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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 | ||||
| 6년(정축, 1397) |
○ 마전군(麻田郡)에서 죽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치제(致祭)하기를,
○ 경상 전라도 도안무사(都安撫使) 박자안(朴子安)이 항왜(降倭)를 응접하여 군사 기밀에 실책을 범한 일로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다. 이서(移書)하여 주벌을 가하도록 하였는데, 일이 왜적들에게 관계된다 하여 비밀에 부치고 선포하지 않아 외부인은 알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박실(朴實)이 우리 태종의 잠저로 찾아갔는데, 때마침 여러 종친들이 찾아오자 태종이 문에 나와 영접을 하였다. 박실이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아비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자, 태종이 불쌍하게 여기고서 여러 종친들과 함께 그의 사형(死刑)을 용서해달라고 청하고자 하였다. 종친들이 아뢰기를,
박실(朴實)은 본래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태종이 그가 아비 구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는데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 전라도 수군 만호 최원충(崔原忠)이 왜선 1척을 포획하여 병장(兵仗)을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 도당(都堂)에 명하기를,
○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칭하고, 전문(箋文)을 바치면서 왜국에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섬라국(暹羅國)의 왕도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였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평양(平壤) 이북은 모두 야인(野人)의 사냥하는 곳이었다. 고려가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 의주(義州)부터 양덕(陽德)까지 가로질러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으나, 생활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까지 하였다. 또 남쪽 지역은 왜구가 날뛰었다. 이리하여 동서 수천 리와 연해(沿海) 수백 리가 성곽은 불에 타고 들녘은 백골이 널려 있어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변(安邊) 이북은 대부분 여진(女眞)에게 점거되어 정령(政令)이 미치지 않았다. 예종(睿宗)이 장수를 보내 깊숙이 들어가서 승첩하여 공을 세우고 성읍(城邑)을 세웠으나 얼마 후에 다시 빼앗겼다.
상이 즉위한 이후에 성교(聲敎)가 먼 곳까지 미치니 백성들은 비로소 생업에 안정을 찾게 되고 전야(田野)는 날로 개간되었으며 인구도 날로 증가하였다. 야인(野人)의 추장이 모두 잠저를 섬기면서 동서로 정벌할 경우에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상이 즉위한 후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관직을 적당히 주어서 이두란(李豆蘭)으로 하여금 여진(女眞)을 안집시키게 하니, 피발(被髮)하던 풍습이 모두 관디를 착용하고 금수와 같은 행동을 바꾸어 예의의 가르침을 익혔으며,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하는 것도 다 같은 편호(編戶)에 들었다. 그리고 추장(酋長)에게 부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모두 백성이 되기를 원하였다. 공주(孔州) 이북에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과 진(鎭)을 두어 백성의 일을 다스리고 학교를 세워 경서(經書)를 가르치니, 문무(文武)에 의한 정치가 다 실현되었고 1천여 리나 되는 땅이 모두 조선(朝鮮)의 영토가 되었다.
풍습이 다른 강 건너 지역들이 다투어 의(義)를 사모하여 직접 와서 조회하는 자도 있고, 자제를 보내는 자도 있고, 벼슬 받기를 요청하는 자도 있고, 내지로 이주하는 자도 있었으며, 기르는 말이 좋은 망아지를 낳으면 모두 자기들이 소유하지 않고 다투어 진상하였다. 강 근처에 거주하는 자들이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었을 경우 관청에서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 감옥에 가두거나 곤장을 때려도 감히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또 변장이 사냥할 때면 모두 삼군(三軍)에 소속되기를 자원하여 짐승을 잡으면 관청에 헌납하였으며, 법률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과 차이가 없었다.
○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아뢰기를,
○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삼아 군현의 지계(地界)를 확정하게 하고 또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도전이 종사관 최긍(崔兢)을 보내 지계를 확정한 일을 아뢰니, 상이 중추원 부사 신극공(辛克恭)을 도선위사(都宣慰使)로 삼아 정도전에게 수서(手書)를 보내면서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그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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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작성시간 11.10.16 남쪽지역 의 동서 수천리 와연해 수백리가 불에 탔다는 본문 구절 이 매우 중요하고 주지승들이 산업을 경영하고 대처승이였다라는 구절도 중요합니다 북방호국불교가 염세 멸업열반 불살생 비폭력 의 자이나교로 전환된 시점이 1397년 이전에 일어난 역사라는 것도 이 글을 통해 얻을 수 있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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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홍진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0.16 당대의 북방불교 승려들은 대부분 소림사 승려들같이 무술을 연마하여...거의 최 강자들 반열에 든 승려들이 많았단 몽골인들의 말도 있습니다.
그래, 서산대사의 그 승군들이 거세엇던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홍진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0.16 송도(숭산)의 소림사도...시조가 서남방일 진 몰라도...철저히 이런 류로 불도와 호국을 같이 병행하던 곳이며..
그 변절도 여타 유교학자들의 말노름 보다 심하지 않아...
대륙조선이 타타르여진의 간접통치를 받으면선...복건성에 소림사 대처승(속가제자) 홍 뭐시기가
현 중원과 열도의 범죄조직의 원조인 천지회계열이나 이론상 태평천국을 모방한 삼합회의 근본인 홍방(洪房)을 만들었단 전설을 봐도
국난시마다 정권에 타협치 않고 사찰을 정복자들로 부터 멀리 옮겨서라도 꾸준한 투쟁을 했던 것도
당대의 대륙조선 대륙불교였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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