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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두 나라의 이야기: 카인의 제단, 아벨의 제단(창세기 4:1-16)

작성자Rev. Oak|작성시간26.06.19|조회수25 목록 댓글 0

서론: 인생의 모든 전쟁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십자가가 내려졌습니다. 서구 선교사들은 중국 교회가 전멸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뒤 문이 열렸을 때 중국 교회는 가정에서, 지하에서 수배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사탄은 건물을 무너뜨렸지만 성도들의 예배를 무너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진짜 영적 전쟁터는 세상이 아니라 예배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이자,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예배 전쟁(Worship War)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게도 인류 최초의 살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날, 제단의 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단계: 평형 깨뜨리기 (예배를 드리는데 왜 내 삶은 무너질까?)

  오늘 우리는 주일을 맞아 이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묵혀둔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는데, 왜 일주일의 삶으로 돌아가면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두려워하며, 영적 전투에서 매번 처참하게 패배하는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마치 마법이 풀린 것처럼 무력해지는 우리 자신을 보며 괴로워한 적이 없으십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우리의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충격적인 답을 들려줍니다. 성경 최초의 예배자였던 한 청년의 끔찍한 실패를 통해서 말입니다.

 

2단계: 모순 분석하기 (카인도 예배자였다는 당혹스러운 사실)

  우리는 흔히 창세기 4장의 카인을 ‘악한 살인자’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카인은 예배를 무시한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예배자였습니다. 농부였던 그는 자신이 땀 흘려 거둔 땅의 소산을 제물로 가지고 제단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정성을 드렸고,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카인의 제사는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4-5)

  여기서 거룩한 모순이 생깁니다. 카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저도 나름대로 땀 흘려 농사지어 제물을 가져왔는데 왜 제 것은 거부하십니까? 왜 아벨의 양만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십니다!” 이 거절감 때문에 카인의 안색이 변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카인의 예배를 거절하셨을까요? 곡식은 싫어하고 고기만 좋아하시는 편식하는 하나님이신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예배의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3단계: 해결의 단서 찾기 (아벨의 예배가 중요했던 진짜 이유)

  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단서는 본문의 아주 세밀한 묘사에 있습니다. 성경은 카인이 ‘땅의 소산’을 드렸다고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하지만 아벨에 대해서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첫 새끼”(בְּכֹרוֹת, 베코로트)는 첫 열매, 첫 소산을 의미합니다. “기름”(חֶלֶב, 헬레브)은 가장 기름진 부분,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벨은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렸고,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양 떼의 첫 자리도 하나님의 것이고, 내 생명의 가장 좋은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인생의 왕좌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주권의 이양을 예배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배란 남는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첫 시간을 드리는 것이고, 남는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원문을 자세히 보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4-5절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제물보다 사람을 먼저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 아벨을 보셨고, 곡식을 보신 것이 아니라 카인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예배자를 먼저 보십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드렸는가?” “얼마나 봉사했는가?”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 “누가 드렸는가?”를 보십니다. 예배의 핵심은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이 아니라 제단 앞에 서 있는 예배자입니다.

히브리서 11: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히브리서 11:4은 창세기 4장의 카인과 아벨 사건을 해석하는 가장 권위 있는 신약의 주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나은”이라는 표현은 제물의 종류나 양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차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예배자를 먼저 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아벨의 제사(θυσία, 튀시아)를 희생제사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그의 예물(δῶρα, 도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헌물로 표현한다. 이는 아벨의 제사가 단순히 양의 첫 새끼를 드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 그리고 자신을 드리는 예배였음을 보여줍니다. 반면 가인은 제물을 드렸지만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없이 형식적인 종교 행위만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예배 전쟁은 제단 위의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은 사실 창세기 3장의 반복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카인도 똑같이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분노를 붙잡았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의 죄는 창세기 4장에서 살인으로 발전합니다. 죄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되지 않은 죄는 반드시 더 큰 죄를 낳습니다. 예배는 “내 삶의 주도권을 누구에게 양도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카인은 종교 행위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확장하려 했고, 아벨은 제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4단계: 복음 경험하기 (문 앞에 엎드린 죄, 그리고 찾아오신 은혜)

  예배 전쟁에서 패배하여 마음의 왕좌를 빼앗긴 카인의 상태를 하나님은 이렇게 진단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여기서 “엎드리다”는 히브리어 로베츠(רֹבֵץ)는 맹수가 먹이를 덮치기 직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살아 있는 맹수처럼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죄가 들어오고, 죄가 들어오면 결국 관계가 무너지고 인생이 무너집니다. 결국 카인은 이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여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 돌로 쳐 죽이고, 하나님의 임재 앞을 떠나 자기만의 성을 쌓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심판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은혜를 봅니다. 하나님은 분노로 가득 찬 카인을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 찾아오셔서 경고하셨고 살인을 저지른 후에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카인처럼 내가 왕이 되어 내 성을 쌓다가 내 뜻대로 안 되면 분노하며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은 우리를 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다시 덮어주십니다. 아벨이 흘린 억울한 피는 보복을 외쳤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우리의 카인 같은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참된 예배자로 부르시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5단계: 회복된 미래 향하기 (예배 승리를 위한 결단)

  창세기 4장이 비극은 비극은 제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의 실패가 형제관계의 실패를 낳았고, 형제관계의 실패가 살인을 낳았고, 살인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추방을 낳았습니다. 결국 인생의 모든 전쟁은 예배 전쟁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관계가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지면 인생이 무너집니다. 반대로 예배가 살아나면 삶이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문화도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전쟁의 승패는 세상의 문화나 정치, 경제가 아닌 바로 오늘 우리의 ‘예배 제단’에서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카인의 길을 버리고, 아벨처럼 예배에서 승리하기 위해 월요일부터 당장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첫 시간과 가장 좋은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양도하십시오. 아벨은 첫 새끼와 가장 좋은 기름을 드렸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스마트폰을 먼저 켜지 마시고 하루의 첫 5분을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드리십시오. 물질의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리고, 일주일 중 주일의 시간을 가장 먼저 떼어 놓으십시오. “주님, 내 시간과 물질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일상의 루틴이 되게 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카인의 제단은 에덴 동편에서 사라진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성공을 먼저 구하는 순간,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보다 내 감정과 욕망을 더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카인의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문화전쟁의 본질은 세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을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면 아벨의 제단이 세워지고, 내가 왕이 되면 카인의 제단이 세워집니다.

  둘째,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 대신 정렬을 선택하십시오. 삶에 고난이 오고 거절감이 찾아올 때 안색이 변했던 카인의 길을 따르지 마십시오. “왜 내 뜻대로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문 앞에 맹수가 웅크리고 있는 영적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때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내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다시 정렬시키는 것, 그것이 진짜 예배자가 치러야 할 영적 전투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가장 아까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쉽게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그 질문의 답이 바로 내가 지금 예배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문화전쟁의 승패는 국회나 언론에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가정의 식탁과 성도의 골방, 그리고 주일의 예배 제단에서 결정됩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삶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승리하는 아벨의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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