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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방관자,객

작성자천리안| 작성시간21.12.08| 조회수8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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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천리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12.08 한사군을 현재의 평양으로 끌고 온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5EsYnM5omfg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답댓글 작성자 천리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12.08 평양엔 한사군 낙랑군 유물이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SdzDCvFFWU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작성자 천리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12.08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80여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역사권력(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박기자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역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역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 답댓글 작성자 천리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12.08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 역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 답댓글 작성자 천리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12.08 천리안  한국 역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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