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 묵상
문이 얼마나 넓고 좁은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지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녀야 하는 길이란, 그것이 주님의 길인가? 주님께서 가신 길인가? 하는 것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하죠.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 길로 가는 문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큰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데 그 문은 내가 더 커지고 나를 더 앞세워야 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신 좁은 문은 내가 앞서기보다 너를 먼저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너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좁은 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커지고 나 혼자만 잘나고,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그 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죠.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이 말씀처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이 가신 그 길은 손해 보는 길이고 어리석은 길이지만, 우리에게 그 길은 거룩한 길이고, 바다 속 진주처럼 귀하고 소중한 길입니다.
오늘의 묵상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전체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는 앞서 말한 모든 요구, 분노와 보복의 중단, 원수 사랑 등을 하나의 문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 문장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 정신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이미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가르침을 다른 이들을 향한 무한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은 인류의 여러 전통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윤리적 경구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사이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섭니다.
이 말은 ‘다른 이의 자리에 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지요. 사실 서로를 향한 윤리는 언제나 관점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황금률은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자리를 떠나, 다른 이의 상처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가 보라고 재촉합니다. 그 이동이야말로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핵심이자 실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황금률이 말하는 바는 다른 이를 나와 같다고 단순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인정하며, 그 다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이 규범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 때로는 행복과 기쁨 앞에 멈추어 서서 그의 삶에 머물러 보는 열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인간적 격언이라기보다, 다른 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초월의 자리입니다. 그 초월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꼭 함께하실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