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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여행

두륜산 대흥사 현판에 얽힌 이야기

작성자안천|작성시간26.06.15|조회수13 목록 댓글 0

해남 두륜산(頭輪山) 기슭의 대흥사는 국가 사적(史蹟)으로,

주변의 두륜산 일대는 국가 명승으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또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2018년 6월)되어 있는 명소이다.

 

두륜산 대흥사(頭輪山 大興寺) ~ 해탈문(解脫門)

 

두륜산 대흥사에서 눈여겨 볼것은 전각에 앞서 현판이다.

현판은 전각의 얼굴이자 명필들의 숨결이 담긴 예술로, 서산대사의

표충사(表忠祠)에서는 정조대왕의 친필을,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에서는

원교 이광사의 힘찬 필획이 물결처럼 흐르고, 무량수각(無量壽閣)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두텁고 강렬한 획을 접할 수 있어 생명의 기운을 전해준다

걸음을 조금 늦추고 천천히 편액을 감상하며 걸어 보는것도 좋을 듯 하다.

 

표충사(表忠祠) 편액 ~ 정조대왕 글씨

 

서산대사 사당의 표충사(表忠祠) 편액은, 1788년

정조대왕(正祖,1752~1800)이 친필로 써서 하사한 편액이다

 

무량수각(無量壽閣) ~  추사 김정희의 글씨

 

무량수각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귀양 가던길에 초의선사를 찾아 이곳에 들러,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를 보며 "조선 글씨를 망쳐 놓은

이의 현판을 어찌 이렇게 버젓이 걸어 둘 수 있는가" 하고는 그 현판을

떼어내게 하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글씨를 대신 걸게 하였다.

그후 8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귀향길에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겸손해져,

스스로 떼어내라 했던 원교 이원사의 글씨를 다시 걸게 하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백설당(白雪堂), 해탈문(解脫門), 침계루(枕溪樓)

 

위의 네 현판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완도군 신지도로 귀양 왔을 때 써준 글씨로, 원교 이광사는

조선의 문신이자 서예가로써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였으며,

이 서체는 중국 서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선화(朝鮮化)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린다.

 

가허루(駕虛樓) ~ 창암 이삼만의 글씨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은 조선후기의 전주지방

서예가로 전주 제남정, 하동 칠불암(七佛庵) 등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다.

 

두륜산 대흥사

 

특히 대흥사는 18세기 후반 서산대사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의 사액을 받아 국가제향이 이루어졌던 사찰로서,

청허계(휴정 서산대사)의 종원(宗院)을 표방하였다.

 

성보박물관

 

향나무

 

초의대선사상(草衣大禪師像)

 

초의대선사는 15세 때 대흥사 일지암으로 출가하여

차와 풀 그리고 자연을 섬기며 풀옷을 입었다고 하여 법호를

초의(草衣)라 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인사들과 다과를 즐기며 덕담을 나누었고, 불교 외에도 도교,

유교학에도 능통하여 "동다송" "다신전"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표충사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으며, 1788년 사액이 내려져 표충사로 지정되었다.

의발(衣鉢)이란 가사(袈裟) 바리때를 아울러 이르는 .

 

외삼문인 호국문, 내삼문인 예제문 등

 

표충사(表忠祠) ~ 정조대왕 친필

 

대흥사 표충사 향례는 국가에서 제관을 파견하여 제를 올리는

국가 의례로 조선시대의 사액(賜額) 제문과 홀기, 국향친필교서 등

문헌이 전하고 있고, 불교와 유교를 혼합한 향례 전통이 이어지고있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영정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1544~1604)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가

휴정을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하자 전국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서산대사 1,500여명, 사명대사 700여명, 처영 1,500여명 등과 합세한

승군의 대장이 되어 일선에서 실전을 지휘하여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2년 후 휴정은 유정과 처영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으로

들어갔으며, 세수 85세, 법랍 76세 되던 1604년 정월 자신의 영정을

꺼낸 뒤 뒷면에 다음의 시를 남긴 후 가부좌한 상태로 입적하였다.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

 

사명대사(왼쪽), 서산대사(중앙), 처영대사 영정(오른쪽)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1520~1604)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8개월간의 협상끝에

1605년 4월 일본에 끌려가 있던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게 되는데, 그때 답답한 심정을 읊은 시다.

 

매화영락불귀거(梅花零落不歸去), 해국춘풍공단혼(海國春風空斷魂)

매화는 다 지고 떨어지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머나먼 바다 나라의 봄바람에 공연히 애만 끊어지네.

 

표충비각 ~ 1860년 건립

 

뇌묵당 처영대사(處英大師)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 12월 11일 권율장군과 함께 독산성(현 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이듬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으로 쳐들어온 왜적 3만명을

승병 1천명과 권율장군의 관군 2천명 등 총 3천명으로 7차례에 걸쳐

모두 막아내는 유명한 행주대첩을 이루었다. 

 

2개의 석비 

 

표충비각의 석비는 서유린(1738~1802)이 1791년(정조 15)에

지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오른쪽)과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이 1792년(정조 16)에 지은 전사사적비명(왼쪽) 석비이다.

 

호국대전(護國大殿)

 

찰피나무꽃

 

찰피나무는 한국 산지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로 보리자나무,

금강피나무로도 불리며,  최대 20m까지 자라는 큰키나무이다.

나무껍질은 회색이고, 잎은 원형으로 2~4cm 정도이며 털이 있다.

 

무염지(無染池)와 수련

 

천불전(千佛殿) ~ 천불전 오른쪽은 용화당으로 대수선공사 중

 

천불전 출입누각인 가허루(駕虛樓) 내.외 ~ 창암 이삼만의 글씨

 

범종루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연리근, 보호수)

 

침계루

 

 침계루(枕溪樓) ~ 원교 이광사의 글씨

 

대웅보전 마당 연등

 

대웅보전 마당 바닥돌 문양

 

대웅보전(大雄寶殿) ~ 원교 이광사의 글씨

 

대흥사 삼층석탑(보물)과 청운당(靑雲堂)

 

응진당(應眞堂)과 산신각(山神閣)

 

윤장대

 

윤장대를 한번 돌리는것은 불경을 한번 독송하는 것과

같은 공덕을 지닌다고 한다

 

명부전(冥府殿)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무량수각(김정호 글씨), 백설당(이광사 글씨)

 

금당천 심진교(尋眞橋)와 침계루

 

금당천 계곡의 다슬기

 

대흥사 부도전(浮屠殿)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일주문

 

대흥사를 한바퀴 관람하고 일주문 밖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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