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경(It3:14)
Addhā-sutta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시간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 현재의 시간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시간이 있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여기서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중생들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나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되도다.
그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면
표현하는 자를 [더 이상 개념적 존재로] 여기지 않아서
위없이 고요한 경지인 해탈을
마음으로 체득하게 되도다.
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구족하여
고요한 자는 고요한 경지에서 기뻐하나니
지혜의 달인은 명칭을 사용하여 수용하지만
법에 굳게 서서 명칭에 떨어지지 않도다.”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관련 주석과 주해》
* “경의 방법에 의하면 재생연결(paṭisandhi) 이전을 과거(atīto addhā)라 하고 죽음(cuti) 이후를 미래(anāgato addhā)라 하고, 재생연결과 죽음을 포함한 그 중간을 현재(paccuppanno addhā)라 한다. 아비담마의 방법에 의하면 [일어나고, 머물고, 부서지는(uppāda, ṭhiti, bhaṅga) - DAṬ.ⅲ.249; ItA.ⅱ.30] 세 [아]찰나 가운데 이미 부서진 이후의 상태(즉 이미 부서져 버려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 bhaṅgato uddhaṁ)를 과거라 하고, 아직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즉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 uppādato pubbe)를 미래라 하고 [일어나고 머물고 부서지는] 세 [아]찰나를 현재라 한다. 과거 등의 구분은 참으로 법들(dhammā)의 구분이지 시간의 구분은 아니다.”(DA.ⅲ.991)
거의 같은 설명이 『이띠웃따까 주석서』에도 나타나고 있다.(ItA.ⅱ.30~31) 주석서들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과거·현재·미래는 법들에 있는 것이지 시간이라는 어떤 단위가 있어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불교의 시간관이다. 어떤 특정한 법이 지금 작용(kicca)하고 있으면 그것이 현재요, 이미 작용했으면 과거요, 아직 작용하지 않았으면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원인과 조건의 작용(kicca)이 끝난 것을 과거라 하고, 원인의 작용은 끝났지만 아직 조건의 작용이 끝나지 않은 것을 현재라 하며, 두 작용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미래라 한다. 혹은 작용하는 순간을 현재라 하고, 그 이전을 미래라 하며, 그 뒤의 것을 과거라 한다.”(Vis.ⅩⅣ.191)라고 설명한다. 북방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도 제법(諸法)이 작용하는 상태에 따라서 삼세를 구분하는 세우(世友)의 설을 정설로 채택한다.(『아비달마 불교」102) 그러므로 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수한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akkheyya-saññī)’라고 하셨다. 여기서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설명한다(akkhāyati, kathīyati, paññāpīyati)고 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akkheyya)이니 논의의 주제(kathāvatthu)를 말한다. 뜻으로는 물질 등의 오온(rūpādayo pañcakkhandhā)이다. … 이와 같은 논의의 주제가 되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 불리는 무더기 다섯 가지들(오온, khandhapañcakā)에 대해서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신’이라고 ‘인간’이라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하는 등으로 전개되는 인식(pavattasaññā)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akkheyyasaññino)이 있다.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upādānakkhandhā)에 대해서 중생이나 인간 등으로 인식하는 자들(sattapuggalādisaññino)이라는 뜻이다.”(ItA.ⅱ.31~32)
*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머물러 있나니(akkheyyasmiṁ patiṭṭhitā)’라는 것은 갈애와 사견을 움켜쥠(taṇhādiṭṭhiggāha)을 통해서 머물러 있다. 혹은 갈망 등을 통해서(rāgādivasena) 여덟 가지 방법으로(aṭṭhahākārehi)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즉 탐욕에 물든 자(ratta)는 갈망을 통해서 머물러 있고, 분노하는 자(duṭṭha)는 성냄을 통해서, 미혹한 자(mūḷha)는 어리석음을 통해서, 집착[固守]하는 자(parāmaṭṭha)는 견해를 통해서, 완고한 자(thāmagata)는 잠재성향을 통해서, 속박된 자(vinibaddha)는 자만을 통해서, 확고하지 못한 자(aniṭṭhaṅgata)는 의심을 통해서, 흔들리는 자(vikkhepagata)는 들뜸을 통해서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ItA.ⅱ.32, cf.SA.ⅰ.32)
* 그 밖의 주해(‘표현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되도다’, ‘철저하게 알면’, ‘표현하는 자를 [더 이상 개념적 존재로] 여기지 않아서’, ‘명칭을 사용하여 수용하지만’ 등) 생략
청소하고 목욕을 한 다음
반상을 놓고 앉았습니다.
<빠알리 예불 및 니까야 독송 기도집>을 따라
30분간 독송과 명상을 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안합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러한 진실한 말로 두 분 스님께서 항상 청안하시기를!
빠알리 삼장 역경 불사가 원만하게 성취되기를!
보리원 불사가 아무런 장애 없이 원만하게 성취되기를!
이 세상에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사두 사두 사두
자나난다 합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