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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

능가경 강해 6회

작성자박상준|작성시간26.06.07|조회수77 목록 댓글 0

 

 


 

1. 한줄요약

이번 대목에서 대혜보살은 허공, 바람, 구름, 기억, 총명, 숲, 나무, 풀, 짐승, 천한 삶, 일천제, 남녀의 몸까지 묻습니다. 겉으로는 세상의 온갖 현상을 묻는 것 같지만, 깊이 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분별과 이름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2. 머릿말

지난 회차에서 대혜보살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와 외도는 각각 몇 종류입니까?

자성과 마음은 또 각각 몇 종류입니까?

시설된 헤아림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은 시설량입니다.

시설은 세운다는 뜻입니다. 본래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중생의 분별과 언어와 인식이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이름으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양은 헤아림입니다. 그러므로 시설량은 우리가 세상을 나누고, 이름 붙이고, 판단하고, 분류하는 인식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대목은 바로 그 질문의 연장입니다.

대혜보살은 허공과 바람과 구름을 묻습니다. 기억과 총명을 묻습니다. 숲과 나무와 덩굴풀을 묻습니다. 코끼리와 말과 사슴을 묻습니다. 더 나아가 왜 어떤 이는 천하게 태어나며, 왜 일천제라 불리는 존재가 있으며, 왜 남자와 여자와 불남의 몸이 생기는지를 묻습니다.

겉으로 보면 자연학, 생물학, 사회학, 인간학의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의 문맥에서 이것은 단순히 세상 만물의 기원을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대혜보살은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 모든 차별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이름과 형상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사람이 귀하고 천하다는 분별, 남자와 여자라는 분별, 깨달을 수 있는 자와 깨달을 수 없는 자라는 분별은 정말 고정된 실체인가?”

『능가경』은 이 질문을 통해 중생의 마음이 어떻게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에서 다시 스스로 묶이는지를 드러내려 합니다.

 


 

3. 한문원문

云何空風雲?云何念聰明?

운하공풍운? 운하념총명?

云何為林樹?云何為蔓草?

운하위림수? 운하위만초?

云何象馬鹿?云何而捕取?

운하상마록? 운하이포취?

云何為卑陋?何因而卑陋?

운하위비루? 하인이비루?

云何六節攝?云何一闡提?

운하육절섭? 운하일천제?

男女及不男,斯皆云何生?

남녀급불남, 사개운하생?

 


 

4. 한글번역

무엇을 허공이라 하고, 무엇을 바람과 구름이라 합니까?

무엇을 기억이라 하고, 무엇을 총명이라 합니까?

무엇을 숲과 나무라 하고, 무엇을 덩굴풀이라 합니까?

무엇을 코끼리와 말과 사슴이라 하며, 그것들은 어떻게 잡히게 됩니까?

무엇을 천하고 누추하다고 하며, 무슨 인연으로 천하고 누추하게 됩니까?

무엇을 여섯 절기로 거두어 말하며, 무엇을 일천제라 합니까?

남자와 여자와 불남은 모두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5. 경전의 종지

이번 대목의 핵심은 “이름 붙여진 세계”입니다.

허공, 바람, 구름, 숲, 나무, 풀, 짐승, 남자, 여자, 천한 사람, 총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깨달을 수 있는 사람, 깨달을 수 없는 사람.

우리는 이런 이름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능가경』은 그 당연함을 흔듭니다.

우리가 허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공이 정말 하나의 물건처럼 어딘가에 있습니까?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색깔이 있습니까? 모양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허공이라고 말합니다.

바람도 그렇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나뭇잎이 흔들리고, 피부가 차갑게 느끼고, 먼지가 움직일 때 우리는 “바람이 분다”고 말합니다.

구름도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 하늘에 모였다가 흩어집니다. 조금 전의 구름과 지금의 구름이 같은 구름입니까? 이름은 하나인데, 그 실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능가경』은 이런 현상을 통해 말합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붙잡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인식하고 분별하고 이름 붙인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묻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름과 차별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이 질문은 곧 『능가경』 전체의 중심 주제인 자심현량으로 이어집니다.

자심현량이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바를 자기 마음 밖의 실재처럼 헤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추고, 마음이 이름 붙이고, 마음이 분별한 것을 다시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착각입니다.

 


 

6. 경전 이해를 위한 심층 탐구

1) 허공·바람·구름은 실체가 아니라 인식의 이름입니다

대혜보살은 먼저 허공, 바람, 구름을 묻습니다.

허공은 비어 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어 있음을 하나의 대상처럼 부릅니다. 바람은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움직임을 하나의 사물처럼 말합니다. 구름은 수증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잠정적 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구름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있다”와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능가경』은 허공도 없고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다고 단순히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허무론이 됩니다. 반대로 허공과 바람과 구름이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상견이 됩니다.

『능가경』은 이 둘을 모두 떠납니다.

허공, 바람, 구름은 인연 따라 드러납니다. 그러나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있지만 실체로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중도적 이해입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야.”

“이 관계는 끝났어.”

“나는 불행한 사람이야.”

우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도 허공, 바람, 구름과 같습니다. 조건 따라 생긴 마음의 모양일 뿐입니다.

2) 기억과 총명도 고정된 자아의 능력이 아닙니다

대혜보살은 “무엇을 기억이라 하고, 무엇을 총명이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 총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을 쉽게 나눕니다. 그러나 『능가경』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고정된 자아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억은 과거 경험의 흔적이 현재 마음 위에 다시 드러나는 작용입니다. 총명은 인연과 습관과 관찰력과 집중력이 어우러져 생기는 작용입니다. 이것을 “나의 고정된 능력”이라고 붙잡으면 곧 아상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높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억력이 약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낮춥니다. 그러나 능가의 관점에서는 둘 다 자심현량입니다.

총명하다는 생각도 마음이 세운 이름이고, 어리석다는 생각도 마음이 세운 이름입니다.

물론 세속적으로 능력의 차이는 있습니다. 수행은 그 차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차이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나는 똑똑하다”는 생각에 묶이면 교만이 생깁니다.

“나는 어리석다”는 생각에 묶이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둘 다 마음이 만든 굴레입니다.

마음공부는 똑똑한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나를 미워하는 길도 아닙니다. 기억과 총명, 무지와 둔함까지도 인연 따라 일어난 마음의 작용임을 보는 길입니다.

3) 숲과 나무와 덩굴풀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대혜보살은 이어서 숲, 나무, 덩굴풀을 묻습니다.

숲은 무엇입니까?

나무 한 그루를 숲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많이 모이면 숲이라 합니다. 그런데 숲이라는 것이 나무와 따로 있습니까? 나무를 모두 제거하고도 숲이 남아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숲은 나무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입니다. 숲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숲이라는 독립된 실체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숲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숲에 들어가면 그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향기가 있고, 새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숲은 있습니다. 그러나 자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있습니다.

이것이 『능가경』이 계속해서 가리키는 지점입니다.

모든 것은 이름으로 성립하지만, 이름 그대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 느낌, 생각, 기억, 습관, 관계, 언어, 욕망, 두려움이 모여 잠정적으로 성립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을 실체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욕당했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가 실패했다”, “내가 이겨야 한다”고 집착합니다.

숲을 숲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숲이라는 이름 뒤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를 나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나를 변하지 않는 실체로 붙잡는 것입니다.

4) 코끼리·말·사슴과 포획의 문제

대혜보살은 “무엇을 코끼리와 말과 사슴이라 하며, 그것들은 어떻게 잡히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중생의 다양한 몸과 업입니다. 코끼리, 말, 사슴은 각각 다른 몸, 다른 습성, 다른 힘,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차이를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업과 인연의 흐름 속에서 중생의 몸과 환경이 다르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둘째는 포획입니다. 잡힌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이 사냥당하는 사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깊이 보면 중생이 자기 습성에 의해 잡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코끼리는 힘으로 잡히고, 말은 길들임으로 잡히고, 사슴은 두려움과 미끼로 잡힙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에 잡힙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잡힙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에 잡힙니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에 잡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에 잡힙니다.

밖에서 누가 잡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의 습관이 자기를 잡습니다.

선종에서는 이것을 한마디로 돌이켜 묻습니다.

“지금 무엇에 끌려가고 있는가?”

잡히는 마음을 보면, 잡은 자와 잡힌 자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밖의 대상이 나를 묶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붙잡는 내 마음이 나를 묶습니다.

5) 비루함은 본질이 아니라 업과 분별의 이름입니다

대혜보살은 “무엇을 천하고 누추하다고 하며, 무슨 인연으로 천하고 누추하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비루는 천하고 낮고 누추하다는 뜻입니다. 현대적으로 읽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의 본질이 원래 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능가경』의 깊은 뜻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속의 눈은 사람을 높고 낮게 나눕니다.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깨끗한 사람, 더러운 사람,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능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구분도 인연 따라 세워진 시설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것, 몸이 불편한 것,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 거친 환경 속에 놓인 것은 모두 여러 인연이 모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은 본래 천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분별입니다.

불교는 업을 말하지만, 업을 운명론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업은 고정된 낙인이 아닙니다. 업은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의 조건은 과거 인연의 결과이지만, 지금 일으키는 마음과 행위는 미래 인연의 씨앗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수행은 사람을 다시 보게 합니다.

누군가를 낮게 보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이 바로 비루한 마음입니다.

자신을 함부로 낮추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도 비루한 마음입니다.

사람을 겉모습과 조건으로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이 곧 무명입니다.

『능가경』은 묻습니다.

“무엇이 정말 천한가?”

몸이 천한 것이 아니라, 분별에 갇힌 마음이 천합니다. 조건이 낮은 것이 아니라, 자비를 잃은 마음이 낮습니다.

6) 육절섭은 시간도 마음이 나눈다는 뜻입니다

대혜보살은 “무엇을 여섯 절기로 거두어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육절은 여섯 절기, 여섯 계절의 구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도 전통에서는 한 해를 여섯 시절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절의 명칭 자체가 아닙니다.

핵심은 시간 역시 인간이 나누어 세운다는 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이름은 편리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어느 날 갑자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그 흐름을 나누어 이름 붙입니다.

나이도 그렇습니다.

스무 살, 마흔 살, 예순 살, 일흔 살이라는 숫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 숫자에 붙잡혀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나는 이제 늦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이 나이에 무슨 수행이냐.”

“이 나이에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

이것도 시간에 대한 시설입니다.

『능가경』은 시간의 구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구분에 갇히지 말라고 합니다. 시간은 흐름입니다. 이름은 편의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편의를 실체로 삼고, 그 실체에 스스로 묶입니다.

수행은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봄이든 겨울이든, 젊든 늙었든, 지금 한 생각을 돌이키면 그 자리가 공부 자리입니다.

7) 일천제는 버려진 존재인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마음인가

대혜보살은 “무엇을 일천제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일천제는 산스크리트어 icchantika의 음역으로,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을 낳은 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선근을 끊고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없는 존재, 또는 해탈의 길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단순히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사람”으로 이해하면 『능가경』의 자비와 맞지 않습니다.

『능가경』은 여래장과 유식의 흐름을 함께 품고 있는 경전입니다. 중생의 마음은 무명에 덮여 있지만, 그 깊은 자리에는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천제라는 말도 어떤 존재를 영원히 버리기 위한 낙인이 아니라, 선근을 등지고 욕망과 분별에 깊이 사로잡힌 상태를 설명하는 말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일천제의 마음은 나타납니다.

진실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

잘못을 알아도 돌이키지 않으려는 마음.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마음.

남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마음.

수행과 자비를 비웃는 마음.

이런 마음이 일천제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마음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진실을 피하고 있음을 알면, 이미 일천제의 문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자비를 잃고 있음을 알면, 이미 선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선종식으로 말하면, 일천제도 한 생각 돌이키면 본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누군가를 버리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마음이 스스로 깨달음의 문을 닫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8) 남자·여자·불남도 고정된 자성이 아닙니다

대혜보살은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와 불남은 모두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불남은 문자 그대로는 남자가 아닌 존재, 또는 남녀의 일반적 구분에 들어맞지 않는 몸을 가리키는 고전적 표현입니다. 이 대목을 현대적 개념으로 성급하게 끌어다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능가경』의 관점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남자라는 이름도, 여자라는 이름도, 불남이라는 이름도 고정된 자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몸은 업과 인연으로 받습니다. 성별도 몸의 조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 몸의 조건 위에 강한 자아상을 세웁니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래야 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저래야 한다.”

“저 사람은 이런 몸이므로 낮다.”

“저 사람은 저런 조건이므로 다르다.”

이렇게 몸의 차이를 실체화하면 곧 분별이 됩니다.

불교는 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몸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몸은 수행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몸을 참나로 붙잡지는 않습니다.

몸은 인연입니다.

성별도 인연입니다.

역할도 인연입니다.

사회적 이름도 인연입니다.

그 인연을 따라 살아가되, 그 이름에 갇히지 않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7. 선종과 마음공부로 읽기

1) 이름 붙이는 순간, 세계가 생깁니다

선종에서는 자주 말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난다.”

이번 대목이 바로 그 뜻입니다.

허공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허공이 생깁니다.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바람이 생깁니다. 숲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숲이 생깁니다.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남자, 여자, 총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런 세계가 생깁니다.

물론 이름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름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실체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선종의 공부는 이름을 없애는 공부가 아닙니다. 이름에 속지 않는 공부입니다.

꽃을 꽃이라 부르되, 꽃이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습니다.

나를 나라 부르되, 나라는 상에 묶이지 않습니다.

남을 남이라 부르되, 남이라는 경계에 막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름을 떠난 마음공부입니다.

2) 내 마음이 세운 사람을 실제 사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내 마음이 만든 이미지로 봅니다.

한 번 미운 사람은 계속 밉게 보입니다.

한 번 실망한 사람은 계속 부족하게 보입니다.

한 번 나를 도와준 사람은 계속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한 번 상처 준 사람은 계속 나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이 변해도 내 마음속 이름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심현량입니다.

내 마음이 만든 상을 보고, 그것을 실제 사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선종의 마음공부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인가, 내 마음이 붙인 이름인가?”

이 질문 하나만 깊이 해도 많은 분노가 풀립니다. 왜냐하면 분노의 상당 부분은 실제 사건보다 내가 붙인 해석에서 커지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

저 사람이 일부러 그랬다.

나는 항상 이런 대접을 받는다.

이런 말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사실인지 분별인지 보아야 합니다.

이름 붙인 마음을 보면, 그 이름의 힘이 약해집니다.

3) 천함과 귀함은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조건으로 봅니다. 재산, 학력, 직업, 외모, 나이, 성별, 건강, 말솜씨, 집안, 인맥으로 봅니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의 방향을 봅니다.

자기보다 약한 이를 함부로 대하면, 높은 자리에 있어도 천한 마음입니다.

가난해도 남을 해치지 않고 정직하게 살면, 그 삶은 귀합니다.

배움이 많아도 교만하면 어둡고, 배움이 적어도 부끄러움을 알면 밝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목의 비루는 단순히 신분이나 외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비루한 것은 자비를 잃은 마음입니다.

참으로 귀한 것은 깨달음을 향해 돌이키는 마음입니다.

선종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 남자와 여자, 귀한 이와 천한 이를 본래 마음의 자리에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혹하면 중생이고, 깨치면 부처입니다.

이 말은 모든 조건을 무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조건은 다릅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차별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4) 일천제의 마음도 알아차리면 공부가 됩니다

우리 안에는 부처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천제의 마음도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은 밀어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마음.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려는 마음.

남이 아픈 것보다 내가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한 마음.

수행보다 욕망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마음.

이 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보아야 합니다.

보는 순간, 그 마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선종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쁜 마음을 없애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마음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를 비추어 봄으로써 그 마음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천제의 마음을 보는 그 마음은 이미 일천제가 아닙니다.

 


 

8. 경전에 인용된 용어 풀이

1) 空風雲

허공, 바람, 구름입니다. 모두 고정된 실체로 붙잡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능가경』에서는 이런 자연 현상을 통해 이름과 형상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2) 念

기억, 생각, 마음에 간직된 작용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기억력만이 아니라, 마음이 과거의 흔적을 붙잡고 현재에 다시 드러내는 작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聰明

총명함, 밝게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불교적으로는 고정된 자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연 따라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4) 林樹

숲과 나무입니다. 숲은 나무들의 모임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 말은 집합적 명칭이 독립된 실체처럼 착각되는 문제를 보여 줍니다.

5) 蔓草

덩굴풀입니다. 인연 따라 뻗고 얽히는 생명 현상을 가리킵니다. 마음의 습관도 덩굴처럼 서로 얽히고 번져 갑니다.

6) 象馬鹿

코끼리, 말, 사슴입니다. 중생의 다양한 몸과 습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각각의 존재는 업과 인연에 따라 다른 몸과 환경을 받습니다.

7) 捕取

잡음, 포획함입니다. 겉으로는 동물이 잡히는 일을 말하지만, 마음공부로 읽으면 중생이 자기 욕망과 습관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뜻합니다.

8) 卑陋

천하고 누추하다는 뜻입니다. 불교적으로는 어떤 존재의 본질이 낮다는 뜻이 아니라, 업과 인연, 세속의 분별에 의해 낮고 천하다고 이름 붙여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9) 六節攝

여섯 절기, 여섯 시절의 구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계절도 자연의 흐름 위에 인간이 세운 이름과 분류임을 보여 줍니다.

10) 一闡提

일천제입니다. 선근을 끊고 깨달음의 길에서 멀어진 존재 또는 그런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대승의 자비에서 보면 영원히 버려진 존재라기보다, 아직 깊은 무명에 덮인 상태로 이해해야 합

니다.

11) 男女及不男

남자, 여자, 불남입니다. 몸의 차별과 성별의 구분도 업과 인연에 따라 드러나는 조건이지, 고정된 자성은 아닙니다.

 


 

9. 결론

이번 대목에서 대혜보살은 허공, 바람, 구름, 기억, 총명, 숲, 나무, 짐승, 천한 삶, 절기, 일천제, 남녀의 몸까지 묻습니다.

질문은 매우 넓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입니다.

“이 모든 차별은 어떻게 생기는가?”

『능가경』은 그 답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세계는 단순히 밖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보고, 마음이 이름 붙이고, 마음이 헤아리고, 마음이 붙잡습니다. 그리하여 허공도 세계가 되고, 바람도 대상이 되고, 나무도 이름이 되고, 사람도 판단이 되고, 나 자신도 하나의 상이 됩니다.

수행은 이 세계를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이름 붙여진 세계에 속지 않는 일입니다.

허공을 허공이라 부르되 허공에 속지 않고,

나무를 나무라 부르되 나무에 속지 않고,

나를 나라 부르되 나에 속지 않고,

남을 남이라 부르되 남이라는 상에 막히지 않는 것.

그것이 『능가경』이 가리키는 마음공부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이름을 붙입니다.

좋다.

나쁘다.

귀하다.

천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나는 늦었다.

저 사람은 틀렸다.

나는 안 된다.

그 이름들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세운 시설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생각 이름 붙이는 자리에서 세계가 생기고,

한 생각 돌이켜 보는 자리에서 세계가 풀립니다.

이번 대목은 바로 그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10. 참고문헌

『楞伽阿跋多羅寶經』, 劉宋 求那跋陀羅 譯, 大正藏 T16 No.670.

CBETA, 『大正新脩大藏經』 T0670 『楞伽阿跋多羅寶經』.

D. T. Suzuki, The Lankavatara Sutra: A Mahayana Text.

Red Pine, The Lankavatara Sutra: Translation and Commentary.

高崎直道, 『楞伽経』, 佛典講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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