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불교 공부

< 쿠샨 제국(Kushan Empire, AD 78~226경)과 불교 >

작성자寶山|작성시간25.07.08|조회수37 목록 댓글 0

 

< 쿠샨 제국(Kushan Empire, AD 78~226)과 불교 >

 

 

1. 쿠샨 왕조(Kushan Dynasty)의 역사

 

한자로 월지(月氏, 月支)라고만 알려진 그들의 종족적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월지족은 타림 분지의 초원을

중심으로 해서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걸쳐 살았던 유목민족으로서,

이들이 흉노족에 밀려 BC 2세기 경 서방으로 쫓겨 가게 됐다.

 

그리하여 BC 2세기 중엽 아무강(아무다리야강/Amu Darya)

상류 평원에 대월지(大月氏, 大月支)국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지역에

걸쳐 있던 그리스계 박트리아(Bactria) 왕국을 점령하고,

거기를 중심으로 동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이곳을 5개의 소국가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쿠샨[貴霜]이었다.

따라서 쿠샨은 월지족의 5제후 가운데 하나인 귀상(貴霜)이 커진 것이다.

 

기원 전후 쿠샨의 수장 쿠줄라 카드피세스(丘就却, AD 30~80 재위) 때에

다른 4제후를 쓰러뜨리고 월지의 5개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쿠샨 제국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아소카왕의 사망 이후 혼란에 빠져있던 인도 북부로 쳐들어가서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해 간다라를 차지해 거기를 나라의 중심부로 삼았다.

그리하여 투르키스탄으로부터 북서부 인도 일대를 지배하게 됐다.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100여년 후 카니슈카(Kanishka) 1(AD 130~170),

그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쿠샨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카니슈카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북쪽의 소구디아로부터

남쪽은 중인도까지를 지배했고, 동쪽은 파미르고원까지 진출,

동서교역의 실권을 장악했다.

 

카니슈카왕의 보호에 의해 대승불교가 흥기했고, 간다라 불교 미술이

융성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쿠샨 왕조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카니슈커왕 사후 AD 226년 파르티아 제국 대신에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란에서 발흥해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

쿠샨 왕조는 그의 번속국(藩屬國)으로 전락했다.

사산조 페르시아 세력이 이완되자 일시 세력을 회복했으나(기타라 쿠샨왕조),

5세기 후반 에프탈(Ephtalites)에게 멸망했다.

쿠샨 왕조 이후엔 굽타 왕조가 세력을 떨친다.

 

에프탈(Haytal, Hephtalites, 압달, 읍달 등으로도 표기함)

5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반까지 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한 민족이다.

에프탈 3(484~545 재위) 때에는 인근의 30여 개 부족을 지배할 만큼 위력이 강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협력해

동방 로마령을 침공하기도 해서, 이로 인해 한 때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사산 왕조와 돌궐(突厥)의 목간가한(木杆可汗) 연합군에게 침범당해 567년 멸망했다.

 

 

2. 쿠샨 제국의 불교

 

3대 왕인 카니슈카(迦腻色伽, 127~151 재위)가 즉위해

수도를 푸쉬칼라왓티에서 간다라의 푸르샤푸라(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로 옮기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계빈(카슈미르)

자신의 판도 안에 편입했으며,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가 쿠샨 제국의 전성기로서, 그의 호불 정책에 힘입어

불교 역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됐다.

 

대승불교의 중국 전파

 

쿠샨 제국은 중국과 교류가 많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중국에 산스크리트어로 써진 대승경전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발상지를 중앙아시아라는 추측을 낳고 있는데,

이 또한 쿠샨 제국을 의미한다.

 

쿠샨 제국은 지리적으로 실크로드(Silkroad)의 중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동서교역의 중간역할을 했고, 불교를 동쪽으로 전하는 중간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국에 불교를 소개한 사람들은 실크로드 상의 중앙아시아 중개무역상과 관련 있는

승려와 재가불자들이었다.

그러니 중국에 본격적으로 불교를 전하게 된 시기 역시 쿠샨 제국

시대부터라 하겠다.

 

4차 불전결집(佛典結集)

 

특히 카니슈카왕은 호불군주로서 장대한 사원과 불상을 세워

불교를 보호했으며, 부파불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호의적이었고,

4차 불전결집을 추진했다.

 

4차 불전결집(佛典結集)

AD 2세기 카니슈카(Kaniska)왕의 후원으로 현재 인도 캐시미르

지방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협(, Pārśva/파르스바)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세우(世友), 법구(法救), 묘음(妙音), 각천(覺天) 등 당대 최고 논사와 500여명의 아라한들이 모여,

20여년에 걸쳐 결집이 이루어졌다.

다만 제4차 결집은 삼장(三藏)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주로 논장(주석)의 결집이었다.

 

이 제4결집에서 경과 율에 대한 논장 대주석서(註釋書)를 만들었고,

이에 대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이 집대성됐다. 이후 중국으로 불교경전이 활발하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불경어를 산스크리트어로 공식화

 

그리고 카니슈카왕 때 이루어진 제4차 불전결집에서부터 불경어가 산스크리트어로 공식화돼,

산스크리트어로 문자화 됐다.

따라서 중국에 전해진 경전 역시 산스크리트어 경전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 대승불교가 한참 일어나고 있었으나

4차 결집은 대승불교를 배제한 채 북방 상좌부에서 가장 강력했던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중심으로 한 결집이 이루어졌다.

 

불방 불교에서 이루어진 제4차 불정경집은 또 다른 설이 있다.

 

불멸 후 400년경(BC1세기 말~AD1세기 초) 500명 나한들이 모여

가전연(迦旃延) 나한을 상좌로 하고 마명(馬鳴) 보살을 판수로 해서

<아비달마비바사론> 1백만 게송(偈頌)를 지었다는 설이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 확실한 논증이 안 되고 있다.

아무튼 설일체유부 논사인 가전연이 불경 제4차 결집에 참여해

<아비달마비바사론> 편집에 공헌했다는 것은 일반화돼 있다.

 

대승불교의 흥기

 

비록 카니슈카왕은 설일체유부를 존숭했으나

이 무렵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출현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해서,

대승불교가 흥기했고, 특히 중관학파가 융성했다.

 

초기 중국에 전달된 쿠샨 제국 시대 대승불교는 이후

중국인들의 불교 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의 불성론(佛性論), 불신론(佛身論) 등의 불교이론이 형성된 것도

그 배경에는 쿠샨 제국 및 그 영향을 받은 중앙아시아 등에서 유입된 대승불교사상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 쿠샨 제국에서 불교가 융성한 반면에 대승불교 흥기와

불교사상 확장에 따른 불교의 변형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페르시아 계통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영향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신학적 특징은 선악 이원론에 바탕을 둔

절대 선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신봉이다.

 

이러한 그들의 신봉 전통은 부처를 미륵과 아미타와 같은

절대적 존재로 이해하고 신봉토록 하는 불교의 변형을 초래했다.

절대신(絶對神)에 가까운 미륵불 개념과 아미타불 개념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그것이 인도 서북지역의 간다라,

캐시미르 지역에서 더욱 강화되고 확대됐을 가능성 크다고 본다.

 

이러한 불교적 절대자 개념이 쿠샨 제국 시대에

중국인들에게 소개된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중국인은 물론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전파돼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리안 민족이 지닌 샤만적 영혼 관념은

조로아스터교의 불멸의 영()과 같은 신학적 관념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불멸의 영() 관념은 인도 서북지역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불교에서 뿌드갈라(pudgala, 個我) 논쟁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진 배경이 됐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초기 중국불교에 나타나는 신불멸론(神不滅論)

이러한 실체 개념에 가까운 영혼 개념을 지닌 중앙아시아

불교이론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쿠샨 왕조 시대에 철학사조 중에 하나에 불과했던 원시불교가

그리스의 헬레니즘 철학과 결합해 비로소 종교적인 색채를 띤

불교가 창시돼, 이를 대승불교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미륵과 아미타 신앙과 같은 타력신앙과

신불멸론(神不滅論)과 같은 영혼불멸설은 근본불교의 교리와는

다른 비불교적인 관념으로 이러한 형태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도

쿠샨 제국의 영향이었다.

 

간다라미술의 융성

 

쿠샨제국은 북방유목민족이 중심이 된 국가로

그 이전의 중앙아시아의 문화, 즉 페르시아, 그리스 계통 문화와

인도문화를 융합 계승한 것이었다.

 

간다라미술의 중심지 간다라(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역)

인도의 서북관문으로서 BC 3세기 이래 인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었고, 다양한 민족문화가 섞여 있어서,

여러 면에서 독특한 지역이었으며, 기후 풍토도 인도와는 달랐다.

 

따라서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미술의 조형형식은

헬레니즘 양식을 적용시켜 일종의 혼합미술로 발전했다.

 

간다라미술은 기원 후 1세기 초 파르티아가

이 지역을 지배할 때를 전후해 시작돼 1세기 후반 쿠샨왕조,

특히 카니슈카왕 때 전성기를 맞는다.

 

간다라미술은 예술성이 뛰어난 불상으로 유명하다.

간다라미술을 꽃피운 예술가들 모두가 그리이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아니지만, 헬레니즘의 조각기법을 배운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헬레니즘 조각 기법에 이 지방 특유의 공예기법을 융합해 새로운 유형의 불상을 조성해냈다.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이 조성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투라(Mathura) 지방에서도 불상이 조성됐다.

마투라 불상도 간다라불상과 마찬가지로 상징물로 표시되던

부처님이 부처님 공양도나 불전도 속에 부각되기 시작하다가

독립한 불상이 발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출현으로 불교의 신앙형태는 커다란 진전을 보게 된다.

 

불상이 출현하기 전까지 불교도들은 깨달음에 기본을 둔

윤리적 생활방식 외에 불탑 등 여러 가지 예배 대상에 현세이익적인

기원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출현한 불상은 이들에게 적절한

예배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은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간다라 불상은 머리가 물결형의 장발이지만

마투라 불상은 승려와 같이 삭발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32상의 표현에 따라 나발형이 됐다.

 

간다라 불상은 콧수염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다가

후기에 이르러 없어지는데 비해 마투라 불상은 콧수염이 전혀 없었다.

 

마투라 불상은 초기에 엷은 옷으로 편단우견

(오른 쪽 소매를 벗어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을 취하다가

뒤에 옷이 두꺼워진 통견(양 어깨에 옷을 걸치지 않는 것)을 취하는데

이것은 간다라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간다라미술이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 동아사이아에 전해졌다.

 

간다리(Gandhari)----간다라(Gandhara)라는 말은

빠알리어의 자매어격인 간다리어다그러니까 간다리(Gandhari)어는

BC 3세기부터 서기 후 4세기까지 간다라 지방에서 쓰던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쓴 간다리족 언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새로이 발굴되는

불교 관련 사본들은 대부분 간다라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사본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간다리어나,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불교 사본군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법구경>이라든가 <코뿔소경> 등도 수록돼 있다.

 

카로슈티문자는 현재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사막

남단의 호탄(和田-옛 고탄)지역에서도 사용했었다.

 

미국의 리차드 솔로몬 교수는 산스크리트어와 간다라에서 출토된

카로슈티 비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솔로몬 교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간다리어로 된 수많은

불전 사본과 그 단편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간다리어 불경은 원래는 삼장을 두루 갖춘 완전한 형태의

경전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교수는 이 지역이 AD 1~3세기경,

인도 불교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사본 연구를 통해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언어이자, 빠알리어의 자매어격인 간다리어에

대한 이해가 크게 향상되면서 이 언어가 고대 인도불교에서 사용된

중요한 언어적 표현 수단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간다라는 불교미술의 원류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현장(玄奘)은 이곳을 불교논사들의 고향이라 했다.

무착, 세친, 법구, 여의, 협존자 등은 모두 간다라 출신이었다.

간다라 논사라는 말은 이미 대비바사론에서

카슈미르 비바사사에 대응하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초기불교사를 장식한 역경승들 중 많은 이가 카슈미르 출신이거나

이곳으로 유학했고, 법현, 현장, 혜초 등의 구법승 또한

이곳을 통해 인도로 들어가고 나갔다. 현장(629~645년 인도여행)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간다라(페샤와르)- 카슈미르-책가(시알코트)-

치나북티(암리차르 일대)를 거쳐 중인도로 들어갔고,

해로로 입국한 혜초는 치나북티-책가-카슈미르- 간다라를 거쳐 출국했다.

이렇듯 카슈미르와 간다라는 불교학의 고향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불교의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권오민

 

 

[출처] 블로그 아미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