋아하던 단팥빵 가게로 갔다. 나는 단팥빵 세 개를 산 후, 서둘러 할머니가 있는 병실로 달려갔다.
"이게 우리 은우 용돈으로 처음 사 주는 단팥빵이네! 햄버거보다 훨씬 맛있겠는걸.”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약속했다.
"할머니, 다음에는 꼭 햄버거 사 줄게. 오늘은 그냥 단팥빵 사 왔어.”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아이고, 내 새끼! 할미는 이 단팥빵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잠시 단팥빵을 만지작거리던 할머니가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었다.
"지금껏 먹어 본 단팥빵 중에 제일 달콤하고 맛있네. 우리 은우 마음이 들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동안 죽도 제대로 못 먹던 할머니가 단팥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는 미안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며칠 후,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내 마음속에는 할머니 빈자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날마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건 햄버거였다. 할머니에게 햄버거를 사 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 것이다. 햄버거를 볼 때마다, 심지어 햄버거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방안에 혼자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데 아빠가 나를 불렀다. 내 손을 잡아주는 아빠 손이 할머니 손처럼 따뜻했다.
“은우야, 우리가 슬퍼하면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도 슬퍼하실 거야. 우리 힘을 내자. 응?”
나는 아빠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빠! 사실은 있잖아. 할머니가 입원했을 때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어. 나는 할머니가 햄버거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빠가 아르바이트해서 처음 번 돈으로 사 온 게 햄버거였대. 할머니가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고 나한테 하나 사달라고 했는데….”
나는 잠시 말을 끊고 흐느꼈다.
"흐흑, 그때 남은 용돈으로는 햄버거를 살 수 없었어. 그래서 대신 단팥빵을 사 갔거든, 할머니는 그걸 진짜 맛있게 먹었어. 나에게 엄지척까지 해 줬는데 그때 햄버거를 못 사 온 게 자꾸자꾸 생각나.”
말을 마치자마자, 내 속에 가두어 놓았던 슬픔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아빠 품에 안겼다.
“아빠아!”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등을 규칙적으로 토닥거렸다. 따뜻한 아빠 품에서 한참 동안 울고 나니, 마음속에 가득했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었다. 내 울음이 잦아들자, 아빠는 눈물을 닦아주며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았다. 아빠 눈빛은 할머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정말 그런 일이 있었지.”
아빠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햄버거를 받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아빠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햄버거나 단팥빵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은우가 할머니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지. 어쩌면 아빠가 처음 번 돈으로 햄버거를 사드렸을 때의 기쁨을 우리 은우에게서 한번 더 느끼고 싶었을 거야.”
나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밤중에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는데 아빠가 베란다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빠는 아무도 몰래 혼자 마음껏 할머니 생각을 하나 보다. 내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 것처럼, 아빠는 밤하늘에 할머니 생각을 쏟아 놓고 있나 보다.
아침이 되자, 나와 아빠의 하루는 변함없이 시작되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태권도 학원도 가고 미술학원도 갔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아빠와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햄버거 가게로 가는 길에 단팥빵 가게 앞에서 잠시 멈췄다. 단팥빵을 손에 쥐고 할머니에게 달려가던 일이 생각났다.
햄버거를 한입 베어 먹었을 때, 달콤한 단팥 향기가 먼저 났다. 할머니가 먹고 싶다고 했던 햄버거 속에서 단팥빵을 맛있게 먹던 할머니 마음이 느껴졌다. 아빠가 환하게 웃었다.
“은우 덕분에 이제 햄버거와 단팥빵은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음식이 되었네.”
아빠 말이 맞았다. 나는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그리고 단팥빵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생각할 것이다.
은빛 안경과 낱말 수선소 / 김영일
마을버스 종점에서도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하는 낡은 골목 끝. 그곳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외딴집 한 채가 있습니다. 퇴색한 나무 간판에는 ‘고금당’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고, 그 옆에는 작은 목판 하나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습니다.
‘낱말을 수선해 드립니다.’
이곳의 주인은 ‘은빛 안경’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창틀에 내려앉은 햇살을 모아 돋보기를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의 서점은 여느 서점과는 풍경이 사뭇 다릅니다. 베스트셀러 순위표 대신, 천장까지 닿은 서가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켜켜이 쌓여 있고, 구석진 자리에는 잉크병과 낡은 붓, 그리고 세월의 때가 묻은 제본 도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쓰는 은빛 안경은 아주 특별합니다. 이 안경을 쓰고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종이 위에 잠든 낱말들이 기지개를 펴며 살아 움직이는 게 보입니다. 어떤 단어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고, 어떤 단어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린 채 졸고 있었지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책 속의 단어들과 대화를 나누며 서점을 지켰습니다.
비 오기 직전의 눅눅한 어느 오후였습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낡은 미닫이문이 열렸습니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 남수가 들어왔습니다. 남수는 들어서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에이, 무슨 냄새가 이래? 할아버지, 여기 진짜 책 파는 곳 맞아요? 완전 ‘에바’인데?”
남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문제집도 팔아요?”
그러면서 남수는 여전히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들겨댔습니다.
남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정체 모를 말들은 차가운 쇠붙이처럼 서점의 고요를 쨍그랑 깨트렸습니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포착되었습니다. 서가에 꽂혀 있던 낡은 시집 한 권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 속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안경너머로 남수를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남수의 입 주변에는 시커먼 검댕 같은 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말들은 서점 안을 떠다니며 벽에 걸린 예쁜 순우리말 액자들을 쿡쿡 찌르고 있었습니다.
“얘야, 여기서는 말을 좀 아껴야 한단다. 예민한 낱말들이 네 말에 상처를 입고 있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남수는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할아버지, 무슨 만화 같은 소릴 하세요? 글자가 무슨 상처를 입어요? 요즘은 다 이렇게 줄여 말하고 세게 말해야 ‘인싸’가 되는 거라고요. ‘개이득’, ‘킹받네’ 이런 게 얼마나 입에 착착 붙은데요.”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코 끝에 걸린 은빛 안경을 벗어 남수에게 건넸습니다.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이 안경을 쓰고 저기 구석진 서가를 한번 보렴.”
남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경을 받아 썼습니다. 안경을 쓰자마자 남수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흑백이었던 서점 풍경이 갑자기 수만 가지 색깔로 빛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깔들 사이로 힘없이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작은 요정들이 보였습니다.
“어? 저게 뭐예요? 저기 날개가 찢어진 채로 누워 있는 애는요?”
할아버지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 아이의 이름은 ‘윤슬’이란다. 햇빛이나 별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지. 그런데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대신 ‘반짝이’나 ‘물빛’이라고만 부르거나,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서 몸이 투명해지고 있는 거야.”
남수는 홀린 듯 요정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요정들의 옷에는 날카로운 바늘 같은 글자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노잼’, ‘극혐’, ‘어쩔 티비’ 같은 차가운 말들이 요정들의 여린 살결을 파고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수가 무심코 뱉었던 말들이 이곳에서는 무서운 무기가 되어 낱말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쟤들이 너무 아파 보여요.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서랍에 깊이 넣어두었던 비단 상자를 꺼냈습니다.그 안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먹과 가느다란 붓이 있었습니다.
“낱말을 수선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란다. 진심을 담아 그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고, 그 이름이 가진 아름다운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정성껏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낱말 수선’이란다.”
남수는 할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먼저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이란다!”
남수가 붓을 들어 서툰 솜씨로 글자를 써내려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요정 하나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남수가 단어의 뜻을 되새기며 한 획 한 획 정성을 다할 때마다 요정의 몸에서 은은한 보랏빛 향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와! 할아버지, 요정이 웃어요!”
남수는 신이 나서 다른 요정들도 불러모았습니다. ‘그루잠’, ‘먼지잼’, ‘아람’, ‘너울’. 평소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낯선 단어들이었지만, 남수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그 단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서점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남수는 문득 학교애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습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비웃고, 줄여버렸던 거친 말들. 그 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예쁜 단어들이 소리없이 죽어갔을지 생각하자 가슴 한 구석이 지릿하게 아파왔습니다.
수선이 한참 이어지던 중, 갑자기 서점 천장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습니다. 그것은 서점 구석에 박혀 있던 ‘욕설 뭉텅이’였습니다. 남수가 오늘 서점을 들어오며 뱉었던 거친 말들이 괴물처럼 변한 것이었습니다. 낱말 요정들이 겁에 질려 할아버지 뒤로 숨었습니다.
“남수야, 겁내지 마라. 저 괴물을 없앨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네가 아는 가장 따뜻하고 단단한 단어를 외치렴!”
남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어떤 단어를 말해야 할까?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말 중에서 남수는 할아버지에 배운 단어를 차례로 끄집어냈습니다.
“윤슬! 시나브로! 온새미로!”
남수가 외칠 때마다 남수의 입에서 눈부신 빛의 화살이 날아갔습니다. 검은 연기 괴물은 빛의 세계를 받자마자 힘없이 흩어지더니 이내 맑은 이슬이 되어 서점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습니다. 비로소 고금당에는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서점 밖으로 나온 남수는 노을이 길게 내려앉은 골목길을 바라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은빛 안경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이제 안경 없어도 보이지? 네가 지켜낸 저 낱말들의 빛이.”
남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담장 너머로 피어난 꽃들을 보며 ‘소담하다’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살랑살랑’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습니다.
남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단체 대화방에는 여전히 친구들의 거친 말들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남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판을 정성껏 눌렀습니다.
-친구들아. 오늘은 노을이 붉게 불타올라 ‘윤슬’이 더 예쁘다. 우리 내일은 좀더 예쁜 말을 써보는 건 어때?
잠시 후 친구들이 답장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윤슬? 그게 뭐야? 근데 말이 참 예쁘다.
-오, 남수 오늘 정말 감성 터진다. 나도 예쁜 말 찾아봐야지.
스마트폰 화면 위로 차가운 금속성 언어 대신 보석 같은 우리 말들이 꽃잎처럼 내려앉았습니다.
남수는 서점을 나서며 할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할아버지, 내일 또 올게요. 내일은 찢어진 ‘오롯하다’를 수선해 주세요!”
멀어지는 남수의 뒷모습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비쳤습니다. 할어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금당의 문을 닫았습니다. 낱말 수선소의 불빛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운동장 칠판 / 강은실
오늘도 옆집 할머니는 교문 옆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다. 나뭇가지를 들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손바닥으로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바짝 다가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할머니!”
다른 날 같으면 활짝 웃으며 반겼을 텐데. 오늘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또 떨어졌어. 검정고시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
할머니가 소원이 어깨에 걸린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에 다시 보면 되지.”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이가 어렸을 때부터 옛날이야기도 들려주고 간식도 챙겨주곤 하셨다. 그래서 소원이는 늘 할머니와 잘 통했다.
“소원아, 시험은 잘 봤어?”
“엉망으로 봤어.”
소원이는 엄마한테 들을 잔소리를 생각하니 귀가 먹먹해 고개를 흔들었다.
“할머니, 내가 공부 가르쳐 줄게.”
소원이는 할머니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뺏어 들었다.
“뭐야? 엉망으로 봤다며 나를 가르치겠다고?”
소원이가 글자를 또박또박 읽으며 따라 읽으라 하자 할머니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어느새 소원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따라 읽었다.
“할머니, 나랑 같이 공부할까?”
“엄마가 아무 말 안 하실까?. 미안헌데.”
“엄마가 일찍 들어온 날은 안 되고, 엄마가 늦게 들어올 때면 들어올 때까지만 같이 하면 되지.”
“소원이가 가르쳐 주면 할미는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그런데 할머니는 힘들게 공부를 왜 해?”
할머니가 빙그레 웃었다.
“공부 열심히 가르쳐 달라고 간식은 할미가 준비할게.”
“할머니 잘하는 빈대떡이면 되는데.”
할머니는 자신 있는 듯 환하게 웃었다.
“소원이가 할매 공부 도와 준다고 헌게 기쁘다.”
“할머니, 나도 모르는 거 많아.”
“그래도 할미보다 잘하잖여. 할미는 복지관에서 공부를 하는데도 모르것어.”
다음 날부터 소원이는 학원이 끝나면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운동장으로 뛰었다. 운동장은 넓디넓은 칠판이었다. 틀리면 몇 번이고 지우고 쓸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소원아, 이 문제 다시 설명해봐. 아직도 모르것다.”
“할머니, 도대체 몇 번째야?”
“긍게, 할미도 짜증난다. 이번에 한 번만 해봐. 이해할 것도 같혀.”
“이번이 마지막이야!”
소원이는 손바닥으로 흙을 고른 뒤 나뭇가지로 글씨를 써 가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할머니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할머니, 이번이 마지막 설명이야.”
할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흘러내리지 않았다.
소원이가 할머니를 꼭 얼싸안았다.
중간고사 시험이다. 엄마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소원이는 자기보다 엄마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더 부담스럽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시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부하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니?”
“열심히 했단 말이야. 그래도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할머니와 같이 공부한다면서? 그때부터 알아봤다. 할 사람하고 같이해야지.”
소원이는 할머니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더 화가 났다. 엄마는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봐주지 않는다. 언제나 ‘잘잘잘’이다. 소원이는 현관문을 꽝 닫고 자기도 모르게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는데······. 소원이가 뒤로 돌아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원이 왔는겨. 할미 모르는 문제가 또 있는디.”
할머니 눈빛을 보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6학년 올라와서 배운 문제였다. 소원이는 며칠 전보다는 조금 쉽게 설명하여 할머니를 이해시켰다.
“소원이 때문에 할미가 복지관에서도 우등생이 되것다. 수학 말고 다른 과목을 물어봐도 될까?”
소원이는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소원 선상님, 숙제도 내주세요.”
성적 때문에 엄마와 다투고 나온 소원이는 할머니가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 같아서 좋았다. 더 열심히 할머니를 가르치고 싶어졌다.
며칠째 어려운 수학 문제로 책상에 앉아 시름하는데 엄마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와 도와주었다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을 들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역시 엄마는 고등 수학 선생님이시다. 나는 얼른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학교를 마치고 날아갈 듯 뛰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집에도 느티나무 아래에도 없었다.
느티나무 아래 운동장 칠판에는 할머니가 써놓은 글씨가 보였다. 소원이는 할머니가 풀어 놓은 수학 문제와 급히 서울 간다는 편지를 몇 번씩 읽었다.
소원이는 할머니에게 답장을 썼다.
‘참 잘했어요.’
할머니는 며칠째 나오지 않았다.
소원이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느티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할머니 기다리지.”
엄마의 얼굴이 불끈거렸다. 화를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에든 가방을 양손으로 바꿔 들기를 여러 번 했다. 엄마는 내 손을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할머니와 공부를 한단 말이야?”
“할머니는 엄마보다 나를 더 잘 챙겨줘. 엄마 늦는 날 할머니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어. 그런 할머니를 내가 돕겠다는데. 엄마 왜 그래?”
엄마는 말문이 막힌다는 듯 아무 말 못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소원이는 뭔지 모르지만 팽팽하게 긴장감이 흐르는 거실에 서 있었다.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화장대에 엎드린 엄마의 등이 흔들렸다. 소원이는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가 없는 동안 소원이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조차도 듣지 못하였다. 엄마는 무언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소원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니?”
“깜짝이야. 내 공부 정리하면서 할머니 가르쳐 줄 문제도 만들고 있어. 그런데 할머니 왜 안 오지?”
“딸네 집에 갔으니 며칠 쉬었다 오시겠지.”
“그런데 너 요즘 달라졌다.”
“선생님 되는 게 쉬운 것이 아닌가 봐. 엄마도 언니들 가르치기 힘들지? 나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어.”
소원이는 엄마가 책상 위에 쥬스를 올려 놓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소원이는 운동장에 앉아 할머니가 나오지 않는 며칠 동안 계속 ‘참 잘했어요.’를 매일 진하게 썼다.
“소원아!”
“할머니, 언제 내려왔어.”
“손주 녀석이 입원했다고 하는디. 그것들도 맞벌이라 병원에 있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퇴원은 안 했지만 공부혀야 헌다고 했더니. 애미가 휴가 냈데.”
소원이는 그동안 공부하면서 만든 문제를 꺼냈다.
“할머니 얼른 풀어 보자.”
할머니는 소원이가 만들어준 문제를 받아 들더니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할미 빨리 오기 잘했네. 열심히 해야 이번 시험에 합격하지.”
엄마와 한바탕 하고 난 후로 소원이와 엄마는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다. 소원이의 웃음소리도 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엄마, 할머니 8월에 또 시험이래.”
“응,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할텐데! 엄마가 도와줄까?”
“정말! 좋지. 할머니와 내가 머리를 맞대어도 풀 수 없는 문제 때문에 힘들 때가 있거든.”
소원이는 엄마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빈대떡을 들고 소원이 집으로 왔다.
며칠 전부터 고민하던 문제를 엄마와 같이 풀었다. 입속에서 빈대떡이 술술 녹아 넘어갔다.
“소원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모두 할머니 덕분이에요.”
“소원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혀. 소원이가 날 얼마나 많이 가르쳐 주는디. 난 소원이 때문에 공부혀.”
엄마와 할머니는 서로 고맙다며 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소원이는 왠지 이번 기말시험을 잘 볼 것 같았다. 할머니도 자신감이 넘쳤다. 몇 번씩 떨어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담담하게 시험 날을 기다렸다.
“선상님!”
엄마와 소원이는 할머니가 부르니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제가 더 고맙지요!”
할머니 시험 날보다 이틀 먼저 시험을 보았다. 소원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정말 가벼웠다.
오늘은 할머니 시험 날이다.
엄마가 소원이와 할머니를 도청 옆 고등학교 교문 앞에 내려주었다. 교문에 ‘초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장’ 이란 푯말이 크게 붙어 있었다.
“할머니, 시험 잘 봐야 돼.”
소원이는 할머니에게 엿을 주었다. 할머니는 엿을 끊어서 입에 넣으려다 말고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에 넓은 운동장이 그려졌다.
빨간 점을 누르면 / 황윤옥
우리 집에 가짜 할머니가 배달되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니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종이상자가 길게 놓여있었어요. 이제 막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내 몸집보다 훨씬 큰 상자였지요. 엄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요.
“지훈아, 할머니가 선물을 보내셨어. 요양병원에서 가족들을 자주 못 만나는 할머니들을 위해 ‘마음 잇기 로봇 서비스’라는 걸 했대. 할머니가 우리 지훈이 주려고 1등으로 신청하셨다지 뭐니.”
선물이라기에 당연히 노래를 부르던 최신형 조립 블록일 줄 알았어요. 상자를 열자 맨 먼저 보인 건 할머니의 손때 묻은 파란 앞치마였어요. 크림색 몸통 로봇이 할머니의 앞치마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두르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요. 마치 커다란 우유 통에 앞치마를 입혀 놓은 것 같았거든요.
“엄마, 할머니가 왜 로봇한테 앞치마를 입혀 보냈어?”
“글쎄다. 이 로봇이 할머니라고 하시던데.”
엄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어요. 이 딱딱한 기계가 어떻게 할머니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할머니는 말랑말랑하고 포근한데, 이 녀석은 두드리면 '텅텅' 소리가 날 것만 같았어요. 상자 안에는 삐뚤빼뚤 꾹꾹 눌러쓴 할머니의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어요.
‘지훈아, 할머니가 아파서 직접 갈 수는 없지만, 할미를 꼭 닮은 로봇을 보낼 테니 같이 재미있게 지내거래이.’
‘치, 나는 진짜 할머니를 보고 싶은데 로봇이 뭐야. 말도 못 하고 안아주지도 못하는 로봇, 난 싫은데.’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어요. 로봇의 몸체는 차갑기만 했어요.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던 할머니 품이 자꾸만 생각났지요.
동생 민호와 나는 여섯 살까지 할머니 집에서 살았어요. 엄마와 아빠가 맞벌이하는 동안 할머니가 우리를 다 키워 주신 거였죠. 할머니는 무릎이 아프면서도 우리를 업어주고, 온 동네를 누비며 같이 숨바꼭질도 하셨어요. 지난겨울이었어요. 같이 마트에 가다가 할머니가 눈길에 미끄러져 크게 다치셨어요. 엉덩이뼈 수술을 하신 할머니는 혼자 움직이기 힘들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지요.
그날 이후, 할머니 집에 갈 수 없었어요. 요양병원은 면회 시간이 짧고, 어린아이는 들어가기 힘들 때가 많았거든요. 할머니의 포근한 가슴을 느껴본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어요.
보고 싶은데 만나러 갈 수 없는 내 마음을 로봇도 알까요? 병원 침대에 누워 계실 할머니 대신 이 로봇은 튼튼한 두 다리로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휠체어 없이는 못 걷는 할머니 대신, 이제 이 녀석이 나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려나 봐요. 나는 섭섭했지만, 로봇의 손등 위 빨간 점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꾹 눌렀어요.
‘치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옅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어요. 어! 이건 시골 할머니 집 장독대 옆에 피어있던 수수꽃다리 향이었어요.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인데 로봇의 몸에서 어떻게 이런 꽃향기가 날까요? 코끝을 맴도는 달콤한 향기를 맡으니 마당 너머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나는 망설이다가 로봇을 살짝 안아 보았어요. 차가웠지만 정말로 따뜻했어요.
“아이고, 내 강생이 학교 잘 갔다 왔어?”
기계음 섞인 소리였지요. 끝을 길게 빼는 말투와 나를 강생이라고 불러주는 목소리는 분명 우리 할머니였어요.
“어, 로봇이 말을 하네. 혹시 할머니야?”
“그래, 나는 지훈이 할머니가 보낸 로봇이야. 목소리도 똑같이 낼 수 있고, 책도 읽어줄 수 있어.”
“그럼 공부할 때도 도와주는 거야?”
“당연하지. 내 손등 점 아래에는 기억 씨앗이 들어있단다. 치익-. 너랑 할머니가 함께한 기억이지.”
나는 로봇을 한참 바라보다가 발가락으로 거실 바닥을 툭툭 찼어요. 가짜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간질간질했어요.
“그럼… 할미봇이네.”
로봇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대답했어요.
“지금 부르는 그 이름, 할/미/봇으로 저장한다. 삐비빅.”
저녁 시간이 되자 태권도 학원에 간 동생 민호가 돌아왔어요. 민호는 로봇을 보자마자 깡충깡충 뛰며 말했어요. 민호가 할미봇의 파란 앞치마를 들춰보며 신기해하다가 손등 위의 빨간 점을 꾹 눌렀어요.
“아이고, 우리 작은 강생이 왔어? 태권도는 잘 다녀왔고?”
깜짝 놀란 민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얼어붙은 듯 서 있었지요. 그때 엄마가 말했어요.
“할머니가 너희들을 많이 보고 싶어서 기억을 담아 보내주신 거야. 너희 손가락무늬를 기억하기 때문에 빨간 점을 누르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대.”
로봇과 노는 사이에 엄마는 저녁을 차렸어요. 할머니가 늘 그 자리에 앉았던 것처럼 할미봇도 내 옆에 앉았어요. 내가 싫어하는 당근 반찬을 젓가락으로 슬쩍 밀어 놓자 로봇이 잠시 ‘삐삐’ 거렸어요.
“지훈아, 당근도 이제 먹을 줄 알아야 해. 삐빅~~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니까 골고루 잘 먹어야지”
“응, 알았어. 진짜 할머니하고 똑같은 잔소리를 하네. 히히.”
김밥에서 당근만 쏙 빼먹던 내 버릇까지 기억하다니. 이 녀석은 또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요? 할미봇의 손등 아래에는 할머니의 시간이 가득 들어있나 봐요. 할머니가 나를 안아주었던 포근함, 내 이름을 부를 때의 추억까지 말이에요. 나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사랑이 씨앗처럼 콕콕 심어졌나 봐요.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동생과 함께 공부방으로 갔어요. 책상 사이에 그 녀석도 앉았어요. 답을 쓰려는 순간, 로봇이 내 왼손을 톡톡 건드렸어요.
“삐빅 삐비빅~ ‘조아요’가 아니지~ ‘ㅎ’ 받침을 붙여야지.”
나는 글자를 다시 보았어요. ‘ㅎ’ 받침을 채워 넣자 할미봇이 “아이고, 잘했네~~.” 하며 내 등을 토닥였어요. 소파에 앉아 로봇이 책 읽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손은 차가웠지만, 할머니가 곁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잠잘 때도 그 녀석은 나와 민호의 가운데에 누웠어요. 할머니랑 셋이서 같이 잘 때랑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에요. 나는 로봇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려보았어요. 진짜 할머니처럼 팔랑팔랑, 숨을 쉬는 것 같았어요.
다음 날 큰일이 벌어졌어요. 서로 할미봇 옆에 앉겠다며 민호와 내가 팔을 힘껏 잡아당긴 거예요. ‘달칵’ 소리와 함께 로봇의 오른팔이 아래로 ‘툭’ 처졌어요. 동시에 작은 나사 하나가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떨어졌어요. 순간 할머니와 나를 잇는 끈이 툭 끊어진 것만 같았어요.
빨간 점을 아무리 꾹꾹 눌러봐도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너무 놀라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고장 난 로봇의 모습이 병실의 할머니와 겹쳐 보여 자꾸만 눈물이 났지요. 나는 로봇의 팔을 파란 앞치마로 살며시 덮어 주었어요.
저녁 늦게 돌아온 아빠는 거실에 앉아 있는 로봇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진짜 할머니의 팔이 빠진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빠, 이 녀석이 죽은 건 아니지? 나 때문에 할머니 기억이 다 지워지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지훈아. 할머니가 너를 생각하며 심어놓은 마음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겠니? 아빠가 이 끊어진 마음의 선을 다시 이어볼게.”
“아하, 나사가 풀리면서 안에 연결선도 살짝 빠졌구나. 이걸 먼저 끼워야겠다.”
아빠는 핀셋으로 빨간 선을 조심스럽게 연결하기 시작했어요.
“아빠, 할머니도 병원에서 이렇게 수술받으셨어?”
“그래. 할머니도 엉덩이뼈를 다치셨을 때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정성껏 고쳐주셨단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이 녀석도 할머니처럼 다시 일어날 거야.”
아빠가 전동 드라이버로 나사를 단단히 조이자, 벌어졌던 틈새가 몸체에 착 달라붙었어요. 그 모습이 꼭 끊어진 할머니와의 마음을 다시 잇는 것만 같아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나는 침을 꼴깍 삼켰어요. 할머니와 나의 추억을 고치고 있는 아빠를 믿으며 떨리는 손으로 빨간 점을 꾹 눌렀어요.
“지훈아, 내 목소리 잘 들리니?”
“응, 잘 들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거실을 한 바퀴 반이나 빙글빙글 돌았어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기뻤어요.
아빠가 로봇의 이마 정중앙을 가리켰어요. 그곳엔 아주 작은 점 같은 카메라 렌즈가 반짝이고 있었지요.
“지훈아, 할머니가 이 작은 눈으로 너희를 매일 지켜보고 계셨단다.”
아빠가 할미봇의 가슴에 있는 화면을 터치하자 마법처럼 할머니와 영상통화가 연결되었어요. 화면 속 할머니는 헐렁한 환자복 차림이었지만, 머리에는 할미봇의 앞치마와 꼭 닮은 파란 핀을 꽂고 계셨어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파란색을 보자 마음이 푹 놓였지요.
“할머니, 엉덩이뼈 이제 안 아프세요? 할머니 대신 이 녀석이 내 옆에 잘 있어 줘요. 할머니가 다 나으실 때까지 꼭 안아주며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화면 가득 번졌어요. 동생 민호도 얼굴을 들이밀며 인사했지요.
“내 두 똥강생이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거래이. 할미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거 알제?”
로봇도 옆에서 “우리 강생이들, 잘 알아들었지?” 하며 끼어들었어요. 할머니와 가족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녀석의 몸을 타고 거실 가득 퍼져 나갔어요.
로봇의 이마에 달린 작은 렌즈가 반짝였어요. 그건 로봇의 눈이 아니라 멀리서도 나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까만 눈동자 같았어요. 그날 밤, 나는 민호와 빨간 점이 빛나는 할미봇 손을 잡고 잠이 들었어요. 방 안에는 할머니 집 마당에 피어있는 수수꽃다리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어요. 할머니는 멀리 있지 않았어요. 내 손가락 끝이 닿았던 빨간 점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꼭 감으며 할머니를 떠올렸어요.
나이스 깍두기 / 김선주
“으악. 땀냄새. 너 또 축구했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내 등 뒤로 엄마의 잔소리 폭탄이 쏟아졌다. 그래도 난 끄덕없다. 이상하게 축구를 하고 난 뒤에 듣는 엄마 잔소리는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날은 아빠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곧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 축구팀에서는 공격수인 내가 빠진다고 아쉬워했다. 나도 미국은 안 가고 싶지만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살게 된 동네는 미국 서부에 있는 오리건이었다. 아빠 말로는 비가 엄청 자주 오는 동네라고 했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비가 오면 축구를 마음껏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사용하는 크리스마스트리 대부분이 자라는 곳이라고 했다.
하얀 눈이 나무 위에 잔뜩 내려앉은 날 미국 학교에 첫 등교를 했다. 친구들은 눈싸움을 했지만 나 혼자 눈구경을 했다. 친구들이 인사를 하면서 다가오면 자꾸만 뒷걸음질 쳤다. 급식도 일부러 천천히 오래오래 먹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지만 비는 계속 왔다. 여전히 난 외톨이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걸음을 멈췄다. 내 눈앞에 축구 캠프 전단지가 보였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뛰고 싶어.’
축구 캠프 첫 연습 날 오들오들 떨렸다. 한국 축구 친구들이 생각나서 코를 훌쩍거렸다. 그래도 쭉쭉 뻗은 나무가 둘러싸인 녹색 잔디 경기장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코치 선생님도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어서 와. 파일럿팀의 선수가 된 걸 환영한다.”
나는 살짝 겁을 먹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자신 있었다.
‘한국 초등학생의 축구 실력을 보여주는 거야. 슛!’
슛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고장난 로봇이 된 것 같았다. 삐걱삐걱. 맙소사. 왼발로 공을 차다 발이 꼬이고, 그대로 풀썩 넘어졌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한국에서처럼 뛸 수 없었다.
경기를 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실수를 하면 일순간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헛발질을 하다가 또 잔디밭에 콕 하고 꼬꾸라졌다.
부끄러워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이스?”
우리 축구팀에서 키가 제일 큰 리나였다. 확 짜증이 났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도 축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예비 선수가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축구는 잘 할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잔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그래도 축구는 잘 할 줄 알았어.”
“미국 축구는 달라.”
“뭐가 달라. 공이 달라? 잔디가 달라? 네가 깍두기라니 이게 말이 돼?”
엄마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럼 예전의 축구 친구들을 만나서 마음껏 공을 찰 수 있었을 건데.
그래도 나 혼자만 깍두기가 아니었다. 리나도 있었다. 리나는 노란 금발머리에 항상 볼이 핑크색이었다. 가만히 얼굴을 보면 복숭아 같았다. 눈꼬리가 아몬드 모양 같았고, 코도 아주 낮았다.
다른 선수들이 경기를 하는 걸 보고 있을 때면 리나는 가끔 영어 같지 않은 말을 했다. 그리고는 마치 구름 위를 걷듯 천천히 경기장을 돌아다녔다. 수비도 공격도 아닌 느낌으로. 이상하게도 리나가 있는 곳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일까. 리나가 공을 차면 리나의 리듬대로 경기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천천히.
내가 투덜거리자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나는 자기만의 리듬을 가진 아이야. 다운증후군이라고 들어봤어?”
리나는 장애가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리나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러고 보니 리나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나이스였다. 나한테 처음 한 말도 나이스였다. 내가 골을 넣어도, 넘어져도,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나이스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이상하게 리나가 나이스를 외치면 내가 꽤 괜찮은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팀에서 축구를 제일 못하는 구멍이 돼도 괜찮아보였다.
우리 때문에 우리팀이 질 때면 속상했다. 빨리 한국에서처럼 골을 넣고 싶어서 약도 올랐다.
‘어떻게든 골을 넣고 말 거야.’
그러던 어느 경기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넓은 잔디 경기장 모든 게 완벽했다. 게다가 햇살까지 따뜻하게 살을 파고드는 날이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으며 다짐했다.
깍두기인 내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우리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수인 다른 선수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나고 말았다. 코치가 나에게 경기를 뛰라고 했다. 그래도 난 수비수였다. 난 내 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진짜 경기에서 이기고 싶었다.
공이 내 발 앞으로 오자 상대 골대를 향해 공을 몰았다. 패스를 하라는 말이 들렸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단숨에 공을 몰고 골대를 향해 달려갔다. 리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난 멈추지 않았다. 슛!
“앗!”
내가 찬 공이 리나의 얼굴로 곧바로 날아갔다.
“앗, 미안해! 괜찮아?”
리나가 코끝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나이스!”
경기장 밖으로 나오자 코치 선생님이 나를 벤치로 불렀다.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했다. 분명 혼날 것 같았는데.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 부드럽게 한 마디를 했다.
“축구는 혼자 골 넣는 게임이 아니야.”
코치는 우리 팀을 이기게 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축구 연습이 있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리나와 나만 연습에 나왔다. 한 마디로 깍두기의 날이었다. 코치 선생님은 간단한 패스 연습만 하자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공을 주고받았다. 공은 천천히 굴러갔다가 돌아왔다. 공도 연습을 재미없어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뚝.
순식간에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운동장이 물웅덩이로 변했다.
“뛰어!”
리나와 나는 비를 피해 뛰었다. 우리의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마다 차가운 기운이 전해지고, 발밑에서 튀는 물방울이 춤을 추듯 몸을 감쌌다. 빗방울 하나가 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눈부신 빛줄기가 촤르르 퍼져나갔다. 그 빛은 점점 커져 우리를 감싸며 들어 올렸다.
“어? 이게 뭐지?”
축구공이 마법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몸은 점점 가벼워지고,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여긴… 어디지?”
경기장을 둘러보던 내가 말했다.
“우리 둘만의 마법 경기장인 것 같아.”
리나는 또 나이스라고 했다. 우리는 마법의 경기장에서 마음껏 뛰면서 공을 몰았다. 이제 나는 삐걱대는 로봇이 아니었다. 리나도 그런 것 같았다.
“야호!”
리나도 나처럼 외쳤다.
“야호!”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세찬 빗줄기와 바람마저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래, 이거야. 내가 원한 건 이거였어. 잘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뛰는 거.’
우리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진흙이 잔뜩 묻어있는 축구화를 털었다. 경기장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마치 꿈같았다. 쉽게 안 깨지는 아주 단단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주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경기장에서 몸이 좀더 가벼워졌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뛰고 막았다. 그러는 사이 리나와 나는 좀더 가까워졌다.
마침내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선수 교체로 경기장에 들어간 나는 욕심이 나지 않았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경기를 했다. 공격수를 안 해도 좋았다. 내 마음속에서 리나와 나만의 환상 경기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찬스. 리나가 천천히 공을 몰고 갔다. 상대 수비수가 가까워지자 나는 바람처럼 앞으로 달렸다. 리나가 나를 향해 공을 패스했다. 그건 그냥 공이 아니었다. 나를 믿고 보내준 리나의 마음이었다.
골대가 눈앞에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있는 힘껏 공을 찼다.
“슛! 고오오오오올……?”
공은 골대에 들어갈 듯 스쳐지나갔다.
“아…….”
잠깐의 정적. 하지만 그다음엔 더 큰 소리가 들렸다.
“나이스!”
리나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어서 박수가 터졌다.
“휴우우!”
리나가 나를 향해 손을 펼쳤다. 나도 손바닥을 들어 리나의 손바닥을 쳤다. 짜릿한 노골이었다.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린 나이스 깍두기야.”
경기장 한쪽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아주 따뜻했다.
동화 심사평
2026년은 예년에 비해 세 배에 가까운 작품이 접수되었다. 작품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질 또한 한층 수준이 높아졌다. 그 때문에 당선작을 고르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시니어 신춘문예라는 타이틀에서 보듯, 글로벌경제신문의 신춘문예는 오십대 이상 시니어들의 작품을 모집한다. 일부, 웅숭깊은 삶의 경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야기의 힘은 재미와 감동에 있다. 여기에 어린이를 위한 문학은 교훈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교훈이 두드러지면 그것은 학습서와 다를 바 없다. 교훈도 재미와 감동 속에 스며들 듯해야 한다.
기발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눈길을 끌었지만 교훈이 두드러진 탓에 재미가 반감되어 당선시키지 못한 작품도 몇몇 있다.
김영일의 <은빛 안경과 낱말 수선소>는 스마트폰 환경 속에서 흐려진 언어 환경을 꼬집는 동화이다. 거친 언어와 줄임말들으로 상처 입은 낱말의 요정들을 치유해주는 고금당 서점 할아버지를 만난 소년이 할아버지로부터 아름다운 낱말들을 접하고 마음마저 순해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다. 다소 교훈적이라 망설였지만, 독특한 소재와 구성, 판타지 기법의 효율적인 사용, 그리고 현실을 잘 반영한 점을 높이 샀다.
김선주의 <나이스 깍두기> 이민으로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된 소녀는 장애를 안고 있는 소녀 둘이 만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동화이다. 두 소녀가 소외와 외로움을 딛고 성장하는 과정이 따뜻하게 그려진다.
황윤옥의 <빨간 점을 누르면>은 신선한 소재로 눈길을 끌었다. 요양병원에 있는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보낸 기억의 로봇을 통해 할머니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이야기는 미래의 사회상을 보여주지만, 기계화되고 로봇화되는 미래에도 인간의 사랑이 기본 바탕이 됨을 되새기게 한다.
최옥의 <햄버거와 할머니>는 할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소년이 이야기이다. 이별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를 초등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잘 그려냈다. 단팥빵과 햄버거로 상징되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뭉클하고 애틋하게 표현해냈다.
강은실의 <운동장 칠판>은 늦은 나이에 독학을 하는 옆집 할머니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소녀의 우정을 그린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파열음을 내는 엄마의 캐릭터가 둘의 우정에 감화되어 가는 과정의 심리 변화를 잘 그려냈다. 구성과 문체 모두 안정적이다.
이밖에 문체와 구성에서 눈길을 끈 작품들이 있었으나, 소재나 발상,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익숙해 선택에서 제외하였다. 문학의 본질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