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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관조약(馬關條約)과 하관조약(下關條約)

작성자박자우| 작성시간10.04.27| 조회수973|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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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7 <원문> 上元門: 在江蘇江寧縣北. 當長江濱. 東至觀音門十里. 西距下關十里.
    [출처=胡毅華·徐鋒, 辛亥革命, 上海書店出版社, 2002년]
    <번역문> 상원문은 강소성 강녕현 북쪽에 있다. 장강 가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관음문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는 하관까지 10리이다.
    예전에 최두환 선생님이 올리신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이군요... 다시 한 번 읽어보니까 기억이 납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7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에 따르면, 1897년에 마관(馬關)은 하관(下關)으로 개명되었다고 하는데...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일본열도에 있는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역은 원래 '馬關'(ばかん; 바칸)이라 불리었는데, 1889년(明治 22년) 시제(市制)의 시행에 따라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로 변경되었고, 1902년(明治 35년)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출처=http://homepage3.nifty.com/jpnships/meiji01/meiji01_kokunai_osk01_.htm]
    1897년과 1902년.... 그 연대가 서로 다르게 나옵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7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는 1881년 신사유람단 이헌영의 <일사집략(日槎集略)> 지(地) 4월 14일(을사)에도 그 지명(地名)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산구현(山口縣)의 적마관(赤馬關)에 이르러 닻을 내렸는데 박다파(博多波)로부터 3백 50리이다. 이곳은 이른바 일본의 서해도(西海道)의 하관(下關)이라는 곳으로, 민가가 번창하기가 박다파(博多波)보다 낫고, 신당(神堂)의 새로 쌓은 석대(石臺)가 우뚝하게 바라보였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일사집략(日槎集略)>에 따르면, 1881년 무렵에 적마관(赤馬關)과 하관(下關)이라는 두 가지의 지명(地名)이 한 지역에서 같이 사용되었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7 참고로, '赤間關'는 본래 '赤馬關'라고 표시했으나, 한문풍(漢文風)으로 줄여서 '馬關'이라 표시했다고 합니다.
    [출처=http://ja.wikipedia.org/wiki/%E4%B8%8B%E9%96%A2%E6%9D%A1%E7%B4%84]
    또한 '下關'이라는 명칭은 1895년(明治 28년) 당시 강화조약을 공포한 문서에 '下ノ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출처=http://www.kawashimashin.com/09/essay/bakanjoyaku.html]
    따라서, 1895년에 이미 '下關'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당시의 문서에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下關'의 본래 이름은 '馬關' 또는 '赤馬關'이라는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8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에 따르면, 광서 21년(1895년)에 청-일(淸-日) 마관조약(馬關條約)으로 강령(江寧)을 상업지역 포구로 개항하였고, 광서 23년(1897년)에는 성북(城北)의 하관(下關)에 부두를 열었다고 합니다.
    마관조약(馬關條約) 때문에 결국 청국(淸國)은 강령(江寧)을 일본(日本) 측에 개항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만...
    1895년 당시에 청국(淸國)은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으로 그 조약(條約)을 통칭하였고, 일본(日本)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을 공포한 문서에 '下ノ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강령(江寧)=마관(馬關)=적마관(赤馬關)"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8 최두환 선생님은 이른바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는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이 강령(江寧) 지역에 나오지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따라서, 최두환 선생님은 '馬關'(마관)을 대체할 수 있는 '下關'(하관)이라는 지명을 중국의 문헌에서 찾으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1895년 무렵... 대륙(大陸)의 강령(江寧)에는 '下關'(하관)이 아니라 '馬關'(마관)이라는 지명이 당연히 존재하였고 또한 실제로 사용되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먼저 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 본문에 인용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의 내용은 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보입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8 다시 정리하면, 최찬동 선생님의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에서는 1897년에 마관(馬關)은 하관(下關)으로 개명(改名)되었다고 하므로... 또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에서 그 개명 사실이 직접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므로...
    1897년에 청국(淸國)이 부두를 열었던 성북(城北)의 '下關'(하관) 지역은 그 개명 이전에 즉 1895년 마관조약(馬關條約) 당시에 그 공식 지명이 '馬關'(마관)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下關'(하관)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중국(中國) 남경(南京)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8 <위키백과(한국어)>에 따르면, "천진조약(天津條約)은 1858년, 애로호 사건 이후 청(淸)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맺은 여러 불평등 조약이다. 러시아(6월 13일), 미국(6월 18일), 영국(6월 26일), 프랑스(6월 27일)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광범위한 외국의 특권을 규정하고 있어, 이후 불평등 조약의 근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1858년 청국(淸國)과 프랑스(法國) 사이의 조약(條約)은 '강령'(江寧)이 아니라 '천진'(天津)에서 체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진조약(天津條約)과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에 따라 청국(淸國)은 '강령'(江寧) 등 10개 항구를 결국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 김홍필 작성시간10.04.28 위에 일부 인용된 <중국역사지리(中國歷史地理)>의 내용은, 대륙(大陸)의 '강령'(江寧) 즉 지금의 '남경'(南京)은 1858년의 천진조약(天津條約)과 1895년의 마관조약(馬關條約)에 의거하여 청국(淸國)이 외국(外國)에 개항(開港)하게 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최찬동 선생님은 '강령'(江寧)을 그 조약(條約)들이 '체결된 장소'(체결지)라고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에 인용된 <대동방씨족원류사(大東方氏族源流史)>의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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