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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영칼럼

아무리 봐도...서태후는 조대비(신정황후)같습니다.

작성자서정호|작성시간11.06.01|조회수1,857 목록 댓글 0

 

아무리 봐도...서태후는 조대비(신정황후)같습니다.|자유게시판
홍진영 | 조회 329 |추천 0 |2011.02.16. 20:26 http://cafe.daum.net/chosunsa/POVo/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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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조심스러워 잠시 보류했던...

서태후는 조대비 홍대비의 조합이란 제 주장에 하나를 덛붙이겠습니다.

 

 

 

 서태후란 인물여...

아무리 봐도 역사외곡세력들이 구한말 청구조선의 태후들을 조합한 실존인물이자 가공의 인물일까 합니다.

 

 

 

서태후의 탄생과 초기 간택과 정비가 아닌 계비다...아니 후궁이다의 내용은...홍계비와 경빈김씨를 조합한 것...

서태후가 이미 죽은 동태후를 시샘하는건...효현황후 김씨를 효정황후 홍씨가 시샘하는 것...

서태후가 동태후와 같이 사이좋게 손주 황제들을 주물딱 거리며 수렴청점하는 건...조대비와 그 며느리인 홍대비&경빈김씨의 구한말 역할...

 

서태후가 결혼 초년엔 사랑받지 못했다 함은...홍대비의 독수공방...그러면서도...

동태후는 독수공방...서태후는 사랑 독차지 했다함은...홍대비의 독수공방...헌종의 강력한 의지로 맞은 후궁 경빈김씨의 사랑독차지...

 

서태후의 애주중지하던 유일한 아들이...후사없이 후궁들에 둘러쌓여 빌빌하다 병사한 건...

조대비의 금지옥옆 유일한 아들인  헌종의 그것...

 

그러함에도 서태후가 아들이 맘에 안들어 독살하여 죽였을 지 모른단 상반됀 설은...

조대비의 외척세력을 견제한 순원황후 김씨가 헌종을 주지육림에 빠지게 많들어 독살 또는 병사시켰을 거란 설 ...

 

 

 

 

서태후가 경친왕(경록?)과 야합하여...청나라 거의 최초로 턱없이 먼 방계혈통의 경친왕(경록?) 아들을 양자로 들여 황제를 만든 건...

조대비가 대원군(경록대부?)과 야합하여...조선 거의 최초로 턱없이 먼 방계혈통인 대원군 아들 고종을 양자로 들여 황제로 만든 것...

 

그게 고마워 경친왕(영록?)과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이화원에  거대 궁궐을 지어 준건...

그게 고마워 대원군(영록대부?)과 고종이...조대비에게 경복궁에 대비전을 크게 지어 준것...

 

그  무리한 토목공사로 청나라가 경재가 파탄에 빠져 청조가 망했다는 비판...

경복궁 재건등의 그 무리한 토목공사로 당백전을 발행해 조선경재를 파탄으로 몰아넣어 망국의 초석을 다졌단 비판...

 

 

 

반면,

서태후를 이뻐한 황제가 이화원에 낙수당 등 거대 건축물을 지어 주었단 소문은...

경빈을 이뻐해 헌종이 500간 짜리 낙선재를 지어 주었단 것...(현재는 6간 만 남았다나...500간 짜리 터는 어디고?...^. .^)

 

그래, 항간엔 서태후와 영록의 로멘스 소문이 자자했었고...

그래, 조선엔 조대비와 대원군의 미묘한 관계가 조심스레 회자됐었고...

 

 

 

서태후의 양아들격인 광서제의 황후는 서태후의 동생이라 함은...

조대비의 양아들격인  고종의 황후는...부대부인 여흥민씨(대원군 부인)의 동생 민황후(자영)라서...이모와 결혼한 격임을 말한것...

 

 

 

광서황제가 자금성을 버리고...별궁인 이화원에서 정무를 보거나 말년엔 반 납치감금 되는 건...

고종황제가 경복궁을 버리고...별궁인 창덕궁에서 정사를 의론하고...말년엔 고종과 순종이 반 납치감금되는 것... 

 

서태후 사망일시와... 사망후 선대 황릉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하는 건...

경빈 김씨 사망 일시와(서태후와 1년차?)... 사망후 엄연히 비빈의 신분이기에 경릉의 헌종옆에 못 묻힌 것...

 

그러면서도 서태후는 청황제의 동쪽에 묻혔단 상반됀 얘기가 나옴은...

홍대비가 헌종비의 동쪽에 묻힌 것...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 너무 같은게 많은... 구한말 망국시기의 청조와 청구국(조선)의 권력층과 대비(태후)들 이야깁니다.

 

 

 

 

위키백과의 서태후의 초상화란 건...

뺨이 홀쭉허고 턱이 길던데...

그건 다른 태후(명헌태후=효정황후=홍대비)나 비빈(경빈김씨?) 초상화로 보입니다.

 

 

차라리 서태후의 여러 사진들을 보건데...

조대비(신정황후)가 딱 서태후의 얼굴과 유사합니다.

 

 

 

 

 

 

 

 

밑에 ...

근래에 단 한 개 발견됐다는... 신정황후(조대비)의 초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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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 조 대비(趙大妃)의 초상화로 전해지는 그림 한점이 처음 실체를 드러냈다.

 

신정왕후 (神貞王后, 조대비 조선 왕비) 1808(순조 8)~1890(고종 27).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 풍양조씨로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만영(萬永)이다. 1819년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827년 헌종(憲宗)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대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고종이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1866년까지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흥선대원군에게 넘겨주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수릉(綏陵)이다.

  

  ▲ 문화재청의 도록과 이태호 교수의 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전(傳) 조 대비 초상’. 조선시대 문신(文臣)

      초상화의 격식을 갖춘 유일한 여성 초상화로 부산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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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하신 조대비 초상화를 서태후의 사진들과 대조해 보겠습니다.

 

 

 

  • 서태후 사진 늙었을 때.jpg (29k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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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후 초상화 3.jpg (93kb)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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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태후 조대비 모두...긴 얼굴상이나...상대적으로 짧은 아랫턱.

    2. 서태후 조대비 모두...귀는 큰데...돌출형이 아닌 ...머리에 바짝 붙은(누운)귀.

    3. 서태후 조대비 모두...넓은 이마.

    4. 서태후 조대비 모두...길지만 상당히 옅은 눈섶.

    5. 서태후 조대비 모두...눈과 눈섶사이 눈두덩이 푹 꺼진 주름이 잡힌 서양인형 눈두덩.

    6. 서태후 조대비 모두...좁고 길고 오똑한 서구형 콧날.

    7. 서태후 조대비 모두...유난히 통통한 뺨과 ...갸름한 얼굴과 상반되게 짧은 아랫턱.

    8. 서태후 조대비 모두...얇은 입술.

    9. 서태후 조대비 모두...다소 옆으로 큰 입술을 작게 오므리려 애쓴 습관이 몸에 밴... 엄발란스한 입술.

    10. 서태후 조대비 모두...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균형잡힌 미인상.

     

     

    이정도면...동일인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여...?

     

     

     

    복장이 왜 다르냐고여...?

     

    상당수의 초상화들은...그 복식이 후대에 맘대로 수정됀 흔적들이 부지기수며...

    정곤수의 초상화에서 보듯...완연한 청나라 복식을 지우고 명나라 복식으로 고친 초상화를 참고하건데...

     

    후대 한반도에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대륙에서 망명한 친일대한떼국 기득권들과 ...섬 원숭이들이 요정도의 손장난도 않 했다 보시는건 ...

    너무 천진난만한 발상들이시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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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 니오는 서태후 초상화는 좀 이상합니다.

    서태후는 노년까지 젊음을 유지했단 설을 뒷바침하듯...노년기 사진에도 검은 머리에 통통한 볼을 지녔던데...

     

    밑의 초상화엔...

    전체적으론 닮은것 같으나...

    백발이 허옇고...결정적으로 뺨이 푹 꺼지고...아랫턱이 작지않은 초상화 이고 보니...

    당대의 다른 태후(홍대비?...경빈김씨?)의 노년기 초상화가 아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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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태후는 광서제가 1898년 6월부터 캉유웨이(강유위)의 의견을 수용하여 일으킨 일련의 개혁운동을 배은망덕이라고 여겼다. 광서제를 황제로 만든 것은 서태후 자신이었다. 황제로 만들어주고 친자식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친정까지 허락하였더니 믿는 도끼도 못 되는 것이 발등을 찍는다고 서태후는 생각했다. 그러나 광서제는 너무 허약한 도끼였다.

     

    그는 서태후의 발등을 찍기는커녕 자신의 발등을 내려찍고 말았다. 서태후와 보수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원세개)의 군사력을 움직이려 했던 광서제는 배신당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계획을 그대로 서태후에게 고해바쳤다. 기회를 노리던 서태후는 1898년 9월 광서제를 자금성의 영대에 유폐시키고, 변법자강을 주도하던 개혁파를 검거하는 무술정변(무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술정변이다)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 다시 나서 청나라를 쥐고 흔들었다.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 땅을 노렸고 내적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일부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족이었고 성은 예흐나라, 어렸을 때 이름은 행정 혹은 행아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다. 젊음과 미모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아들이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젊은 시절의 서태후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태후의 아들 통치제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겼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 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수렴청정 초기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후세에서는 이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내주어야만 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였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다. 황후의 간택에도 마음에 둔 여인이 따로 있었지만 결국 서태후가 골라준 서태후 가문의 여인을 황후로 맞아야만 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상’ 일 뿐이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것은 이미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다.


    서태후가 황제로 고른 광서제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예상 외로 강했다. 거기에다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도 있었다.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청나라는 세계 만방에 자신들의 국력이 형편없음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한 서태후. 손톱에는 비취보호판을 달아 매우 길고 뾰족해 보인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서태후가 지은 이화원. 앞에 보이는 호수가 사람이 직접 파낸 인공호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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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유니버최남석 11.02.17. 07:02
    청나라가 한반도로 왔군요 청과 이조 두개로 보던것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면 남한산성을 포위했던 후금 과 인조는 집안끼리 싸운 ㄱ것 일 뿐 국가 와 국가가 전쟁한게 아니군요 서태후 조대비 같은 얼굴 입니다 복장은 필ㅇ요에 의해 다르게 그릴 수 있다지만 성씨는 그렇게 못할거 같은데 이것 참 큰 난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홍진영 11.02.18. 00:21
    청나라는 고지도 그대로입니다...한반도는 고지도 대로... 코리아(고려) 또는 朝鮮인 것이고...이도 선대는 고려나 이조에 밀려...이후엔 타타르 청나라(북청)에 밀려 황하 근처에서 이동한 세력이란게 제 생각입니다.
     
    홍진영 11.02.18. 00:23
    단지,북경을 중심으로 청나라라 불리운 구한말까지의 나라는...서북 타타리아(북청)가 동국조선의 함경도(내몽골) 평안도(북경인근&서안인근) 황해도(신장자치구)를 집중통치구역으로 점유하면서 한반도와 양자강 하류(남명)지역을 간접통치한 달단(타타르)예속의 청구조선으로 해석하는게 제 입장입니다...그러기에 당연히 달단과 인접해 친 달단 계통인 노론 소론의 서인들 세상이 지속됐다 보여집니다.
     
    홍진영 11.02.18. 00:27
    태평천국의 난(초기 동학운동?)으로...타타르(만주족)에게서 조선의 漢족이 독립하잔 투쟁 와중에 청구조선은 혼란해졌고...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서구 열강들의 영향으로 큰 섬 원숭이들이 일본열도를 흡수한 연후...거세진 힘으로 중원 동남부의 남명세력들인 대한제국 세력들과 제휴...섬 원숭이들이 이미 흡수해 가던 한반도 조선과 현 만주 조선의 왕통을 ...이성계의 먼 방계혈통임을 주장해 대원군계로 심어 놓았고...서북 백러시아에 밀리고 청일전쟁 이후 더욱 몰락한 달단 영향하의 무주공산이 된 북경일대의 청구조선 왕가의 대체 황제로 고종을 심어 놓는게 대한제국의 잠시간의 역할였다 보입니다.
     
    홍진영 11.02.18. 00:33
    청과 조선의 전쟁은...선생님 말씀 대로...생소한 상대국간의 전면전이라기 보단...서북지역 제후인 누루하치 집안이...왜란으로 쇠락한 명조선과 동국조선의 패권을 쥐기 위한 제후의 반란으로 시작됀 것이고...그 시발점은...전의 글에도 거론했듯이...함길도(몽골)왕인 안평대군을 제거한 수양대군의 난에 기인하며...이때 수양의 수하장수이자...전 여진지역에서 영웅으로 섬겼던 이징옥 장군이 누루하치 등의 여진족들에 의해 대금황제로 추대됐었고...그게 에센으로 추대됀 오일라트의 에센칸일까 합니다.
     
    홍진영 11.02.18. 00:36
    에센칸에게 토목보 전투에서 포로가 됀 명나라 왕이 세종의 첫째아들인 정종으로 보이며...에센칸을 서북도인들을 이간책으로 구슬러 암살 제거한 명나라 신임황제가...이징옥장군을 제거한 수양대군(세조)라 보입니다.
     
    홍진영 11.02.18. 00:44
    에센칸(이징옥?) 서거후...2인자인 누루하치가 여진의 우두머리가 돼어...이미 조선관 남이 되어 버린 서북도인들(여진인들)을 규합해...왜란으로 국력이 쇠한 명조와 동국조선을 압박해 가는 과정이 누루하치 여진의 발호이고...조선과의 전쟁구실도...임란의 대리 통치자인 광해군의 숙청에 대한 불만을 구실로 삼았으니...당시까진 누루하치와 홍타이지는...조선의 제후임을 인정한 격이고...임란시기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허약하고 무책임한 몰골을 목격하고 실망한 조선 서북도(내외몽골 전체)인들이 이에 동조하였기에...조선이 그리도 쉽게 무너진 것이라 예상됩니다...내란였고...토벌 의병들의 호응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홍진영 11.02.18. 00:56
    성명이 다른건 어찌 해석해야 하시나 고민하실 것도 없습니다...여진족인 만주족(카자흐스탄&중앙아&신장지구 서쪽)인들과 문화가 같은 서북도(몽골=황해,함경도)인들과 평안도 (북경 주변)서북지역 인들은...어짜피 지역 사투리가 몽골어 계통이니...만주어(한자로 기록된 몽골어)나 위구루어가 자신들의 지역 사투리였을 것이니...자연스레 그 언어로 이름이 존재했을 것이요...청구조선의 중앙 관료나 국민으로 취급받을땐 청구조선식 한자이름이 다시 부여됐다 보시면 됄 겁니다...부의황제의 동생 부걸등이 현재의 체재에선..흔히 김(金)씨로 불리우듯이여.
     
    홍진영 11.02.18. 01:00
    경빈이 김씨이니...서태후의 몽골(만주)어식 성씨는...한자로 의역하면 김(金)씨가 아닐지도 싶습니다.
    서태후의 애인이란 영록"도여...서태후에게 아들을 양자로 드리민 경친왕의 별칭일 수 있으며...영록대부의 약칭일지 싶습니다...방계혈통의 황제가 탄생시...그 아비를 영록대부로 추서하는 고려의 전통에 유래한다 보입니다...고로 당대 똑같은 일을 한 대원군이 그 자일지 싶습니다.
    서태후의 애인이란 영록"도여...서태후에게 아들을 양자로 드리민 경친왕의 별칭일 수 있으며...영록대부의 약칭일지 싶습니다...방계혈통의 황제가 탄생시...그 아비를 영록대부로 추서하는 고려의 전통에 유래한다 보입니다...고로 당대 똑같은 일을 한 대원군이 그 자일지 싶습니다. 
     
    필유니버최남석 11.02.18. 08:31
    이부문은 홍진영님의 역작입니다 저를 비롯해 다른 분들도 거들어 주면 좋을거 같은데 저는 홍진영님의 이부문을 계속 보고 있을 뿐 아직 거들 수 있는 정도가 안 됩니다 홍진영님의 계속적인 연구기고 를 기대합니다 특히 토목보 난 이라든가 이징옥 수양대군의 난 과 관련해 기존의 시각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해 생각하는 실력이 아직 되지 않아 맞장구를 치지 못합니다 이점은 홍진영님께서 이해하시고 좀더 좋은글 주시기 바랍니다
     
     
    리단호 11.02.20. 03:07
    홍진영님의 천재적인 추리는 한국역사연구의 보배와도 같습니다. 끈질기게 방해하고 다리를 거는 사람들이 많지만,
    부디 개의치 마시고 연구를 계속해 주십쇼, 님의 연구가 얼마나 역사조작 세력에게 위협적이면 거머리 처럼 달라붙어
    방해를 하겠습니까? 그만큼 역사조작 세력은 홍진영님의 추리가 무서운 거겠죠,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말을 안할뿐이지
    님의 연구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리단호 11.02.20. 03:10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론인데, 조선의 서인,동인,노론,소론 당파싸움은 천산이서에서 천산을 넘어서 고려를 뒤업은
    달단(타타르)계열 몽골계 이성계집안(여진 포함)과 천산이동 족속들과의 지역적 파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잠시 서인들이 남인과 연합해서 동인(북인)들을 공격해서 조정에서 동인(북인)을 몰아내고,
    그 후엔 장희빈과 숙종때 서인들이 다시 남인을 제거합니다. 임진왜란때 동인(북인)은 광해군을 옹립하려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해 왜적과 싸웠는데,,이 동인들은 서쪽에서 건너온 이성계조선의 기세에 대항하려 한 듯 합니다.
     
     
    리단호 11.02.20. 03:14
    이성계 조선이 이방원 이후로 천산을 기점으로 동쪽은 이방원계열이,,,서쪽은 함흥차사(지금의 우즈벡 카시,,혹은 사마르 칸트?)로 돌아간 이성계의 다른 자손들 계열로 갈라졌다면, 이방원을 따라서 천산이동으로 지역을 옮긴 서인들은 대부분
    여전히 중앙아시아와 혈연적 유대를 가진 달단계열 여진계열들이 많았을 겁니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천산이동 사람들을
    피 지배층으로 무시했을 것이며,,,그래서 광해군때 천산이동의 동인들이 뭉쳐서 서인들의 횡포에 대항했을 것이고,
    이것을 서인들은 임진왜란 이후로 남인들을 부추겨서 동인(북인)들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한게 아닐런지요,,
     
    리단호 11.02.20. 03:17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진해온 서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이씨조선을 세운 지배세력으로서, 농사나 짓는 남인, 즉 대륙의
    남방부족들을 피지배층으로 우습게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지배해야 할 남방계열 족속들과 같이 조정에 앉아
    정사를 논한다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숙종이나 영정조때만 해도,,이미 이방원계의 조선왕들은
    서쪽의 명나라,,즉 이성계의 다른 자식들 계열인 명나라와는 비록 친족간이긴 하나,,이미 촌수가 상당히 멀어졌고,,
    서쪽 명나라와 혈연관계를 유지하며, 동국조선의 왕을 감시하고 휘두르려는 서인들을 남인들을 이용해서 견제하려 한게
    장희빈같은 사건이 아닐런지
    남방부족들을 피지배층으로 우습게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이 지배해야 할 남방계열 족속들과 같이 조정에 앉아
    정사를 논한다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숙종이나 영정조때만 해도,,이미 이방원계의 조선왕들은
    서쪽의 명나라,,즉 이성계의 다른 자식들 계열인 명나라와는 비록 친족간이긴 하나,,이미 촌수가 상당히 멀어졌고,,
    서쪽 명나라와 혈연관계를 유지하며, 동국조선의 왕을 감시하고 휘두르려는 서인들을 남인들을 이용해서 견제하려 한게
    장희빈같은 사건이 아닐런지 
     
    리단호 11.02.20. 03:21
    숙종때의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건을 보면,,,숙종은 파격적으로 남인인 장희빈세력을 조정에 들이는데, 이것은 남인을 피지배
    노예계층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중앙아시아 출신 서인들에게는 대단한 모욕입니다. 대대로 동국조선에서 서인출신 왕비를
    맞이해야 하는 이유는,,아마도 대대로 중앙아시아에 있었을 이성계의 또다른 자손들인 명나라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을 서인세력이,,,조선의 왕비를 여전히 자신들의 중앙아에 있는 친족들에게서 선발해서 데려오는 역할을 했거나.
    조선의 왕비는 혈통적으로 당연히 조선의 왕처럼 서인(천산기준 서쪽)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봅니다.
     
     
    리단호 11.02.20. 03:26
    인조때 병자호란의 경우도,,,반청세력과 친청세력을 보면...반청세력,,즉 곧 망해가는 명나라에 끝까지 붙어야 한다는 세력은
    서인세력들이 주축이었고,,,새로 떠오르는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세력은 "비 서인"세력들 이었습니다.
    서인세력들은 원래 그 혈통이 중앙아시아 출신들이니 당연히 서쪽 명나라가 자신들이 뿌리며 조상의 고향이고,
    대대로 혈통적으로도 결혼등을 통해서 관계를 유지해왔을 것이니, 만약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지지기반인 서쪽의 고향모국이 붕괴되니 결사적으로 명나라지원을 주장한 것이고,친청세력인 '비서인"들은 오히려
    명나라가 망하면 서인들의 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서인세력들이 주축이었고,,,새로 떠오르는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세력은 "비 서인"세력들 이었습니다.
    서인세력들은 원래 그 혈통이 중앙아시아 출신들이니 당연히 서쪽 명나라가 자신들이 뿌리며 조상의 고향이고,
    대대로 혈통적으로도 결혼등을 통해서 관계를 유지해왔을 것이니, 만약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지지기반인 서쪽의 고향모국이 붕괴되니 결사적으로 명나라지원을 주장한 것이고,친청세력인 ‘비서인"들은 오히려
    명나라가 망하면 서인들의 세력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리단호 11.02.20. 03:29
    특히 재미있는 것은,,,홍진영님의 분석대로 명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청에게 밀려서 남쪽으로 찌그러들어서 인도지역을
    새로운 왕조의 거점으로 삼은 무굴제국이라고 봤을때,,,중앙아시아에서 명나라가 밀려서 남쪽 인도지역으로 서서히 수도를
    이동해 가는 시점을 분석해 보면,,,조선왕조에서 서인이 몰락해 가는 것과 타이밍이 거의 일치합니다.
    조선왕조에서 서인은 숙종이후 정조때 쯤이면 거의 몰락하게 됩니다. 숙종,영정조 시기야 말로 조선왕조에서 서인들이
    가장 남인(혹은 "비 서인")을 탄압하고 조정을 장악하려 발악하던 때인데,,,이것은 그들의 대대로 지지기반인 천산이서의
    명나라가 망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인 듯
     
     
    리단호 11.02.20. 03:33
    중앙아시아에서 조정을 인도대륙,,주로 황제 직할지는 갠지즈강 상류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굴제국이 "남명"이라는
    홍진영님의 추론을 근거로 했을때,,, 명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남진해서 인도지역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면...
    히말라야 산맥때문에 동국조선의 서인들과의 교류가 상당히 힘들어집니다. 조선에서 서인들이 세력을 유지하려면
    여차하면 명나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있어야 왕도 갈아치우고,타세력도 견제할 수 있지요, 그런데 명나라가 인도지역으로 축소되고, 더구나 1700년대 중후반부터 남명(무굴제국)이 영국등에 먹혀들어 가기 시작할때부턴 조선의 서인세력도
    급격히 와해되고 안동김씨등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
     
    리단호 11.02.20. 03:40
    명나라가 청에 밀려서 중앙아에서 쫏겨서 남쪽 지금의 인도대륙으로 밀려났다 하더라도, 인도지역에서라도 세력을
    계속 유지했을때가 아마도 숙종,영조,정조 전중반 같습니다. 그러다가 1700년대 중반에 이르면 무굴제국(남명)은 각지방의
    소부족과 페르시아 지역에서의 침략,그리고 영국등 서구세력의 인도대륙 침략으로 급격히 망해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왕조의 서인세력 역시 마지막 남은 벽파가 정조에 의해서 숙청당하게 되는데,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던 서인들이 정조대에 와서 결국 제거되는 것은 바로 서쪽의 모국인 명나라가 무굴제국으로 축소되더니, 결국 망해가서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
    리단호 11.02.20. 03:43
    그러다가, 정조말년에는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안동김씨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합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나 역사교과서에서나 안동김씨,풍양조씨등을 조선을 망친 대표적인 조선말기 외척세력으로 폄하하고, 매도합니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말년에 안동김씨 세력에게 의지했고, 신임합니다. 안동김씨 김조순을 사돈으로 맞기까지 하죠, 그런데 이 안동김씨 세력들은
    대부분인 천주교도들인 남인세력을 탄압한 세력입니다. 정조시대는 바로 서양세력이 프리메이슨들이 천주교 사제를 사칭하고 대대적으로 동양에 침투하던 시기로서, 이들은 서쪽은 중앙아의 청나라를 통해, 남쪽은 지금의 인도와 동남아,양자강하류등을 통해서 대륙으로 침투
    대부분인 천주교도들인 남인세력을 탄압한 세력입니다. 정조시대는 바로 서양세력이 프리메이슨들이 천주교 사제를 사칭하고 대대적으로 동양에 침투하던 시기로서, 이들은 서쪽은 중앙아의 청나라를 통해, 남쪽은 지금의 인도와 동남아,양자강하류등을 통해서 대륙으로 침투 
     
    리단호 11.02.20. 03:46
    따라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조선은 서양세력이 천주교를 침투시키면서 국가체계가 급속도로 붕괴되고 약화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1700년대 부터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천주교를 확산시킨 세력은 남인세력으로 대표적으로 정약용집안이 있지요, 정약용은 아마도 지금이 베트남이나 라오스, 혹은 운남성이나 사천성정도의 토호였던 것 같은것이, 베트남의 호치민이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것은 지금이 베트남 하노이 근처에선 대대로 정약용이 영웅시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민심을 얻어야 했던 호치민은 정약용의 이미지를 차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리단호 11.02.20. 03:50
    조선의 왕들을 견제하고 감시하며, 툭하면 서쪽의 종가집인 명나라(이성계의 다른 자손들 왕조)에 고자질하며 조선왕을 견제하던 서인들이었지만, 반면에 서인세력은 조선왕조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는데, 이 서인세력이 정조때 대부분 몰락하자 정조는 안동김씨 세력을 의지하고 중용합니다. 안동김씨란 안의 동쪽에 있는 김씨부족이겠죠,,이들중 상당수가 후일 한반도지역으로 피신한 건 맞다고 봅니다. 왜 정조는 남인들을 의지하지 않고 안동김씨를 의지했을까? 아마도 정조역시 서양세력과 결탁한 천주교 남인세력들을 믿지 못한 것 같아요, 고로 역사조작 세력은 서양의 하수인들이니 당연히 안동김씨 세력을 조선을 망친 세력으로 날조
     
     
    홍진영 11.02.21. 08:19
    리선생님의 댓글...그렇찮어도 제가 다음 글로 쓰려 했던 내용인데...무안스럽습니다...네.저도 딱 그리 가닥이 잡혀 갑니다.
    영정조기의 파당싸움은...이조의 본향세력은 알타이지방(함경북도)의 서북인들인 것이고...우즈벡족(달단)들의 남하로 카자흐 남단으로 밀려 서인(西人)이라 불렸을 것이고...인도로 밀린 무굴의 잔여세력이 동남아로 진출하면선 왜노들과도 섞이면서...그들이 남인도 되는 이치고...서안과 북경 일대의 조선인들은 동인(東人)...내외몽골(함경남북도)인들은 북인...이게 맞지 싶습니다.
    홍진영 11.02.21. 08:26
    아주 중요한 건 이겁니다...
    내내 조정을 휘둘렀던 서인들이...내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단 겁니다.
    소론은 남쪽 양자강 연안의 남인들과 제휴하여 노론을 치는데...이는 적의 적은 동지다란 비열한 정치다툼인것이 아니라...
    양자강 남쪽 운남,호남성 등지엔...패망 무굴의 잔존세력들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었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성계의 본향(무굴)세력이 서남쪽으로 찌그러들어 남인세력의 주체가 되는 이치니...서인들 중 소론은...명나라를 이조의 뿌리인 무굴(명)을 끝까지 존숭하던 세력이라 봄이 맞을듯 합니다.
     
    홍진영 11.02.21. 08:31
    반면...서인(알타이&알타이 이서)들중 노론은...새로운 서인들 지역(여진)의 영웅인 누루하치가를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세력으로...
    병자호란 이후로 내내 타타르 청나라를 뒷배경으로..중후기 조선의 권력층으로 존재하다가...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동원한 양이들의 진출로 오히려 타타르 청나라가 망해가는 싯점부터 서인들(청나라 달단청인들)중 노론(달단청계열)이 몰락한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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