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차(蜀茶)가 중국차의 원류(源流)가 된 까닭①
이 원 홍
(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삼성퇴(三星堆) 청동유물(靑銅遺物)의 파노라마
촉나라 문화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86년 여름이다. 인부들이 건축용 벽돌을 만드는 데 사용할 흙을 파다가 유물이 묻혀 있는 구덩이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막상 발굴을 해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와 고고학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구덩이는 길이가 4미터에 너비가 2.8미터로 그 속에 금과 청동으로 된 괴이한 형태의 청동기와 토기, 옥기, 무기 등 400여 점의 유물이 묻혀 있었다. 발굴단은 지표조사를 하다가 근처에서 또 하나의
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것도 길이 5미터에 너비가 2미터나 되며, 거기에도 800여 점의 금과 청동과 상아로 된 유물들이 가득 묻혀 있었다.
학술조사를 담당한 고고학자들은 그 유물들이 대부분 촉나라의 토템과 그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구덩이의 이름을 ‘제사갱(祭祀坑)’이라 지었다.
유물이 묻혀 있던 구덩이는 네모나게 일부러 패인 것이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유물도 누군가가 두들겨 부셔 쓸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보존을 위해 손을 쓴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발굴 사진을 보면 초보자가 보아도 정상적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어디서 못
쓸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끌어 모아, 구덩이를 파고 쓰레기 파묻듯이 묻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촉나라 사람들이
보존을 위해 묻어둔 것이라면 공손히
모신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고, 천재지변으로 건물이 붕괴되면서 흙더미를
뒤집어쓴 것이라면 구덩이를 팠다는
것이 이상하다.
삼성퇴(三星堆) 유물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9년이다. 삼성향(三星鄕) 북쪽에
있는 용수로 수리공사를 하다 옥기(玉器)와 석기 등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정부의 손이 발굴 작업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다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겹쳐 문화적인 것은 돌볼
겨를도 없었다.
발굴 작업이 제대로 시작된 것은 모택동(毛澤東)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고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끝난 약 10년 뒤인 1986년부터였다. 그때부터 삼성퇴가 세상에 알려지고 촉나라 문화의 모습이 햇빛을 보게
되어 그 규모와 학술적 가치로 학계의 관심이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4천년 전에 양잠(養蠶)한 비단의 나라
삼성퇴 유물의 실상은 이렇다.
가장 오래된 촉나라에 관한 문헌은 『화양국지(華陽國志)』의 촉지(蜀志)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왕이 잠총(蠶叢)이며 백호(柏濩)와 어부(魚鳧)가 그 뒤를 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잠총으로 보고 있는
청동종목면구(靑銅縱目面具)도 구덩이 속에서 나왔다. 양쪽 눈이 말뚝을 박은 것처럼 튀어 나와 면상이 괴이하다. 잠총이 촉나라를 지배한 것이 B.C. 2100년경이라고 추정한다.
‘蜀’은 ‘벌레 충’의 13획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 벌레는 다름아닌 누에이다. 그러므로 촉나라 군주 잠총이 누에 치는 양잠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의 일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의 성도(成都)는 옛날부터 비단의 산지로 유명했다. 양잠을 업으로 할 수 있을
정도의 부족이라면 그 문화수준도 높았을 것이다.
미국의 페어뱅크(John K. Fairbank) 박사는 그의 저서 『중국사(China: A New History)』에서 고대 중국의 가장 큰 위업 중의 하나가
양잠이라고 했다. 그는 “대량의 뽕잎으로 누에를 키워 그것이 누에고치를 만들고 다시 고치에서 생사를 뽑아내는 것은 매우 힘든 기술이며 B.C. 6세기 서방으로 누에가 밀수출될 때까지 양잠이 중국의 독점 산업이었다”고 격찬하였다. 100파운드의 뽕잎을 먹은 누에가 만들어내는 고치는 불과 15파운드, 그것으로 뽑아내는 생사는 1파운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촉나라의 문화적 수준이다.
이백(李白)이 촉도난(蜀道難) 읊은 천부(天府)의 지세(地勢)
그들은 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천연지형을 이용하여 튼튼한 성벽을
쌓았다. 해자처럼 북쪽을 지켜주는 압자하(鴨子河)와 서쪽을 흐르는
마목하(馬牧河)를 이용하여 삼성퇴 도성을 요새화했다. 옛 사람들은
촉나라를 ‘천부(天府)’라 하였다. 그만큼 높고 험준한 곳이었다. 이백(李白)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를 읊었다.
오호! 위험하구나, 높기도 하구나
촉도(蜀道)의 어려움이 청천(靑天)을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
잠총과 어부의 개국(開國), 아득하구나
어언, 사만팔천 세(歲)
진새(秦塞)와 인연(人煙)이 스칠 수도 없도다.
서쪽으로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병풍처럼 두르고 대소의 장강(長江)
지류를 끼고 있는 험준한 환경 때문에 촉나라 사람들은 물에 익숙하여 고기잡이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생활 환경에서 형성된 것이 촉나라 사람들의 수조신앙(水鳥信仰)이다. 이것이 그들의 토템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잠총을 이어 군주가 된 백호(栢濩)는 홍수대책에 전념하여 안정된 생활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촉나라는 문화적인 수준도 향상되어 옥기와 토기, 석기 등의 생산과 가공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주(周)에 합세하여 은(殷)나라 정벌한 어부(魚鳧)
촉나라의 존재가 중원지방에 알려진 것은 어부가 군주가 된 다음부터이다. 그는 왕조를 세우고 주나라 무왕에 합세하여 은나라를 정벌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周本紀)』는 주나라 무왕이 병거(兵車) 300대에 근위병 3천 명과 무장병사 4만5천 명을 거느리고 은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할 때, 촉(蜀)·강(羌) 등 8개국이 합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재위 기간은 B.C. 1134년부터 1116년까지이다.
촉나라 사람들의 뿌리는 중국의 서북쪽 티베트쪽에서 이주한 강족(羌族)이라 한다. 저()족과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으나 저강(羌)이라 일컫는 강족은 저지대의 강족(羌族)이며, 그들이 촉나라 사람들과
결합하여 촉인이 되었다고 한다.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동류로 묶어 걸주(桀紂)라 하는데 두 왕은 중국 역사의 대표적인 폭군이다. 주나라 무왕이 주왕의 은나라를 정벌한 것과 그 정벌에 촉나라가
동참한 데는 뭔가 중요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기(史記, 殷本紀)』에 기록된 주왕의 음란 폭거만으로도 그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왕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사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달기(己)를 총애하여 달기가 하는 말에는 무엇이든 따랐다. 음악사 연(涓)을 시켜 새로운 음란한 노래를 만들게 하였다. 세금으로 백성을 착취하여 금고를 채우고 곡간을 채워 개와 말과 진기한 물품을 몰수하여 궁전을 채우며, 별궁의 정원과 고대(高臺)를 더욱 넓혀 많은 야수와 새들을 잡아 가두었다. 귀신을 깔보고 군신 관녀를 모아 그곳에서 낙희(樂戱)하였다. 술을 연못으로 하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어(以酒爲池 縣肉爲林) 남녀를 벌거벗겨 그 사이를 서로 쫓게 하며, 밤낮을 주연으로 지새웠다. 백성들의 원망이 충천하여 제후(諸侯)들 가운데도 배반자가 나오게 되었다. 주(紂)는 형벌을 가중시켜 포락(烙)의 법을 내렸다.
부패한 나라는 스스로 패망을 자초한다. 나라의 뼈대 속이 썩어 외적의 공격에 그냥 무너진다. 주변의 나라들이 그것을 보고 못본 척하지 않는다.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는 것이 군웅들의 정의인 것이다.
두우(杜宇)와 제사갱
은나라를 정벌한 촉나라 어부(魚鳧)는 많은 전리품을 삼성퇴로 가져갔다. 제사갱에서 발굴된 청동기 가운데 문양과 기형이 은나라 것과
비슷한 것들이 많은 점에 관해 고고학자들은 은나라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일부이거나, 포로로 잡아간 은나라 기술자를 시켜 만들게 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신수(神樹)와 청동입인상과 청동면구 등 촉나라 특유의 청동토템은 그들 자신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은나라에도 없고
중국의 다른 지역에도 없는 전혀 색다른
것으로, 촉나라 사람들의 우주관(宇宙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어부의 뒤를 이은 촉나라 군주는 두우(杜宇)이다. 때는
서주중기(西周中期). 『촉왕본기(蜀王本紀)』에는 하늘에서 강림한 두우라는 자가 자립하여 촉왕(蜀王)이 되어
망제(望帝)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 망제는 홍수를
치수하지 못해 별령(鱉令)이란 자를 재상으로 임명하니,
수로를 수복하고 민생을 안정시켰기에 그에게 왕위를
선양했다고 전해진다.
별령은 왕이 되어 개명제(開明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망제가 별령이 치수공사로 집을 비운 틈을 타서 그의 부인과 통정하는 일이 생기자 자신의 부덕을 뉘우치고 양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별령이란 ‘자라’를 일컫는 것으로 필경 물과 관련이 깊은 부족의 대표일 것이다. 민간
전설에는 망제가 스스로 도망쳤으며 차마 죽지 못하고
두견(杜鵑)이 되어 봄이면 나타나 슬피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견새의 별명이 ‘촉혼(蜀魂)’이다.
다른 기록에는 두우가 삼성퇴를 장악하고 어부의 권력
상징이었던 청동 귀신들을 무참하게 파괴하여 땅 속에 묻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제사갱의 연유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촉왕본기』가 그를 두고 하늘에서 강림하였다고 한 것은 그가 외부에서 침입한 정복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삼성퇴를 정복한 두우가 신전을
파괴하고 그곳 사람들의 수호신인 청동 토템을 두들겨 부셔 구덩이
속에 묻어 버렸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두우 일족도 촉인의 다른 부족일 것이다. 촉나라는 이렇게 군주를 바꾸어 가며 천수백 년 영화를 누리며 사천 평원에 군림해 왔다.
삼국시대 촉자(蜀茶)가 차의 전성기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중국 대륙은 약육강식의 격투장이었다. 이기고
지는 것으로 종말이 결정되었다. 촉나라도 이러한 도전에 굴하여 결국 파촉(巴蜀)으로 병합하게 된다. 초(楚)나라 변방에서 일어난 파(巴)는 초나라와 대소간의 분쟁을 계속하며 이웃인 촉나라와도 험악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초나라 정복에 야망을 키우고 있던 진(秦)이 토촉론(討蜀論)으로 국론을 굳혀 촉나라와 파(巴)를 병합시켜 진나라로 편입시켰다.
파촉은 본래 문화적·경제적 기반이 강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이 30여 년만에 진나라의 망국으로 무너지자 파촉은 유방(劉邦)의
힘이 되어 항우(項羽)를 정벌하고 한왕조(漢王朝)를 세우는 데 기둥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흘러 천하가 촉(蜀)·위(魏)·오(吳)로 삼분되어
촉나라는 유비(劉備)와 제갈공명(諸葛孔明) 등 삼국지 영웅들의 화려한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촉나라 차를 중국차의 대본으로 전파케 하여 중국 차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어 냈다.
삼성퇴(三星堆), 하상대(夏商代)에 독자적 문화 형성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중국의 고고학적 연대에 관해 잠깐 언급해
두는 것이 좋겠다. 중국 고대사에서 촉나라가 점하고 있는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중국차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고학 시대에 중국차가 어떠했는지 그 기원과
실태에 관한 결정적인 자료는 없으나 차의 기원과 깊은 관계가 있는
촉나라 문화와 중국 고대사의 고고학적 이해를 높이는 것이 차문화
연구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B.C. 5000년경 황하(黃河)유역에서 시작된 중국의 채색토기와 농경문화의 문화연대를 앙소문화(仰韶文化)라 한다. 그 뒤를 이어 B.C.
2700년경 회도(灰陶)의 시작과 가축문화의 다양화를 이룬 연대를 용산문화(龍山文化)라 하고 그 다음 B.C. 1600년경에 이르러 청동기문화의 융성기에 해당되는 은(殷)문화가 나타난다. 그로부터 주(周), 한(漢), 춘추(春秋), 전국(戰國)과 진(秦)나라의 천하통일로 발전하여 고대 중국의 문화적 개화기를 형성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를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하여 하(夏)·상(商)·주(周)로 기술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상(夏商)을 신화시대로 구분하는 학자들이 많았지만 하왕조(夏王朝)의 실존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은허(殷墟)의 발굴로
상대(商代)의 실존이 분명해져 이젠 학계의 양상도 많이 달라졌다.
하상(夏商)의 유적은 하남성의 정주(鄭州)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언사(偃師)·등봉(登封)·안양(安陽)·우현(禹縣) 등에 산재해 있으며
황하 남북에서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 일대가 한족(漢族)의 고향인
중원으로, 한족문화(漢族文化)의 발상지이며 중국문화의 고향이다.
여기서 토기와 석기·옥기·왕궁유지 등 엄청난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호사스러운 권력자의 모습과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파노라마다. 고고학은 이 시대를 용산문화만기(龍山文化晩期)에 나타난 이리두문화기(二里頭文化期)로
구분한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차(茶)의 역사
내가 이리두문화권을 답사한 것은 몇 년 전이다. 하(夏)·상(商)·주(周)에서 춘추(春秋)와 전국시대를 거쳐 한대(漢代)에 이르면서 중국문화의 근간을 형성한 중원의 원점이다. 크게는 요(遼)·금(金)·원(元)·청(淸) 등 많은 이민족의 지배로 인한 문화적 갈등이 있었지만,
당(唐)·송(宋)·명(明) 등으로 한족문화의 근간이 이어져 이민족문화까지도 동화시키는 문화적 역량이 성장되었다.
답사할 당시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챙겨보았으나 이리두문화기에 차생활이 있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의문이 남아 있다. 홍수에 시달리며 취락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경질(硬質)의 토기를 구워 놀라운 수준의 취사도구를 만들었고, 식생활과 더 나아가 연회에 필요한 각종
용기까지 만든 것을 보고, 그들이 물을 어떻게 조리해서 마셨을까 하는 극히 초보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시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물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육우(陸羽)가
『다경』에서 ‘차를 음료로 삼은 것은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일어났다(茶之爲飮 發乎神農氏)’고 하였으니 고고학시대에도 차가 있었다고 생각하여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신농씨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삼황의 한 분으로 원시 중국의 신화인물이다. 그분이 차를 마신 시조라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차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신농씨가 『식경(食經)』을 저술하여 그 속에서 도명(茗)을 마시라고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그 책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감이다.
나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이은 우(禹)의 나라가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중원의 기점이라 생각한다. 황하유역을 답사하면서 우왕(禹王)과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많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촉인문화(蜀人文化), 중원(中原)에도 영향 미쳐
우왕에 관한 설화 한두 가지를 참고로 소개해 두고자 한다. 우(禹)는
요(堯)로부터 명령을 받고 9년을 끌어도 치수에 성공하지 못해 죽음으로 책임을 진 곤()의 아들이다. 그가 치수에 실패한 것은 상제(上帝)의
보물인 식양(息壤)을 훔쳤기 때문이다. 식양은 한 주먹의 흙인데, 땅에 바르기만 하면 부풀어 제방이 되고 산이 되어 홍수를 막아 준다는
것이다. 곤()은 그것을 훔쳐 치수를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식양을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된 상제가 그것을 거두어 가버렸다. 그로 인해
쌓아 두었던 제방과 산이 없어져 세상이 다시 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제는 축융(祝融)이라고도 하고 촉용(燭龍)이라고도 하는 인면용신(人面龍身)의 귀신을 시켜 곤()을 죽였지만 3년이 지나도 시체가
썩지 않아 칼로 몸통을 잘랐더니 그 속에서 우(禹)가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삼성퇴박물관에서 촉용이라는 청동상을 보았다. 축융과 촉용이
같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발음이 비슷하여 와전된 것이라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도 인면용신(人面龍身)·인면수신(人面獸身) 등 몇
가지 용모와 이름으로 촉용이 등장하고 있다.
촉용은 본래 삼성퇴 촉나라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촉용을 청동으로 형상화해서 신전에 모셨던 것 같다. 박물관에 진열된
촉용은 괴이한 모습의 가면으로 학자들은 얼굴이 용의 모습이라 말하고 있다. 밤과 낮을 조종한다는 그 눈은 무섭게 튀어 나왔고 안면 중간에는 대관(帶冠)이라는 긴 장식물이 붙어 있다.
촉용을 시켜 우왕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촉나라 토템이 중원으로
확산된 것을 설명해 준다. 촉나라 문화가 중원으로 침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민족이나 부족에 따라 상이한 문화가 대동한 것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면서 확산되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한두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제사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법이다. 의식과 제물과 제복 등 제사의
형식적인 내용에서도 왕이 다른 민족이나 부족을 정복하라는 ‘천명(天命)’을 받는 의식도 있었고, 천명에 따르는 맹서를 창출하는 의식도 있었다. 그리고 거둔 전과를 수호신에게 보고하는 의식도 있었다.
이 의식에서는 제물이 달라질 수 있으며 술과 차를 의식에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차자(茶字) 없어 도자(字) 통용
여기서 일단 해명을 하고 넘어 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앞에서 인용한 신농씨의 『식경』에 차를 ‘도명(茗)’이라 했다는 부분이다. 우선 수천년 전에 읊었다는 『시경(詩經)』에 나타난
차의 명칭부터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면()에는 ‘주나라 넓은 들이 비옥하여 쓴 나물 씀바귀도 엿처럼 달다(周原 菫繁如飴)’고 한 구절이 있고, 국풍(國風)편의 곡풍(谷風)에는 ‘누가 씀바귀를
쓰다 했나뇨, 내 처지엔 냉이보다 달아요(誰謂盃苦 其甘如薺)’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여기
나온 도()와 『식경』에서 인용했다는 도()는 동일한 글자이며 모두 ‘씀바귀(苦菜) 도’로 읽는다. 그러나 중국의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한어대사전출판사)』은 차(茶)의 고자(古字)라 했다.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 諸橋轍次著)』은 두 번째 뜻으로 ‘특히 잎을 빨리 딴 것을 도()라 한다.
늦게 딴 것은 명(茗)이라 한다. 차(茶)와 같다’고 하였다. 육우도 이
두 글자를 혼용했다.
‘도’가 ‘차'의 옛 글자라는 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차가 생산되기 전에 ‘도’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씀바귀’를 지칭하는 것이며 당대(唐代)를 전후하여 차(茶)라는 글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을 해석하면 당나라 전후에 비로소
차(茶)라는 글자가 생겼으니 그 이전에는 도()라는 글자가 차의 글자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나라 이전에 이미 차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차는 글자(茶)가 있기 전에 존재했다. 운남성(雲南省)에 야생 차나무가 아직도 거목으로 생존하고 있으니 차의 뿌리를 캐기에는 다행한 일이다. 여러 문헌과 기록을 살펴 본 바로는 고대
중국 사람들은 차(茶)자가 생길 때까지 도()자를 차(茶)의 뜻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또 하나의 근거는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이란 날짜가 기록된 ‘동약(約)’이라는 노예문서에 나오는 도()자다. 신작 3년이면 B.C. 59년, 기원전 1세기다. ‘동약(約)’은 촉나라 문인 왕포(王褒)가 편료(便了)라는 노예를 매입하여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백 가지 사역을 계약서로 만든 것이다. ‘종 동()’에 ‘맺을 약(約)’이니 문자 그대로다. 그 종이 해야 하는 사역 가운데 도()에 관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포별팽도(鱉烹)’ 다른 하나는 ‘무양매도(武陽買)’다. 즉
‘자라를 통째로 굽고 “도”를 삶는 것’과 ‘무양에 가서 “도”를
사 오는 것’이다. ‘씀바귀를 삶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양까지
가서 씀바귀를 사 오라’는 것은 정황에 맞지 않는다. 무양은 지금의
사천성 팽산현(彭山縣)이다. 성도(成都)에서 아미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 그곳은 옛날부터 차의 집산지다. 차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약’에 나오는 도()를 차(茶)의 뜻으로 인용하고 있다.
차(茶)자가 만들어진 것은 8세기
나는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아미산(峨眉山)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렀다. 대로변만을 스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여기가 무양이구나’ 생각하며 아미산 명차들이 여기서 시장을 이루었겠다고
생각했다. 팽산을 지나고 소식(蘇軾)의 고향 미산(眉山)을 지나서 낙산(樂山)에 이르렀다. 삼성퇴 고대 촉나라를 요새화 시켰던 민강(岷江)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대도하(大渡河)와 청의강(靑衣江)이 낙산에서 민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고 홍수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 때인 개원(開元) 원년(713)에 그 곳 산을 깎아 미륵좌상을 건조하기 시작하여 90년만에 완성했다. 높이가 71미터에 강물을 밟고 있는 듯이 앉아 있는 미륵불의 발등 위에 100명의 사람이
올라 설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부처님이 안치되고 나서는 강물로 인한
수재가 줄어들고 천하명승지가 되어 일거양득의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자랑이었다.
이 ‘도()’자를 ‘차’(茶)로 읽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고증학(考證學)의 개조인 청나라 고염무(顧炎武)다. 17세기 사람인 그는 ‘도()’자로부터 ‘차(茶)’자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 8세기경의 당나라 때였으며 차를 마시는 것은 촉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무양까지 가서 씀바귀를 사 오라’는
동약의 기록은 ‘무양에 가서 차를 사 오라(武陽買茶)’로 읽는 것이
옳다고 했다.
삼성퇴를 중심한 촉나라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 매듭을 지으려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차는 오묘하다. 맛과 향과 멋이 오묘하지만 그 역사와 발전 과정은 더욱
오묘하다. 사천성(四川省)에 정착한 촉나라 사람들이 차를 마신 시조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에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유역에서, 그리고 운남성(雲南省)을 비롯한 중국의 남방지역에서도 차를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다(製茶)의 방법이 다르고, 다려서 마시는 자법(煮法)이 다르고, 그
맛이 달랐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차였다는 사실에는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문화 2000. 11-12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