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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토의장

[답변]주화론의 척화론 반박

작성자kaeshin01|작성시간02.12.11|조회수2,559 목록 댓글 0
제가 조선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따라서 '답변'이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에 답변을 드리도록 하지요.

우선 '척화(화친 배척)파'는 지난 글에도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대의 명분론(존화양이 사상)을 내세웠다 할 수 있습니다.

朝鮮 조정에서는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척화파와 『일단 '종묘사직'을
'보전'한 뒤에 '설욕'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의 논쟁이
치열해져 갔습니다.

즉 '청 태종'이 종래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자 척화파는 '명'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사상 즉
'존화양이'에 의거하여 척화 즉 청과의 '화친'을 '배척'하는 입장에
있었고 반면 주화파는 일단 '청'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총론'에는
찬성하면서도 현실 우선론 즉 우리의 준비가 '미진'하니 외교와 실력
양성을 통한 침략 저지를 표명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명분론에 입각한 주전파와, 오랑캐라 할지라도 '청'의 '국력'을
'현실'로 '인정'하여 화의를 모색해보자는 주화파로 나누어졌던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主和派는 '전술 차원'의 '화목'을 강조하는 것이었지
친청파는 아니었습니다.

주화파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목적과
당파적 정략에 의해서 나라의 외교가 결정되었다는 점입니다.

하기야 '인조 정권' '자체'가 '중립외교'를 표방하던 '광해왕'을
'타도'하고 세운 정권이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현실'보다는 그저 '자파'의 '이념'에만 '우선'하여
무조건적인 항전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시대의 '분위기'는 냉정하게 실리외교를 말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해서 주화파가 내세운 논리는 '대의'에는 '찬성'하나 아직 우리의
힘이 약하니 우선 나라를 외교로서 보전하고 충분한 힘을 기른 후에
저들과 맞서자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척화파가 지키고자 했던 대상이 백성이냐
아니면 명 왕조냐 하는 것입니다.

주화파는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설욕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 반면 척화파는 현실문제를 떠나 오랑캐에게 굴복은 아니
된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입니다.

척화파들의 주장을 보면 '민족'의 대의나 자존심 혹은 '백성'의
안위보다는 '철저히' '명 왕조 우선주의'를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외 당시 '공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던 것이지만 '실제로'
사태를 수습한 측은 최 명길 같은 주화파였고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추태'를 '일삼은 축'은 '고위 신료들' '대부분'이 소속된 '척화파'
대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만 강경했지 '실제'에 있어서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책임'을 '방기'하고 「公人(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저버린 고위 신료들에 대한 단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이 더 국가를 위하는 일인가?, 또 무엇이 보다 훌륭한
삶인가?

여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 척화파와 주화파이지만
척화파가 다분히 명분론 그것도 '남'을 위한 것이라면 주화파는 비록
굴욕스러우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다만 당시에 '청'의 '횡포'가 '증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또 당시 지배층들 대다수가 '의도적으로' '명 왕조'에게
충성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척화를 반대하려면 '상당히 기술적인 논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할 것입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 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 명길(崔鳴吉)'은 다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 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최 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 법입니다.

앞에 든 최 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광해왕 때의 강 홍립
장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주화파」를 '무조건' '매국노'처럼 '취급'하는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은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당시 상황으로 척화파는 분명 명 왕조 우선이었던
반면 주화파는 종묘사직이 우선이라고 하여 적어도 자국이 우선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자, 아래와 같이 나오는 주화파의 주된 논리입니다.

'형세'가 '불리'하고 힘이 모자랄 때는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일단
실리를 찾아 위기를 넘긴 다음 실력을 길러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무작정'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은 '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더 심한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나은 대안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주화파의 논리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쉽게 수긍되지 않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과거 친일파들이 주화파의 이
논리를 자기 정당화에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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