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윳따 니까야 제 4권 느낌 쌍윳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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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짜깡가 경 (S36:19)
Pancakaṅga-sutta
2.
그때 빤짜깡가 목수가 우다이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우다이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4.
이렇게 말하자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느낌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평화롭고 수승한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두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6.
세 번째로 빤짜깡가 목수는 우다이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8.
그러나 우다이 존자는 빤짜깡가 목수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빤짜깡가 목수도 우다이 존자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9.
아난다 존자가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우다이 존자와 빤짜깡가 목수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10.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빤짜깡가 목수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빤짜깡가 목수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 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언쟁하면서 입의 칼로 서로를 찌르면서 머물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에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화합하고 정중하며 논쟁하지 않고 물과 우유가 섞인 것 같고 우정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머물 것이다.”
11.
“아난다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들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緣而生)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즐거움을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이라 부른다.”
12.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3.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 2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4.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 3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5.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 4선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움이다.”
16.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아리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음이다.”
17.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라고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음이다.”
18.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이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음이다.”
19.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음이다.”
20.
“아난다여, 그런데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육체적 즐거움이며, 정신적 즐거움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면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에 들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앞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 다른 즐거음이다.”
21.
“그런데 아난다여,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 간에 즐거움이라고 천명하십니다.’**라고”
*눈, 귀, 코, 혀, 몸 (眼耳鼻舌身) 등의 다섯 감각기관을 통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과 여덟 가지 증득 (4선과 4처)을 통해서 생긴 즐거움은 느껴진 즐거움임. 이에 반해 상수멸을 통한 인식과 느낌의 소멸은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임. 상수멸이나 열반이나 아라한과와 같은 행복은 전적인 행복이고, 지극한 행복이며, 열반의 행복이며, 궁극적인 행복이며, 가장 수승한 즐거움임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면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두 즐거움(행복)에 포함하여 말씀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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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경 (S36:6), 간병실 경(S36:7-8),
부처님 법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기원합니다,
빠알리 삼장 역경불사가 원만히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보리원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기를 기원합니다,
두 분 스님께서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보리원 법우들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