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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열 가지 족쇄 중 유신견, 자만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작성자홍로일점설|작성시간24.04.01|조회수170 목록 댓글 2

사견과 자만에 관해서 공부하면서 정리한 글이 있어 올려 봅니다.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갈애 사견 자만 그리고 무명

 

지워 없앰 경(M8)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막 마음에 잡도리하는 비구에게도 이런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런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집니까?”

쭌다여 참으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난다. 그런 것은 자아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어디서 일어나고254) 어디서 잠재해 있고 어디서 움직이더라도255)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256)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257) 자에게 이러한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러한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진다.”

 

254) “이러한 견해들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오온과 관련하여 설하셨다.”(MA.i.182)

 

255) “일어나고(uppajjati), 잠재해 있고(anuseti), 움직인다(samudacarati)는 것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이러한 견해가 이전에 없었는데 지금 생겨나는 것이고, ‘잠재해 있다.’는 것은 반복해서 행하여 굳건해지고 내재해 있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몸의 문과 말의 문을 통하여 표출되는 것(sam-patta)이다.(MA.i.82)

 

256) “‘이것은 내 것이다(etarn mama).’라고 거머쥐면 백팔 번뇌로 분류되는 갈애에 의한 사량분별(tanha-papanca)을 취하게 되고, ‘이것이 나다(eso-hamasmi).’라고 거머쥐면 아홉 가지로 분류되는 자만에 의한 사량 분별(mana-papanca)을 취하게 되고, ‘이것이 나의 자아다(eso me atta).’라고 거머쥐면 62가지 사견으로 분류되는 사견에 의한 사량분별(ditthi-papanca)을 취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rn mama-nesohamasmi na meso atta).’라고 말씀하시면서 갈애 등의 세 가지 사량분별을 내치신다.”(MA.i.183)

 

257) “‘바른 통찰지로 본다(sammappannaya passato).’는 것은 예류도의 통찰지로 귀결되는(pariyosana), 위빳사나 통찰지로 본다는 말이다.”(MA.i.183)

 

1. 사견과 자만은 왜 같이 일어나지 못하나?

2. 탐욕, 사견, 자만: 탐욕,사견.자만은 모두 여덟 가지 탐욕이 함께한 마음에서 작용한다. 그중에서 탐욕은 여덟 가지 모두에서 작용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사견과 자만이 탐욕이 함께 포함되는 이유는 이 둘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담마에 의하면 사견과 자만은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 둘이 동시에 생기지는 못한다. 사견은 대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지 못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고 자만은 자부심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남과 동등하다, 남보다 못하다는 마음의 현상이다. 그런데 사견 사견과 결합된 4가지 마음에서 반드시 발견된다고 하여 자만이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4가지 마음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만은 반드시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4가지 마음에서만 일어나므로 이 넷과 연결지어 분류하는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1285p

 

사견과 자만을 대상()과 자부심()의 차이로 이해한다면 상반된 성질이라 할 수 있고, 그렇게 본다면 이 둘은 동시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류도에서 제거되는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 사견과 결합된 4가지

1.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지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은마음 하나

3.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하나

5. 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지않은 마음 하나

6. 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은마음 하나

7. 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8. 평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자극받은 마음 하나

 

예류도에서는 사견과 결합된 마음 4가지와 의심과 결합된 마음이 영원히 제거된다.

사견은 제거되었지만 예류자와 일래자에게도 사량분별(허황된 생각 空想)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견이 제거된 예류자·일래자·불환자(유학)에게는 사량분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자만이 함께하는 마음으로 사량분별을 일으킨다.

 

사견과 자만을 대상()과 자부심()의 차이로 이해한다면 상반된 성질이라 할 수 있지만, ‘내가 있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비슷하다는 내용이 경전과 주석서에 나온다.

 

바른 견해 경(M9)

 

8.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해로움을 꿰뚫어 알고, 해로움의 뿌리를 꿰뚫어 알고, 유익함을 꿰뚫어 알고, 유익함의 뿌리를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 성향을 제거하고,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 성향296)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296)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ditthi-mana-anusayam(삿된 견해인 자만의 잠재성향)을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이것을 ditthi-sadisam(삿된 견해와 비슷한) mana-anusayam으로 풀이하고 있어서(MA.i.206) 이렇게 옮겼다. 계속해서 주석서는 덧붙이고 있다.

이 자만의 잠재 성향은 내가 있다(asma).’라고 일어난 삿된 견해와 비슷하다(ditthi-sadisa). 그래서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성향(ditthi-mana-anusaya)’이라 한다.”(MA.I.206)

 

 

 

3. 사견과 사량분별

 

관찰 경(S22:47)

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들이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아를 관찰하는 자들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자아로] 관찰하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안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그는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들을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를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알음알이가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알음알이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하여 [사견을 통한] 관찰과 나는 있다.’[사량분별이]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133)

 

133)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사견을 통한] 관찰과(iti ayanceva samanupassana)’라는 것은 이와 같이 견해(ditthi = 邪見)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asmiti cassa avigatam hoti).’는 것은 이러한 관찰이 있을 때 그에게는 나는 있다.’라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이라 불리는(tanha-mana-ditthi-sankhata) 세 가지 사량분별(papanca-ttaya)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SA.ii.269)

여기서 [사견을 통한] 관찰은 개념적으로 형성된 견해이고,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은 자만과 사견을 포함하는 무명의 더 미세한 현현(顯現)을 뜻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케마까 경(S22:89) 전체에서 진행되는 중요한 대화를 참조할 것.

그리고 자아에 대한 견해(유신견)는 예류도에 의해서 제거되지만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은 즉 자만은 아라한도에 의해서 척파된다.

본서 제1얼마나 끊음 경(S1:5) {8}10가지 족쇄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것.

제석문경(D21)

두 번째 질문

2.2 이와 같이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한 뒤 세존께 다른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질투와 인색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질투와 인색은 좋아하고 싫어함이 그 근원이며, 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일어나고, 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생기며, 좋아하고 싫어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있으며,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좋아하고 싫어함은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으며 열의가 없을 때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열의는 무엇이 그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열의가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열의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열의는 일으킨 생각이 그 근원이며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일어나고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생기며 일으킨 생각으로부터 발생하노라. 일으킨 생각이 있을 때 열의가 있으며 일으킨 생각이 없을 때 열의도 없습니다.”

존자시여, 일으킨 생각은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합니까? 무엇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일으킨 생각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그 근원이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458)으로부터 일어나고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으로부터 생기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으며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도 없습니다.”

458)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papanca(사량분별)-sanna(인식)-sankha(헤아림)으로 분석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취하고(matta) 방일한(pamatta) 모습에(akara) 다다른다는 뜻에서 사량분별이다. 이것이 함께한 인식이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다. 헤아림이란 부분이란 뜻이다.”

즉 주석에서는 papancapamatta(방일함)pa다다른다를 의미하는 papana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빠빤짜(papanca, SK, prapanca)는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로서 pra(앞으로)+ panc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빠니니 다뚜빠타에 ‘panc’는 퍼짐의 뜻으로 쓰인다.(paci vistravacane)’라고 나타난다. 아마 (panc)’하고 터지면서 퍼져나가는 것을 나타내는 의성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희론(戱論)이라고 한역되었으며 여러 가지 사량분별이 확장되고 전이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는 불교술어이다. 그래서 사량분별로 옮겼다.

한편 사량분별 없음(nappapanca)’은 열반의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빠빤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갈애, 자만, 사견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한다.(VbhA.508)

 

꿀 덩어리 경(M18)

8. “비구여, 어떤 것을 원인으로 사람에게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가 일어나는데, 그것에 대해 즐거움과 환영과 집착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탐욕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적의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견해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의심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교만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존재[] 탐욕에 대한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무명의 잠재성향들의 끝이요, 그것은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논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의 끝이니 여기서(660) 이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660) “‘여기서(ettha)’란 열두 가지 감각장소[十二處]를 말한다. 왜냐하면 오염원들(kilesa)은 일어날 때에도 열두 가지 감각장소를 의지하여 일어나고, 소멸할 때에도 반드시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서 소멸한다. 이와 같이 반드시 일어난 그곳에서 소멸한다. 이 뜻은 일어남의 진리에 대한 질문(samudaya-sacca-panha, D22 §20)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면서 일어나고, 어디서 소멸하면서 소멸하는가?”라고 말하고 나서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그 갈애가 일어나면서 일어나고, 소멸하면서 소멸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디가 니까야2염처경(D22 §20/ii.308)라는 방법으로 오로지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서 그것의 일어남(uppatti)과 소멸(nirodha)을 설했다. 그와 같이 이런 나쁘고 해로운 법들도 감각장소에서 소멸한다고 알아야 한다.”(MA.ii 75~76)

 

 

4. 범부와 성자의 갈애 사견 자만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

2. “비구들이여, 모든 법들[諸法]의 뿌리에 대한 법문32)을 설하리니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2) 중략

그리고 복주서는 모든 법들의 뿌리(sabba-dhamma-mula)’로 갈애(tanha)와 자만(mana)과 사견(ditthi)들고 있는데(MAT.i.57) 이 셋은 본경 §3의 여러 주해에도 키워드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본경 §3에서 범부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라고 나타난 듯이 무명(avijja)도 뿌리가 된다고 복주서는 밝히고 있다.(Ibid)

본경에서 모든 법들[諸法]을 존재 더미[有身] 즉 오취온을 뜻하고 모든 법들의 뿌리 즉 오취온의 뿌리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과 무명이라는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특히 본경의 §§3~26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생각하다(mannati)’를 주석서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 허황된 생각[空想, mannana]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아래 §313번 주해참조?) 이처럼 세 가지 허황된 생각[空想]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법들 즉 오취온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 된다.

 

범부

3.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땅을 땅이라고 인식한다. 땅을 땅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고, 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46). 그는 땅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46) 이상 땅에 네 가지 허황된 생각[空想, mannana] 의 구문은 본경에 나타나는 나머지 23가지 대상에도 다 적용되어 나타난다. 이 네 가지 허황된 생각은 [자신을] 라 생각한다. [자신을] 에서(in)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로부터(from) 생각한다. ④ Ⅹ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로 정리 된다. 여기서 은 동일시, 는 근본, 은 별개 혹은 파생 는 소유(전유)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범부는 땅과 자신을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고 땅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땅과 자신은 다르거나 자신을 땅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기고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범부는 이렇게 모든 대상에 대해서 허황되고 전도되고 잘못된 생각[空想, mannana]을 가진다고 부처님께서 설파하고 계신다.

 

유학

27.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으로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원하면서 머문다. 그는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알아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75),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땅이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땅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75)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pathavim ma manni를 문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먼저 주석서의 설명을 살펴보자.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pathavim ma manni)’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유학에게는 생각한다(manni).’라고 말해도 안되고, ‘생각하지 않는다.(na manni).’라고 말해도 안된다는 뜻이다(ayam pana manni ca na manni ca na vattabboti).

범부는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하나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한다(mannaati).’라고 하고, 번뇌 다한 자는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모두 다 버렸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다(na mannati).’라고 하지만, 유학은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은 버렸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줄어든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를 범부처럼 생각한다.’라고 해서도 안되고, 번뇌 다한 자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해서도 안된다.(MA.i.41~42)

 

담마 상가니

400. 무엇이 해로운 법들인가722)?

형색을 대상으로 하거나 소리를 대상으로 하거나 냄새를 대상으로 하거나 맛을 대상으로 하거나 감촉을 대상으로 하거나 법을 대상으로 하거나 그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여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에 빠짐과 결합되지 않고 [자극을 받지 않은] 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3. 기쁨이 함께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722) “세 번째 [해로운 마음]에는 여섯 가지 대상들에 대해서 기쁨이 있는 자(somanassita)가 탐욕을 일으킨 뒤에 중생이 있다, 중생이 있다.’라는 등의 방법으로 [이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집착하지는 않지만 [남들의 자극이 없이도] 닭싸움이나 몸싸움이나 권투나 춤이나 공연 등을 보면서 마음에 들고 매혹적인 소리를 듣는 등에 빠져들게 된다.”(DhsA.255)

 

5. 갈애 사견 자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무상한 것 경(S22:15)

3.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92)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

 

92)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m mama, nesohamasmi, na meso atta)’라는 것은 [각각]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뜻한다.”(SA.II.372;SA.v.83)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는 괴로움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들에 대한 견해에서 내 것이라는 생각(mamam-ka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아니고라는 것은 무상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에서 나라는 생각(aham-ka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이런 견해에서 자아를 거머쥠(atta-ggaha)이 없기 때문이다.”

이 셋은 [각각] 갈애와 자만과 사견(tanha-mana-ditthi)으로 거머쥠을 내던지는 것(gaha-patikkhepa)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sammappannaya datthabbam).’는 것은 원인(hetu)과 이유(karana)와 위빳사나와 함께 하는 도의 통찰지(sahavipassanaya maggapanna)로써 봐야 한다는 뜻이다.(AA.ii.380)

 

내 것 = 갈애 = 괴로움

= 자만 = 무상

나의 자아 = 사견 = 무아

 

담마 상가니

 

두번 째 도

361. 무엇이 유익한 법들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악의를 엷게 하는671) 두 번째 경지[二地, 일래과]를 얻기 위하여, 출리로 인도하고 [윤회를] 감소시키는 출세간을 닦아서, 감각적 쾌락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도닦음도 어렵고 초월지도 느린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 때, 그때에 감각접촉이 있고 pe(§§227-2/§1-2) 구경의 지혜의 기능[己知根]이 있고 pe(§§227-2~337-1/§§1-2~57) 산란하지 않음이 있다. pe(§§337-2~360/§§58-145) … ― 이것이 유익한 법들이다.

 

두 번째 도가 [끝났다.]

 

671) 먼저 유념해야 할 점은 앞의 출세간의 첫 번째 경지[初地, pathama-bhumi], 즉 예류도의 정형구에 나타난 사견에 빠진 것들을 버리고는 여기 출세간의 두 번째 경지(二地, dutiya-bhumi), 즉 일래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악의를 엷게 하는(kamaraga-byapadanam tanubhava)’이라는 정형구로 대체가 되고 있다. 예류자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처음의 셋인 유신견과 계금취와 의심(§1006 이하를 참조할 것.)을 버렸는데 이 가운데 첫 번째인 유신견이라는 사견을 제거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고, 일래자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족쇄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악의를 엷게 한 자들이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 도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을 살펴보자.

 

여기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악의를 엷게 하는(kamaraga-byapadanam tanubhava)’이라는 것은 이런 오염원들(kilesa)을 엷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엷어짐(tanubhava)’드물게 일어남(adhiccuppatti)사로잡는 힘이 약함(pariyutthana-mandata)의 두 가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래자(sakadagmi)는 윤회를 따라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 오염원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지 않고 가끔씩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어나더라도 드문드문하게 씨를 뿌린 들판에 있는 싹처럼 드문드문한 형태가 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일어나더라도 윤회를 따라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 파괴하고, 널리 퍼지고, 덮어버리고, 암흑을 만들 듯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도에 의해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아주 약하게 일어난다. 얇은 운모판처럼, 파리의 날개처럼 엷은 형태가 되어 일어난다.”(DhsA.238~239)

 

세번 째 도

362. 무엇이 유익한 법들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악의를 남김없이 제거하는 세 번째 경지[三地, 불환과]를 얻기 위하여, 출리로 인도하고 [윤회를] 감소시키는 출세간을 닦아서, 감각적 쾌락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도닦음도 어렵고 초월지도 느린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 때, 그때에 감각접촉이 있고 pe(§§227-2/§1-2) 구경의 지혜의 기능[己知根]이 있고 pe(§§227-2~337-1/§§1-2~57) 산란하지 않음이 있다. pe(§§337-2~360/§§58-145) … ― 이것이 유익한 법들이다.

 

1220. 여기서 무엇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취착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해서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295)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감각적 쾌락을 즐거워함,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애정,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병, 감각적 쾌락에 빠짐, 감각적 쾌락에 달라붙음 이를 일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취착이라 한다.

295) “‘ 감각적 쾌락에 대해서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yo kamesu kamacchando)’라고 하였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들(kama)은 전적으로 대상으로의 감각적 쾌락들(vatthu-kama)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여기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취착(kamupadana)이어서 불환자에게도 이것은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이라는 대상을 가진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kamaraga)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DhsA.385)

 

주석서는 감각적 쾌락을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쾌락(vatthukama)오염원인 감각적 쾌락(kilesa-kama)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DhsA.62)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에 실린 제 1편의 제1장 제목인 욕계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것

 

 

네번 째 도

363. 무엇이 유익한 법들인가?

색계에 대한 갈망, 무색계에 대한 갈망, 자만, 들뜸, 무명을 남김없이 제거하는675) 네 번째 경지[四地, 아라한과]를 얻기 위하여, 출리로 인도하고[윤회를] 감소시키는 출세간을 닦아서, 감각적 쾌락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도닦음도 어렵고 초월지도 느린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 때, 그때에 감각접촉이 있고 pe(§§227-2/§1-2) 구경의 지혜의 기능[己知根]이 있고 pe(§§227-2~337-1/§§1-2~57) 산란하지 않음이 있다. pe(§§337-2~360/§§58-145) … ― 이것이 유익한 법들이다.

 

675) “네 번째 도(아라한도)에서 색계에 대한 갈망, 무색계에 대한 갈망, 자만, 들뜸, 무명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러한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uddhambhagiya-samyojana)들을 남김없이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색계에 대한 갈망(ruparaga)’은 색계에 대한 욕탐(rupabhave chandaraga)이다. ‘무색계에 대한 갈망(aruparaga)’은 무색계 대한 욕탐이다. ‘자만(mana)’은 아라한도에 의해 살해되는(vajjhaka) 자만이다. 들뜸과 무명도 마찬가지이다.(DhsA.240)

 

한편 청정도론의 복주서인 빠라맛타만주사는 탐욕(lobha)과 욕구(chanda)와 갈망(raga)과 욕탐(chandaraga)을 이렇게 설명한다.

약한 탐욕은 열의라는 뜻(chandanattha)에서 욕구이다. 이보다 더 강한 것이 물들인다 뜻(ranjanattha)에서 갈망이다. 이보다 더 강한 두터운 갈망(bahala-raga)이 욕탐이다.”(Pm.i.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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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계 정혜 | 작성시간 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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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v내맘대로v | 작성시간 24.04.05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에 시간을 두고 검토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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