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불이 붙었는데 내일 끄겠다고
“어떤 부자가 부인 넷을 두고 살다가 최후를 맞게 되었다.
첫 부인에게 묻기를, ‘평생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었으니
나를 따라 가겠느냐?’고 했다. 대답은 거절이었다.
둘째부인에게 물었다.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 내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함께 가겠느냐’고 했다.
대답은 역시 안 된다 였다.
셋째부인에게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극진히 사랑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무덤까지만 따르겠노라고 했다.
넷째부인에게 묻기를 ‘당신을 남달리 대접한 일은 없지만
나를 따르겠소?’하였다.
넷째부인은 잘났든 못났든 함께 살았으니 좇아가겠다고 했다.
첫째는 육신, 둘째는 재물, 셋째는 권속이고 넷째는 업식을 말한다.”
몸을 벗어도 업식은 남는다. 눈도 없고 귀도 없지만
몸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살아온 차원대로의 업식은 남아서 떠돈다.
마치 앞을 못 보는 장님처럼
오로지 생전의 습과 인과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고로 생전에 축생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면
죽어서도 축생의 몸을 받고 생전에 보살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면
보살의 차원대로 살게 된다. 그것은 누가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짓는대로 받는 법칙, 그것일 뿐이다.
육신이 사대로 흩어져 원점으로 되돌아가도
몸이 있었던 인과로 인해 업식은 몸이 있는 줄 안다.
또 악업 선업으로 뭉쳐진 업식은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앞을 가로막고 나서기 때문에 거기에 밟혀서
꼼짝없이 노예처럼 끌려 다닌다.
그러니 불을 만나면 타죽을까 겁내고
물을 만나면 빠져죽을까 겁내는 형국이 마치 육신 있을 때와 같다.
고로 사후의 일이란 물을 것도 없다.
생전에 했던 일을 스스로 일기장에 꼼꼼히 적어 놓은 것처럼
그것이 바로 사후의 문제를 결정한다.
나를 돕는 것은 오로지 수행의 힘뿐이다.
첫째부인도 돕지를 못하고 둘째 셋째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옷을 벗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데려갈 수도 없으니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쥐고 가지 못하고 들고 가지 못하고 먹고 가지 못한다.
재화도 놓고 가고 권력도 놓고 가고 명예도 놓고 간다.
가족도 버리고 간다. 갖고 나온 것이 없으니 들고 갈 것도 없다.
다만 가지고 왔고 갖고 가는 것은 생전에 시시로,
구구절절로 먹었던 마음뿐이다. 고로 마음도리를 알아야 한다.
몸 떨어지고 나면 그 차원 그대로 머물게 될 것인즉
육신이 온전할 때 마음을 닦아야 한다.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살아서 극락에 들어야 한다.
살아서 통행증을 얻어야 한다.
오늘 살아있다고 내일도 당연히 살아 있을 줄로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그런 착각 속에서 산다.
내게 내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당연히 내일은 밝아올 것이고
또 그다음 내일도 계속되리라 믿고 산다. 그래서 느긋하다.
오늘 못하면 내일에 하면 되지 하는 그런 심정이다.
그러나 오늘 못한 것을 내일엔 어떻게 하나?
누가 그걸 보장해주나? 내가 내일에 할 수 있다면 오늘엔 왜 못하나?
오늘 하면 왜 안되나? 오늘 못한 것은 내일에도 못하기 십상이다.
고로 시간이 없다. 느긋해할 시간이 없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한다.
마음도리를 공부하는 일은 날자 받아놓고 하는 일이 아니다.
순간순간에, 생활의 경계 경계마다 해야 하는 공부이다.
어차피 갖고 갈 수 없는 것이니 놓고 가라.
어차피 들고 갈 수 없으니 지금 놓고 가라.
들고 가는 사람은 고(苦)를 받지만
놓고 가는 삶에 고는 따르지 않는다.
놓고 가는 것은 바로 업식을 녹이는 길이다.
몸 떨어질 때 잔뜩 짊어지고 가야하는 업식을 덜어내는 일이다.
이왕이면 홀가분한 게 좋지 않겠나?
이왕이면 업식의 그림자에 묶여서
가고 올 길을 모르기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눈멀고, 귀멀어 헤매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마음도리를 익히지 않으면 시간은 없다.
당연히 내일이 찾아올 것이라는 느긋함은 금물이다.
그래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급하고 급한 것이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