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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뉴스

대한민국 국민 90% 이상이 동학(東學)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다.

작성자천리안|작성시간18.09.11|조회수767 목록 댓글 0






과학문명의 발전은 빈부의 격차, 살상무기의 발전, 환경 파괴 등의 많은 폐단을 가져왔으며, 정신문화를 잃어버리고 물질제일주의, 배금주의를 낳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기존의 사상과 질서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산업 발달로 자본을 축적하고 많은 물자를 생산하게 된 서양 열강은 제국주의화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시작하였고, 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개혁의 기회를 지녔던 조선은 인조를 비롯한 서인들의 변란으로 인해 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교조화된 주자학에 경도되어 변화하는 정세를 바로 보지 못했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간 노론老論 일당 정치에 의해 신분체제가 고착화되고 사회는 경직되었으며 사상의 다양성은 상실되었다. 더불어 관리와 아전들의 혹독한 수탈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다.

 

 



조선의 이름 없는 구도자,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


1824 갑신년 10월 28일 새벽 첫닭이 울 때 경주 구미산 자락인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 금곡산 안태봉 아래에서 태어난 최수운은 본명이 제선濟宣이고 아명은 복술福術이었다.



수운의 7대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용맹을 떨쳤던 최진립崔震立(1568~1636) 장군이다.

 

수운의 부친은 최옥(崔鋈,1762~1840)으로 제자백가에 정통하고 성리학을 깊게 연구한 영남학파의 당당한 한 계승자였다. 퇴계 학맥을 이은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경주 최씨 남인 간판으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막막했다. 이후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들의 간청으로 최옥은 60세에 과부로 있던 30세의 곡산 한韓씨 부인을 재취로 맞이하게 된다. 이를 두고 경주 최씨 문중에서는 족보에 한씨 부인이 정실로 올라와 있지 않았고, 재가녀再嫁女라고 해서 정실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에 수운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서자庶子 취급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경국대전>에 의하면 재가녀 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수운이 6세 때 모친 한 씨는 세상을 떠났다. 60이 넘은 나이에 얻은 혈육에 대한 부친의 사랑은 깊었다. 직접 글을 가르쳤고, 공부에 전념하게 하였다.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타고난 재주에 더해, 고명한 학자인 부친으로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16세 때 이미 80 노인이 다 된 부친이 별세를 하게 되었다.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19세의 수운은 울산 출신의 월성 박朴씨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20세 때에는 집에 불이나 집과 책이 모두 화마에 사라졌다. 수운은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돌아와 여섯 마지기 논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1859년 고향인 경주 구미산 밑의 가정리로 귀향하였다. 당시 수운은 두 아들과 두 딸을 거느린 가장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수운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처연하였다. 그 때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 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含情하니 불효한 이내 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오작烏鵲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 난다. 가련하다 이내 부친 여경餘慶인들 없을소냐.” (용담가)

 

그는 부친이 공부하던 용담정에 살림집을 차리고 다시 구도의 결의를 굳혔다. 여기서 제우濟愚라는 이름과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쓰게 된다.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를 얻기 전까지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不出山外)는 굳은 결의를 하고, 이듬해 초에 쓴 입춘서에서는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고 하여 결의를 분명히 하였다.

 

 








구도자 수운의 간절한 성경신에 드디어 동학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1860 경신庚申년 4월 5일 천상문답天上問答 사건이다. 이에 대해 《도원기서道源記書》(현존 최고最古 동학 초기 역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신이 혼미하고..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공중으로부터 완연한 소리가 있어.. 공중을 향해 묻기를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하니,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곧 백지를 펴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아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상제께서 또 일컬어 말씀하시기를
“너의 전후 길흉화복을 내가 반드시 간섭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이 정자에 들어앉아 이름과 호를 고치고 산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며, 소위 입춘시인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를 써서 벽상에 걸어두고 세상을 조롱하니, 실로 우스운 일이다.



네가 이왕에 사람들을 가르치고 포덕을 하니, 나를 위하여 지극히 섬기면 너 역시 장생하게 되어 천하에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너는 삼가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라.”하는 말씀을 내렸다.





 

오행 

木: 유(儒)

金: 불(佛)

선(仙)

水: 동선(東仙)

火: 서선(西仙)

도의 전공분야

유지범절(凡節)

불지형체(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우주 주재자 

상제님

미륵 천주님

옥황 상제님

백보좌 하느님

목적(目的)

대동(對同)

극락(極樂)

태청(泰淸)

천국(天國)

교리강령

충서(忠恕)
존심양성
(尊心養性)
집중관일
(執中貫一)

자비(慈悲)
명심견성
(明心見性)
만법귀일
(萬法歸一)

감음(感應)
수심연성
(修心練性)
포원수일
(抱元守一)

박애(博愛)
성령감화
(聖靈感化)
삼계유일
(三界唯一)

삼극

오황극
(五皇極)

일태극(공)
(一太極(空)

십무극(十無極)

(三位一體)

무극/태극/황극

법신/보신/화신

옥청/상청/태청

성부/성자/성신








































“물구물공(勿懼勿恐)하라. 세인(世人)이 위아상제(謂我上帝)어늘 여부지상제야(汝不知上帝耶)아.” 『동경대전』「포덕문」


‘두려워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예로부터 나를 상제님이라 불러왔는데, 너는 구도자로서 어찌 상제를 모르느냐.’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줄 것이니 닦고 다듬어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밝게 빛나게 하리라.(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논학문>

 

“천지가 개벽한 이래 나 역시 공이 없었으므로 세상에 너를 내어 나의 이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나니 의심하지 말고 또 의심하지 말라!(余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 勿疑勿疑)” <포덕문>


이제까지 수운에게는 직접 말씀을 내려주시는 인격적인 상제님은 낯선 존재였다. 이에 대해 상제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勿懼勿恐)”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주문을 내려주시니 그게 바로 시천주주(侍天主呪)이다.

 

 















상제님께서 주문을 내려주신 이유를 <포덕문>에서는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불순천리(不順天理)하고 불고천명(不顧天命)하였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명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상제님을 위하도록 초학 주문으로 ‘위천주(爲天主)’ 주문을 내려 주었다.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은 사람은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선생 외에 1천 년 전, 상제님을 친견했던 통일신라때의 진표眞表대성사가 유일하다. 그 기록이 『삼국유사』「진표전간(眞表傅簡)」에 있다.

 


 

 

 



동학의 이름으로 포덕에 나서고 상제님으로부터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천명(天命)을 받은 수운은 곧바로 포덕을 하지는 않았다. 이는 <수덕문>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불의포덕지심不意布德之心 극념치성지단極念致誠之端(포덕할 마음은 두지 않고 오로지 치성만을 생각하였다)” 치성(致誠)은 상제님에 대해 지극히 공경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약 1년간 수운은 계속해서 수도하며 상제님께 받은 영부 그리는 법, 주문 수행법, 교리 등을 정립한 뒤에 포덕문을 지으면서 포덕(布德)을 펴기 시작했다. 이때 찾아온 이들이 도의 이름을 묻자 “천도天道”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가르침을 “동학東學”이라고 밝혔다.

 

동학東學은 동방 조선에서 열린 천도(天道)를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이지 서학(西學)과 단순 대비한 것은 아니다.




수운은 찾아온 이들에게 득도 과정과 상제님의 가르침, 주문 읽는 방법과 수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지에서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6개월 동안 약 3천여 명이 제자가 되었다. 이에 제자들에게 포덕을 명하여, 경주를 넘어 경상도 일대에 널리 동학이 전파되었다.

 

1863년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삼남 지역을, 계층에 불문하고 널리 퍼지자 유생(儒生)들은 동학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그릇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으로 몰았다.


수운은 11월 하순경 해월 최시형崔時亨을 불러 도통을 전수하고 그동안 지었던 글을 건네주며 간행하라고 했다.

 







1863년 11월 20일 조정은 정운구鄭雲龜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12월 10일 최수운과 가족, 제자 23명을 체포하였다. 죄명은 좌도난정지술(左道亂正之術) 잘못된 도를 가르쳐 통치에 혼란을 초래한 죄다.

 


참형 집행 이전에 최수운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

비록 나를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을 틈새가 없다. 결국 너희들 손에 죽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전 40은 내려니와 후 40은 뉘련가. 천하의 무극대도가 더디도다, 더디도다, 8년이 더디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후 8년이 지나 1871 신미辛未년에 수운에게 천명을 내리신 상제님께서 이땅에 직접 강세하셨다.







 




 



최수운은 1864년 3월 10일 대구 남문 앞 관덕당觀德堂 뜰에서 참형되었다. 순도殉道 당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날 참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는 형졸이 칼로 수운의 목을 내리쳤지만 칼자국도 나지 않는 믿기 힘든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경상감사 서헌순을 비롯한 관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운은 청수를 가져오게 하여 상제님께 정성스럽게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 후 형리에게 안심하고 베라고 말하고 나니 비로소 목이 베어졌다고 한다.

 

수운의 나이 41세. 3일간 효수한 뒤에 가족에 시신을 인도하여, 3월 17일 구미산 자락 대릿골 밭머리에 매장하였다.



시천주(侍天主, 천주님이 이땅에 오신다)를 선포하고 다시 개벽의 도래(到來)를 선언한 수운은 이렇게 짧은 공생애를 마쳤다.







최수운의 한계와 진리적 사명


최수운이 천명(天命)을 완수하지 못한 이유

 

지극한 정성으로 상제님의 천명을 받았던 수운은 천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1871년 신미년에 동방 조선 땅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는 최수운이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서 진법을 들춰내어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했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셨다(도전(道典 2편 30장 14~15절).

 




최수운은 퇴계 학통을 이은 아버지에게서 직접 글을 배웠기에 유교적 소양과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인물이었다. 이런 모습들이 《동경대전》에서 보인다. <수덕문>에서 최수운은 동학이 공자의 도와 대동소이하다고 말하고 있고, 같은 글에서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이 가르친 것이며 자신이 정한 것은 수심정기(修心正氣)일 뿐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옛 선비들은 천명에 순종하였으나 후학들은 천명을 잊어버린 것을 자신은 한탄한다고 하면서 동학이 유학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포덕문>에서 최수운은 성인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현상계의 일체 변화의 원인과 존재의 근원을 하늘에서 찾아 천명에 대한 공경과 천리에 대한 순응의 근거를 제시하였고 사람이 군자가 되고 학문이 도덕이 되는 길을 밝혀주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박경환 같은 이는 동학은 유학의 사유형식과 지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했고, 심지어 종교학자 최준식은 동학을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동학을 “중국적인 성리학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 나름대로 철저하게 극복되고 대중적인 실천의 수준에까지 가게 된 높은 사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개혁유교’, ‘세속화된 유교’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증산상제님은 유교의 테를 벗어나지 못한 동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여 ‘참동학’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최수운의 가르침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참동학인 상제님의 말씀과 행적인 담긴『도전道典』)

 


 

 





최수운의 공덕과 사명

 

최수운은 상제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할 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후천개벽의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오시는 상제님을 모시는 길(侍天主)이라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한 종교의 창시자는 별도로 경전을 직접 집필한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경전 집필은 후대의 몫이었다. 하지만 동학은 드물게도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직접 기록을 남겼다. 이것이 수운의 공생애가 2년 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교세가 급속하게 확장된 이유일 것이다.

 

수운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諭)詞』(수운가사水雲歌詞라고도 함)라는 기본 경전을 남겼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은 ‘동학의 경전을 빠짐없이 모아 엮은 책’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용담유사』는 지식인 뿐 아니라 일반인 특히 부녀자들도 쉽게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한글 가사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동경대전에서 문文에 해당되는 편은 천상문답사건과 상제님께 받은 무극대도를 세상에 펴야 한다는 논리가 담겨 있는 <포덕문布德文>, 동학을 논하고 동학의 요체를 밝히고 있는 <논학문論學文>, 도인이 지켜야 할 계율과 동학의 가르침을 행하면 나타나는 수행의 효험 등을 기술한 <수덕문修德文>,



천도의 인식론적 근거를 통찰하여 시천주의 본의를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가르침을 펴고 있는 <불연기연不然其然> 등이고 그 외에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필법筆法>, <축문祝文>등의 글이 들어 있다.




시詩로는 <입춘시立春詩>, <절구絶句>, <강시降詩>, <좌잠座箴>, <화결시和訣詩>, <결訣>, <우음偶吟>, <제서題書>, <영소詠宵>, <유고음流高吟> 등이 있으며, <주문呪文>과 <팔절八節>과 수운이 제자들에게 보낸 <통문通文>과 <통유通諭>가 각기 한 편씩 있고, 동경대전 판각 당시 해월이 쓴 <발문跋文>,<입도식入道式>, <치제식致祭式>, <제수식祭需式> 등의 의식을 행하는 방법 등을 적은 글이 들어 있다.

 


즉 동경대전은 수운의 가르침을 담은 글들과 종교의식에 필요한 사항을 적은 글, 수도 절차나 수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시의 형식을 빌린 잠언과 같은 글 그리고 문학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담유사龍潭遺(諭)詞』는 초기에는 유사팔편 혹은 가사팔편이라 불렸는데, 수운이 태어나고 자라고 득도한 용담의 내력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용담가龍潭歌>,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은 <안심가安心歌>,

 

득도하기까지 어려운 생활역정과 포덕할 때의 즐거움과 친척들로부터의 괴담흉설로 인하여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수에 대하여 구구절절이 읊고 있는 <교훈가敎訓歌>가 있다.

 

또 수운의 출생 성장 득도 과정과 함께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 및 상원갑에 대한 예언 등이 담겨 있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관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직접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제자들에게 도를 닦는 요체를 설명하고 있는 <도수사道修詞>,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 동귀일체同歸一體 할 것을 권유하는 <권학가勸學歌>,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로 상제님의 조화를 자각 실천함과 성경誠敬 2자를 강조하고 있는 <도덕가道德歌>,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과 비比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흥비가興比歌> 등이 있으며,

 

<검가劍歌>는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어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땅에 강세하신 상제님의 동학의 왜곡에 대한 말씀


 

도전道典 5편 233장 9~14절) “천(天)은 천이요 인(人)은 인이니 인내천(人乃天)이 아니니라. 손병희가 ‘아이를 때리는 것(打兒)’을 ‘하늘을 때리는 것(打天)’이라고 이르나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요, 감히 하늘을 때린다고 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사람의 생사와 화복이 하늘에 달려 있거늘 어찌 하늘을 때린다 하리오.

 

하늘은 억조창생의 임금(君)이요 억조창생의 아버지(父) 되나니 옛 성현들이 하늘을 모시는 도가 지극히 엄숙하고 지극히 공경스러워 통통속속(洞洞屬屬)하고 수운의 하늘을 모시는 가르침이 지극히 밝고 정성스러웠느니라. 큰 근본(大本)이 어지러워지면 만덕(萬德)이 모두 그르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道典 5편 233장 9~14절)

 



최수운 대신사가 대구 장대에서 순도를 당한 이후 동학은 오랫동안 불법화되었다.

 

동학도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정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거나 인적 드문 곳으로 잠적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학의 조직을 재건하고 끝내는 동학의 세력을 크게 떨친 인물이 2세 교주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다.

 

경주에서 출생한 최시형은 35세에 동학에 입교한 뒤 1862년 3월 수운으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경북 일대를 돌며 포교를 하였다.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인도하여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었고, 8월에 도통을 이어 받았다. 1865년부터 수운의 순도일과 탄신일에 동학교도들의 비밀모임을 가지기 시작하여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이 사람이다’는 설법을 하여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 가르침을 전했다. 이듬해에는 적서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기도 했다.

 

1878년 접소接所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接制의 통문을 돌려,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경진 5월 인제군에서 목판본 《동경대전》을 간행했으나 전해지지 않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이후 《동경대전》은 1883년 경주판이 목활자본으로 나와 현존 최고 경전 판본으로 남아있고, 1888년 인제에서 목판본으로 최초 판본인 경진판 목판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최수운 순도 후에도 동학의 교세가 급신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인쇄되어 보급되었기 때문이었다.


1892년 7월 호남 접주 서인주(서장옥), 서병학 등이 찾아와 교조 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의 억울함을 벗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이었다.

 

해월 최시형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그해 11월에 삼례역에서 신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12월에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고 이듬해 2월에 상경하여 광화문 앞 복합상소를 올렸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2만 명이 모였는데, 이는 단순히 교조 신원만이 아닌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며 정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 동학혁명의 지도부인 전봉준과 김덕명, 김개남, 최경선 등이었다.

 



1894년 갑오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났으나, 해월은 때가 아니라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10월 재기포 때에는 전체 동학교도에 총기포總起包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 말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월 최시형은 탁월한 조직 구성력과 혁명적 가르침과 소박한 인품 등을 갖추고 있어, 신관神觀에서 최수운의 본래 가르침을 왜곡하지만 않았더라면 최수운보다 더 탁월한 종교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상제님의 존재를 직접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영적 체험이 없던 해월은 최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신앙을 왜곡하여, 만물 안에 하느님이 내재하고 있고 그렇게 모실 때 진정한 모심이 이루어진다는 양천주(養天主) 사상을 제시했으며, 양천주의 대상을 마음이라고 했다.



즉 양천주의 신은 최수운이 알리려 했던 인격적인 모습의 천주(상제님)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서 키울 수 있는 신이다.

해월의 범신론적인 시각은 하느님의 인격적 성격과 주재적 성격을 부인하게 된다. 이는 불교의 ‘모든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와도 혼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해월은 천주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인시천人是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섬기되 하늘처럼 섬겨라)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신관은 후일 손병희의 인내천 교리로 이어져 동학의 본래 가르침과는 동떨어지게 되었다.

 





해월의 순도 이후 동학의 3세 교주가 된 사람은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1861-1922)다.

 

손병희는 청주관아의 서리인 손두흥의 아들로 서자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면서 일본 신문에 낸 광고에서 종지宗指는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천도교 초기의 주요 교리서인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도 인내천 사상이 천도교의 핵심교리임을 밝혔다. 이는 수운의 원래 가르침이 왜곡된 것이었다.


동경대전을 비롯한 그 어떤 경전에서도 인내천이란 말은 찾을 수 없으며, 인격적 상제님을 인정하지 않는 성리학의 주장과 유사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의 동학과 지금의 천도교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더불어 수운이 전한 상제님의 강세와 후천개벽 및 무극대도의 출세라는 메시지에 대해 본연의 전거를 세워 이를 올바르게 전하고 집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왜 이 시대에 참동학 증산도가 출현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문헌
『천지의 도 춘생추살』(안운산, 대원출판, 2007)
『동경대전』(윤석산, 동학사, 2001)
『용담유사』(대원출판, 2000)

 

『동학의 창도자 최수운』(김현일, 상생출판, 2013)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김철수, 상생출판, 2011)

『녹두전봉준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2007)

 

『도올심득-동경대전1』(김용옥, 통나무, 2004)
『사상기행1』(김지하, 실천문학, 1999)
『동학이야기』(김지하, 솔, 1996)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푸른역사, 2002)
『한국의 종교,문화로 읽는다 2』(최준식, 사계절 출판사, 1998)
『표영삼의 동학이야기』(표영삼, 모시는 사람들, 2014)
『동학1-수운은 삶과 생각』(표영삼, 통나무, 2004)

 



1) 노론 일당 정치- 조선 후기를 장악했던 노론 세력은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해방 이후에는 친미 사대주의자로 변신하여 현재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해방 후 이들에 대한 단죄 시도였던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이승만과 친일 경찰, 친일파 세력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두계 이병도李丙燾의 매국사학은 현재도 우리 국사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2) 이광순, <수운선생과 동학창도>《한국사상(10)》, 한국사상연구회, 1972

 

3) 최진립崔震立- 경주 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 17세손이 수운 최제우의 조상인 최진립이다. 최진립은 사성공파 시조로 그의 아들 최동량 대에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최국선(1631~1682)으로부터 28세손인 최준(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렸다. 그 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 이야기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독립자금을 지원했으며 마지막 부자인 최준은 1947년에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4)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1804-?):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의 서쪽에는 띠울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감사와 참판을 지냈던 연담 이운규선생이 국운이 쇠미해짐을 보고 서울에서 낙향하여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 이서구(李書九)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여 천문(天文), 역산(曆算), 역학(易學), 시문(詩文)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는 김일부선생 뿐 아니라 후일 동학(東學)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崔濟愚), 남학(南學)의 김광화(金光華)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의 스승이 된다.

 

김일부 선생이 36세 되던 해, 하루는 연담 선생이 최제우, 김광화, 김일부를 차례로 불러 말하였다. 최제우와 김광화에게는 ‘각기 떨어져가는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주문을 외우고 깊이 근신(謹愼)하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일부에 대해서는 “그대는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장차 크게 천시를 받들 것이니 이런 장할 데가 있나.
 

이제까지는 ‘너’라 하고 ‘해라’고 했으나 이제부터는 ‘자네’라 하기도 과만한 터인 즉 ‘하소’라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예서(禮書)만 자꾸 볼 것이 아니라『서전(書傳)』을 많이 읽으소. 그러노라면 자연 감동이 되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고, 후일 정녕코 책을 지을 터이니 그 속에 나의 이 글 한 수만 넣어 주소.”하고 글 한 수를 내어주니 이러했다.

 

“관담막여수(觀淡莫如水)하고 호행의행인(好德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 맑은 것을 보는 것은 물만 같음이 없고 덕德을 좋아하는 것은 인仁을 행함이 마땅하구나.

 

빛이 천심월(天心月)에서 동하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소.”연담 선생은 이 글을 남겨놓고 마을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

 




5) 초학주문- 위천주爲天主 고아정顧我情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의萬事宜 상제님을 위하면 내 사정을 돌보아 주시고 영원토록 상제님을 잊지 않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강령주-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상제님 기운이 크게 내릴 것을 바라는 주문

 

본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


또한 수운은 <논학문>에서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各知不移’라고 풀이하였다.

 

마음으로는 상제님의 영을 접하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定’을 풀이하기를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천주를 지극히 모시면 저절로 하느님의 덕과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지知’는 “그 도를 알고 그 지혜를 받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6) 수덕문修德文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유일집중惟一執中은 인사지찰人事之察이라 고故로 생이지지生而知之는 부자지성질夫子之聖質이요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선유지상전先儒之相傳이라 수유곤이득지雖有困而得之한 천견박식淺見薄識이라도 개유어오사지성덕皆由於吾師之盛德이요 불실어선왕지고례不失於先王之古禮니라.


원과 형과 이와 정은 천도의 떳떳함이요, 오직 한결같이 중도를 잡는 것은 인사의 살핌이니라. 그러므로 나면서 아는 것은 부자(공자)의 성스러운 바탕이요, 배워서 아는 것은 먼저 선비들이 서로 전해오는 것이니라. 비록 힘들여 얻은 천박한 견식과 지식이라도 모두 우리 스승의 성덕에 말미암음이요. 선왕의 옛 예의를 잃지 않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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