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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삼석 신부 - 요한 19,34의 “피와 물”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

작성자사랑 은총 평화|작성시간11.08.04|조회수292 목록 댓글 0

요한 19,34의 “피와 물”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해석

 

 

손삼석 신부(부산가톨릭대학 성서신학 교수)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19,31-37의 위치

Ⅲ. 문학적인 구조

Ⅳ. 34절의 병행구절

Ⅴ. 34절의 주해

1. 찔렀다(ἔνυξεν)

2. 예수의 옆구리

3. 피와 물

Ⅵ.다양한 해석들

1. 비성사론적 해석

2. 성사론적 해석

3. 파스카적 해석

4. 그리스도론적 해석

Ⅶ. 피와 살의 상징적인 가치와 신학적 해석

1. 찔린 옆구리의 상징

2. 피와 물의 상징적 가치

Ⅷ. 맺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기원후 30년 4월 8일 예수께서 골고타 동산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의 이 역사적인 죽음을 두고 복음사가들은 자기들의 신학에 따라 각기 달리 몇 가지 사실들을 각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다. 공관복음사가들은 예수의 죽음을 전하면서 몇몇 기적적이고 특별한 사실들을 언급한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38; 마태 27,51; 루가 23,45); “무덤들이 열리고 잠들었던 성인들의 많은 육신들이 일으켜졌다”(마태 27,52);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마르 15,39; 마태 27,54) 등.

하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외부의 사건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몸 자체에서 일어난 한 표징을 전하고 있다: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19,34) 물론 공관복음은 이 사실을 전하지 않는다. 즉 요한의 특수 전승인 것이다. 요한의 수난기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이 짧은 한 절을 두고 초대교회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다. 본고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흐름을 보고 나서 현대의 한 신학자(I. de la Potterie)가 주장하는 그리스도론적 해석을 중심으로 새로운 해석의 시도를 해 보고자 한다.

 

 

Ⅱ.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19,31-37의 위치

 

요한 19,34이 속해있는 31-37절의 단락이 요한의 수난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살펴보는 것도 34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요한복음의 수난기 전체를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예수의 체포(18,1-11), 대제관 앞에서의 예수(18,12-27),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18,28-19,16), 십자가의 길과 골고타에서 일어난 일들(19,17-37), 예수의 매장(19,38-42).

네 번째 단락(19,17-37)의 서두에는 십자가의 길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안에 십자가형과 십자가 위에서 들어올림(17-18)이 포함되어 있다. 이 네 번째 단락도 다섯 가지의 주제로 된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유대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19-22); 겉옷과 속옷의 나눔(23-24); 예수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던 제자(25-27); 목마르심, 마지막 말씀과 영을 넘기심(28-30);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름(31-37). 이렇게 볼 때 19,31-37의 단락은 요한복음의 수난기의 네 번째 단락 맨 끝 부분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예수의 매장 직전에 놓여 있음으로써 실제적인 수난기의 절정이요 결론으로 볼 수 있다.

 

 

Ⅲ. 문학적인 구조

 

이 단락의 문학적인 구조를 보는 것도 단락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먼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을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 파스카 준비를 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시체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가서 그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달라고 청했다. 이런 것은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들에게 흔히 행해진 것이었다. 군인들은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그러나 예수께 와서는 그분이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는 대신 한 군인이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여기에서 복음사가의 신학적 반성(묵상)이 시작된다. 그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았다는 것과 두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소위 삼중 증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단락(31-37)은 서론(31-32)을 제쳐두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교차대구 형식을 취하고 있다: 31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주된 인물로 등장한다. 유대교의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그냥 둘 수 없다(신명 21,22-23 참조). 그리하여 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달라고 했던 것이다. 군인들은 그 일을 하러 갔던 것이다(32). 그리고 A, 일어난 일들이 전해지고; B, 제자의 증언; A', 성경 말씀의 인용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해석이 있다. A에는 두 가지 행위가 나타나는데 부정적인 문장과 긍정적인 문장을 통해서 드러난다.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부정적인 문장)과 예수의 옆구리를 찌름(긍정적인 문장)과 거기에 따른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A'에는 부정적 의미의 텍스트와 긍정적 의미의 텍스트가 관련지워진 설명이 나온다. 그리고 중심에는(B) 복음사가의 증언이 있다. 그 도식을 보면,

 

서언(31-32)

A. 일어난 일들 (33-34)

- 부정적인 문장 :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않고”(33)

- 긍정적인 문장 :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34)

B. 삼중 증언 (35)

A.'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해석 (36-37)

- 부정적인 문장에 대한 해석 : “그의 뼈가 상하지 않으리라.”(36)

- 긍정적인 문장에 대한 해석 :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리라.”(37)

 

 

Ⅳ. 34절의 병행구절

 

요한 19,34이 요한의 특수전승이기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 그 병행구절을 볼 수 없는가? 볼 수 있다. 시나이 사본, 바티칸 사본등 몇몇 중요한 사본에 따른 마태 27,49에 덧붙여진 구절이 요한 19,34의 병행구절이다. 틀림없이 덧붙여진 이 구절은 고대의 어느 필사자가 요한의 전승을 알렉산드리아 텍스트 전승에 따라 마태오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두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 19,34 ἀλλ’ εἶς τών στρατιωτών λόγχῃ αὐτού τὴν πλευρὰν

ἔνυξεν, καὶ εὐθὺς αἶμα καὶ ὕδωρ.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마태 27,49 ἄλλος δὲ λαβών λόγχην ἔνυξεν αὐτού τὴν πλευρὰν,

καὶ ἐξήλθεν ὕδωρ καὶ αἶμα

어떤 이가 창을 잡고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

 

버나드(J.H.Bernard)는 마태오의 구절을 두고 다음과 같이 가정하고 있다: 마태 27,48의

εἶς ἐξ αὐτών 때문에 필사자는 요한 19,34의 εἶς τών στρατιωτών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찬(改竄)을 하게된 것이다. 또 요한의 ἀλλ’ εἶς를 필사자는 ἄλλος로 잘못 읽었던 것이다.

 

 

Ⅴ. 34절의 주해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것만 보도록 하겠다.

 

1. 찔렀다(ἔνυξεν)

 

νύσσω 동사에는 자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 “찌르는 것” 등의 가벼운 의미도 있지만, 치명적으로 찔러 상처를 입혀 생명에까지 관계되는 것을 나타내는 심각한 의미도 있다. 불가타나 시리아 사본(harclensis syrʰ)등에는 “찔렀다” 대신에 “열렸다”(aperuit)고 되어있다. 아마도 ἔνυξεν을 ἔνοιξεν으로 잘못 읽은 데에서 연유된 것 같다. 이것은 라틴 교부들에게 깊은 묵상의 계기를 주었다. 성 아우구스티노(S.Augustinus)는 말하기를 “그(군인)는 옆구리를 찔렀고, 상처 입혔고 동시에 옆구리를 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그리하여 생명의 문이 열렸다. 그분에게서 교회의 성사가 넘쳐 흘러나왔고, 그 성사 없이는 참 생명에로 나아갈 수 없다”면서 “노아의 방주가 열려 거기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나오고,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탄생하듯이,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2. 예수의 옆구리

 

예수의 어느 쪽 옆구리를 찔렀는가? 오른쪽? 왼쪽? 에디오피아 역(versione)이나 위경(빌라도 행전, 니고데모 복음서)은 예수의 오른쪽 옆구리를 찔렀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예술이나 이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옆구리를 가리키는 희랍어 πλευρά는 단수로 사용되었는데 자주 복수로 사용된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요한복음사가가 하느님이 아담의 πλευρά(갈비뼈)를 취하셔서 여인을 만들었다는 창세 2,21-22이 단수를 사용한데서 영향을 입지 않았나 생각한다.

 

3. 피와 물

 

유대인들이 미드라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볼 때 사람은 피와 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요한 19,34에는 ‘피와 물’이 나왔다고 되어 있지만, 1요한 5,6.8에서 나온 몇몇 사본 그리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태 27,49의 덧붙여진 부분에서 그 순서가 전도되어 ‘물과 피’로 되어 있다.

비켄하우저(A.Wikenhauser)는 “물과 피”의 순서가 더 이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몇몇 중요한 텍스트(고대 시리아-아프리카 텍스트, 에집트 사본)나 몇몇 그리스, 라틴 교부들의 글을 보면(1요한 5,6도 마찬가지) “물과 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더 이전의 것이다.

하지만 포테리에(I.delaPotterie)는 “피와 물”의 순서가 원래의 것이라고 본다: “이 두 단어의 순서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수사본들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텍스트 비평을 통해서 보면 올바른 순서는 ‘물과 피’가 아니라 ‘피와 물’이다. ‘물과 피’의 순서를 나타내는 많은 사본들은 아마 요한의 첫째 편지(5,7-8)의 영향을 입은 것 같다. 분명히 그 편지에서는 피가 물 다음에 놓여져 있다. 하지만 이 편지는 수난기와 다른 분위기에서 저술된 것이다. 즉 그것은 신생교회 안에서 작성된 것이다. 분명히 요한의 첫째 편지 저자는 먼저 물로 씻어지는 세례를 생각하고 나서 피의 성사인 성체성사로 넘어가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을 본 요한복음사가에게 커다란 신학적 동기를 제공하였다.

 

 

Ⅵ. 다양한 해석들

 

군인들 중 하나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결과는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34b) 하지만 이 간략하고 세부적인 묘사가 전 단락의 중심이다. 요한복음의 이 단락에 대한 해석은 무척이나 다양했고, 또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 풍부한 사상을 도출하였다.

이 절에 대한 신학적, 영성적 다양한 해석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요한 주장들을 보려고 한다: 비성사론적 해석, 성사론적 해석, 파스카적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론적 해석이다.

1. 비성사론적 해석

 

1)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다르면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단지 신체학상의 의미만을 지닌다는 것이다. 방금 죽은 사람의 심장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혈청같은 것)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 의학계에서나 몇몇 고대의 증언에서 이런 현상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요한복음사가가 단지 신체적인 증언을 하기 위해 그 구절을 서술했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피와 물’이라는 두 요소는 상징적이고 계시적인 의미를 지녔다.

 

2) 다른 이들은 피와 물에서 “기적적인 표징”을 보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하기를 “죽음 이후 우리 몸의 피가 응고되는 것은 확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는 죽음과 부패가 있을 수 없다. 차라리 생명력이 흘러 넘친다. 그리하여 물과 피가 나온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씻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대속을 위한 것이다.”고 한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Loisy, Bauer, Hoskyns, Davey, Bultmann등)은 오리게네스의 의견을 (Contra Celsum Ⅱ 36) 따르면서 요한복음사가가 실재적이면서 기적적인 사실을 언급하려 했다는데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기에 복음사가는 자신의 목격증언을 강조한다는 것이다(35).

하지만 슈낙켄부르그(R.Schnackenburg)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적적인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주장은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난기에서 결코 기적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복음사가는 결코 다른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의 의료과학이나 고대의 증언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혈청)은 단지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 현상에 대한 기적적인 의미부여는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난기에서 요한복음사가는 결코 어떤 현상에 대한 기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뿐더러 차라리 그는 피와 물에 대한 상징적인 가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3) 불트만(R.Bultmann)은 예수의 죽음을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공통의 해석(로마 3,25; 에페 5,2; 히브 7,27 등 참조)은 요한의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요한의 기록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계시자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요한 19,34이나 그밖의 예수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언급하는 구절들(요한 6,53-56; 1요한 1,7)은 후대의 첨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제사의 개념은 요한의 사상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포테리에는 말하기를 “이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충분치는 않지만 이 사상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요한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계시의 신학이고 또 이것이 수난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계시의 신학과 속죄의 신학이 서로 배척하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신학을 토대로 해서 보면 속죄의 신학에는 모순이 있다. 이것은 중요하고 또 실제적인 문제이다. 만일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계시자이시라면 불트만은 이 죽음이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설명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계시의 내용이나 목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2. 성사론적 해석

 

교부들이나 중세의 많은 학자들은 피와 물에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 즉 교회의 탄생을 보고 있다. 이미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 텍스트를 성사론적으로 해석한 것을 보았다: “복음사가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찌르다’, ‘상처입다’ 등과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열렸다’는 단어를 쓴다. 이것은 마치 생명의 물과 같이 예수의 옆구리가 열려 거기로부터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 성사들 없이 참 생명에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피와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형성된 이 두 물질의 흐름은 우연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물로써 새로 태어났고, 살과 피로써 양육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테오도로도 물은 새로운 탄생의 표징이고, 피는 성체성사의 신비의 상징이라고 했다.

교부들의 해석에 동의하여 현대에도 성사론적인 해석을 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물과 피는 세례와 성체를 나타낸다.”(Lagrange, Panimolle) 브라운(R.E.Brown)도 성사론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요한복음사가가 여기서 성령의 선물 뿐만 아니라 성령이 공동체의 믿는 이들과 통교할 수 있는 두 개의 통로인 세례와 성체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물은 세례를 그리고 피는 성체성사를 나타낸다(3,5; 6,53.63).”

 

3. 파스카적 해석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파스카 어린 양의 피를 말하고 있다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어 온 것이다: 라그랑즈(P.M.Lagrange)는 말하기를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보았고 모든 사실을 증언하는 요한복음 사가는 두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여겼다: 첫 번째 것은 율법서에 있는 것으로 해방의 상징(figura)인 파스카 양에 대한 것으로 ‘그의 뼈가 상하지 않으리라’(신명 21,23)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언서의 말씀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보리라’(즈가 12,10)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비켄하우저(A.Wikenhauser)도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 “이 단락(31-37)의 결론에서 요한은 예언의 성취를 말한다. 특별히 요한은 ‘그의 뼈가 상하지 않으리라’는 출애12,46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파스카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으로 볼 때 복음사가는 예수를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파스카 어린 양으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36절의 출애 12,46의 인용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리오네(S.Lyonnet)는 주장하기를 “만일 이 인용이 피의 의미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파스카 어린 양이다”라고 한다. 사실상 파스카의 예절에 있어서 특수한 것을 상기시키는 첫 번째 인용(출애 12,46)은 분명히 파스카 양의 죽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요한은 이전에 유대인들이 “부정을 타지 않고 해방절(음식)을 먹기 위하여”(18,28) 빌라도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도 요한은 두 번이나(19,31.42) “준비일”임을 언급했다. 즉 일몰 직전, 그 시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파스카 축제에 쓰일 양들이 도살되고 있었다.

하지만 포테리에는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문설주에 발라질 파스카 양의 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예수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파스카 양에 대한 인용은 옳다. 그러나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를 완전히 의미가 다른 파스카 양에다가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출애 12,13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천사를 물리치기 위하여 문설주와 문상인방에다가 어린 양의 피를 뿌렸을 뿐 그 이외에 그 양으로부터 흘러 나온 피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마치 파스카 양의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하지만 그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는 파스카 어린 양의 피와는 전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4. 그리스도론적 해석

 

콘티(B.Conti)는 “예수의 피와 물에 대한 많은 현대 학자들이 내리는 해석은 그리스도론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① 현대 학자들, ② 포테리에의 주장, 그들의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 현대 학자들의 그리스도론적 해석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마치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처럼(1요한 5,6-8) 반가현설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발견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요르단 강(물)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현양되신 그리스도와 십자가(피) 위에서의 인간 예수를 분리시키려는 이단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희생되신 예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는 단지 나타내 보이기 위한(δοκέω, 여기서 docetism-가현설이 나왔다) 존재라는 주장을 한 이단에 맞서 예수의 강생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했다.

버나드는 “아마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자연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할 당시 널리 퍼진 이단인 가현설을 배척하기 위해서 특별히 이 현상을 언급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마쉬(J.Marsh)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34절에 대한 성사론적인 해석을 부정하면서, 스트라스만(H.Strathmann)은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써 요한은 구속자로서 진정한 의미의 수난을 부정했던 영지주의에 맞서 세례와 죽음 안에서 예수의 지상적인 존재의 결정적인 사실을 지적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슈낙켄부르그는 이 구절을 요한 7,37-39의 단락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다. 그 단락에서는 예수의 가슴(속)에 흐르는 물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보면 피는 예수의 구원론적인 죽음의 표징이요(1요한 1,7 참조) 물은 성령과 생명의 상징이다.

 

2) 포테리에의 그리스도론적 해석

포테리에는 최근에 요한의 피와 물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의 재해석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구절(34)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두 가지이다: 요한복음의 구원론과 계시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희생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 문제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고, 차라리 그 가치를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된 학자들은 성서 안에서 피와 죽음과 삶의 상징으로서의 피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테리에는 마테오스(J.Mateos)와 바레토(J.Barreto)의 의견을 수용한다. 그들의 의견을 보면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받아들이신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피는 예수께서 수용하신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포테리에는 이 의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희생제사적 의미의 텍스트, 예수의 죽음과 피를 쏟으심(요한 19,30.34; 1요한 1,7; 5,6-8 참조)에 대한 텍스트는 분명히 계시론적인 가치가 있다. 그리고 불트만이 주장한대로 요한의 신학이 계시의 신학이라는 것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희생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려는 텍스트를 이 계시의 신학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사실 요한복음에 있어서 계시의 신학과 제사의 신학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다. 희생적 의미를 나타내는 텍스트도 상징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면서 구원론적인 의미도 나타내기 때문이다.

 

 

Ⅶ. 피와 살의 상징적인 가치와 신학적 해석

 

1. 찔린 옆구리의 상징

 

포테리에는 34절의 그리스도론적 주제와 영적인 주제를 28절과 30절과의 밀접한 관계 안에서 설명한다. 이제 그의 신학적인 해석을 보도록 하자.

34절의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34절이 속해있는 19,31-37의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19,28-30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아야한다. 즉 예수의 죽음과 죽음 직전에 군인들이 저지른 행위와의 연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군인들의 두 행위(다리를 꺾지 않은 것과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것)는 분명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 죽음에 대한 구원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두 단락의 관련성을 따져보면 자연히 34절이 앞의 두 절, 28절과 30절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찾아내게 된다. 이제 다음과 같은 도식 안에서 위의 세 절(28.30.34)의 관련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요한 19,28-37의 구조 안에서 본 19,34의

피와 물의 상징과 그와 관련된 주제

 

 

 

28절

(서술적 텍스트)

상징적인 현실

 

30절

(서술적 텍스트)

상징적인 현실

 

34절

(상징적 언어)

상징

그리스도론적

주제

예수

생애

(복음사가)

그후에

예수께서는 이미

모든일이 다

이루어 졌음을

아시고

성경(말씀)이

이루어 지도록

(예수)

 

 

예수께서 “다

이루어졌다”

하셨다.

 

 

(복음사가)

 

 

…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가 나왔다.

 

 

 

영적주제

 

 

(예수)

 

예수께서

“목마르다”

하셨다.

(복음사가)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

주셨다.

(교회의 생명)

물이

(나왔다)

(교회의

생명)

또한 28절의 예수의 말씀, “목마르다”(sitio)가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도 알 수 있다. 이 목마름은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교회에 성령을 주시려는 간절한 원의이다. 이것은 돌아가시면서 “영을 넘겨주셨다”(tradidit spiritum)는 표현 안에서 실현됨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이미 앞에 있는 두 예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10-14)와 ‘초막절 축제 때 성전에서 큰 소리로 외치신 예수의 말씀’(7,37-39)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두 예화에서 역시 예수께서 ‘목마름’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당신 안에 흐르는 생수(의 강)는 바로 성령의 상징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 34절에서 무엇을 나타내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 단계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28절, 30절과 34절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이다. 이 세 절 안에서 나타나는 주제의 연속성을 보자: 아직까지 살아 계신 예수의 목마름(28), 돌아가시면서 성령을 선물로 주심(30), 돌아가신 후 주신 선물의 상징인 생명력있는 물(34). 이것이 교회에 생명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주제다.

세 절 안에서 피의 주제에 대해서도(34) 이와 비슷한 관련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물의 주제와는 반대로 34절에서 출발해서 30절, 그리고 28절을 향해 거꾸로 되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 τετέλεσται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28,30). 30절에서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나온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미 복음사가에 의해 앞에서(28) 더 강하게 언급되었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다.”(πάντα τετέλεσται)

이 세 절에서 두 주제의 병행된 평행선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예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데 피가 나타내는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다’ - ‘다 이루어졌다’ - ‘피’); 다른 도식에서는 영적인 테마가 발전되었는데 물이 나타내는 상징을 설명한다(‘목마르다’ - ‘영을 넘겨주셨다’ - ‘물’). 후자의 도식에서 그 도착점은 34절이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 이후에 있는 피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의 상태로 거꾸로 되돌아 간다. 그와는 반대로 후자의 도식에서는 28절의 “목마르다”에서 시작한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당신의 원의를 드러내신 것이다. 성령의 선물을 주시기 위한 그분의 목마름은 교회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향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34절의 “피”와 “물”이라는 두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론적 견지에서 앞의 두 절(28,30)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2. 피와 물의 상징적인 가치

 

포테리에는 피와 물이 흘러나온 이 현상을 요한복음 안에서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사실의 역사성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이 역사적인 사실이 상징으로 다가왔고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직접 보았음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보았기에 그 자체 안에서 상징을 발견할 수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34절의 ‘피와 물’은 사실적 언어가 아니라 요한복음사가의 상징적인 언어의 영역 안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1) 피

그러면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어떤 상징적인 가치가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성서적인 측면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성서에서 피는 모든 생물의 생명이다(레위 17,11-14). 그러니 피흘림은 죽음의 표지이다. 하지만 표지(sign)와 상징(symbol)은 구분된다. 예수의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그분이 죽으셨다는 단순한 물질적인 표시(sign)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에서 볼 때 피는 생명의 상징(symbol)이다. 요한복음의 텍스트에 제시된 것은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 나온 피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sign) 그분의 생명(symbol)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증인들에게는 죽으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죽으시기 전, 살아계실 때 예수의 심원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볼 수 없었던 것(예수의 의식)에 대한 볼 수 있는 상징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피는 물질적인 차원을 떠나 보다 영성적인 차원, 그분과의 친교의 차원까지 끌어 올려져야한다. 그리하여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그분의 옆구리가 열렸다.”고 했다. 피의 상징성 때문에 보다 깊은 차원, 예수의 심원한 생명에까지 연결시킨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본 문학적인 구조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즉 34절이 피는 거꾸로 되돌아가 예수의 죽음 이전의 구절, 28절과 30절에 연결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피)이 삶과 연결되는 것이다.

 

2) 물

앞에서 본 것처럼 물은 성령의 오심(강림)의 상징이다. 요한 7,38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칠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대해 복음사가는 덧붙이기를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7,39). 여기에서 인용된 성경구절은 확실치는 않지만 에제 47,1과 즈가 14,8인 것 같다.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생명이 넘치게 하는 강에 대해서, 즈가리야는 예루살렘에서 흐르는 ‘살아있는 물’에 대해서 말했다.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은 죽는 순간에 예수께서 인간에게 주셨던 구원의 선물의 상징이다. 이것은 이미 직전에 요한복음사가가 언급한 이중적 의미를 지닌 “tradidit spiritum”(19,30)에서 잘 나타난다. 즉 그 의미는 “영을 넘겨 주셨다”, “성령을 건네 주셨다”이다. 그래서 19,34에서 복음사가가 언급한 “물”에서 볼 때 예수 자신이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성전이요, 그분으로부터 구원의 생명수가 흘러 나온다.

 

 

Ⅷ. 맺는 말

 

불트만과 다른 학자들의 “속죄 양의 희생제사”의 개념을 부정하면서 포테리에는 말하기를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실제로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것과 요한이 말하는 피의 쏟음이 희생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옆구리를 찌름은 단지 로마 군인들 중 하나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또 예수 자신도 당신의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심으로써 직접적으로 희생제사를 나타내시려 하시지 않으셨다. 사실 그 순간에 이미 예수께서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4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그리스도론으로 집중되고 있다. 예수께서 쏟으신 피와 물이 상징하는 것은 죽으실 순간까지 예수 자신이 사셨던 보다 깊은 의미의 삶 자체다: 아버지께 순종,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쏟으신 피는 아직도 예수께서 은밀히 살아계시다는 현존의 상징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론적 해석이 따르면 그분이 흘리신 피를 통하여 예수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를 끝없이 사랑하셨던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 뜻에 따르는 전적인 투여, 인간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한편으로 그분이 흘리신 물은 성전이시며, 샘의 원천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의 상징이다. 피와 물이 상징하는 것들의 밀접한 관련성은 이미 앞에서 도식의 분석을 통해서 보았다. 분명한 것은 34절 안에 그리스도론적 주제와 영적인 주제가 병행한다는 것이다. 피는 그리스도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이고 물은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의 상징이다.

이렇게 볼 때 피와 물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은 이미 요한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이미 전제되었고, 절대적이고 또 불가피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되었고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저자로 여겨지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당신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1요한 5,11)

 

(「신앙과 삶」 1997, 겨울, 창간호, 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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