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문화횡단 작업
호미바바의 저서 『문화의 소재』(The Location of Culture)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이접적 발화”(disjunctive enunciation)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일반화한 것이다. 바바는 그 개념을 가지고 근대성 담론들이 식민주의 역사에 의해 시달림을 받고 차단당하는 방식들을 설명하는 “제3의 공간”, “포스트식민성”, “시차”와 같은 자신의 핵심적 비평 개념들을 만들어낸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부인(否認)개념, 철학-언어학적으로는 차연(差延)개념에 기반을 둔 “이접적 발화”는 또한 좀더 보편적이며 구성적인 성격을 지닌 출몰학(hauntology)을 시사한다. 그러한 일반화의 문제점은 식민주의 현재적 경험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접적 발화”개념은 전략적으로 가동하면 식민지 권력의 권위를 -실제 어떤 종류의 권위라도-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뒤흔들어 버린다. 또 한편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그것은 식민주의의 역사적 거울들을 깨뜨려버린다.(p315)
문화횡단(transculturation)과 번역이라는 개념들이 최근 메트로폴리스 문화연구의 주요 개념이 되었다. 문화연구가 중첩된 자본-문화 구성체들을 비판적으로 추적함에 따라 얻게 된 초국화(transnationalization)의 흔적들이다. 문화횡단이라는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나온 것이지만 첫째, 그것과 유사하지만 이제는 이 분야에서 헤게모니(우두머리의 자리에서 전체를 이끌거나 주동할 수 있는 권력. ‘주도권’으로 순화)를 갖게 된 “혼종성”에 의해서, 둘째, 최근의 하위주체 관점들의 강력한 표명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개념적으로 뒷전에 밀려났다. 이 글이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면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적어도 고전적인 네스토르 가르시아 캉클리니와 호미 바바 류의 혼종성보다 문화횡단을 선호하는 것은 “문화횡단”이 궁극적인 전복 가능성의 관점에서 “발전”으로서의 자본을 보는 안목-비록 문제적이고 종속적인 것이지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혼종성”은 그러한 고찰에 반대하며 부상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하위주체론의 관점은 개발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공유하고 있지만-내 견해로는 하위주체론은 “자본의 시간”으로 간주되는 전체 “발전”장치에 대한 비판이다-민족-인민주의적이며 동시에 문화 엘리트주의적 공모관계들-문화횡단 개념들이 자신이 비판하는 과정들과 공유할 수도 있는-을 부각시켜 왔다.
번역은 물론 명확하게 위치지을 수는 없지만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과 비판 인류학에 의해 특히 활성화된 어떤 초국적 문화연구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전형적으로 확립된 낭만주의의 미학적 윤리적 관심사를 다시 명확하게 표현하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로렌스 베누티아 제임스 클리포드의 작업이 중요하다. 사실 클리포드는 개념적 등가성의 동일성 논리를 경계하면서 문화들을 통과하고 가로지르는(“여행하기”) 사유 모델로서의 번역 행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피터 오스본이 이번 『흔적』 창간호에서 주장하듯, 클리포드의 “번역 용어들”이라는 개념은 문화횡단과 번역의 실제 과정들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타자의 타자성 자체를 전제한다.
그래서 아래의 논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나는 그 개념의 역사적 내용을 전경화하는 비판적 재정비 노력의 일환으로, 제도화를 통해 그것을 비판적으로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급진적-역사주의적-비평을 통해 그것을 역사책에 국한시켜 버리는 최근의 경향들을 거슬러 가며 문화횡단을 읽는다. 둘째, 나는 바바가 그의 저작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그에 의해 환기된 식민권력의(“이접”을 통한) 명백한 “패배”의 역사적 사례를 만들고 싶다. 그와 같은 패배는 문화횡단의 번역 작업에서 나온다.
오늘날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에 너무나 중요한 18세기 제국주의 시기 유럽 부르주아 또는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선행하지만 매우 중요한 절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번역 행위를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접은 번역에서 식민지적 등가성의 논리를 깨뜨림으로써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는 정치-문화적인 결연의 조건을 창출하면서 연접(conjunction)과 식민지 권력을 강화한다. 이 시각에서 보면 문화횡단은 이접과 연접의 변증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p316~318)
문화횡단 작업
문화횡단 개념은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매리 루이스 프랫의 저서『제국의 눈―여행기와 문화횡단』을 경유해서 영어권 문화이론 내로 들어왔다. 그녀는 “문화횡단”은 “종속적 주변적 집단이 지배적 또는 메트로폴리스 문화에 의해 그들에게 전해진 재료들을 선별해서 그로부터 뭔가 창안해내는 접촉지역의 현상이다”고 한다. 이 텍스트에서 중시되는 재료들은 재현들과 언어들, 예컨대 피진, 크레올 같은 경계지역 언어들이다. 그와 같은 상호 변형 및 교류지역들과 경계들은 분명 번역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지점들이기도 하다(실제 우리는 아래에서 그 중 하나를 다룰 것이다). 그러나 문화횡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재현들이나 언오로, 심지어 번역으로도 환원하고 싶지 않으며, 아래에서 보겠지만, 그것의 일방적 상향적 성격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에서의 언어와 재현 문제를 일련의 실천들 및 사회적 관계들의 일부로서 꼼꼼히 살펴보고자 할 따름이다.
문화횡단 개념은 쿠바의 인류학자 페르난도 오르티즈에 의해 담배와 설탕 생상이 쿠바에 끼치는 사회적 문화적 영향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이 개념을『쿠바식 대위법―담배와 설탕』에서 사용하였다. 1940년에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1947년 브로니슬로프 말리노프스키가 쓴 서문과 함께 영어로 번역되었다. 오리티즈는 “담배와 설탕은 쿠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상징들이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쿠바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설탕의 생산은 제국주의적 현상, 즉 농장 노예제도가 이 섬을 관통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반면에 담배는 원래 토착적이고 지역적이며, “소규모 자작농을 형성한”것이었다. 오르티즈에 따르면 각자는 “언제나 대조적으로!” 특정 작물과 그 특징들을 지닌 채 “토지, 기계, 노동, 화폐”의 특수한 결합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이것은 쿠바의 문화횡단 과정과 관련된 작업―노동의 형태, 사회적 관계, 잉여의 전유―의 일종이다. 그러나 두 작물의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차이들은 그것들이 대량산업 생상체제―담배 생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대중적 사치품으로 부상한 것이다―와 금융 자본에 종속됨에 따라서 차츰 사라졌다. 심지어 담배도(오르티즈가 유감스러워하듯 설탕처럼) 외국의 통제 하에 놓인다. 따라서 여기서 문화횡단 개념은 국제 경제 내의 종속에 대한 더 첨예한 인식과 함께, 하지만 또한 근대성 비판의 형태와 민족/국민적 상실이라는 쓰라린 의식 속에서 회고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다시 문화횡단 속에 이루어진 다른 종류의 작업, 그것의 상징적 작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오르티즈가 말한 것처럼 담배와 설탕이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각각은 “자신의 완벽한 유용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깨지지 않은 연속성을 제공”한다. 여기서 양자에 공통된 문화적 중요성이 나온다. 하지만 각 작물은 피부색(즉 인종적)과 젠더로 코드화 된다. “만일 담배가 남성(입술에서 곧추 서 있는)이라면, 설탕은 여성이다.”(p 319~320)
다음 인용은 문화횡단 개념에 대한 오르티즈의 정의와 정당화로서 아메리카 대륙의 나머지 지역에서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문화횡단이라는 말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들을 더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영어로 문화변용(acculturation)이 실제로 함축하듯 단순히 다른 문화를 습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과정이 반드시 탈문화화(deculturation)로 정의할 수 있는 이전 문화의 상실과 근절을 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것은 신문화화(neoculturation)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들이 그 결과 생긴다는 생각도 담고 있다…. 이러한 사회학적 명명법의 문제들은 특히 쿠바의 경우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보다 고양된 이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경시할 수가 없다. 다른 어떤 아메리카 국가들의 역사보다 쿠바의 역사는 모두 과도기에 있는 인간집단들의 격동적이고 복잡하고 중단되지 않는 과정이다. 문화 횡단 개념은 쿠바 역사의, 그리고 유사한 이류로 아메리카 일반의 이해에 근본적이고 필수 불가결하다.
이는 사회들과 문화들은 스페인 식민주의와 미국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상실과 개혁을 모두 수반하며 이행 중에 있다는 말이다. 오르티즈의 생각이 당시 인류학에서 문화 변화를 사고하기 위해 채택한 지배적인 유럽 중심적“문화변용”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인 라틴 아메리카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도 명백하다. 그리고 사실 여기서 프랫의 “접촉지역”을 식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오르티즈의 글에서 그 지역의 동학을 사고하기 위해 사용된 모델들은 언어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생물학적이고 민족적인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위에서 인용한 문단의 나머지 부분이다.
결국 말리노프스키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듯 문화들의 통합의 결과는 개인들간의 재생산 과정의 결과와 유사하다. 즉 후손은 늘 양친의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지만 그 두사람과 항상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주제를 길게 다룰때가 아니다. 그것은 인디언, 백인, 흑인, 몽고 인종의 문화횡단이 쿠바에 미친 영향을 다루는 진행 중인 다른 작업에서 고려할 것이다.(p 321~322)
첫째 세자르 룸브르소의 영향을 받아 쿠바의 인종과 범죄라는 주제를 다룬 오르티즈의 초기 인류학 작업들―예컨대 1960년에 출간된 『검은 주술치료사』(The Black Witchdoctors)―이 있다. 여기서 고도로 구체화되고 인종화된 문화발전 도식이 그의 분석에 핵심이다. 1940년에 이르러 그의 인종주의적 시각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특히 가치평가와 관련된 부분은 변화되었지만, 그의 독해의 역학―즉 자연적 특성들이라는 것에 대한 과도한 상징화―은 식물학으로 바뀌었을 뿐 비슷하게 남아있다. 둘째 오르티즈가 쿠바인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담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종화된 범죄적 신체들은 작물들의 사회문화적 삶으로 대치한 배경에는 쿠바 섬에서 진행된 인종차별주의의 단편적 제도화에 맞선 1908년의 유색인 독립단의 출현과, 지금 입수 가능한 연구에 따르면 대략 3천명의 흑인들이 살해된 1912년에 있었던 짧은 “인종”전쟁 ― “작은 전쟁”이라고 알려진―의 원인이 된 쿠바의 인종 문제와 관련된 위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문화횡단에 관한 오르티즈의 성찰에 정치성을 부여해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르티즈의 상징적 치환(“인종”)은 인종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 읽으면 쿠바식 대위법으로 나타난 문화횡단의 문화적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언급할 필요도 없이, 말리노프스키는 오르티즈의 용어를 번역도 하고 그것에 대해 분명히 큰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택하지 않았다. 주류 인류학에서의 문화변용이라는 진화론적 패러다임에 어떤 변화도 없어야 하며, 따라서 동시대성의 부인에 따라 걱정거리나, 이론 노동의 국제적 분할에 있어서의 균열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보았듯 이 문화횡단 역시 그것에 대체하려는 인종주의, 그것이 여전히 몰래 간직한 발전주의, 그리고 그것이 채택하는 민족적 인민주의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비판적으로 재정비할 가치가 별로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컨대 “혼종성”이란 개념은 좀더 명확하게 그러하지만, 영국의 문화연구와 함께 나타난 비판적인 문화 개념 역시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비평은 정확히 자기성찰성 형태로서의 개념들에 들어 있는 역사적 경험들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그 모든 개념들이 쓰이는 용도에 대한 실질적 요구―이론의 정치―를 한하다. 문화횡단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특히 소설가인자 인류학자인 호세 마리아 아르구에다스의 작업 속에서 쓰였다. 그것은 197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주의들이 근대화가 도시에서 농민과 인디언이 사는 오지로 번짐에 따라 근대화의 대도시 중심적 경험을 문화적으로 반영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게 되면서 이 지역주의들의 관점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의 좌표들을 재정리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 비평가 안젤 라마에 의해서 다시 발견되고 가공되었다. 문화횡단 개념이 자신이 성찰하기 위해 출현한 “인종”은 문화적 분석의 차원으로서의 폐기되었다. 반면 문화 형태에 대한 관심은, 특히 케추하어(Quechua)와 스페인어를 이중모국어로 쓴 인류학자인 아르구에다스의 경우처럼 소설가들이 대중문화의 측면들을 “선별하고”(라마의 표현) 재사용하는 방식은 두드러져 보인다. 이“횡단문화적(transcultural) 아방가르드”는, 환상적 리얼리즘과 연관된 이국주의와 인식상의 하위주체화를 배제한 채 농민과 인디언들의 이야기방식, 그들의 매체(시각과 음향 영역), 그리고 (단순한 내용 이상의) 창작원리로서의 우주론을 통합함으로써 소설을 실험하고 변형시켰다. 문화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프랫이 “접촉지역”―역사적으로는 선교사와 인류학자들의 장이기도 한―이라 부르는 곳에 서 있는 이들 문화횡단적 작가들은 라마의 설명 안에서는 자신들이 그래도 의존하는 메트로폴리스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근대화와 발전 형태에 대한 문화적 근거 다시 살펴보기, 지양, 그리고 전복 등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러한 시골중심적 이해―위에서 인용한 프랫의 공식이 다시 펼치는―의 핵심적 비판은 위반보다는 헤게모니의 팽창과 결합이라는 문화정치를 촉진하는 인민주의이다. 사실라마가 주목한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라마 자신에 비해 그들이 관련 맺고 있는, 권력의 모순과 관련들을 더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라마의 문화횡단 개념 사용에 있는 이 명백한 긴장―한편으로 발전주의의 역학과 다른 한편으로 종속이론에 영향 받은 민족인민주의적 비판 사이의 ―이 양자를 잘못 혼동하여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긴장은 문화횡단 개념을 새로운 맥락들에서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도록 개방하고 동시에 그 개념이 역사적으로 지니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문화라는 모순적 작업의 의미를 높일 수 있는 잠재적 성찰성의 계기로서 이론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p323~325)
번역과 변형/교화
위에서는 나는 첫째로는 오르티즈와 관련된 문화횡단 개념의 주요한 역사적 내용을 환기시키고자 했고, 두 번째로는 말리노프스키와 프랫에 의한 영어권에서의 사용(비사용을 포함해서)도 암시하면서 그 개념이 라마에 의해 나중에 발전됨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국제적 정치경제 내에서의 노동과정, 다른 한편으로는“발전”과 관련된 문화라는 개념에 있어서의 치환들과 연관이 있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문화횡단의 작업”이라고 칭하는 실천들이다.(p325)
연대기로서 알려진 식민지 문학형태는 사실 식민화의 특정 행위들을 서술하는―그리고 설명하는―법률 문서나 국가(왕)에게 쓴 편지였다. 위의 정의가 나온 텍스트는 신부들에게 무장을 허용해 달라는 의견과 함께 예수회 리덕션의 역사를 기술한다. 리덕션들은 식민지 전초기지 역할을 하며 신세계에서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칼 제국 사이의 식민지 국경들 위에 건설 되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풍부하게 알려주듯이 예수회원들은 식민화의 지속적인 과정에 의해 구조화된 “접촉지역”에서 인디언들의 개종교화 사명을 수행했다. 그라나 여기에는 몇몇 구아라니인들이나 다른 인디언 집단의 저항, 식민지 국경 너머로 팔려나갈 인디언들을 포획하는 노예상 무리들의 습격, 그리고 현지 장원주인의 농장이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게 될 인디언들의 신체에 대한 경쟁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예수회들은 육체와 영혼 모두에 관심이 있었다. 지역의 주요 산물은 오르티즈의 쿠바처럼 담배는 아니었으나 설탕, 포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지장의 찻잎인 예르바 마테(yerba mate) 혹은 파라과이 차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서쪽의 포토시 광산으로부터 남부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의 식민지 시장에서 거래 되었다. 예수회 개척자들은 이러한 파라과이 차 생산과 수출 부분의 중요한 일부였고, 인디언 노동력을 얻으려는 경쟁은 격렬했다. 정말 문화횡단 이었던 것이다.
노동과 종교는 예수회 리덕션에서의 삶의 중심적 좌표였다. 위의 인용문이 시사하듯 의상 코드와는 별로로, “교화당한(reduced)” 인디언들은 삶의 방식의 극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주거의 구조와 가족 형태는 철저히 변형되었으며 춤과 같은 공동체의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알베르토 아르마니의 1972년도 작품『신의 도시와 태양의 도시』(The City of God and the City of the Sun)의 한 구절이 있다. 이 구적은 작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몬토야가 언급한 외견상의 사회화라는 것은 계획적인 문화적 “영적”개인화 형태들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p326~327)
스페인어 알파벳 철자와 그것이 초코드화하는 구아라니 음성의 관계는 멕시코 피라미드 꼭대기에 지어진 그 유명한 식민지 교회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략은 미리 주어진 제의 형태들을 다시 사용하면서 그것들을 새로운 의미작용의 회로 속으로 전유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과정에 대해 기적화(miracu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와 같은 전유는 초코드화된 것이 사실은 강요된 것의 효과임, 다시 말해 구아라니 음경(soundscape)은 스페인어 알파벳 철자의 효과임을 시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p328)
이런 점에서 초코드화는 구아라니의 음향계를 통합하고, 종속시키고, 조합하며, 또한 그것을 특히 교리서를 경유하여 예수회 교육의 기표들과 연결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로는 “삼각형은 피라미드의 기초가 되었고, 세 변들은 음성(구아라니의 음성), 문자(알파벳 철자), 시각(책)이 전 제국주의 탁월한 합일성을 향해 수렵되도록 했다.” 알파벳 문자 자체는 라틴어와 연계되어 있어서 신체와 음성을 길들이는 당대의 조직적이고 문명적 가치기준으로 여겨졌으며, 스페인과 식민지 양쪽에서 동원되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은 구아라니 언어를 표준화했으며, 다른 한편 인쇄 기술이 그것을 재생산했다. 주로 언어를 배우는 성직자들이 읽던 문법책과 달리 교리서들은 “교화당한” 구아라니인들 사이에 더 널리 유통되었다. 교리서는 큰 소리로 반복 학습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이제 문화를 횡단하여 되돌아오며 자신들이 포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국을 지니고 있었다.
야콥슨의 언어간 번역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오키 사카이의 비판은 야콥슨이 번역행위의 관계와 실천과,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단일어와 이중어의 사전 및 문법서의 편찬에서만 생산되는 언어의 통일성을 견제하고 있는 한 분명히 맞다. 다양한 지방 언어의 통일성을 견제하고 있는 한 분명히 맞다. 다양한 지방 언어와 방언들로부터 하나의 지배적 형태가 찾아내어져 가공되었으며, 탈식민지 파라과이에서 “공식” 스페인어와의 이중 국어적 관계 속에서 일상생활, 친밀감의 언어로서―뚜렷이“고전적”구아라니어의 형태로―그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출현한 것은(“수프”, “스튜”를 의미하는) 요파라(yopara)로 알려진 세 번째 의 혼합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접촉지역”에서 만들어진 제국주의적 이중언어 대역 사전의 역사-나하우틀어와 스페인어, 퀘추아어와 스페인어, 구아라니어와 스페인어-는 유럽의 민족국가 언어의 구성에 대한 통찰에 중요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이 편찬한 『구아라니 언어의 보고』(A Treasure of the Language)에서 몬토야는 그 언어를 “명망 높은 언어들과 무리 없이 경쟁할 수 있는 우아함”을 지녔다고 칭송한다. 그것은 또한 강력한 언어였다. 구아라니인들 사이에 권력과 기품은 언어의 멋진 사용으로부터 나왔다. 몬토야는 많은 족장들이 “연설에서 유창한 화술을 통해 지위가 올라갔다(그들이 그들의 언어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언어는 칭송과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물론 그 언어의 변형을 위한 훌륭한 이유들이기도 하다.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이 신(Dios)에 해당하는 단어까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p330)
몬토야 신부의 말은 바바라면 양가성의 이집적 생산이라고 부를 것 같은 것, 즉 발화되는 바로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식민지 기독교 권위의 기호들을 보여준다. 이 속에 몇 가지 진실이 있다. 그러나 번역행위라는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문화횡단 작업-위에서 지적한 대로 파라과이 차 생산(경제)과 영혼의 개종(문화)에 연결되어 있는-은 약간 더 복잡했다. 왜냐하면 이접성 자체, 즉 강요된 등가성(투파=디오스〔하느님〕) 내의 번역상의 비등가성이 식민권력이 실제로 강화되는 주요 지점(정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표 “Tupa"는 우주론들-사실 분열의 계기들을 조장할 뿐 아니라 비동일성 안에서 존재와 심지어는 동일화의 계기들도 조장하는-을 연결하는 경첩으로 이해되는 것이 더 낫다. 예수회 전교지역들은 ”변형과 교화“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전초 기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교 당국이 군대와 군수품을 잘 간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교화당한” 많은 인디언들은 가공할 군인들이 되었다. 알베르토 아르마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구아라니 무장 세력들은 공식 지시 때문만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은 포르투칼인들과 인디언 부족들에 맞선 실제 군사 작전들에 참여를 하기 위해서라도 스페인 당국의 부름을 받았다. 1644년과 1766년 사이에 구아라니인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따라 약 70회의 군사 개입에 참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1722년에서 1735년 사이 호세 안테쿠에라와 페르난도 몸폭스가 이끈 파라과이 크레올들에 의한 자치주의 혁명의 진압이 들어있다( 이때 만이천명 이상의 구아라니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문화횡단의 관점에서 보면 질문은 언제나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었을까?
최근 “문화횡단”이라는 개념이 메트로폴리스 문화연구 어휘의 일부가 되었다. 크라니어스커스는 쿠바의 인류학자 페르난도 오르티즈가 처음 사용한 이후 메리 루이스 프랫이 최근 다시 사용하기까지의 “문화횡단” 개념을 추적한다. 그는 이 개념을 써서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지역 언어들과 방언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의 지배적 형태가 선택되고 가공되어 식민지 합병을 위한 언어가 되었는지 분석한다. 그는 중첩되는 자본-문화 구성체들을 은폐하고 초국화(超國化)를 이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며 그 중요성을 증명해 보인다.(p33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