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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공부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작성자寶山|작성시간25.06.17|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누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아서 요달하고자 한다면,

응당 제법의 성품을 보라, 일체는 오직 마음의 지음이니라.

 

위는 <80 화엄경>에 나오는 게송으로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나타낸 말이다.

 

위 게송은 우리가 정말로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면,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다름 아닌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고 했다.

 

법계라는 건 이 세속계를 떠나서 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속계에서도 탐치라는 한 생각 쉬면,

치를 떨 구어내면, 그 자리가 법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 자성, 불성, 성품이라는 것을

관찰해 보면, ~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었구나,

마음이 조물주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내 마음이 그렇게 그려낸 것, 지어낸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이 만든다. - 만들어냈다는 말은 아니다.

마음이 그렇게 인식했다는 말이다.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내겠는가.

다만 마음이 그렇게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인식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있게 됐다는 말이다.

 

<대승기신론>삼계허위 유심소작(三界虛僞 唯心所作)-

삼계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만이 짓는다는 말이 있고,

 

<화엄경> ‘십지품에는

삼계허망(三界虛妄) 단시일심작(但是一心作)이라,

삼계가 허망하니 다만 한 마음이 만든 것이란 말이 있는데,

이들이 다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심외무법(心外無法), 유식무경(唯識無境)과 같은 맥락의 말이기도 하다.

 

심외무법(心外無法)’을 심외무물(心外無物), 심외무불(心外無佛)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인정하는 세계,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각자의 심식(心識)이 그렇게 파악한 것이란 말이다.

 

따라서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진리도 없고, ()도 없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란 말이다.

마음이 그렇게 인식한 것이란 말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유식설에서 식() 이외의

외경(外境)은 식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외적인 세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식만 있을 뿐 대상 경계는 없다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정신활동 뿐이며,

나무나 돌 등과 같은 외적 사물은 허상이란 것이다.

,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오직 인식작용이 분별해서 인식한 대상들이지, 실제로는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 세상은 오직 유식의 현현(顯現)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유심조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말이 일체의 범위이다.

여기서 일체의 범위는 심법에 한정된 것이다.

, 주관적 판단을 할 때를 말한다.

 

<달마어록> 가운데에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 보면 예쁘다, 밉다에 객관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밉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운 것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심법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새가 지저기는 소리를 기쁜 마음으로 들으면 기쁘게 들리고,

슬픈 마음으로 들으면 슬프게 들리는 것처럼,

지저기는 새소리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따라 기쁘게 혹은 슬프게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색법 자체에는 선도 악도 없다. 다만 있을 뿐인데,

보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좋다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는 것이다.

 

그 꽃을 바라보는 각자의 마음은 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해서 본다.

그처럼 생각이 들어가서 판단하는 것이 심법이다.

 

 

그리고 마음에 의해 조작돼 만들어진 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한다.

<금강경>에 유위법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일체의 모든 조작된 법은 꿈허깨비거품그림자와 같다는 의미다.

진짜가 아니고 가짜, 거짓이란 의미다.

 

꿈도 깨고 나면 가짜요, 허깨비도 환영이라서 가짜요,

거품도 물이 아닌 가짜요, 그림자도 본체가 아닌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가짜라면 누가 속이고 있는가.

내가 나에게 속고 있을 뿐이다. 내 마음에 내가 속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이해해야만 한다.

(자기)마음이 (자기)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탁월한 수행이

바로 자기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뜻을 제대로 안다면,

즉 마음이 모든 것을 그려낸다는 것을 안다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모든 정신병이나 정신적인 괴로움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은 이걸 모른다. 그래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모든 것을 마음이 지어낸다는 걸 알지 못하므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깥을 쳐다보고 바깥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이 짜증나는 마음의 원인이 내 밖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남의 탓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이 분노가 내 마음에서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걸 모르니까,

마음의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하려 하고,

이 분노의 원인을 밖에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로 인해 수많은 증오와 싸움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일체유심조에서 오직 마음(唯心)이라고 할 때,

마음()’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생각이나 사상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할 때,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할 때의 마음이다.

분별 망상하지 않는, 때 묻지 않은 그 마음이 일체를 지어낸다는 말이다.

그 마음이 바르게 인식하면

일체의 원인이 자기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元曉) 대사가

밤에 갈증이 나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들이켰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시원하고 맛있던 물이 이튿날 구역질로 변하는 것에서,

바가지 해골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왜 구역질이 나는 것일까?

 

그 순간 원효 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큰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내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음이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해, 시원한 물이 되기도 하고,

구역질나는 물이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알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니까

불교가 유심론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불교는 유물론이 아니지만 유심론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는 정신과 물질을 떠난,

곧 양변 정신과 물질을 떠나서 양변이 융합한 중도적인 유심을 말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결코 아니다.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심론은 변견(邊見)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변견으로는 설 수가 없다. 완전한 중도적 입장이라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보면 유심(唯心)도 아니고 유물(唯物)도 아니다.

유심도 유물도 아니어서 유심과 유물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심과 유물이 통하는 세계이다.

유심과 유물의 연기관계, 곧 물심불이(物心不二)이다.

 

 

그런데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즉 마음이 모든 것을 조작한다는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 땅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산도,

일체만물을 만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의 작용이란,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또 마음은 너그럽기도 하고 협소하기도 하며,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마음이 바뀔 때마다

마음에 따라서 세계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된다.

 

따라서 마음을 연기관계로 파악하란 말이고,

마음 혼자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연기의 관계로 이해해

일체세계와 법계성이 유심조(唯心造)임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마음()은 그 작용이 광대무변하기도 하고,

바늘귀보다도 작을 때도 있다.

마음을 넓게 쓰면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 무한한 마음이 되고,

마음을 좁게 쓰면 겨자씨도 들어가지 못하는 아주 좁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우리의 마음이 부리는 오묘한 작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한한 마음의 힘을

어떻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엄경> ‘십지품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불자여! 어떤 중생이 선근을 깊이 심고, 모든 행을 잘 닦고,

()를 돕는 법을 잘 모으고, 모든 부처님께 잘 공양하고,

청정한 법을 잘 쌓고, 깊은 마음을 청정하게 해,

광대한 뜻을 세우고, 광대한 지혜를 내면, 자비가 앞에 나타난다.

 

보살이 처음 이런 마음을 내고는, 곧 범부의 처지를 뛰어나와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집에 태어나나니,

여래의 종성(種性)에서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마음 바탕에 착한 마음을 심고

착한 행을 잘 닦아 광대한 뜻을 세우면

반드시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한다고 했다.

, 우리의 올바른 마음을 잘 닦고 쓰면 바라는 것을 성취한다는 말이다.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했다.

 

삼계유심이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우주의 삼라만상을 뜻하는 3계 역시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마음이 만들었다는 뜻으로 의성천(意成天)이라 한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모습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장소가 다르다고 해서 각각 다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심생종종법생(心生種種法生) 심멸종종법멸(心滅種種法滅)이라 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심생(心生)이면 종종법(種種法)이 생하고,

심멸(心滅)이면 종종법이 멸하는 것이니,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

 

그러므로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모든 법이 다만 의식에 의해

지어진 바일뿐이요, 실제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죽을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보이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현대 과학의 영점장(Zero Point Feild), 홀로그램(hologram),

비국지성(非局地性)이라는 이론들이 증명해 준다.

 

이것은 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 공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물결(파장)로 가득하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바라보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형태(입자)를 갖춘 현실로 내 눈 앞에 깜작 등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양자 물리학자인 울프(Fred Wolf) 박사는

이러한 관찰자 효과신이 부리는 요술(God’s trick)‘이라 일컫는다.

 

신이 부리는 요술은 내가 얼마나 깊이 바라보느냐에 따라

변화의 폭이 다르다. 생각에도 층이 있기 때문에

깊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깊이 변화하고, 얕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티끌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하이젠베르크(Karl Heisenberg)

이러한 미립자들을 무한한 가능성의 알갱이들이라고 불렀다.

미립자들이 이처럼 영향을 받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지성(非局地性)이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현상을 멀리서 일어나는 으스스한 행동

(spooke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에너지가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한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사사불공(事事佛供)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우주의 신비, 곧 우리들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힘(에너지)이 들어 있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다.

, 내 마음 하나가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게

현대과학에서 입증한 실제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한

<화엄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실종생 무법이부조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낼 수 있다.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듯이,

그 무엇도 (마음은)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일체유심에도 한계가 있다.

색은 대상이 아니다. 색은 실상이다.

실상은 유심이라 할 수 없다. 색을 환이나 공이라 하면 안 된다.

북한의 핵폭탄, 화학무기 같은 것을 환이라 할 수 없다.

실상으로 존재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명예, 지위, 자존심, 행복이런 것은 환이고 공이다.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까.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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