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보리원 불사 원만성취 발원 100일 기도 (88일째)

작성자아누붓다(香那)|작성시간22.07.27|조회수42 목록 댓글 13

梵網經

범천의 그물, 견해의 그물

Brahmajāla Sutta(D1)

 

  법을 통한 칭송

 

1.28. “비구들이여, 또 다른 법들이 있어서 그것은 심오하고, 보기도 힘들고, 깨닫기도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으며,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이 만약 이러한 법들을 보고나서]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한다면 그제야 그들은 참으로 바르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심오하고, 보기 힘들고, 깨닫기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으며, 여래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었으며, 이것을 본 후에야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하는 자들이 참으로 바르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법들은 어떤 것인가?”

 

  Ι. 18가지 과거를 모색하는 자들

 

1.29.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18가지 이유로 과거를 모색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18가지 이유로 과거를 모색하고, 과거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과거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는가?”

 

  Ι-1. 영속론자들

 

1.30.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영속론자들인데 네 가지 이유로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네 가지 이유로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1.31.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이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宿命通].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수백 생, 수천 생, 수십만 전생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수백 생, 수천 생, 수십만 전생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서 나는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1.32. “비구들이여, 그러면 두 번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이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하나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두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네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다섯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하나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두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네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다섯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서 나는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1.33. “비구들이여, 그러면 세 번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이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스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서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마흔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나는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거기에 걸맞는 마음의 삼매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한다. 즉 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스무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서른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 마흔 개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을 기억한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처럼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해서 나는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안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1.34. “비구들이여, 그러면 네 번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논리가요 해석가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을 수반하며 자신이 스스로 규명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고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1.35. “비구들이여, 그들 사문·바라문들은 이런 네 가지 경우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사문·바라문들이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것은 모두 이 네 가지 방법으로 하거나 혹은 이 넷 중 한 가지 방법으로 한다. 이것 이외에는 없다.”

 

1.36.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취하고 이와 같이 거머쥔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딘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알지만 [갈애와 견해와 자만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평화를 분명하게 안다.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여래는 취착없이 해탈한다.”

 

1.37.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법들이야말로 심오하고, 보기도 힘들고, 깨닫기도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으며, 이것은 여래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이 만약 이러한 법들을 보고나서]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한다면 그제야 그들은 참으로 바르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바나와라가 끝났다.

 

보리원 불사가 아무런 장애 없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역경과 전법의 중심도량이 되기를!

이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모든 중생들이 고통 없이 안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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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양영지 | 작성시간 22.07.28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_()_
  • 작성자메따 | 작성시간 22.07.28 사두 사두 사두
    _()_ _()_ _()_
  • 작성자자나난다 | 작성시간 22.07.29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 _()_ _()_
  • 작성자수마나 (무량심) | 작성시간 22.08.01 사두 사두 사두 ()()()
  • 작성자sumangala | 작성시간 22.08.11 사~두 사~두 사~두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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