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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성계(李成桂)와 주원장(朱元璋)과 납합출(納哈出)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10.02|조회수1,062 목록 댓글 0

                         이성계(李成桂)와 주원장(朱元璋)과 납합출(納哈出)

 

○ 명사열전(明史列傳) 달단(韃靼) 편

 

《夏,師逾金山,臨江侯陳鏞失道,陷敵死.乃剌吾歸,備以朝廷撫恤恩語其眾,於是全國公觀童來降。納哈出因聞乃剌吾之言已心悸,復為大軍所迫,乃陽使人至大將軍營納款,以覘兵勢.勝遣玉往受降.使者見勝軍還報,納哈出仰天歎曰:天弗使吾有此眾矣.遂率數百騎詣玉納降.已,將脫去,為鄭國公常茂所傷不得去。都督耿忠遂以眾擁之見勝,勝重禮之,使忠與同寢食。先後降其部曲二十余萬人,及聞納哈出傷,由是驚潰者四萬人,獲輜重畜馬亙百余裡。勝班師,都督濮英以三千騎殿,為潰卒所邀襲,死之秋,勝等表上納哈出所部官屬二百余人,將校三千三百余人,金銀銅印一百顆,虎符牌面百二十五事,馬二百九十余匹,稱賀.●太祖封納哈出為海西侯,先後賜予甚厚,並授乃剌吾千戶。納哈出既降,帝以故元遺寇終為邊患,乃即軍中拜藍玉為大將軍,唐勝、郭英副之,耿忠,孫恪為左,右參將,率師十五萬往征之.》

 

太祖封納哈出為海西侯,先後賜予甚厚,並授乃剌吾千戶。納哈出既降,帝以故元遺寇終為邊患,乃即軍中拜藍玉為大將軍,唐勝、郭英副之,耿忠,孫恪為左,右參將,率師十五萬往征之.》

 

<太 祖 封 納 哈 出 為 海 西 侯 : 명(明) 태조(太祖)가 항복한 납 합 출(納哈出)에게 <해서 후 (海西 侯)에 봉했다.>

 

● 《현 세기의 역사해설에서 『 ‘하 북 성’ 동북(東北)쪽 “의무려산(醫巫閭山) 밖』쯤에 있었다.』고 하는 달단(韃靼)의 납합출(納哈出)에게 『해서 후(海西侯)』라는 관작(官爵)을 내렸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설이 맞는다고 할 때 『해서(海西)』라는 말이 무색(無色)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海西)』란 말 그대로 『해(海)의 서(西)쪽 또는 서(西)쪽 해(海)』를 말하는 것이다. “의 무려 산(醫巫閭山)” 밖의 사막(沙漠)지대가 『해서(海西)』란 말과는 어떤 연관도 없다.

 

● 『해서(海西)』라면 최소한 1) 일천리 관중평원(넓고 넓은 땅)의 서쪽이라든가, 2) 청해(靑海)를 서해(西海)라 했다는 것에, 청해(靑海)의 서쪽지방이라든가, 3) 약수(弱水)가 흘러드는 거연(居延)택【내몽골 최 서쪽의 액 제 납 호수 : 거연(居延)성과 흑수(黑水)성이 있는 곳】 두 개의 호수(湖水)중에서 서쪽의 것을 서해(西海)라 했다는 설명(說明)에 따라, 이곳의 서쪽지방이라든가, 4) 신강(新疆)지방을 서역(西域)이라 했으니 이곳의 포창해(蒲昌海: 염 택)를 서해(西海)라 하여 이곳의 서쪽지방이라든가 하는 최소한의 타당(妥當)성이 있어야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 위의 것은 바로 전회(前回)에 설명(說明)한 내용인데, 이게 조선(朝鮮)사와 비교를 해보면 황 당(荒唐)한 기록(記錄)이기도 하다.

 

○ 위의 명사(明史) 기록에서 “납합출(納哈出)” 또는 “달단(韃靼)” 무리들을 토벌키 위해 출정(出征)한 곳은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현 신강(新疆)성 북방(北方)지대라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고 아래 조선사(朝鮮史) 기록을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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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명사(明史)에서 기록하기를, 명 태조(明 太祖)인 주원장(朱元璋)으로부터 “해서(海西)”후(侯)에 임명된 “납 합 출(納哈出)”이란 자는 원(元)의 승상(丞相)이었는데,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보낸 군(軍)에 의해 궤멸(潰滅)되어 항복하고, 주원장(朱元璋)으로부터 “해서 후(海西 侯)”라는 관작을 봉(封)받게 된 인물이다. 그런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49권/함경도(咸 鏡 道)/홍원 현(洪 原 縣)】또 조선(朝鮮) 유학자들의 대부분 기록을 보면 ;

 

《 원(元) 나라 승상(丞相) 납 합 출(納哈出)이 조 소생(趙 小生)의 꾀 임을 듣고 삼살【三 撒 북청】홀 면(忽 面)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는데, 도지휘사(都 指揮使) 정휘(鄭 暉)가 그들과 누차 싸워 패전(敗戰)하니,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를 말한다.】를 동북 면 병마사(東北 面 兵馬使)로 임명해 보냈다.(중략). 납 합 출(納哈出)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조선(朝鮮) 땅에서 궤멸(潰滅)되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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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납 합 출(나하추) 역시 대륙의 납 합 출(納 哈 出)이 있고, 반도(半島)의 납 합 출(納哈出)이 별도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러면 대륙(大陸)의 달단 동(韃靼 洞)은 어디며, 반도(半島)의 달단 동(韃靼 洞)은 또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기록을 믿어야 할 것인가? 헷갈리는 기록임에 틀림없다.

 

● 이렇게 헷갈리는 부분이 바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한 부분인 것이다. 두 명의 납 합 출(納哈出)이 있을 리 없으며, 두 곳의 달단(韃靼)동이 별도(別途)로 있을 이유(理由)가 없는 것이다.

 

○ 달단 동(韃靼 洞)과 함 관(咸關)의 남쪽지방은 풍 패(豊沛)지역으로써,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의 흥성(興盛)지이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이곳은 대륙(大陸)의 서북(西北)방 지대(地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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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7 / 恭愍王[二] 【壬 寅 11 年 - 元 지장 22 年】

 

《秋七月,納哈出,領兵數萬,與卓都卿,趙小生等,屯于洪原之韃靼洞,遣哈刺萬戶那延帖木兒,同僉伯顏甫下,指揮,率一千餘兵爲先鋒太祖,遇於德山洞院平,擊走之,踰咸關,車踰二嶺,幾殲,委棄鎧仗,不可勝數,是日太祖,退屯答相谷,納哈出,怒移屯德山洞。○ 가을 7월에 ‘나하추(納哈出)’ 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탁 도경(卓 都 卿)’ㆍ‘조 소생(趙 小生)’ 등과 함께 ‘홍원(洪 原)’ ‘달단 동(韃靼 洞)’에 둔을 치고, ‘하라 만호(哈 刺 萬戶)’ ‘나 연 첩목아(那 延 帖木兒)’와 ‘덕산 동원 평(德 山 洞 院 平)’에서 이들과 만나 공격하였다. 달아나는 적을 함 관(咸關)과 차유(車 踰) 두 고개 너머까지 추격하여 거의 섬멸시켰는데, 버려진 투구와 병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태조는 이날 군사를 답 상 곡(答 相 谷)으로 물러나 둔을 쳤더니, 나하추가 노해서 군사를 덕산동으로 옮겼다. 》

 

《太祖,乘夜襲擊敗之,納哈出,還韃靼洞.太祖,屯舍音洞,太祖,遣斥候,至車踰嶺,賊,登山樵蘇甚衆,候卒還白. 태조가 밤을 타서 습격하여 물리치니, 나하추는 달단 동으로 돌아가고, 태조는 다시 사음동(舍 音 洞)에 둔을 쳤다. 태조가 보낸 척후(斥候)가 차유 령에 이르러서 보니,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 적이 매우 많았다.(중략).》

 

《後數日,太祖,踰咸關嶺,直至韃靼洞,納哈出,置陣相當,率十餘騎,出陣前,太祖,亦率十餘騎,出陣前相對,納哈出,紿曰,我之初來,本追沙劉關先生,潘誠等來耳,非爲侵犯貴境也,今吾累敗,喪卒萬餘,亡裨將數人,勢甚窮蹙,乞罷戰,惟命是從,時,賊兵勢甚盛,며칠 후에 태조가 함 관(咸關)령을 넘어 바로 달단(韃靼)동에 이르니, 나하추가 진을 펴서 서로 대치하고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므로, 태조도 10여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와 서로 대치하였다. 나하추가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여기 온 것은 본래 사유(沙 劉)ㆍ관 선생(關 先生)ㆍ반성(潘 誠) 등을 쫓아서 온 것이지, 귀국의 국경을 침범하려 함이 아닙니다. 이제 내 여러 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 만여 명을 잃었고 비장 몇 명을 잃어 형세가 심히 궁하게 되었으나, 싸움을 그만두고 그대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이때 적병의 형세가 심히 왕성하였다. (중략).》

 

《納哈出,知不可敵,收散卒,遁去,獲銀牌銅印等物以獻,其餘所獲之物,不可勝數,於是,東北鄙,悉平, 나하추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달아났다. 노획한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거두어 왕에게 바쳤다. 이리하여 동북쪽 오랑캐가 모두 평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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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 / 함경도(咸鏡道) / 홍원 현(洪 原 縣)

 

【고적】 달단 동(韃 靼 洞) 본 현 남쪽 30 리에 있다. ○ 원(元) 나라 승상(丞相) 납 합 출(納哈出)이 조 소생(趙 小生)의 꾀 임을 듣고 삼살(三 撒 북청) 홀 면(忽 面)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는데, 도지휘사(都 指揮使) 정휘(鄭暉)가 그들과 누차 싸워 패전하니,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태조(太祖)를 동북 면 병마사(東 北 面 兵馬使)로 임명해 보냈다. 이때 납합출은 조소생ㆍ탁도경(卓都卿)과 같이 이 달달동에 둔치고 있었다.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이곳에 도착하니, 납합출(納哈出)이 진(陣)을 치고 서로 대하여 10여 명의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오므로 태조도 또한 10여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나아가 상대하였다. 납합출(納哈出)이 거짓말로, “내가 처음 올 때에는 본시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반성(潘誠) 등을 추격하여 왔으며 귀국 경지를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누차 패전을 거듭하여 군졸 만여 명을 상실하였고 비장(裨將) 수명도 죽어 형세가 심히 곤궁하고 급박하여 파전(罷戰)하기를 비는 바이니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때 적병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태조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항복받는 척하고는 한 장수가 납합출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쏘니,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꺼꾸러졌다. 또 납입출이 탄 말을 쏘아 죽이고 바꿔 탄 말을 또 죽였다. 이리하여 큰 싸움을 한참 동안 벌여 서로 승부를 다투었다. 태조가 납합출에게로 바짝 쫓아가니 납합출이 급히 말하기를, “이만호, 두 장수가 어찌 서로 핍박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곧 말머리를 돌리는 것을 태조가 또 그의 말을 쏘아 죽였는데, 그 부하의 군사가 말에서 내려 자기 말을 납합출에게 주어 드디어 모면하게 되었다. 조포산(照浦山) 본현 동쪽 12리에 있다. 태조(太祖)가 일찍이 이 산에서 사냥할 적에 세 마리의 노루가 떼를 지어 나왔다. 태조가 먼저 노루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노루 두 마리가 함께 달아나는 것을 또 쏘니 한 화살이 한꺼번에 겹쳐 꿰뚫고 나무 벤 밑동에 매우 깊이 박혀 있었다. 함관령(咸關嶺) 태조(太祖)가 납합출과 큰 싸움을 한참 동안 벌이다가 날도 저물려고 해서 태조가 군사를 거두어 진지로 퇴각하는데 스스로 후군(後軍)이 되어 오고 있었다. 고갯길이 꾸불꾸불 여러 층을 이루고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가장 아래층에 있었는데 은갑(銀甲)을 입은 두 장수가 ‘이 파 라 실’을 쫓아 창을 겨누고 거의 닿을 찰라에 태조가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꺼꾸러뜨리고 곧 이어 20여 명을 죽이고는 다시 군사를 돌려 반격했다. 한 명의 적이 태조를 뒤로 추격하여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였다. 태조가 홀연 몸을 뉘어 말에서 떨어지는 형상을 지으며 위로 적을 쳐다보며 그 겨드랑을 쏘고는 즉시 도로 탔다. 또 한 적이 앞으로 나와 태조를 정면으로 쏘았다. 태조가 즉시 말 위에서 일어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아래로 빠져 나갔다. 태조가 이에 말을 달리며 쏘아 그 무릎에 명중시켰다. 또 냇물 가운데서 한 명의 적장을 만나니, 그 사람은 갑옷으로 목까지 싸고, 면갑(面甲)에다 또 턱에 갑주까지 만들어 입을 벌리는데 편리하도록 하여 주밀하게 보호한 것이 몹시 견고해서 쏠 만한 구석이 없었다. 태조가 부러 그 말을 쏘니, 말이 광기(狂氣)를 발작하여 마구 뛰었고, 적은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면서 입을 벌렸으므로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췄다. 이미 세 사람을 거꾸러뜨리니 이로부터 적군은 크게 붕괴(崩壞)하기 시작하였고, 태조가 철기(鐵騎)를 동원하여 짓밟으니 적은 저희끼리 밟고 쓰러져 죽이고 노획한 것이 심히 많았다. 요원산성(要 原 山城) 본 현 동쪽 35 리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9백 84척에 높이가 4척인데, 지금은 태반이 무너져 있다.

 

●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서북쪽 사막(沙漠) 주위에 있었던 달단(韃靼)동이 어느 날 갑자기 반도(半島)의 동북(東北)방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제정신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 아래 유학자들의 문집(文集)속의 내용을 보면서 위 명사(明史)와 조선사(朝鮮 史)를 비교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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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수기언(眉 叟 記 言) / 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 동사(東 事)

 

○ <고전번역 원 본문 인용> : 《백성들의 습속은 꼼꼼하고 인색하며 여자들의 길쌈 솜씨가 훌륭하여 옷ㆍ신발ㆍ관디를 잘 만들었다. 사방에서 몰려와 만 융(蠻 戎)들이 복종하였다.나라의 제도로 유술(儒 術)과 시서(詩書)를 존중하여 선비를 가르치니, 예악(禮樂)의 풍이 있었다.》

 

● 반도(半島) 땅 ; 동(東)쪽과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北)쪽 한 면(面)으로 대륙(大陸)과 연결(連結)되는 곳에서 『사방(四方)의 만 융【 蠻 戎 : 단어의 뜻대로 하면 남방의 미개한 오랑캐를 말한다.】들이 복종(服從)하였다.』라는 것이 사실(事實)일 수 있겠는가. 『사방(四方) 어느 곳에서, 어떤 만 융(蠻 戎)들이 반도(半島) 조정(朝廷)에 복종(服從)하였다.』는 말인지 귀신(鬼神)이 곡(哭)할 노릇 아닌가???????

 

○ <고전번역 원 본문 인용> : 《개경(開 京)은 선비와 여자들이 흰옷을 입었으며 성률(聲律)을 숭상하니, 이는 고국(古國)의 풍이었다.》

 

● 반도(半島) 땅이 어찌 개경(開 京)이란 한 도회지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오직 개경(開 京)의 백성(百姓)들, 선비와 여인네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말은 옛 부터 내려오기를, 반도(半島) 조선(朝鮮 : 총칭) 종족(種族)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말하는 것을 무색케 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백의(白衣)를 숭상(崇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러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 <고전번역 원 본문 인용> : 《강남(江南)과 해양(海 陽) 【강남(江南)은 지금의 전주(全州)이고, 해양(海陽)은 지금의 광주이다.】 은 본래 마한(馬韓)의 땅으로 서남쪽이 바다에 접하였다. 소금ㆍ철ㆍ해산물ㆍ귤ㆍ유자ㆍ치자ㆍ비자(榧子)ㆍ죽전(竹箭)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해안 습속이 농사에는 힘쓰지 않고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쌓아 두는 법이 없다. 강남(江南)에서는 닥나무ㆍ칠(潻)ㆍ매실ㆍ석류(石榴)ㆍ왕골ㆍ모시ㆍ파초ㆍ생강ㆍ짚ㆍ연[荷]ㆍ울 금(鬱金) 등이 산출된다.》

 

➊ 강남(江南)은 전주(全州)를 말한다고 하였다. 결국 충청도(忠淸道)를 흐르는 금강(錦江)의 남쪽지방을 “강의 남쪽”이라 하여 “강남(江南)” 지방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언제, 누가, 금강(錦江)의 남쪽지방을 “강남(江南)”지방이라 호칭한 것인가? 근거는? 아무런 것도 없다. 그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있을 뿐이다. 왜? 라는 의문(疑問)은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일제(日帝)가 왜곡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태 종 태 세 문 단 세”로 이어지는 암기식 교육의 폐해다.

 

➋ 광주(光州)는 강남(江南)이 아니고, 어찌 해양(海陽)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이곳이 마한(馬韓)의 땅이라고 하였다. 조선사(朝鮮 史)와 대륙(大陸)사에서 모두 말하기를 『“마한(馬韓)”은 서쪽과 북쪽에, “변한(弁韓) 은 마한(馬韓)의 남쪽지방에”, “진한(辰韓) 역시 마한(馬韓)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였으며,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남쪽지방은 왜(倭)와 접(接)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가능한 일인가?

 

➌ 또 이곳에 귤(橘)이 산출되고, 파초(芭蕉)가 자라고, 울 금【鬱金 : 백과사전 -이시진(李 時 珍) : 술과 울창을 섞은 것을 옛 사람들은 로마에서 생산되는 鬱金花香이라고 하였고, 송나라 鄭樵의 <通志>에서도 곧 이것이 鬱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夏 殷 周 시대에는 로마와 中國이 아직 통하지 않았으니, 이 약초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羅 愿의 <爾 雅 翼>에서도 역시 이것은 뿌리이며, 술과 함께 섞으며 누렇게 되어 金처럼 되니 黃 流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이치에 맞다. 이 뿌리는 모양이 莪?과 비슷하고 말의 질병을 치료하므로 '마술'이라 한다. 또한 강 황(姜黃/薑黃)을 울 금(鬱金)이라고 하는데,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서남부 지방에 걸쳐 서식하며. 4~6월에 꽃이 핀다.】 이 산출된다고 ............웃어야 할지, 비참한 마음에 울어야 할지, 한심한 생각만 든다.

 

➍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가 마한(馬韓)의 땅이라고 했을 때, 『변한(弁韓)과 진한(辰韓)과 왜(倭)는 용왕(龍王)님의 백성(百姓)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사(人間事)에서 불가능한 신(神)들의 전설(傳說)같은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에서 이러한 사건(事件)의 역사(歷史)가 진행됐었다고 한다면 반도(半島)의 백성(百姓)들은 인간(人間)이 아닌 신(神)의 선택된 후손(後孫)들이다. 그러나 이게 아닌 것이 반도(半島) 백성(百姓)들 역시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하고,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여 부부생활이 가능해야 후손을 퍼뜨릴 수 있는 원초적 인간(人間)들이다. 더 설명해야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 분들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올가미에 매여 언제 그 올가미가 조여들지 모르는 시한부(時限附) 인생(人生)을 살고 있는 자들일 것이다.

 

○ <고전번역 원 본문 인용> : 《삭방(朔方 함경도)은 옥저 땅으로, 치 구루(置 溝 婁)라고도 한다. “개마(盖 馬)에 있는데, 동(東)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 북으로 읍루(挹婁)에서 남으로 예맥까지 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나 강건하고 날래며 이해(利害)에 밝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특산물로는 어염(魚鹽)ㆍ사(絲)ㆍ마(麻)ㆍ피혁ㆍ은(銀)ㆍ석(石)ㆍ유황(琉 黃)이 있다. 북방에는 좋은 말이 많다. 옥저는 셋이 있는데, 동옥저ㆍ북옥저ㆍ남옥저이다.》

 

『개마(盖 馬)에 있는데, 동(東)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이러한 반도(半島)의 지형(地形), 지리(地理) 설명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위에서 말하는 “개마(盖 馬)는 개마(蓋 馬)”를 말하는 것으로, 『함경남도 북서부· 양 강 도· 자강도 일대에 발달한 우리나라 최대의 고원(高原)지대로써, 압록강· 운 총강과 낭림산맥·부전령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1만 4,300㎢, 평균높이는 1,340m이다. 』라고 봤을 때, 『그 동(東)쪽이 “발해(渤海)”에 닿는다.』라면 『현재의 동해(東海 : 한국해)가 발해(渤海)라는 설명이다.』그러면 현 대륙(大陸)과 반도(半島)의 북방 사이의 발해(渤海)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무식한 자들이라고 해도 해가 뜨는 곳이 동(東)쪽이란 정도(程度)는 안다. 본인(本人)의 집 베란다에 여러 화초(花草)들이 화분(花盆)에서 자라고 있는데. 베란다에 쏟아지는 태양(太陽)을 바라보며 식물(植物)의 줄기와 잎이 햇빛이 비치는 양지쪽으로 휘어져 있다. 이런 식물도 어느 쪽에서 태양이 비치는지를 알기 때문에 줄기와 잎이 그 햇빛이 비추는 곳으로 휘어지는 것이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光合成)을 해야 살아가니까!

 

● 하물며 만물(萬物)의 영장이며, 동방(東方)의 찬란한 문명(文明)을 세웠다는 반도(半島) 왕조(王朝)의 수많은 인물(人物)들이 어느 곳이 동쪽이요, 서쪽인지 조차 분간 못했다????????????? 이러한 폐단(弊端)은 왜곡(歪曲)된 조선(朝鮮)사를 가르친 우리들의 선배(先輩)와 동년배(同年輩)와 후배(後輩)들의 책임(責任)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조작되고 왜곡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라고 하더라도, 광복(光復) 이후(以後), 자주적인 조선(朝鮮)입장에서의 역사관(歷史觀)을 세웠어야 함에도, 지금까지 식민사관(植民史觀) 곧 매국(賣國)사관(史觀)의 테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前進)하지 못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자체가 문제(問題)인 것이다.

 

● 『발해(渤海)』란 “산해 경”을 보면 현 신강(新疆)성의 포창해(염 택)를 말함이요, 또 하나는 하수(河水)가 땅 밑으로 흐르다가 청해(靑海)성의 적석(積石)산을 지나 발해(渤海)를 관통(貫通)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옛 대륙(大陸)측의 기록으로 보면, 『발해(渤海)는 서역(西域) 땅과 청해(靑海)성 사이의 내륙의 거대한 호수(湖水)를 말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차하고, 치사하게” 이를 7-8천리 동(東)쪽으로 이동시켜 “하 북 성” 남(南)쪽의 바다(海)를 칭한다고 하니 통곡(痛哭)할 일인 것이다.

 

어떤 분께서도 『이러한 주장(主張)이 동북(東北)공정(工程)에 이용, 또는 동조(同調)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나타내는데,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세뇌(洗腦)된 세포가 아직도 건재(健在)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대륙(大陸)이었다는 것과 현 중국(中國) 당국의 동북(東北)공정(工程)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그들은 안다. 대륙(大陸) 자체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음을, 또 그들은 반도(半島) 역시 조선(朝鮮)의 일부였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조선(朝鮮)의 진정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후예(後裔)라고 믿는다면 우리들은 당당하게 우리의 영토(領土)를 달라는 주장(主張)을 해야 하는 것이지, 식민사관(植民史觀) 곧 매국(賣國)사관(史觀)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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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 산천의 형승(形勝) : 《보령(保 寧)의 영보 정(永 保 亭) :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 / 地 如 拍 (拍) 將 飛 翼 /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 / 樓 似 搖 (搖) 不 繫 篷 』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 보령(保寧) 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이곳이 본인의 고향(故鄕) 땅이니 말이다. 보령(保寧) 땅에는 “대천해수욕장”을 빼고는 그 어디에도 명승지 또는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고(最高)의 명승지(名勝地)”가 될 만한 곳이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의 유명한 해수욕장 역시 근세(近世)에 개발되어 유명(有名)해진 것이지 옛 부터 유명(有名)했다는 근거(根據)는 없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높은 누각(樓閣)이 바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 모습과 누각(樓閣)의 사방(四方) 풍경이 기가 막힌 그야말로 최고의 명승지(名勝地)였다.』는 설명으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곳이 “보령(保寧)”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반도(半島) 보령(保寧)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저절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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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 동국(東國)의 지방을 논하다.

 

《여 동래【呂 東萊 이름은 조 겸(祖 謙)】 가 말하기를, “중국(中國)의 동북(東北)쪽 변방(邊方) 밖에 있는 자를 구이(九夷)라 하는데, 상고(上古)에 우이(嵎夷)ㆍ방이(方 夷)ㆍ황이(黃 夷)ㆍ백이(白 夷)ㆍ적이(赤 夷)ㆍ현이(玄 夷)ㆍ남이(藍 夷)ㆍ양이(暘 夷)의 칭호가 있었다.” 하였다. 《서경(書經)》에, “요(堯) 임금이 희 중(羲 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거처하게 하였으니, 양곡(暘谷)이다.” 하였으며, 《죽서(竹書)》에, “하(夏)의 후상(后 相) 2년에 황이(黃 夷)를 정벌하였고, 7년에 우이(于 夷)가 조공(朝貢)하러 왔으며, 소강(少 康)의 시대에 방이(方 夷)가 조공하러 와서 이로부터 구이(九夷)가 대대로 왕(王)의 교화(敎化)에 복종(服從)하고 자기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桀)이 무도(無道)하자 여러 이족(夷 族)이 번갈아 침범하였다. 은(殷)나라 탕(湯)이 혁명(革命)하자 이를 쳐서 평정시켰다. 중정(仲 丁)의 시대에 남이(藍 夷)가 침입하였으며, 상(商) 나라 말기에는 혹은 반란을 일으키고 혹은 복속하였다. 삼대(三代) 이후 구이(九夷)의 연대(年代)와 구역(區域)은 고증할 수 없다. 춘추 시대에 공자(孔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겠다.’ 하였으니, 이 지방은 대개 중국(中國)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요양(遼 陽) 이동(以東)으로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北)쪽은 사막(沙漠)에 접(接)하였으며, 남(南)쪽으로는 조선(朝鮮)에 미치기까지가 모두 그 구역이다.” 하였다. 《동문광고》

 

● 위 본문 글 중, 《춘추 시대에 공자(孔子)가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겠다.’하였으니, 이 지방은 대개 중국(中國)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요양(遼 陽) 이동(以東)으로 동쪽은 바다에 닿고, 북(北)쪽은 사막(沙漠)에 접(接)하였으며, 남(南)쪽으로는 조선(朝鮮)에 미치기까지가 모두 그 구역이다.” 하였다.》고 기록하였을 볼 수 있다.

 

➊ <중국(中國) 발해(渤海)의 동(東)쪽>이란 말은 “발해(渤海)”가 어디냐에 따라 중국【中國 : 나라이름이 아닌 황도(皇都)를 말하는 것이다.】의 위치(位置)를 알 수 있다. 『발해(渤海)』가 신강(新疆)의 『포창해』에서 청해(靑海)성 사이』라는 대륙 사(大陸 史)에 따르면 중국(中國 : 신주)의 위치는 『타클라마칸 사막 또는 카자흐스탄의 남쪽지대가 될 수 있다.』이는 역사서의 기록대로 가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➋ 이를 뒷받침하는 하는 것은 『요양의 동쪽으로 바다에 닿고, 북쪽은 사막(沙漠)과 접(接)하였다.』라는 것으로 증거(證據)하기 때문이다. 『요양(遼陽)의 동쪽 바다란 “하수(河水)”를 말함이요, 북쪽의 사막(沙漠)과 접(接)하다라는 것은 하수(河水)의 북쪽 지대는 사막(沙漠)과 연결(連結)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옛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지리, 지형적 근거(根據)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半島)나 그 북쪽 삼성(三省)지방의 지형, 지리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추정(推定),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 근거(根據)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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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 동국(東國)의 지방을 논하다.

 

《 “일 통지”에, “패수는 조선국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대 통 하(大 通 河)라고도 하며 가운데에 조 천 석(朝 天 石)이 있다.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패수에서 군사를 격파하였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였다. 《설문(說文)》에는, “물이 누 방(鏤 方)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 패수현은 강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당 나라 이적(李 勣)이 패강도 대 총 관(浿 江 道 大 總 管)이 되었다. <증보자휘(增補字彙)>. 》

 

<패수는 조선국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대 통 하(大 通 河)하고도 한다.> 라는 내용을 진솔하게, 꾸밈없이 말해보자.

 

이러한 기록은 대륙(大陸)사【일 통 지】에 의거한 것이다. 대륙(大陸)사와 조선(朝鮮)사에 수없이 등장(登場)하면서, 수많은 가설(假說)과 수많은 설(說)을 쏟아내는 패수(浿水)!!!!!!!!!!!!그러나 안타깝게도 “패수(浿水)”는 『평양(平壤)의 동쪽에 있으며, 대 통 하(大 通 河)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언제 우리가 반도 ‘대동강’을 ‘대 통 하’라고 부른 적이 있었나? “패수(浿水)”가 평양성(平壤城)의 동(東)쪽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물이 누 방(鏤 方)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 패수현은 강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라고 했을 때, 『반도(半島)나 그 북쪽 삼성(三省)지방이나, 하 북 성이나 산서(山西)성 지방에는 이러한 하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반도(半島) 북방지역은 동고서하【東 高 西 下 :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의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평양(平壤)의 동쪽에서 발원한 하천(河川)이 동쪽의 높은 고원(高原)지대로 흘러갈 수 없는 지형, 지리다. 【“낭림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었고, 평균높이는 1,470m이며, 최고(最高)봉은 와갈봉(2,260m)이다. 자강도 중강군 중지 봉에서 시작하여 평안남도 대흥군의 소마대령까지 길게 뻗어 태백산맥(太白山脈)과 함께 한반도(韓半島)의 등줄기 산맥(山脈)을 이룬다. 산맥은 지형 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따라서 『반도(半島) 평양성(平壤城) 동쪽에서 발원한 “패수(浿水)”는 동(東)쪽으로 흐를 수 없으며, 실제 역시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의 대륙(大陸)사에서 말하는 “패수(浿水)”나 “평양성(平壤城)”은 반도(半島)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우리 스스로 선대(先代) 삶의 발자취를 찾으려하는 노력(努力)은 하지 않고, 식민지(植民地)시절 통치자(統治者)들이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을 순응(順應)토록 만들기 위한 왜곡(歪曲)되고, 조작된 선조(先祖)사를 그대로 베껴 재탕, 또 재탕하여 우려먹는다. 그것도 반도(半島)라는 협소(狹小)한 곳에서 말이다. 본인(本人)이 식민사학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비록 육신이 흙이 되었다 하더라도, 언젠가 시기(時期)가 도래(到來)하면 그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2010년 12월 21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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