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줄요약
색과 마음, 장단과 유무, 미진과 세계까지 모두 자심이 세운 분별의 자리임을 알 때, 수행자는 악견을 떠나 자각성지의 길로 들어갑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의 마지막 문구는 “隨入爲一切刹土最勝子,以自心現方便而教授之。”였습니다. 보살은 모든 국토에 들어가 가장 뛰어난 불자들을 교화하되, 바깥에 따로 고정된 진리를 세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방편으로 가르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은 능가경의 핵심인 자심현량과 바로 이어집니다. 모든 국토, 모든 중생, 모든 방편이 마음 밖에 따로 세워진 실체가 아니라, 마음의 나타남 속에서 방편으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생이 실제라고 붙잡는 세계가 어떻게 마음의 분별과 업식 위에서 성립하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번 회차는 부처님께서 앞의 뜻을 다시 게송으로 정리하시는 대목입니다. 색과 마음, 몸과 수용, 식장과 중생, 장단과 유무, 미진과 색의 망상, 그리고 자각성지의 경계가 차례로 제시됩니다. 이 게송은 짧지만 능가경 전체의 사상적 줄기가 매우 조밀하게 담겨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 대목을 단순한 철학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색도 없고 마음도 없다”는 말을 지식으로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세계가 어떤 마음의 자리에서 세워지는지를 직접 살펴야 합니다. 그때 능가경은 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3. 한문원문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이시세존욕중선차의,이설게언:
色等及心無,色等長養心,身受用安立,識藏現衆生。
색등급심무,색등장양심,신수용안립,식장현중생。
心意及與識,自性法有五,無我二種淨,廣說者所說。
심의급여식,자성법유오,무아이종정,광설자소설。
長短有無等,展轉互相生,以無故成有,以有故成無。
장단유무등,전전호상생,이무고성유,이유고성무。
微塵分別事,不起色妄想,心量安立處,惡見所不樂。
미진분별사,불기색망상,심량안립처,악견소불락。
覺想非境界,聲聞亦復然,救世之所說,自覺之境界。
각상비경계,성문역부연,구세지소설,자각지경계。
4. 한글번역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 보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색 등과 마음은 본래 실체가 없으나,
색 등은 도리어 마음을 길러낸다.
몸과 받아쓰는 경계가 세워지고,
식장은 중생의 세계를 드러낸다.
마음과 뜻과 식,
그리고 자성의 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며,
두 가지 무아와 청정의 뜻은
널리 설하는 이가 말한 바이다.
길고 짧음, 있음과 없음 등은
서로 굴러가며 의지해 생긴다.
없음으로 말미암아 있음이 성립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없음이 성립된다.
미진을 나누어 분석하는 일에
색에 대한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
마음의 헤아림이 세운 곳은
악견을 지닌 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깨달음의 생각은 분별의 경계가 아니며,
성문 또한 그러하다.
세상을 구제하시는 이가 설하신 것은
스스로 깨닫는 지혜의 경계이다.”
5. 경전의 종지
이번 대목은 능가경의 핵심인 자심현량을 게송으로 압축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색을 부정하고 마음만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색도 실체로 붙잡을 것이 아니고, 마음도 실체로 붙잡을 것이 아닙니다. 색과 마음이 서로 기대어 중생의 경험 세계를 이루는 과정을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色等及心無”라는 구절은 색 등의 경계와 마음이 모두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色等長養心”이라고 하십니다. 색 등이 마음을 길러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바깥 경계처럼 보이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기억, 관념이 마음의 분별을 자라게 합니다. 마음은 경계를 붙잡고, 경계는 다시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중생의 세계가 계속 이어집니다.
“識藏現衆生”이라는 구절도 중요합니다. 식장은 아뢰야식의 깊은 저장 작용을 가리킵니다. 중생의 세계는 단순히 눈앞의 사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래 쌓인 업의 종자, 습관, 기억, 욕망, 두려움이 조건을 만나 세계처럼 드러납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만나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바깥 경계가 하나처럼 보여도, 각자의 식장이 드러내는 세계는 서로 다릅니다.
능가경은 이처럼 공과 유식의 뜻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어 공하지만, 그 공한 세계는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이 아니라 업식과 분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없다”에 머물러도 안 되고, “있다”에 집착해도 안 됩니다.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나, 마음이 세계를 세우는 자리를 직접 보아야 합니다.
6. 경전 이해를 위한 심층 탐구
1) 색과 마음은 서로 의지해 분별 세계를 이룹니다
“色等及心無”는 색도 마음도 본래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색은 눈앞에 분명히 보이지만, 우리가 붙잡는 색은 이미 마음의 해석을 거친 색입니다. 같은 꽃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시들어 간다고 느끼며, 어떤 사람은 아무 감흥 없이 지나갑니다. 꽃이라는 대상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면 모두가 같은 세계를 경험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음만 따로 실체로 세우는 것도 능가경의 뜻이 아닙니다. 마음도 조건을 따라 일어나고, 이름과 기억과 습관을 따라 흐르는 작용입니다. 마음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고정된 주인처럼 붙잡으면 그것도 또 하나의 망상입니다. 능가경은 색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마음에 대한 집착도 깨뜨립니다.
그러나 색과 마음이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해서 아무 작용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色等長養心”이라 하신 것처럼 색 등의 경계는 마음의 분별을 길러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보는 것, 반복해서 듣는 것,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 습관을 키웁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무엇을 가까이하고 무엇을 멀리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을 대하는 마음의 작용을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2) 몸과 수용은 마음이 세운 자리입니다
“身受用安立”은 몸과 수용의 세계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한 육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느끼는 중심, 경험을 받아들이는 자리, 세계를 내 쪽에서 해석하는 틀까지 함께 포함합니다. 수용은 몸과 마음이 경계를 받아들여 자기 경험으로 삼는 작용입니다.
우리는 몸이 있으므로 세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이 있으니 색을 보고, 귀가 있으니 소리를 듣고, 몸이 있으니 추위와 더위를 느낍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몸과 수용의 세계도 마음과 식의 흐름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몸이라고 붙잡는 감각조차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하는 경험의 묶음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통증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경험이 달라집니다. 두려움이 섞이면 통증은 더 커지고, 분노가 섞이면 괴로움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반대로 알아차림이 있으면 통증은 여전히 있어도 그것을 둘러싼 마음의 괴로움은 줄어듭니다. 몸의 경험 역시 마음의 해석과 떨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3) 식장은 중생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識藏現衆生”은 이번 게송의 중심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식장은 아뢰야식의 저장 작용을 말합니다. 중생은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래 쌓인 업의 종자, 기억, 감정의 습관, 반복된 욕망과 두려움이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조건을 만나 세계를 드러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상처받고, 어떤 사람은 분노합니다. 바깥의 말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식장 속에 저장된 종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누군가는 평화를 느끼고,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끼며,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갑니다. 이처럼 중생이 사는 세계는 단순한 외부 세계가 아니라 식장이 드러낸 경험 세계입니다.
이 점을 알면 수행자는 남 탓만 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현실의 잘못이나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 괴로움이 내 안의 어떤 습기와 만나 커지는지 보아야 합니다. 바깥 경계만 붙잡으면 끝없이 상대를 바꾸려 하지만, 식장의 흐름을 보면 같은 괴로움이 반복되는 뿌리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4) 마음·뜻·식은 한 흐름의 다른 작용입니다
“心意及與識”은 능가경과 유식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마음, 뜻, 식은 서로 완전히 떨어진 세 물건이 아닙니다. 한 마음의 흐름을 작용에 따라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마음은 깊이 저장하고 모으는 작용으로, 뜻은 그 저장된 흐름을 자기 것으로 붙잡고 헤아리는 작용으로, 식은 대상을 나누어 아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씨앗을 품습니다. 뜻은 그 씨앗을 “나”와 “내 것”으로 붙잡습니다. 식은 그 붙잡음을 바탕으로 대상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해석된 세계를 봅니다. 그냥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섞인 소리를 듣습니다.
수행이란 이 흐름을 억지로 끊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떻게 저장하고, 뜻이 어떻게 붙잡고, 식이 어떻게 나누는지를 밝게 보는 일입니다. 밝게 보면 집착의 힘이 약해집니다. 붙잡는 마음이 약해지고, 분별의 날카로움이 누그러집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의 실제 길입니다.
5) 다섯 가지 자성법은 분별과 깨달음의 구조를 함께 보여 줍니다
“自性法有五”라는 구절은 능가경의 오법 체계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오법은 보통 이름, 모양, 분별, 바른 지혜, 여여로 설명됩니다. 중생은 이름과 모양을 붙잡고 분별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 분별의 허망함을 보고 바른 지혜를 얻으며, 마침내 여여한 자리로 들어갑니다.
이름은 대상을 부르는 말입니다. 모양은 그 말에 의해 붙잡힌 형상입니다. 분별은 이름과 모양을 실체처럼 여기며 좋고 싫음, 옳고 그름,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는 작용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대부분 이 세 가지 위에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잡고, 그것을 실체로 믿습니다.
그러나 바른 지혜가 일어나면 이름과 모양이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님을 봅니다. 그러면 분별의 힘이 줄어듭니다. 그때 드러나는 자리가 여여입니다. 여여는 억지로 만든 평온이 아니라, 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함을 보는 자리입니다. 능가경의 가르침은 결국 이름과 모양을 떠나 바른 지혜와 여여로 나아가게 합니다.
6) 두 가지 무아는 수행의 문을 엽니다
“無我二種淨”은 두 가지 무아와 청정의 뜻을 말합니다. 두 가지 무아는 인무아와 법무아입니다. 인무아는 고정된 “나”가 없다는 뜻이고, 법무아는 모든 법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이 둘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무아를 알면 “나”에 대한 집착이 약해집니다. 내 자존심, 내 욕망, 내 상처, 내 판단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생긴 흐름임을 알게 됩니다. 법무아를 알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약해집니다. 내가 붙잡는 사람, 물건, 생각, 교리, 판단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임시로 성립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무아를 함께 보아야 청정이 열립니다. 나만 비우고 법을 실체로 붙잡아도 안 되고, 법만 공하다고 하면서 나에 대한 집착을 남겨 두어도 안 됩니다. 나와 법이 함께 공함을 볼 때, 마음은 비로소 분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7) 장단과 유무는 서로 기대어 생깁니다
“長短有無等,展轉互相生”은 매우 선종적인 구절로 읽을 수 있습니다. 길다는 말은 짧다는 말이 있어야 성립합니다. 있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 있어야 성립합니다. 깨끗하다는 말도 더럽다는 말이 있어야 생기고, 높다는 말도 낮다는 말이 있어야 생깁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사실처럼 붙잡는 많은 판단은 사실 관계 속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긴 것도 따로 길지 않고, 짧은 것도 따로 짧지 않습니다. 있음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없음도 홀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기대고 서로 비추며 분별의 세계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있다”에 집착하지 않고 “없다”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하면 상견에 떨어지고, 없다고 하면 단견에 떨어집니다. 능가경은 계속해서 이 양변을 떠나라고 가르칩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기대어 생긴 이름임을 보면, 마음은 조금씩 중도의 눈을 얻게 됩니다.
8) 미진을 분석해도 실체는 잡히지 않습니다
“微塵分別事,不起色妄想”은 앞 회차의 토끼 뿔과 소 뿔 논의와도 이어집니다. 외도들은 사물을 분석하여 끝까지 들어가면 어떤 근본 실체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미진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고정된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분석의 지성만으로는 망상을 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세밀하게 나누어도, 나누고 있는 마음 자체를 보지 못하면 다시 분별입니다. 미진을 붙잡는 것도 분별이고, 미진이 없다고 붙잡는 것도 분별입니다.
수행자는 분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분석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유는 필요하지만 사유만으로는 자각의 경계에 들 수 없습니다. 분별의 칼날이 멈추고, 마음이 자기 작용을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능가경의 문이 열립니다.
7. 선종과 마음공부로 읽기
1) 바깥 경계를 고치기 전에 마음이 세운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선종에서 마음공부는 바깥세상을 부정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깥을 보되, 바깥이라고 믿는 그 자리가 어떻게 마음에서 세워지는지를 보는 공부입니다. 능가경의 “心量安立處”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헤아림이 자리를 세우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을 한 번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의 말과 행동이 모두 밉게 보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말을 해도 의심하고, 조용히 있어도 불편하게 느낍니다.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이 세운 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저 사람은 나쁘다”는 자리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선종 수행은 이 자리를 깨뜨립니다. “정말 그런가?” 하고 묻습니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세운 그림자인가?” 하고 돌이켜 봅니다. 이 한 번의 돌이킴이 자심현량의 문입니다.
2) 악견은 마음이 세운 세계를 실체로 믿는 데서 생깁니다
“惡見所不樂”이라는 말은 악견을 지닌 이들이 이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 좋아하지 않을까요? 악견은 붙잡을 것이 있어야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며, 이것은 있고 저것은 없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구조가 있어야 유지됩니다.
그런데 능가경은 장단과 유무가 서로 의지해 생긴다고 말합니다. 색과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세운 자리를 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악견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래서 악견을 가진 마음은 이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자기 고집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믿어 온 자리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 자리를 내려놓을 때, 마음은 잠시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그 불안을 견디고 보면, 고집이 사라진 자리에 넓은 지혜가 나타납니다.
3) 자각의 경계는 말로 붙잡을 수 없습니다
“自覺之境界”는 능가경 전체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자각의 경계는 남이 대신 증명해 주는 경계가 아닙니다. 글로 외워서 얻는 경계도 아니고, 논리로 이겨서 얻는 경계도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을 직접 비추어 보고, 분별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스스로 깨닫는 경계입니다.
선종에서 “문자를 떠난다”고 할 때, 그것은 경전을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자를 붙잡아 분별의 집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능가경은 말로 설해졌지만, 그 말은 말을 떠난 자리를 가리킵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물고 있으면 달을 보지 못합니다.
이번 게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색과 마음, 장단과 유무, 미진과 식장을 배워야 하지만, 그것을 지식으로만 쌓으면 다시 분별입니다. 배운 것을 자기 마음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무엇을 있다고 하고 무엇을 없다고 하는지, 무엇을 길다 하고 짧다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4) 성문의 경계와 보살의 경계
“聲聞亦復然”이라는 말은 성문 또한 이 자각의 경계를 분별로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문은 고통을 여의고 열반을 구하는 수행자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더 깊은 보살의 길을 말합니다. 보살은 자기 해탈에만 머물지 않고, 일체 중생이 마음의 망상을 떠나도록 방편을 일으킵니다.
지난 회차의 “以自心現方便而教授之”와 이번 회차의 “自覺之境界”가 여기서 만납니다. 보살은 자기가 깨달은 마음의 이치를 바탕으로 중생에게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생을 실체로 붙잡지 않고, 국토를 실체로 붙잡지 않고, 방편도 실체로 붙잡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심이 나타낸 자리임을 알기에 자유롭게 들어가고 자유롭게 가르칩니다.
이것이 능가경의 보살도입니다. 공을 알아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공을 알기에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음이 만든 환영임을 알기에 환영을 미워하지 않고, 환영에 속지 않기에 환영 속에서 중생을 돕습니다.
8. 경전에 인용된 용어 풀이
1) 色等
색 등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형상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경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표현입니다. 중생이 대상으로 붙잡는 모든 경계를 가리킵니다.
2) 長養心
장양심은 마음을 기르고 자라게 한다는 뜻입니다. 바깥 경계처럼 보이는 색 등이 마음의 분별과 습기를 더욱 키우는 작용을 말합니다.
3) 識藏
식장은 아뢰야식의 저장 작용을 가리킵니다. 업의 종자와 습기가 저장되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중생의 경험 세계로 드러납니다.
4) 心意識
심·의·식은 한 마음의 서로 다른 작용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심은 저장하고, 의는 붙잡아 헤아리며, 식은 대상을 분별해 아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自性法有五
자성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한 대목입니다. 능가경의 문맥에서는 이름, 모양, 분별, 바른 지혜, 여여 등의 오법 체계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계를 분별로 세우는 방식과 그 분별을 넘어서는 지혜의 구조를 함께 말합니다.
6) 無我二種淨
두 가지 무아는 인무아와 법무아를 말합니다. 인무아는 고정된 “나”가 없다는 뜻이고, 법무아는 모든 법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둘을 밝게 알 때 청정의 길이 열립니다.
7) 長短有無
길고 짧음, 있음과 없음은 서로 대비되어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능가경은 이러한 상대적 개념을 실체로 붙잡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8) 微塵
미진은 아주 작은 물질 단위를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물질을 끝까지 분석해도 고정된 실체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할 때 자주 쓰입니다.
9) 心量安立處
마음의 헤아림이 세운 자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많은 것은 마음의 분별과 이름 붙임에 의해 세워진 자리입니다.
10) 自覺之境界
스스로 깨닫는 경계입니다. 남의 말이나 문자, 논리로만 아는 경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작용을 직접 비추어 보고 증득하는 지혜의 자리입니다.
9. 결론
이번 19회차는 능가경의 중요한 흐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 줍니다. 색과 마음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세계는 식장의 흐름 속에서 드러납니다. 장단과 유무는 서로 기대어 생긴 이름이고, 미진을 분석해도 자성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바깥 경계에 속지 말고, 동시에 마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공부의 핵심은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세계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누가 나를 괴롭힌다고만 생각하기 전에, 그 괴로움이 내 마음속 어떤 습기와 만나 커지는지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반드시 있다고 고집하기 전에, 그 있음이 어떤 없음과 대비되어 생긴 말인지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없다고 부정하기 전에, 그 없음조차 있음에 기대어 세워진 분별임을 보아야 합니다.
능가경은 우리에게 허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책임을 말합니다. 세계가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면, 수행자는 자기 마음을 밝히는 일을 미룰 수 없습니다. 자심현량을 바로 보는 사람은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분별에 갇히지 않으며, 방편으로 중생을 돕는 길로 나아갑니다.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10. 참고문헌
『楞伽阿跋多羅寶經』 劉宋 求那跋陀羅 譯, 大正藏 T16 No.670, 4권본.
『入楞伽經』 菩提流支 譯, 大正藏 T16 No.671, 10권본.
『大乘入楞伽經』 實叉難陀 譯, 大正藏 T16 No.672, 7권본.
CBETA 및 대정신수대장경 계열 원문 자료.
능가경 주석 전통 및 선종의 자심현량·분별타파 해석.
#정혜의구도행 #능가경 #능가경강해 #楞伽經 #楞伽阿跋多羅寶經 #자심현량 #유식 #아뢰야식 #식장 #마음공부 #선종 #불교공부 #불교경전 #분별타파 #자각성지 #보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