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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문화연구

「상하이영화와 상하이인의 정체성」올드 상하이영화의 영상서사 미학적 정체성 요약

작성자수산나|작성시간11.04.18|조회수206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상하이영화와상하이인의정체성요약2.hwp

11113201 장수산나

<상하이영화와 상하이인의 정체성>

 

올드 상하이영화의 영상서사 미학적 정체성

 

1. 뒤섞인 역사 문화의 시공간

  중국 동남부 해안의 조그만 어촌이었던 상하이는 당대(唐代)에 교역기지였고, 원대(元代) 지원(至元) 29년(1292)에 진(鎭)에서 현(縣)으로 승격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갔다. 이 시기부터 수도작(手稻作)을 시작함으로써 식량의 소출이 늘고, 송말(宋末)에 목화씨를 들여와서 명대(明代) 만력년간(萬歷年間)(1578~1619)에 면화는 이미 상하이 지역의 주요 농작물이 되었다.(p.184)

  나아가 19세기 초에 상하이 일대의 면직물은 멀리 구미 각국으로 수출되었다. 세계사의 변화에 둔감했던 청(淸)의 봉건왕조는 여전히 ‘수농물공(守農勿工)’ 정책으로 상품 경제를 억압했지만 상하이 지역의 상업 농업과 면방직업의 자본주의적 발전 추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p.184)

  상하이의 역사 문화적 시공간이 다문화로 착종(錯綜)되어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세계무대에서 주목을 받았던 시점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으로, 1842년 전쟁에 패한 청 왕조는 불평등 조약(南京條約)에 동의한다. 마침내 1843년 11월 17일 개항이 선포되고 이로써 상하이에서 공식적으로 외국인의 거주(居住)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租界, concession)는 역사 문화 전변(轉變)의 적극적인 공간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p.185)

  ‘나라 안의 나라(國中之國)’, 즉 조계는 자국의 영토(territory)이면서 이국(異國)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이다. 조계의 도시 건설은 도로와 교량 건설이 그 추이를 선도하면서 발전해 갔다.(p.185)

  당시 외국 교민들은 상하이를 ‘서양 생활 및 과학 기술과 동등한 수준’의 지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1930~40년대에 유럽의 대도시를 개조하면서 뒤따랐던 부정적 사회 현상이 상하이에서도 속출하고 있었다. 동시에 청조(淸朝) 당국의 관할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은 외국인들의 쾌적한 생활을 동경하면서 서양 사람에 대한 편견을 줄여갔고 이질(異質) 문명 간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갔다. 이런 정황에서 ‘올드 상하이’ 엘리트들의 현대화 및 민족중흥에 대한 중첩된 갈망은 개량운동과 1911년 신해혁명으로 분출되었다.(p.185~186)

  자국의 영토 안에 이국의 교민이 거주하고 그런 시공간에서 민족전쟁을 치르고, 다시 공산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던 공간 환경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하이는 혼종다양(多樣混種)한 역사, 정치, 민족, 문화적 요소가 뒤섞여서 풍요로운 근대 도시 문화를 꽃 피운다.(p.187)

 

2. 조계·해파·도시

  1920년대 상하이 조계는 32.4 평방킬로미터로서 중국에서 가장 크고 정치적으로도 몹시 중요한 지역이었다. 서유럽 열강의 조계가 건설되면서 전통적으로 이민(移民) 도시이던 상하이는 ‘양화잡거(華洋雜居)’, ‘오방동처(五方同處)’하는 근대 도시로 변모한다. 조계 문화가 서양 문화의 적극적 표현의 일부라면, 동서(東西), 고금(古今), 아속(雅俗)의 혼종을 특징으로 한 상하이의 해파(海派) 문화는 1930년대에 이르러 상하이 지역의 대중문화를 선도하여 갔다.(p.188)

  조계, 이 공간은 약탈과 식민 통치의 기지였기에 선각한 중국인의 역사 문화적 정서로는 굴욕의 땅이었지만, 근대 서방의 물질문명을 필터링 없이 면세로 받아들이고, 근대 도시 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공받을 수 있었던 기회의 땅이기도 하였다.(p.188)

  해파는 중국 전통 문화 옹호자들의 견책을 늘 받아왔으며, 유가(儒家) 문화 엘리트들은 줄곧 상업을 도덕적 타락과 저속한 문화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해파 문화는 도시 거주민의 일상생활에 뿌리내렸으며 순전히 중국적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서양적이지도 않았지만, 외래(外來)한 다원문화(多元文化)를 수용하여 재탄생시킨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적 함의를 담고 있다. 이 문화 공간에서 도시민의 소일거리·오락거리로 창작된 문학 작품은 ‘올드 상하이’ 영화에 주요한 창작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p.191)

  중국 도시 문학의 문을 연 작가로 꼽히는 무스잉(穆時英)은 『상하이 폭스트롯上海的狐步無』에서 ‘상하이는 지옥 위에 만들어진 천당’이라고 적고 있다. 이 같은 기형적 근대가 이식되었던 도시로서 상하이는 이질적 공간(천당/지옥)이 병치되고 전쟁과 시한부 평화가 공존하는 시공간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반(半)식민지의 산물인 조계 지역의 문화는 상하이의 도시 문화를 선도해갔으며, 중서(中西)·고금·아속이 혼재하여 있는 이 역사·문화적 시공간에는 그로테스크한 문화 지형이 그려지고 있었다.(p.192)

  이 밖에도 『중국회화사中國繪畵史』를 보면 동치광서(同治光緖, 1862~1908) 년간에 상하이에서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던 ‘해상화파(海上畵派)’의 간칭을 ‘해파’의 어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p.192)

  만청(晩淸) 이후부터 ‘올드 상하이’에 관한 각종 텍스트인 소설, 산문, 영화, 역사 기록 등에는 강렬하면서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그 공간에 대한 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여러 텍스트에서 부단히 중복된 담론에 의해 재단되고 복제된 ‘올드 상하이’는 조계가 중심이 된 특수한 타자(Other) 공간으로 나타난다.(p.192~193)

 

3. 영상 서사 기획과 공간 알레고리

  2005년 중국영화 100년을 맞아 선정한 중국영화창작사 ‘백년 동안의 100편의 명작 영화(百年100部名片)’에서 1930년대 작품은 모두 10편인데, 이 10편의 영화는 죄다 상하이영화이며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社會片)’로 유형이 분류되어 있다. <신녀>, <제자의 범행>, <거리의 천사>, <교차로>는 비교적 직접적·전면적으로 도시 공간으로서 상하이의 문제에 주목한 영화이다. 그래서 상하이의 사회문제는 서사 기획의 구심력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상하이 도시 공간이 재현된 영상은 우화(allegory)적 기표로서 그 몫을 하고 있다.(p.193~194)

  분석 대상인 영화 4편을 주요 서사 내용과 결부된 인물 계층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신녀>와 <거리의 천사>는 도시하층민들이며 <제자의 범행>과 <교차로>는 청년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실업(구직)’의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서사를 매개하는 문제적 사건으로 살인과 자살이 일어난다. 이처럼 이들 영화의 서사 공간에서는 상하이의 문제적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살인’과 ‘사망’이 서사 기획에 따라 스토리의 중심에서 작동하고 있다.(p.194)

  애정 문제는 모두 3편의 영화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 밖에도 이상 네 편의 영화에서 ‘사회문제’는 감독의 서사 기획에 따라 스토리 라인의 중심축으로 작동하고 있다.(p.196)

  이 영화들의 주제와 주요 인물의 계층은 각각 다르지만 쇼트, 미장센 혹은 시퀀스에 동일하게 현상되는 그림이 있다.(p.196)

  주목되는 서사 공간은 인물의 전형(典型) 공간이 아닌 하나의 기표로서 상하이를 상징하고 있다.(p.196)

  건축사학가들은 ‘현실 속의 건축은 윤리적 기능이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p.197)

  이처럼 조계, 해파, 도시 문화가 구현된 물적 형상은 상하이를 작위적(artificial)으로 알레고리화하면서 영화의 영상에 재구성되어 서사적·미학적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p.197)

 

4. 올드 상하이·상하이·영화

  근대 도시로서 상하이는 서양의 타자로서 그 모습이 만들어졌으며, 그 공간에서 고금과 동서는 착종·혼성적 양상으로 그 발전의 궤적을 밟아왔다. 그래서 1930년대의 ‘올드 상하이’는 역사 문화적 상황이 착종·혼성되어 나타난 다양한 영상으로 재현, 재구성되는 도시 공간이었다.(p.197)

  1990년대에 중국, 홍콩, 타이완에서는 ‘올드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제작된다. 이들 영화에서 재구성된 ‘올드 상하이’는 감독들에게 영상 소비 상품으로 타자화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스크린 속의 상하이는 ‘올드 상하이영화’와 다른 재현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감독들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다.(p.198)

  1990년대 영화에서 재현된 ‘올드 상하이’는, 단지 타자화된 소비 상품으로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며 향수하고픈 관객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을 따름이다.(p.199)

  중국에서 첫 영화는 1896년 8월 11일 상하이의 자베이 탕자룽(閘北唐家弄) 개인집 화원인 쉬위안(徐園)의 찻집 유이춘(又一村)에서 상영된 서양그림자극(西洋影戲)이었다. 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 ‘올드 상하이’는 영화의 제작·상영·배급 등 중국영화사에서 기념비적 자취들이 풍성한 역사·문화적 시공간으로 그 자리를 잡아갔다.(p.199)

  현재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명명되는 ‘상하이영화’는 기본적으로 상하이 소재 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영화, 혹은 다른 지역의 영화제작소와 합작하여 만든 영화를 가리키고 있다. ‘상하이영화’라는 개념을 폭넓게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 개념 규정의 논거에 상응하는 보편타당한 기준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30년대’ 혹은 ‘올드 상하이’ 등의 제한적 경계를 분명히 그어야 한다는 말이다.(p.200~201)

  1930년대 ‘올드 상하이영화’는 영화 선진국에서 수입된 영상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조계’, ‘해파’, ‘도시’ 문화가 뒤섞여 그것을 상징하는 문화적 요소의 구현물들이 영상의 안팎으로 반영·재현·재구성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화에는 ‘올드 상하이’의 사회문제를 드라마틱한 서사의 중심에 놓고 스토리를 전개시켜 가면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혼성다종(混性多種)한 상하이적 문화의 물적 구현물(具現物)들을 문제적 쇼트, 미장센, 시퀀스에 배치시켜서 그것이 하나의 기표가 되고, 그러면서 ‘상하이적인 것’을 표상하는 의미 있는 서사로 작동하고 있다. 동시에 이 영상 서사 기표는 단일한 알레고리적 차원을 넘어 ‘올드 상하이영화’만의 그 무엇인 ‘정체성’으로 질적인 변화를 거쳐 그 심미적 작용을 하고 있다.(p.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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