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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터키[Turkey]

작성자사랑 은총 평화|작성시간12.03.18|조회수2,393 목록 댓글 0
터키(Turkey)

1) 개요
셀주크 터키, 오스만 터키로 대표되는 오리엔트의 강자,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비잔틴 문명의 꽃을 피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한때 세계사에 빛나는 문명의 수도로서 유명했던 유럽과 동양의 건널목, 이런 것들로도 터키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너무도 모자랄 것이다. 그 땅을 점령한 수많은 침략자들과 종교와 문화는 오늘날의 터키를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한, 그러나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중해 동북쪽의 지브랄타 해협, 동서양을 나눈 그 해협을 끼고 있는 이스탄불의 상징성은 고대 이래로 동서의 교차로의 그 위치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섬들과 고대 기독교의 신비와 기적이 가득한 오리엔트내륙 지방의 고도시들은 터키 광대한 역사 속에서 빛나게 한다. 케말 파샤에 의한 20세기 초의 민족운동 이후 이슬람교를 기본으로 하여 근대화로 매진하고 있다.

2) 일반적으로 터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위치 : 유럽 남동부와 중동 일부 지역
(북쪽-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서쪽-불가리아, 그리스,
남쪽-시리아, 동쪽-이란, 이라크와 접경,
흑해 및 에게해, 지중해에 둘러싸임)
b) 기후 : 지중해성 기후(여름 고온건조, 겨울 저온다습)와 대륙성 기후가 공존,
평균 기온-13.8도, 평균 습도-73%, 평균 강우량-668.2mm)
c) 인구 : 6,200만 명(이스탄불-1,000만 명, 앙카라-360만 명, 이즈밀-310만 명)

d) 수도 : 앙카라
e) 종교 : 이슬람교(98%), 소수의 기독교 및 유다교
g) 언어 : 터키어(90%), 쿠르드어 및 아랍어(10%)
h) 정치형태 :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며, 수상이 정치
i) 화폐 : 터키 리라 TL, (환율 변동 심함)/유로화 동참국
j) 유의사항 : ① 일요일이 공휴일이며, 관공서 및 은행은 토, 일요일 2일간 휴무임
② 백화점 외 대부분의 상점은 오후 7시부터 문을 닫음
k) 간단한 회화 : 안녕하세요?(Merhaba 멜하바)
감사합니다.(Tesekkorler 테쉐큐렐)
l) 전압 : 110, 220V
m) 평균 기온 및 강수량 : 기온- ̊C, 강수량-mm


터키 역사 연표

서기 전 6500년 :
차탈 회육(Catal Hoyuk : 코니아 남동쪽 35킬로미터 지점)에 예리고 다음으로 오래된 신석기 시대 도시 건설. 1958년 James Mellaart가 처음 발굴. 대모신 등이 앙카라 아나톨리아 박물관에 전시.

서기 전 1800-1200년 :
히티트 제국이 철제 무기로 아나톨리아를 지배. 수도는 하투샤쉬, 일명 보아즈쾨이. 히티트 왕 하투실리스 3세와 이집트 왕 람세스 2세가 맺은 아카다아어 강화조약문 토판이 이스탄불 고대 동방 박물관에 전시.

서기 전 1200-750년 :
아나톨리아 중부에 프리지아 제국 건설. 대모신(키벨레) 숭배.
에페소에 아르테미스 숭배. 후에 성모 마리아 숭배로 발전.
그리스인들이 에게해 연안에 정착하여 도시국가들을 세움.

서기 전 680년 :
서부 아나톨리아에 사르디스를 수도로 리디아 왕국 창건.

서기 전 546년 :
페르시아의 치루스(고레스) 2세가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킴.

서기 전 500년 :
밀레토스 시민들이 에게해 연안 열한 도시와 이오니아 동맹을 결성하여 페르시아에 저항.

서기 전 494년 :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동맹군을 격파.

서기 전 334-333년 :
알렉산더 대왕이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이끄는 대군을 격파. 알렉산더 두상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

서기 전 322년 :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병사한 후 대왕의 막료들이 제국을 분할 통치. 필레타리우스가 리시마쿠스 장군을 제치고 베르가모를 수도로 베르가모 왕국을,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장군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셀레우코스 왕조를,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 장군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수도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움.

서기 전 189년 :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우쿠스 3세가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게 패함.

서기 전 133년 :
페르가모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헌납.

서기 후 45-58년 :
사도 바울로가 터키와 그리스에서 세 차례 전도.


서기 후 313년 :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줌.

서기 324년 11월18일 :
비잔티움 맞은 편 크리소폴리스(지금의 위스키다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공동 황제 리치니우스를 격파하여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 비잔티움을 신로마로 개명함.

서기 325년 5월20일-8월25일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 별궁에 제1차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의 신성교리를 확정.

서기 330년 5월11일 :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제국의 수도로 정함.

서기 381년 5-7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 1차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령의 신성교리 확정.

서기 395년 :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양분하여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 제국을, 차남 호노리우스에게는 서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했다.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라벤나.

서기 431년 :
테오도시우스 2세는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교리를 확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단죄.

서기 451년 :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맞은 편 칼케돈(지금의 카디쾨이) 지역에 있는 성녀 에우페미아 성당에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께는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양성론 교리를 확정.

서기 532-537년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소피아 대성당을 건축.

서기 726년 :
레오 3세 황제가 성화상 공경을 금지.

서기 787년 :
콘스탄티누스 6세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통산 7차)에서 성화상 공경을 옹호.

서기 843년 :
테오도라 황태후가 성화상 공경을 정리함으로써 성화상 논쟁은 종식됨.

서기 1054년 7월16일 :
교황대사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함으로써 교회가 서방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양분.

서기 12-13세기 :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고니온(지금의 코니아)에 도읍을 정하고 아나톨리아 중동부 지역에 왕국 건설.

서기 1096-1291년 :
일곱 차례 십자군 전쟁. 제4차 십자군이 1204-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강점.

서기 1288년 :
오스만 투르크족이 부르사를 도읍으로 정하고 오스만 투르크왕조 창건.

서기 1453년 5월29일 :
오스만 투르크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에디르네 성문을 뚫고 콘스탄티노플 점령.

서기 1922년 11월1일 :
오스만 투르크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가 돌마바체궁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

서기 1923년 10월 29일 :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천도.

서기 1935년 :
소피아 대성당을 박물관으로 만듦.













삼총사 교부의
가빠도기아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킬로미터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 지대를 통칭 ‘가빠도기아’라 한다.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서기 14-37년 재위)는 가빠도기아 왕국을 멸하고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이 지명이 신약성서에는 두 번 나온다(사도 2,9 ; 1베드1,1).
서기 30년 5월경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 가빠도기아에서 순례 온 유다인들이 있었다고 한다(사도2,9).

또 1세기 말엽에 1베드로 서두에서 지금의 터키 여러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빠도기아도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역사적으로 이미 1세기 말엽에 가빠도기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하겠다(1베드1,1)


삼총사 교부 시대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이 약진한 곳이 바로 가빠도기아 속주였다.
이 곳에서는 교부 삼총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곧 가빠도기아의 수도인 가이사리아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니싸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이다.
바실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 신봉자였으며, 375년에는 탈고한 ‘성령론’ 덕분에,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 교리가 통과되었다.

그의 고향 가이사리아에는 그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
나지안조의 주교였던 그레고리오의 아버지도 그레고리오였다.
그의 아버지는 무려 45년간 나지안조(데린구유와 귀젤리유르트 간 도로변 네네지, 일명 베카를라르) 교우촌의 주교로 재임하다가 374년에 선종했다.

어머니는 성녀 논나이며 그레고리오는 가빠도기아의 가이사리아, 팔레스티나의 항구 가이사리아,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세서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375년 나지안조에서 아버지에게 사제품을 받았고, 372년 친구인 바실리우스로부터 강제로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부입하지 않았다.

379년에는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아, 380년 11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되었고, 381년 5월부터는 콘스탄티노플 성이레네우스 성당에서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5-7월) 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공의회 일부 교부들이 주교좌 이동을 금지한 니케아 공의회 규정을 내세워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직을 문제 삼자, 그는 공의회 회기 중에 그 유명한 ‘고별사’(연설 42)를 하고 나지안조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두 해 남짓 나지안조의 주교로 재직하다가, 383년에 사촌 에울라리우스를 그곳 주교로 임명하고 자신을 아버지에게서 물려 방은 유산이 있는 아리안조(지금의 귀젤리우르트) 한촌으로 은퇴하여 살다가 389/390년 선종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했고,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이시라는 존칭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교회 행정과 대인 관계에 매우 서툴렀다.
무척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을 타고났으며, 문 필력은 뛰어나 연설문, 시, 서간문에 두루 능했다.

지금의 나지안조는 미루나무와 밀밭 사이에 큰 건물 주춧돌만 남아 있다.
그가 말년에 은거한 아리안조에는 계곡에 그를 기려 지은 정교회 성당이 있으나 1923년 그리스 정교도들이 그리스로 떠나간 다음부터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

니싸의 그리고리오는 바실리우스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성녀 마크리나이다.
그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한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는데 전력했다. 그는 가빠도기아 삼총사 가운데서 가장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성서도 신비주의적으로 풀이하곤 했다.

그 이후 가빠도기아는 오직 바실리우스가 일으킨 수도생활의 전통만 이어져 갔고, 성화상 파괴 난리 때(725-843)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난 수도자들이 자연스레 가빠도기아로 피신하여 거기에 살던 원주민 수도자들과 합류한 것 같다.

1174년부터는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515년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가빠도기아의 그리스 정교회 수도자들과 신도들은 끈질기게 거기에 거주하다가 1923년에 모두 그리스고 떠났다.

1923년 스위스 로잔느에서 터키와 그리스와 조약을 맺어, 터키에 사는 그리스인들은 모두 그리스로 돌아가고 그리스에 사는 터키인들은 모두 터키로 돌아가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가빠도기아에 있는 땅굴 유적
[지하도시]

가빠도기아의 지질은 독특하다. 이 지역은 본디 사암 지대였다.
그런데 3천만 년 전에 에르치에스 및 하싼 화산이 터지면서 용암이 흘러 넘쳐 사암을 뒤엎었다.

이지역의 암석은 비교적 연하며 오랜 기간동안 풍화작용에 의해서,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하고, 진기한 원추형 모양의 석주형상이 수천 개 늘어 서 있다.

그러기에 푸석푸석한 사암을 퍼내기만 하면 훌륭한 주거 공간이 생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땅굴 방이다. 거기다 영영 세세 수리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선사 시대부터 주민들은 집을 짓지 않고 땅굴 속에서 살았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 바위를 파고 교회와 수도원이 생겨나게 되었고, 벽에는 “freasco"성화를 그려놓았다. 그리하여 이곳은 4세기에 이르러선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하 도시만도 30개나 되는데 그 중 데린쿠유(Derinkuyu)와 카이마클러(Kaymakli)가 가장 유명하다. 이들 지하의 도시는 모든 도시 기능을 갖춘 것들로, 지하 120m까지 내려간다. 이러한 지하 도시들은 크리찬들이, Arab Moselm의 공격을 피해 숨어지낸곳으로 추정된다.


[수도원 집성촌 괴레메]

가빠도기아 곳곳에는 3천 개가 넘는 동굴 성당이 있는데, 그 가운데 수도원 집성촌 괴레메(Goreme)의 성당들이 단연 돋보인다.

예술적 가치는 별로 이지만 수도자들이 불타는 신심으로 천 년에 걸쳐 그린 벽화들이 여러 동굴 성당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성당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바실리우스 성당(작은 성당), 엘말러 킬리세(사과 성당), 성녀 바르바라 성당, 열라 늘러 킬리세(뱀 성당), 카란르크 킬리세(어두운 성당) 차르클러 킬리세(샌들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수도원), 엘 나자르 성당, 토칼러 킬리세(버클 성당)

이곳 괴레메는 그리스 중부의 수도원 집성촌 메데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 깊은 수도원 집성촌이다.
1923년 정교회 수도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이주했다.
(장군바위, 바샤바위, 비둘기골짜기)


[어흘라라 계곡]
가빠도기아에서 수도원 집성촌 괴레메 다음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닮은 험준한 골짜기에 동굴 교회가 열두 개가 있다.



셀주크 제국과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이고나온: [코니아]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지금의 얄바츠)에서 이고니온(지금의 코니아)까지는 180킬로미터이다.

이곳은 기원전 334-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고니온을 점령했고,
기원전 323년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 리시마쿠스 장군이 차지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정권에 이어 베르가모 왕국이 차지했다가
기원전 133년 베르가모 왕 앗탈로스 3세가 임종에 이르러 왕국을 로마공화국에 진상할 때 이고니온도 함께 넘어갔다.

사도 바울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9년) 비시디아의 안토오키아에 이어 여기서 유다인 들과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다.(사도14,1-7)

제2,3차 전도여행 때 사도 바울로가 다시 이고니온을 찾아봤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으나 방문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사도 15,41-16,1 참조)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코니아를 수도로 삼아 셀주크 제국을 세웠다.
13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가 여기서 메블라나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했다.
코니아의 유적은 셀주크 제국 및 메블라나 신비주의와 관련된 것들이다.

셀주크 궁성 옛터(지금의 알라딘 파르키) 둘레 도로 남쪽에 1910년에 지은 성 바울로 성당이 있다.

코니아 고고학 박물관 마당에 사도 바울로와 관련이 있는 비석 둘이 있다.
리스트라 비석(유물796호)과 데르베인들이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은덕을 기력 157년에 세운 송덕비(유물1146호)이다.
관련 성서구절 : 사도행전 14,1-7


제자 디모테오를 만난 곳
[리스트라]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9년경) 베르게에 와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이렇게 네 곳에서 전도했다. 앞의 두 곳은 분명하나 뒤의 두곳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루미의 시편중:

“하느님, 임의 입술 떠올리며, 금강석 붉은 반지에 입을 맞춥니다.
임의 입술 닿을 길 없으니, 반지에나마 입을 맞춥니다.
임의 입술 닿을 길 없으니, 반지에나마 입을 맞춥니다.
임의 하늘 이를 길 없으니, 무릎 꿇고 입을 맞춥니다.
뉘우침은 벌레 같고 사랑은 용 같도다.
뉘우침은 인간의 속성,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

이별을 슬퍼 말게, 내 장례를 치를 때
사랑하는 임 찾아가는 때이니
땅 속으로 내려가는 내 모습 보거든
하늘 높이 오르는 내 모습도 떠올리게
달이 지고 해가 진다 애달파 하리오
땅에 묻힌 씨앗은 자라게 마련
내 주검 씨앗 되리니 의심을 품지 말게.”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베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가면 에이디르 호수에 닿는다. 호수의 동북쪽에 위치한 주민 2만 5천 명 정도의 소도시 얄바츠(Yalvac) 동쪽 1킬로미터 지점에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폐허가 있다.

베르게에서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까지는 약 160킬로미터, 시리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창시한 셀레우코스 니카토르가 기원전 301년 이 도시를 세우고 자기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케아라고 명명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곳에 로마군을 주둔시키고 로마인 거주지로 삼았다.

사도 바울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8년경) 베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미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두 안식일에 걸쳐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나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갔다(사도 13,13-52)
바울로가 제2.3차 정도여행 때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들렀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들렀다고 추정된다(참조 사도 15,41-16.1;18,23)

로마 시대 유적으로는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 다음에는 황제를 기려 세운 아우구스투스신전, 도시 북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수처크터’ 샘에서 물을 끌어온 상수도교가 돋보인다.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울로 대성당 초석이 남아 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엔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작은 성당 바닥에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381)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작은 성당은 본디 유대교 회당 자리였음이 판명되었다.

터키에서 유대교 회당 터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여기뿐이다. 바로 이 회당에서 사도 바울로가 두 안식일에 걸쳐 유대인 동족에게 전도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사도 13,13-52)
관련 성서구절: 사도행전 13장 14-52절


[요한 묵시록의 7교회와 주변지역]

요한 묵시록은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 치세 말기에 씌어진 것 같다. 황제는 자신을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자처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배척하는 유다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특히 로마와 에페소에는 웅장한 황제 신정을 짓고 참배를 강요했다.
베르가모에 있던 ‘사탄의 권좌’(묵시2,13)도 황제 신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런 박해 상황에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로 편지를 보내어 그리스도 신앙을 온전히, 그리고 굳세게 지키라고 축구했다.
일곱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공동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교회를 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일곱은 전부를 가리키는 ‘충만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본디 바울로와 그의 제자들은 아시아 속주에서 전도했다.

그런데 1세기 말엽 요한계 문헌이 씌어질 무렵에 바울로계 종파는 현저히 약화되고 요한계 종파가 매우 득세했다.
비잔틴 시대에 아시아 속주에 세워진 교회들이 요한 성당으로 불린 사례는 흔한 반면 바울


스미르나(Smyrna)[현재지명 Lzmir]

현재이름은 이즈밀이다. 주전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은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이 알렉산더 대왕의 성채는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성채에서 알렉산더는 ‘스미르나의 새도시를 세우’하는 꿈을 꾸었고 그는 그대로 실행하여 스미르나 새도시를 건설하였다.) 스미르나는 주전 3-2세기 희랍시대에 크게 번성하였다. 이곳은 항구상업도시


페르가모(Pergamum)[현재지명Bergama]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 리시마쿠스 장군이 베르가모 일대를 차지했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쿠스가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와 싸워 패하자, 리시마쿠스의 부하 필레타리우스가 베르가모를 수도로 삼아 베르가모 왕국을 세웠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 앗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헌납하여 베르가모는 아시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북동쪽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연 요새(Acropolis)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국,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컸다는 유메네스 도서관, 가파른 언덕배기에 만든 노천 극장, 1992년 현재 오스트리아 고고학계에서 복원중인 하드리아누스 신전, 소나무 숲이 무성한 제우스 신전 터가 있다.

묵시록 2,13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는 바로 제우스 신전 아니면,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를 신으로 섬긴 황제 신전을 가리킬 것이다.
베르가모 도심에 사도 요한 성당이 있다.

본디 2세기에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섬기려고 붉은 벽돌로 지은 신전이었는데, 비잔틴 시대에 내벽을 쌓아 성당으로 개조했다.
시가지 서쪽 외곽 지대에는 방대한 종합의료 시설(Asklepeion)이 있다.
관련 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1,12-17


티아디라(Thyatira)[현재지명 Akhisar]

베르가모와 사르디스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B.C 300 셀루코스 1세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이며 주후 1세기에는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6:11-15에 의하면 사도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필립보에서 “티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 루디아는 자주색 옷감장사로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현재지명 Alasehir]

B.C 159-138 베르가모의 왕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 도시가 세워졌다. 그의 이름
따서 이 도시는 필라델피아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와 베르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이아와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 업이 주요산업이었다.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러나서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크게 도와주었다. 이 도시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며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Temple of Tiberius, Caligula, Vespasian등)

이러한 로마황제 숭배의 도시에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비잔틴 시대에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사르디스(Sardis)[현재지명 Salihli]

주전 3세기 Seloucid 왕가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이 지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4년 프린스톤 대학팀의 발굴로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라오디게이아(Laodicea)

골로사이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폐허인 언덕이 있다.
이곳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쿠스 2세(기원전 261-252 재위)가 그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도시를 창건하고 왕비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이아라고 명명했다.

기원전 129년부터 로마 공화국에 병합괴어 아시아 속주의 중요한 도시로 번창했다.
라오디게이아 교우들은 여교우 님파의 집에 모여 주일 전례를 행하였다(골로4,15). 사도 바울로가 라오디게이아 교회로 편지 한 통을 써 보냈다고 하나(골로4,16) 전해오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작가는 이 교회를 호되게 꾸짖었다(묵시3,14-22).
여기 교우들을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다. 묵시 3,16에 “네가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13세기까지 라오디게이아를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관련 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3,14-22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리커스강변 100m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오디게이아에서 약10여 킬로 떨어진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전 2세기경 베르가모의 왕 엔멘네스에 의해서 도시로 세워졌다. 그러나 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온천물이 솟는 동굴은 제의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일찍부터 이곳에는 성소가 있었다. 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도 그 뜻은 본래 “성소가 있는 도시” 였으며 후에는 거룩한 도시라는 뜻으로 변하였다.(일찍부터 초대교회가 설립됨)

지금은 터키어로 파묵칼레(Pamukkale)라 불리는 노천 온천장이 있다.
산화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시가지 아래 언덕으로 흘러내리면서 공기와 접하여 새하얀 석고처럼 응고되어 그 일대가 마치 목화가 핀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터키인들은 이곳을 ‘파묵칼레’ 즉 ‘목화성’이라 한다.
60-130년경 생존한 파피아스가 히에라폴리스 주교로 재직하면서 ‘예수 어록 해설 5권’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 오지 않는다.
히에라폴리스 뒷산에는 5-6세기에 세운 사도 필립보 순교 기념관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필립보는 여기서 전도하다가 도미시아누스 황제 제위(81-96)때 박해로 순교했다고 한다(관련 성서구절 : 골로 4,13).



파묵칼레(Pamukkale)

히에라폴리스의 남쪽 경사 부분을 파묵칼레라고 부르며 유명한 온천이 이곳에 있다. 파묵칼레라는 뜻은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이며 이 온천물에 다량으로 포함된 칼슘의 축척으로 멀리서보면 흡사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힌 성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오늘날도 이곳은 세계적인 자연의 비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온천물은 섭시35도로 특히 심장병,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에 찾아왔었다.



골로사이(Colossae)

에페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7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20여만 명의 시민이 사는 데니즐 리가 있다.

데니즐리에서 다시 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되는 지점에 골로사이 폐허인 작은 언덕이 있다. 히에라폴스 라오디게이아에 비해 볼품없는 동내이며, 언덕 남쪽으로 3킬로미터 쯤 떨어진 카드무스 산(호나즈다어. 해발 2571M) 기슭에 아담한 호나즈 마을이 있다.

사도 바울로는 제3차 전도여행 중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면서 전도할 무렵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가 골로사이에 교회를 창립하고 라오디게이아와 히에라폴리스 교회도 세운 것 같다.(골로 4,12-13)
바울록 에페소 로마군 감옥에서 골로사이 교회 앞으로 써 보냈다는 골로사이서가 바울로의 친서인지의 여부는 아직도 미결로 남아 있다.

또 바울로 사도는 에페소 로마군 감옥에서 골로사이 교회 신도 필레몬 앞으로 써 보낸 필레몬서는 친서임에 틀림없다.

골로사이 교우 필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에페소에서 전도하다가 로마군 감옥에 갇힌 바울로에게로 도망쳐 왔는데, 바울로가 오네시모에게 세례를 준 다음 그를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면서 당부하는 말을 적어 보낸 쪽지가 필레몬서이다.
즉, 오네시모에게 벌을 주지 말고 가능하다면 자신에게로 되돌려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필레몬서는 바울로의 친서들 가운데 개인에게 써 보낸 단 한편의 서신인데,
필레몬의 바울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내용과 표현이 간절하다.

골로사이서는 처음과 끝의 인사와 기도를 빼면 종교혼합주의를 경고하는 교리편(1,12-2,23)과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조하는 훈계편(3,1-4,6)으로 짜여 있다.

필자는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던 모상가(골로1,15-20)를 인용했는데, 우주 창조와 우주 구원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관련 성서구절 : 골로사이1,3-8



에페소(문이 활짝 열렸다는)

터키 서남쪽 지중해안 이즈미르(스미르나) 항구 도시에서 남쪽을 74킬로미터 지점에 에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바울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한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기원전 133년 베르가모 왕국의 마지막 왕 앗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바칠 때 에페소도 함께 바쳤다.

기원전 129년 로마는 에페소를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 삼았다.
당시 시민은 약 29만 명,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반기를 들어 라틴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자, 로마 장군 실라가 에페소를 초토화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서기 14년 치세) 때부터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 에페소는 스미르나(오늘날 Izmir)로부터 11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주전 200년부터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에페소 곁은 멘데레스(Menderes) 강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강으로부터 흙이 퇴적되어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2. 에페소에서는 희랍의 철인 탈레스(Thales 640-546)와 헤라클리트(Heraclit, 540-480 B.C)가 활동하였다. 334 B.C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군대를 패배시킨 후 에페소를 방문하였고 그가 죽은 후 희랍의 장군 Lysimachos는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0 B.C 에페소는 소아시아에 있어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에는 200명 주교들이 모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려 Nestorian 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에페소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는 Mother of God으로 확인되었고 정통교리인 니케아신조가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구분하였던 네스토리아파는
파문을 당하였다.)

3. 아데미(Artemis)여신 신전

에페소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아데미 여신(로마인들은 Diana라고 불렀다)은 본래 달의 여신이었으며 호머의 작품에서는 사냥꾼 여신으로 등장한다.
에페소에서는 아데미는 다산의 여신(fertility godness)으로 숭배되었다. 아데미 여신 신전은 에페소의 상진이었고 에페소 사람들은 스스로 “전각지기”(temple keeper)라고 불렀다.(행 19:35)

주전 356년 에페소의 아데미 여신 신전은 정신병자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바로 이 때 마케도니아의 수도 Pella에서는 알렉산더가 출생하였다. 왜 아데미 여신은 자신의 신전이 방화범에 의해서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아데미 여신은 알렉산더 대왕이 탄생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Pella로 가서 신전을 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 (334 B.C) 에페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데미 여신 신전을 재건시켜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신전을 복구하기를 원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제안을 외교적으로 거절하였다.
“신(알렉산더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 다른 신의 신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아데미 여신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에페소 여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다 바쳤다. 재건된 아데미 여신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 (이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됨) 즉 길이는 약 130m, 넓이 약 70m2, 높이 도한 20m에 달하는 127개의 Ionic식 석주(기둥)가 신전을 둘렀다.

이 재건된 신전은 사도 바오로 때에 있었다. 3세기에 에페소는 침입을 받고 신전은 약탈, 파괴되었다. 비잔틴 시대에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 이 파괴된 아데미 여신 신전의 기둥들은 이스탄불로 옮겨져 St. Sophia를 짓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5. 야외 원형극장
Cladius 황제(A.D 41-54)때 공사가 시작되어 Trajan 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 약 24,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극장이다. 3단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6. Agora(Market Place) - 111m×111m 지역의 넓은 시장터이다.

7. Arcadian Street
원형극장으로부터 항구(고대시대)에 이르는 530m 길이의 거리 이름이다. 거리 양쪽으로는 돌기둥이 서있고 길바닥은 대리석으로 덮혀있다. 길의 넓이는 양편의 인도까지 포함하면 21m에 이르는 넓은 거리이다. 밤에는 길 양옆에 서있는 돌기둥에는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시설까지 있었다.

8. Clesusu 도서관(The Library of Clesus)
Agora 옆에 있는 유명한 에페소의 도서관이다. A.D 135년 Julius Aguila가 그의 아버지, 곧 로마원로원 회원이었고 아시아의 총독이었던 Clesus Polemaenanus를 기념하여 건설한 도서관으로 현재 많이 복원되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9. Odeion(Concert Hall)
주후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약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소형 콘서트홀이다. 22줄의 원형 계단이 있다. 다른 야외 원형극장과는 달리 빗물이 흘러가는 홈통 장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0. 에페소와 요한 전승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은 노년에 에페소에서 지냈고 이곳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후 죽었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 Justinian 황제는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 온 장소(Ayasuluk 언덕)에 큰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것이 Basilica of St. John이다.
오늘날 이 교회는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11. 에페소와 마리아 전승
주후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 (Council of Ephesus)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하느님의 성모”(Mother of God) 마리아는 요한과 함께-요한은 그리스도 대신 마리아를 돌보는 의무를 감당하였던바-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소아시아를 향하여 출발하였고 에페소에 와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요한복음 19:26-27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있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되 그때로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전통적으로 여기서 예수께서 모친을 부탁한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으로 생각되었다. 에페소의 전승에 따르면 요한은 마리아를 에페소로 모시고 왔고 마리아는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마리아의 무덤에 관한 전승은 다양하며 예루살렘 갈람산에 마리아의 무덤이 있고 또 마리아가 숨진 곳이라고 전해지는 “시온산”(Mt. Zion) 위에 Dormition 교회가 있다.)

마리아가 말년에 살았다는 장소는 오랫동안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초 Catherine Emmeriche의 계시로 그 장소가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장소는 에페소의 420m 언덕(Panaya Kapulu) 위에 있다. 이곳에는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작은 교회가 있고 이 교회는 바로 마리아가 살던 집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된다. 오늘날 복원된 이 교회는 T자형으로 된 건물로서 중앙부분은 예배 실이고 오른쪽 끝방은 침실, 왼쪽 끝방은 부엌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을 가톨릭교회의 성소(Sacred place)로 공포하였다. 교황 Paul 6세, John Paul 2세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성모마리아 교회

A adian Way 우편에 위치하는 교회 유적지로서 이 교회내의 세례소(baptistry)는 소아시아 교회 유적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이다. 이 교회는 본래 로마시대의 건물로서 콘스탄틴왕 때 교회로 전환하고 성모마리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 교회가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가 열렸던 교회라고 추정된다.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교리 화되었다.

1967. 6. 26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교회를 방문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 장소에 십자가가 기념으로 걸려있다. 에페소는 바오로의 2차, 3차, 전도여행과 관련된 중요한 도시이다. 바오로는 2차 전도여행에서 귀로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토로부터 배를 타고 에페소에 들렸고 이곳을 거쳐 가이사리아로 갔다.

3차 전도여행 때 아티옥을 출발해서 에페소에 도착하여 2년 이상 머물렀다. 사도행전 19:9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두란노서원(Tyrannus)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에페소에서 데메트리오라하는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은장색은 바오로와 그의 동역 자들을 독신 죄로 고발하였고 이들을 잡다 “연극장”으로 데려가 소요를 부렸다. 그러나 “서기장”(town Clerk)의 중재로 일이 무마되었다.(행 19:23 이하)


사도 바울로의 전도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고린토 교회를 창립한 다음, 브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데리고 고린토 동쪽 외항 겐크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에 상륙하여 거기에 부부를 남겨두고 자신을 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전도 출발지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사도 18,53-58).

53년경 바울로는 제3차 전도여행을 떠나, 우선 터키 중부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과 그 남쪽 프리기아 지방 교회들(테르베, 리스트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을 돌아보고 나서 에페소로 내려가 무려 27개월 가까이 전도했다.

에페소에서는 ‘문이 활짝 열렸다’고 바울로 자신이 말할 만큼 전도가 잘 되었다(1고린16,9).
또한 제자 에바프라를 450여 리 동쪽으로 보내어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에도 교회들을 세웠다.

바울로는 에페소에서 편지를 여러 편 썼다.
그러나 다 유실되고 지금은 세 편의 고린토서만 남아 있다.

에페소에는 옛 시내와 아야솔루크(Ayasoluk) 요새 중간 지점에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로마 신화에서는 디아나라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평판이 있었고, 온 아시아에서 순례 객들이 모여들었다.
에페소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만들어 순례 객들에게 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 바울로의 활발한 전도로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은장이 대표 데메드리오가 동료 은장이들과 시민들을 선동하니, 시민들이 바울로의 일행 가이오와 아리스다르코를 노천 극장(터키어로 파나이르 다어산, 그리스어로 피온산 기슭에 있다)으로 끌고 가서 난동을 피웠다(사도19,21-40).
바울로는 에페소 로마군 병영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로마군은 항구 동쪽 산에 주둔했다는 설이 있다.

58년경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필립비 교회에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20,6) 돌아오는 길에 밀레토스 항구에 들어, 거기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와서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했다(사도20,17-38)고 한다.


요한계 교회:

53-58년경에 에페소는 바울로의 가장 활발한 전도 무대였다.
그러나 요한계 문헌이 집필된 100년경 에페소를 비롯한 아시아 교회들은 요한계 교회 일색이 되었다.

일예로 요한 묵시록 필자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에 써 보낸 편지들을 들 수 있다(묵시2-3장).

요한 서한집에서는 체린투스식 ‘분리 그리스도론’ 영지주의와 ‘예수 가현설’ 영지주의를 대적하여 혈투를 벌이는데, 그 역사의 배경은 아무래도 100년경의 아시아라 하겠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루스 간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431년 6월 7일 에페소 성모 성당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했으나 제때에 열리지 못했다.

네스토리우스에게 동조해온 시리아 주교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루스와 에페소 주교 멤논이 주축이 되어 6월 22일 서둘러 공의회를 열고 네스토리우스를 파직하고 성모님께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이라는 존칭을 드리기로 결의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수도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공부한 다음 명 설교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총애를 받아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발탁되었다. 당시는 성모신심이 고조되던 때라 신자들이 성모님을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사실 이 존칭은 신조어가 아니었고 오리게네스(185-254) 때부터 그리스 교부들이 자주 사용해오던 관용어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 존칭을 사용하지 말고 그 대신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Christotokos)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의 논리인즉,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갖추신 분이신데, 성모님은 인간 예수만을 낳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지 결코 신 예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치릴루스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으로 합치(Henosis Kath'hypostasin)되었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 편을 들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과 시리아 주교단이 뒤늦게 에페소에 당도하여 자기네에게 동조하는 주교들과 함께(모두 50여병) 6월 26일 따로 회의를 열고 치릴루스와 멤논을 파직했다.
그러자 황제는 6월 말경에 명을 내려, 모든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를 새로 열도록 했다.

그러나 양편이 싸움을 계속하자 황제는 9월에 양편을 콘스탄티노플 황궁 건너편 칼케돈으로 불러 친히 화해를 종용했으나 성과가 없자 공의회 폐회를 선언하고 네스토리우스를 면직시켰다.
이제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수도원으로 돌아가 한동안 지내다가 436년 이집트 상부로 유배 가서 451년경 거기서 죽었다.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한동안 에데싸(지금의 터키 동남부 우르파)를 중심으로 네스토리우스 교파를 이루고 살다가 제노 황제에게 쫓겨나 동로마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던 페르시아 제국으로 피신하였다.

6-7세기부터는 아라비아, 인도, 당나라에까지 선교사들을 보내 활발히 전도했다. 그러나 이슬람이 득세하면서 교세가 현저히 약화되어 오늘날에는 이천만 쿠르드족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른바 아시리아 그리스도인들로서 신도 수는 40만 명 남짓하다.
아시리아 교회 총대주교 마르딘카 5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 11월11일 ‘그리스도론에 관한 공동 선언문’에 합의 서명했다.

인도 남부 케랄라 지방에도 네스토리아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백만 명이 있다. 이들은 말라바르 그리스도인들, 일명 토마스 그리스도인들이다. 토마 사도가 인도에 친히 내려와서 전도했다고 해서 생긴 명칭인데, 이는 전설에 불과하다.

635년 페르시아인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 알로펜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 와서 당 태종의 환영을 받고 네스토리우스교를 전파하였다.
알로펜은 네스토리우스교를 ‘빛나는 종교’, ‘위대한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景敎)라고 한역했다.

경교는 한동안 융성했으나 희종(873-888년 재위)이 외국인들을 대 학살함으로써 점차 소멸되었다.

경교의 당나라 전도 유래를 알리는 비석이 그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대진은 경교의 발상지 동로마 제국을 뜻한다.
경교 장안 주교 겸 중국 총 감독이던 경정이 781년에 세운 비로서, 현재 서안 비림에 전시되고 있다.

449년 에페소 성모성당에서 제2차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으나 실은 공의회를 취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인성을 소홀히 하고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함으로써 ‘단성론’(單性論) 이단에의 길을 열어 놓은 사기성 회의였다는 점 때문이다.

유적: 아르테미스 신전, 노천극장, 성 요한 성당, 성모 성당, 성모 마리아의 집,
에페소 시가지에는 실내 극장, 시청, 트라야누스 샘터, 하드리아누스 신전, 스콜라스티카 공중 목욕탕, 공중 수세식 화장실, 사창가, 첼수스 도서관 등이다.

(관련 성서구절 : 사도행전 19,24-40)
바울로 성당은 하나도 없다.


목마의 항구
트로아스:

트로아스(트로이)라면 누구나 기원전 9세기 스미르나 출신 장님 호메로스가 슨 양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생각한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13세기 트로아스 임금 프리암과 그리스 연합군 간의 장기전. 목마를 이용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내용으로 하여 <일리아드>를 엮고, 이어 그리스군의 험난한 귀국을 소재로 하여 <오디세이>를 엮었다.

기원전 13세기 프리암 시대의 유적(남쪽 성문), 기원전 9세기 호메로스 시대의 유적(기원전 9세기 신전)은 트로아스 폐허인 히사르릭크(Hisarlik)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옛 트로아스는 이미 알렉산더 대왕 때 퇴적 현상으로 항구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왕은 안티고누스 장군과 리시마쿠스 장군에게 명하여 옛 트로아스에서 남으로 5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조 항구를 건설하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다서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Alexandria troas)라고 명명했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는 지금의 Oduniskelesi 마을 남쪽 1킬로미터쯤에 있다.

잡초와 밀밭 여기저기에 성벽, 극장, 경기장, 목욕탕 잔해가 보일 뿐 옛 영화는 온데간데없다.
사도 바울로는 적어도 세 차례 이곳에 들렀다.

관련 성서구절 : 사도행전 16장 6-11


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 저쪽 유럽과 이쪽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 사이의 해협으로서 실이 32킬로미터, 평균 넓이 3.3평방킬로미터, 평균 수심 70미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현수교 두 개가 만들어졌고, 양쪽 지역 사람들이 그 다리를 통해 왕래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약사:

콘스탄티노플을 빛낸 황제들로는 다섯 대제가 두드러진다.
콘스탄티누스(306-337):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다음 로마 제국 동부는 리치니우스와 막시미누스가 다스리고, 로마 제국 서부는 콘스탄티누스와 막센시우스가 다스렸다.

312년 10월28일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티베르 강변에서 막센시우스를 제압하여 홀로 제국 서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리치니우스를 만나 자기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와 결혼시켰다.

리치니우스는 제국 동부로 돌아가 막시미누스와 겨루어 이김으로써 제국 동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와 리치니우스 두 대제는 317년부터 사이가 벌어지더니 324년 패권 전투를 시작했다.

423년 11월8일 비잔티움 맞은편 동쪽 포구 크리소폴리스(지금의 위스퀴다르)에서의 최후 결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동방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황제는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 별궁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제1차 공의회를 개최했다(325년5월20일-8월25일).
300여병의 주교들이 모여 석 달 동안 논의한 끝에 아리우스와 그 일파를 단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원전 7세기에 보스포러스 해협 서안에 건설된 비잔티움을 네 배로 확장한 다음, 330년 5월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개병하고 제국의 새 수도로 정했다.
그는 고지대에(지금의 고고학 박물관 옆) 이레네우스 성당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다.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재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했다.

그리고 381년5-7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2차)를 소집하여 성령의 신성 교리를 확정하고, 예수의 인성을 약화한 시리아의 라오디게이아 주교 아폴리나리우스를 단죄했다.

공의회 회기 중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직을 물러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후임으로 넥타리우스를 발탁했다.
390년 케살로니카 시민들이 로마군 사령관을 살해하자 황제는 군인들에게 시민들을 엄벌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경마를 구경하러 경마장에 모인 시민 7천 명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밀라노의 대장부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여 감히 황제에게 공개적인 사죄를 요구했고, 황제가 마지못해 주교에게 순종했다는 일화는 감동을 자아낸다.

콘스탄티노플 경마장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대리석 기단에 황제 부부와 두 아들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테오도시우스2세(408-450년 재위):
431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에페소 공의회(통산 3차)를 개최하여, 성모 마리아는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분이라고 한 콘사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교리를 확정했다.


마르치아누스(450-457년 재위):
451년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아시아 해안 칼케돈(지금의 카디쾨이) 지역에 있는 성녀 에루페미아 성당(지금의 기차역)에서 칼케돈 공의회(통산4차)를 개최했다.
교부 600여명이 모여서, 에우티케스가 주장한 예수의 단성론(單性論)을 단죄하고 예수께는 한 위격(位格)에다 신성과 인성 두 성품이 있다는 양성론 교리를 선포했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그의 치적으로는 528년부터 534년 사이에 이룩한 법전 편찬 4부를 들 수 있다.
그는 또한 지금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지었는데 그 사연과 과정은 이렇다.

532년 청색당과 녹색당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전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지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 불을 질렀다.
이때 폭도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를 외쳤다해서 ‘니카 반란’이라 한다.
이에 황제는 반란을 진압한 다음 밀레토스 출신 이시도로스와 트랄레스 출신 안테미오스를 채용하여 532년 2월23일 성 소피아 대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5년 10개우러의 대역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축성식을 거행했으며, 황제는 입장하다가 너무나 감격하여 “솔로몬 대왕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기원전 1천 년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이 훨씬 훌륭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553, 557, 559년 연속된 지진으로 중앙 돔이 무너지자, 황제는 그것을 2.65미터나 더 높여 563년 지금과 같이 만들었다.
중앙 돔의 높이는 55.60미터, 넓이는 31.36평방미터, 황제만이 드나들던 중앙 출입문에서 제대 뒷벽까지의 길이는 79.30미터, 대성당 전체의 길이는 100여 미터, 중앙 회중석 넓이는 32.27평방미터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완공 후 천년 동안은 세P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나 지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대성당, 세비아의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 다음으로 다섯 번째 큰 성당이다.
1453-1935년 사이에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하다가 1935년 2월 1일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55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5차)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 교파를 단죄하였다.

동방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가 결별할 때까지
(656-1054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다음 동로마 제국은 계속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보면,

1. 680년 콘스탄티누스 4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6차)를 열어, 예수께 오직 한 가지 의지가 있다는 단의론을 단죄하고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다 있다는 양의론 교리를 선포했다.
2. 726년 레오 3세 황제는 칙령을 내려 성화상 공경을 금지했다.
이때부터 한 세기 이상 계속된 성화상 파괴 난리로 동방교회의 이콘, 모자이크, 벽화 등 성화상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787년 콘스탄티누스 6세가 니케아에서 개최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통산 7차)에서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고, 843년 테오도라 황태후가 성화상 공경을 허락함으로써 성화상 난리는 막을 내렸다.
3. 869-870년, 바실리우스 1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통산 8차)를 열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우스를 파문했다.
총대주교는 교황을 상대로 동방교회의 자주성을 주장하고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했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덧붙인 “성자에게서도”는 삭제해야 한다고 교회 사상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4. 1054년 7월 16일 교황대하 훔베르투스 추기경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 드리러 모인 동방교회 성직자들과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교서를 대성당 제대 위에 놓으면서 “하느님께서 보시고 심판하시리라”(Videat Deus et judicet)라고 외쳤다.

파문 사유인즉, 평소에 총대주교가 서방교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덧붙인 “성자에게서도”(Filioque)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방교회에서 미사 때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곧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사움으로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은 아주 갈라서버렸다.

동로마 제국 멸망. 오스만 제국 멸망. 터키 공화국 창건
(1054-1923)

제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 성지를 수복할 생각은 않고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강점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비잔틴 황실은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로 옮겨가서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할 때까지 일종의 망명정부를 세웠다.

. 1360년 오스만 쿠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의 서부 요충지 에디르네(수도에서 228킬로미터)까지 점령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은 사방 고립무원의 도읍이 되었다.
1452년 오스만 투르크족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공략 준비를 마쳤다. 마침재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거느린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수도의 에디르네 성문을 뚫고 들어와서 삽시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사했다.

메흐메트 2세는 승전 당일 서 소피아 대성당을 둘러보고 이슬람 모스크로 삼았다. 대성당의 수많은 인물 모자이크와 벽화는 이슬람 계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석회로 덧칠을 해버렸다. 아울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명했다.

.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1935년 성 소피아 대성당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석회 덧칠을 벗겨 모자이크와 벽화들을 드러나게 했다.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차이점

두 교회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일람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정교회:
가톨릭:
1
성령은 오직 성부에게서 나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
(Filioque)
2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 선포를 반대한다.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한다.
(1854년 비오9세)
3
성모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 선포를 반대한다.
성모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를 선포한다.
(1950년 비오12세)
4
이콘 성화는 허락하나 입체적인 조각은 금한다(그리스 정교회 입장).
조형 미술의 모든 양식을 허용한다
5
로마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거부한다.
로마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교리로 믿는다. 교황의 무류성 교리를 선포한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6
미사 때 누룩 넣은 빵을 사용한다.
양형 영성체를 한다.
미사 때 누룩 넣지 않은 무교병만 사용한다.
흔히 성체만 영한다.
7
부제서품 전에 결혼 여부를 결정한다. 기혼 사제가 상처했을 때는 재혼할 수 없다. 주교는 독신이어야 한다.
독신 사제만 허용한다.
8
성직자는 대체로 수염을 기른다.
성직자는 대체로 수염을 깎는다.
9
남녀 수도자들의 수도복이 간다.
수도자들은 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남녀 수도자들의 수도복이 다르다




[코라 구세주 성당]

비잔틴 후기의 모자이크와 벽화가 가장 잘 보존된 성당이다.
그리스어 ‘코라’는 시골이라는 뜻인데, 콘스탄티노플 성밖에 있다 고해서 이런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발음이 ‘카리에’로 변하고 1510년부터는 이 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까닭에 지금은 ‘카리에자미이’라 한다.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우스 대제(527-565년 재위)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성당 몸체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1081-1118년 재위) 황제의 장모 마리아 두카스가 세웠다.
그 후 13-14세기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총리 테오도로스 메노키테스가 부속 경당을 증축하고 온 성당을 현란한 모자이크와 벽화로 꾸몄다.
100종이 넘는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품들이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다음, 1463-1478년 톱커프 궁전을 건설하고 거기서 350여 년 동안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1855년 보스포러스 해변에 돌마바체궁전을 신축하고 황궁을 옮겼다.

톱카프 궁전 옆에는 도자기 박물관, 고대 동방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을 세웠는데, 이 세 박물관을 합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라 한다.
고대 동방 박물관에는 아라비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히타이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 전시품 중 카데쉬 조약문을 눈여겨본다. 이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오래 장수하고 가장 권능을 떨친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바탈리쉬간의 혈전이 기원전 1296년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카데쉬(지금의 시리아, 아시네흐리)에서 벌어졌다.
양측 모두 지쳐 기원전 1280-1269년 사이에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왕 무바탈리쉬의 후계자 하투실리스 3세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집트 상형문자로 씌어진 이 조약문이 이집트 중부 룩소르 나일강 건너편에 있는 람세스 묘소 신전 및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 새겨져 있다.
그런가하면 아카디아어 설형문자로 된 조약문이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일명 보아즈쾨이)에서 출토되어 고대 동방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소장품 Bo. 10403.6549.6674호).

정치적 조약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람세스 2세 치세 때 이집트 피 람세스(지금의 칸티르)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족이 모세의 영도 아래 시나이 반도로 탈출했다.
2) 고대 동방 박물관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신바빌로니아 왕국 수도 바빌론의 이쉬타르 성문에서 떼어온 사자상 부조(소장품 88.142호)와 황소상 부조 (소장품 88.147호)이다.
부조의 조형미도 놀랍거니와, 성문과 성벽과 부조물의 소재가 유약을 발라 구운 청, 황, 흑6색 벽돌인데, 그 색체가 가히 중국의 당삼채와 견줄 만하다.

. 기원전 597-581년 사이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바라보고 드나들던 바로 그 한많은 성문 부조이다.
성문 부조 일부는 베를린 페르가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구약성서와 관련되는 게제르 달력, 히츠키야 석판, 성전 입장 금지 석판을 눈여겨봐야 한다.
게제르 달력은 석회석에 새긴 달력으로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의 국도 변에 있는 게제르 폐허에서 1908년에 발견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시대 작품으로 히브리어 금석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소장품20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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