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최고라는 생각.
괴데가 자기는 평생 17시간만 행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는 온통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말년을 정신병으로 죽었다.
자기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의 제자 융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는 말년에는 자신의 사상을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 가출을 감행했고,
아스타포보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도대체 자기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들 모두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죽을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는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가장 위대하지도 않다.
식물과 동물과도 하등 다르지 않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는 그런 오만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져 죽은 것이다.
헤밍웨이의 생애를 보자.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2남 4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둘 다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당시 아기들에게 성별 무관하게 여자 옷을 입히는 일이 잦긴 했으나,
어머니의 이러한 강요는 훗날 헤밍웨이에게 큰 영향을 남기게 된다.
이 일 때문인지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아들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권총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어니스트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하고 조용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어니스트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아들과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어니스트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죽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라는 식으로 가볍게 무시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려 미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권투 선수 시절에 얻은 눈 부상과 어머니에게서 얻은 선천적인 시력 낮음으로 인해 미 육군, 해병, 해군
모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십자사 소속의 구급차 운전사 모집공고가 뜨자
바로 신청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했었다.
1918년 5월부터 운전사로 일하는 중 7월 8일에 두 다리가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일시적 불구가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받던 도중,전쟁이 끝났고 다리 부상도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겪은 걸 기반으로, 자전적 소설인 논픽션과 허구를 약간 섞은 무기여 잘 있거라 책을 집필했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 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수박 겉 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다.
이때의 경험을 기반으로, 헤밍웨이는 1926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 대전의 참전 용사였던 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오류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워낙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스트 성향 지식인, 문화인들이 주목했던 사건이니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같은 실재로 참전하여 전장에서 싸웠던 다른 네임드 문필가들에 일방적으로
비교당한 면도 있다.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빠"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참고로 파리 해방 이후 파리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J. D. 샐린저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4번째 아내이자 당시 특파원으로 런던에 있던 메리 웰시와 만나서 1946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하다가
결국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미쳐버리고 만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맘에 들지 않아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절규를 터뜨렸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은 피할 수 없는 자살의 한 사례로 종종 소개되곤 한다.
그를 포함해서 그의 가족 중 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형, 누나, 손녀, 본인) 또한 아들 중 한 명은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생하였고
여러 차례 전기경련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하였고 우울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입원은 1961년 메이요 클리닉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망상과 인지 저하,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신체적 노화,
폭음으로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었다.
7주 동안 입원하며 항우울제 치료, 전기경련치료, 정신치료를 받았고 1961년 6월 26일 퇴원하였다.
퇴원 당시 그는 치료진에게
"선생님과 저는 제가 어느 날 저한테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퇴원 후 6일 뒤 1961년 7월 2일, 헤밍웨이는 산탄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헤밍웨이는 자살의 요소인 여러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전성, 정신 질환, 약물 오남용, 자살 사고, 소아기 외상 등이 위험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의 여동생 어설라와 남동생 레스터 역시 그의 사후에 차례대로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한마디로 그가 자살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인간에 대한 오만이다.
자기가 이 지구에 태어남을 감사하지 못함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생각때문이다.
결국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는
사실 '누구를 위해 조종이 울리나'인데
자기의 죽음에 대해 조종이다.
한번 쯤 들에 나가 잡풀들을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바다에 나가 바다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는 결코 자살하지 않았을리라.
바다와 노인.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모두 허구다.
만약 그이 논리라면
이 지구상에 그 어떤 것도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
모두 자살해야지.
인간만을 위해 조종이 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