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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 지나간 일들 - 긴 여정旅程

작성자초동|작성시간26.06.07|조회수11 목록 댓글 0

 

♫ Wild Mountain Thyme - Sarah Calderwood ♫ LYRICS

https://youtu.be/_G9VEvEx1Bc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 모모수게 

 

 

 

  강물은 흘러 대양으로 드나 흔적은 남긴다

  그 고통의 흔적은 새살이 돋으며 덮는다

 

  세월은 흘러가며

  험난했던 굽이치고 부서지고 다 잃을 거 같았던 쏘

  그 자리엔 다시 길이 나고 생명들이 싹을 틔운다

  더 억척스럽고 돈톡 하며 home을 이룬다

  아메리카의 서부 개척사를 보면 대양을 건너온, 돌아갈 곳도 없는

  이민자들 손에 믿음과 구원이라는 희망하나로 그 길고도 험한 서부를 개척했으리

  이제 내 험하게 굽은 손과 내 알토란 같은 손孫들을 보며 삶을 귀추해 볼 나이에 든다

 

  내 길게 실아온 여정旅程
  어느새 머리도 희어졌고 기쁨도 슬픔도 또렸지가 않다
  손주만 보면 올인하며 그저 좋고 허허 응응하며
  바보웃음만 짓는 것이 나 할아비 모습이다

 

 

 

 

  내 글에는 간혹 날개라는 글제로도

  굴레라는 부여로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글들이 많다

  감옥이나 빠삐용 같은 내용으로 더 적극적으로 조명해보기도 한다

  내가 돌이켜 보면 또 그런 고생을 할까 두렵다

  젊을 때의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도 한다지만

  고생이 징그럽고 두렵다기보다는

  그때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창피도 하다

  40여 년이 지난 그때 나를 가까이서 보아 온 사촌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오빠야 삼촌아 고생 많이 했어" 한다

 

  도미할 때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어서

  근 2년여를 지내면서

  네 댓살 먹은 아이로 다시 태어난 거 같고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님께 생활비를 보낼 여지도 없어진 데다가

  응급상황까지 두어 번 겪으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한국에 도로 나가야 할 사람임을 현실감으로 알고는

  그저 한 푼이고 두 푼이고 모아서 한국 나갈 때 갖고 나가려고 더럽게 아꼈다

  이태리집 주방 옆 주부들이 일하다가 잠깐 쉴 수 있는 루블 문짝으로 칸 막은 쉼방에서

  기거하면서

  마침 이 이태리 가족도 이민 1세대였기 때문에

  나를 거의 음식재료 값만 내고 있게 해 준 거다

  조금만 더 참고 있으면 그 주부의 여동생이 IBM 컴퓨터 회사에서 은실을 다루는 기능공인데

  전문적이고 페이도 좋다며

  자기들 이태리인과 한국인의 손재주 skill이 좋다며

  내가 개집이고 차고 문짝을 수리해 주는 걸 보고는 장인급 솜씨라고 극 칭찬했다

 

 

 

  도움을 준 이태리 가족분들

 

 

  내가 처음 도미할 때는 매형이 건축 설계사무소도 하고 아이스링크와 부틱크도 가지고 있어서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 영주권을 급 취득 시켜 도미했지만

  그 사이 누나에게 큰 교통사고가 나서

  작은 가게들은 다 처리했고 누나는 장기 입원 생활을 해야하니

  나는 점점 그 집에서의 생활이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고

  영어는 지금 중학생 수준도 안되는데 홀로서기를 해야 하니

  뉴욕 5th Ave. 호텔에서 야간 점검하는 잡도 가져보고

  뉴욕 외곽지에서 주한 미군이었던 상사와 한국인 부인이 운영하는

  낮부터 새벽 03까지 운영하는 투 데이 라운지에서 뒷정리와 청소일로

  그리고 고급 양로원에서 안정 되게 일하기도 했다

  마을마다 시와 하이스쿨에서 외국인들을 위해서 무료로 영어 공부를 시켜주는 랭귀지 스쿨에서

  이태리 가족을 알게 되었으며

  나에게 침식을 제공해 준 거고 앞으로의 미국 생활에선

  같은 코네티컷 내의 이웃 도시이니 IBM 컴퓨터 회사만큼 좋은 곳이 없다며

  나를 적극 미국에 있게 했다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선 다른 자식이 아무도 없으니

  내가 빨리 시민권을 받아서 어머니를 모셔와야 하는데(누나는 큰 사고로 발언권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영문과 출신이라고 하니 빨리 모셔오면 나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며

  그 자매분들이 형식상 나와 결혼 한 거로 해서 어머니를 빨리 모셔오자고 했다

 

 

  투 데이 라운지에서의 일은

  주한 미군과 결혼하여 함께 들어와서 투데이 라운지라고 하는

  새벽 3~4시까지 영업하는 클럽을 운영했는데

  나는 영어가 서투르니까 낮에는 집안 도랑을 치우고 일찍 취침한 후에 새벽 3~4시면 기상하여 텅 빈 홀을 정비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바닥 청소를 하다 보면 동전들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걸 모아 카운터 위에 놓아두었더니

  오너가 이 일은 네 일이니 이것도 네 것이라며 나를 무척 아껴주었다

  난 내 그 배짱이 또 시키지도 않은 지하실의 깨진 빈병들을 모아둔 드럼통을 혼자 옮기다가 평소에도 안 좋은 허리가 삐끗해서 꼼짝 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그곳서는 캔맥주는 없고 병맥주인데 먹고 난 건 카운터에 있는 홈통으로 버리면 밑에 지하실 드럼통에 떨어지면서 깨지게 되어있다)

  오너 내외는 자기 가게에서 아팠고 보험에 가입 돼있으니 자기 집에서 맘 놓고 있으라고 했지만

  뜨거운 온돌방만 생각나고

  서울에 홀로 계신 어머님께서 고혈압으로 눈으로 코로 코피를 흘리셨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오자마자 미국 경제도 안 좋아져서 누나네 가게도 문을 닫아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누나도 앞으로도 1년을 병상 생활 해야 한다지

  애들은 이미 돌봐 줄 곳을 마련했는데 다가

  어머니께서는 한국에서 혈압으로 코피도 쏟고 눈으로도 피를 흘리셨다니

  미국 오신다고 해도 막막했다

  한국은 내가 있던 직장이 좋은 곳이라서 아직도 많은 도움을 어머니께도 주고 있었지만

  그러다가 집안에 쌓아둔 연탄이 넘어가면서 어머니의 허리를 덮치는 사고가 났다

  불야불 한국에 선보라 간다고 해야 빨리 주미한국대사관에서 비자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나오니

  서류상 결혼만 해주고 미국 들어가서 함께 살던지 이혼하던지 해도 좋다는

  갑부딸들도 중매가 들어오던 미국 미국 하던 시대였지만

 

 

 

  6척이 훨 넘는 이태리집 아들들과 함께  / 나에겐 고생기가 돌던 때

 

 

  내가 성공하면 얼마나 성공하겠다고

  또 어머니께서 내가 미국 시민권자가 된 후에 더 늙으셔서 미국 오시면

  우선 생활이 배로 힘든데 무엇이 행복할까 해졌다

  당시에 최저 임금 시급으로는

  남녀도 사랑만 하면 빨리 동거를 하는 거가 한 사람 몫의 방세와 한 사람의 자동차 할부와(자동차가 꼭 있어야 하는 타운들에서는)

  생활비도 절감할 수 있어서 일찍이 동거하는 남녀 커플들이 많았다

  내가 다시 귀국한다고 할 때

  이태리 가족은 극구 말리면서

  그동안 모은 현찰을 잘 가지고 가라고 내복에 호주머니를 하나 달아 주면서

  또 만나자고 허그해주던 따뜻한 체온이 지금도 잊여지지가 않는다

 

 

 

  결국

  한국서 어머니 편안히 모시고 좋은 가정 꾸리는 것이

  내 달란트 같았고

  한 여자와 가정을 가져 애들 키우며 어머니 편히 모시고

  부부가 한 이부자리에서 사는 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길 같았다

  짧은 기간이지만도 미국서 살아보았기에

  내 와이프 내 홈이 얼마나 귀한 보금지리인지를 절실하고 왔고

  내 재주라곤 그거 하나만 일거 같았다

 

  이젠 그 이태리 자매도 이태리에 사는 친정 오빠의(교회 신부) 고향으로 도로 돌아갔다니

  진즉 한국을 방문하게 초청 못한 아쉬움만 남는다

  세월은 지나고 나면 다 견뎌내고 고생한 것도 별것도 아닌냥 잊어지지만 흔적은 남는다

  상처가 되든 약이 되든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미안한 마음으로 남는다

 

 

 

 

내가 살던 이태리 가정집(그 집주인 남자가 목수여서 직접 지었음)

 

내가  근무했던 코네티컷 데리앙 컨벌레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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