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鷄林)은 인도에 있었다.
원본출처:http://kr.blog.yahoo.com/mouxri/1036253.html?p=1&pm=l&tc=1&tt=1187500935&frommode=c
송 에서 고려를 다녀간 사신들은 고려에 관한 관찰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로 남이 있는 것은 서긍의 [고려도경]이 유일하다. 손목의 [계림유사]는 "고려방언"은 남아 있는데 그 외의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외는 무명씨의 [계림지]가 있다. 이 마지막 [계림지]에는 모두 10 칙의 내용이 남아 있다.그 중에서 3 개의 항목은 불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첫번 째 것의 내용은 불교 성지와 관련되어 있다.
"구산(龜山)에 불감(佛龕)이 있다.
숲과 나무가 무성한 곳이다.
전하는 말로는 나한삼장(羅漢三藏)이 표교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양치질을 하고 땅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더니 나무에서 맑은 물이 여기에 도착했다.
그래서 청천국(淸泉國) 사람들이 이곳을 불법이 처음 흥하게 된 곳이라 하여 가장 존중하고 받드는 곳이다." 물론 반도에 이런 곳은 없다. 따라서 [계림지]를 쓴 사신이 다녀간 고려는 반도의 고려가 아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계림은 석탈해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서나벌이란 국명을 계림으로 고치고 이후 박씨, 석씨, 김씨 삼성이 번갈아 가며 왕위를 이어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기록는 이 석(昔)씨가 신라왕이 되었다는 기사는 없다.
대개는 "김성이 서로 이어 오기를 30 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수당 전후의 얘기다.
당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아리야발마(Aryyavarman, 聖胄)전"에는 신라인인 아리야발마가 정관년중에 장안을 떠나 광협으로 갔는데 왕성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그는 바른 가르침을 찾아 친히 부처의 발자취를 드듬은 후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베끼고 거기서 죽었다. "계귀(鷄貴)의 동쪽에서 와서 용천(龍泉)의 서쪽에서 죽었다."
이 부분의 원주(原注)에는 계귀는 범어로 "쿠쿠타의설라(Kukutesvara)"며 "고려국"이라 한다. 범어로 "구구타"는 "계(鷄)"를 뜻하며, "의설라"는 "귀(貴)"를 뜻한다. "계귀"가 "고려"라 했으니 "계림"과 같은 것이다. 계귀는 "계족산," "존족산(尊足山)," "계령(鷄嶺)"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의정의 책에 왕방유는 이 부분에서 주석하기를 당 이전에 조선은 이미 계림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럴다면 그 조선은 인도에 있는 "계림"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주몽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이밀묘지명]에 의하면 주몽이 "동하(東夏-즉 동중국)에서 떠나 돌아 와서는 서역의 현자의 말을 했다(言遵西路)"고 했다. "준로"는 지혜로운 말씀이란 뜻이다. 따라서 주몽은 홀본에 개국하기 전에 몇년 동안 서역 원정길에 오르는데 그 때 부처가 탄생한 마가다(Magadha, 摩伽陀)국을 다녀 온 것이다.
당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와서 그해 7월 13일부로 당태종에게 올린 [진경론등표]가 고사본으로 남아 있다.(나진옥. [나설당선생전집]) 그 내용중에 "이로서 녹야(鹿野)의 담소가 성기(聖期)에 응하였으며, 중역(重譯)으로 계림지사(鷄林之士)가 신화를 숭앙하여 함께 왔으니," 중주(중국)에 살게 된 것이란 내용이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계림"의 인사를 데리고 왔으니 계림은 분명 인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계림"이란 지명과 "녹야"라는 지명이 같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고대 티벳어로는 무그리그(Mug-lig)라 한다는 것은 "무쿠리"란 고구려 국명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티벳어로 조선 또는 고려를 "Glingga, Galingga)"라 했다.([오체청문감]) 이것과 비슷한 말이 인도어에 남아 있다. 원래 Kling이라 쓰고 읽기는 Kalinga 또는 Kaling으로 읽는 것이 그것이다. 그 위치는 벵갈만의 테레구(Telegu)연안인 북 시르칼스(Circars)지방에 대한 고대 명칭인데 키스트나(Kistna)에서 마하나디(Mahanadi) 지방에 이르는 지역이다.([Henry Yule. [Hobson-Jobson]) 이 지방은 마게타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Mug-lig 와 Glingga 는 단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달라 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신라의 지형과 관련하여 "그 나라는 산이 연하여 수십리가 되는데 협곡이 있으니 견고하기가 철함(鐵闔)과 같다. 호칭하여 철문(鐵門)이라 한다. 신라는 활 쏘는 사람 수천명을 항상 이곳에 주둔시켜 지키게 한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이 표현을 그대로 소개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전해 들은 떠도는 얘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마디로 부인하고 있다. 물론 반도에는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 김부식은 아예 우리 역사를 반도에 한정시키기로 작정을 하고 모든 역사적 현실을 거기에 맞춘 것이다.
중국이 서역과 통하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그 북도는 [석가방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장안에서 부하라(縛渴羅)에 이르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파밀고원(蔥嶺)의 북쪽을 지나면 산길이 험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도달하는데 동남으로 산길 300여리를 가면 철문관(鐵門關)이 나온다. 철문관을 지나면 도화라(覩貨羅)국에 이른다. 이 철문관은 인도 북부의 중천축에 위치한 셈이다. 이 철문은 [자은전]에 의하면 "돌궐의 관색(關塞)"이라 하며, 당나라 초기에는 당의 영토 밖이 었으나 중기에는 당의 중앙세력의 공제(控制)하에 있었다.([왕방유. [대당서역구법고승전교주]) 신라의 흥기는 백제를 따라 고구려를 치다가 반도의 무리를 모아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면서 일어 났다.([한원]신라전) 즉 이것이 바로 돌궐이다. 돌궐은 신라였던 것이다. [유양잡조]에는 "신라가 구유를 바쳤기로 이것을 궁정의 두 방에 깔았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의 "구유"는 서양 카펫을 말하며 그 발음이 "구유, 구수"인 것은 [우공]에 나오는 서역지명에서 음을 빌린 것이다. 그 위치는 총령산의 서에 있은 것으로 비정된다.
오대시 한(漢)의 홍명대사의 비명에는 "녹원(鹿苑) 계림(鷄林)"은 불교가 시작한 것으로 대사가 몸소 성지를 순례했다는 표현이 있다.([남한금석지]) 녹원은 "녹야원(鹿野苑)," "선원(仙苑)"등으로도 불린다. [설인귀향묘비]에 의하면 "고려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설인귀를 계림도 총관으로 출정시킨다." 660년 전후의 일이다. 다시 함형 원년(670)에 설인귀는 계림도 총관이 된다. 호빙지의 발문은 [당회요]를 인용하면서 "정관 3년 이후로는 행군은 총관이라 부르고 본도는 도독이라 불렀다." 따라서 계림도 총관이란 "계림도 행군 총관"이란 뜻으로 정벌군 사령관이다. 계림이 지금의 경주라면 설인귀가 정복군 사령관으로 반도의 서남 까지 왔을 리가 없다.(호빙지. [산우석각총편])
"왕사성"의 서북에 "아욕달산(阿縟達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시조 단군과 관련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이란 지명이 보인다. 혹시 두 산이 같은 산이 아닌지 고려 해 볼 만 하다. 흔히 일연이 스님이었으니까 우리 역사를 불교 설화식으로 기술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설혹 앞의 두 산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조선이 원래 서방에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말로 "막리지"는 "마하하라지"였다.([한원]고려전) "마하(Maha)"는 범어로 "대(大)"란 뜻이고, "라지(Raj)"는 역시 범어로 "왕(王)"이란 뜻이다. 연개소문은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리지 연개소문은 이품(二品)이 었다. 일품은 "토졸"이란 명칭만 있지 한번도 사람이 거론된 바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는 대왕보다 높은 신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급"이어야 한다. [위서] 유연전에서는 유연의 수장 칭호는 카칸(可汗)인데 "중국의 황제와 같은 것이다"라 했다. 유연은 고구려의 또 다른 국명인 "무쿠리"국이다. 을지문덕은 실은 카칸이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의 "토졸"이었다. 그의 본성은 "을지(乙支)"가 아니라 "위지(尉遲)씨"였다.([자치통감고이]) "위지"씨는 중앙 아시아의 코탄(Khotan)국의 왕성(王姓)이다.
코롬부스가 지리상의 대 발견을 할 때 가지고 간 책이 세 권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카타란 지도], 그리고 [만데빌 유기]란 책이다. 이 마지막 책에는 중국에서 인도를 향해 가면 "카딜헤(Cadhilhe)"라는 왕국을 가게 된다고 한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이 카딜헤는 "고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 졌다.(C.W.R.D. Mosley(tr.). [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아마도 "쿠다라(Kudara)"의 음이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쿠다라"는 일본어로 백제를 뜻한다.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에 백제는 금치국, 점성(占城), 자바(瓜蛙)등과 함께 서남이(西南夷)의 한 나라였다.(E. Blochet (transc.). Rashid ed-Din. [Tarikhi Moubarrek-i Ghazni] Tome II, p. 451, note a. Blochet는 중국 문헌을 인용한 것이다.) 이 백제는 분명 인도로 가는 해상로의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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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http://kr.blog.yahoo.com/mouxri/1036253.html?p=1&pm=l&tc=1&tt=1187500935&frommode=c
송 에서 고려를 다녀간 사신들은 고려에 관한 관찰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온전한 형태로 남이 있는 것은 서긍의 [고려도경]이 유일하다. 손목의 [계림유사]는 "고려방언"은 남아 있는데 그 외의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외는 무명씨의 [계림지]가 있다. 이 마지막 [계림지]에는 모두 10 칙의 내용이 남아 있다.그 중에서 3 개의 항목은 불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첫번 째 것의 내용은 불교 성지와 관련되어 있다.
"구산(龜山)에 불감(佛龕)이 있다.
숲과 나무가 무성한 곳이다.
전하는 말로는 나한삼장(羅漢三藏)이 표교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양치질을 하고 땅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더니 나무에서 맑은 물이 여기에 도착했다.
그래서 청천국(淸泉國) 사람들이 이곳을 불법이 처음 흥하게 된 곳이라 하여 가장 존중하고 받드는 곳이다." 물론 반도에 이런 곳은 없다. 따라서 [계림지]를 쓴 사신이 다녀간 고려는 반도의 고려가 아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계림은 석탈해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서나벌이란 국명을 계림으로 고치고 이후 박씨, 석씨, 김씨 삼성이 번갈아 가며 왕위를 이어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기록는 이 석(昔)씨가 신라왕이 되었다는 기사는 없다.
대개는 "김성이 서로 이어 오기를 30 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수당 전후의 얘기다.
당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아리야발마(Aryyavarman, 聖胄)전"에는 신라인인 아리야발마가 정관년중에 장안을 떠나 광협으로 갔는데 왕성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그는 바른 가르침을 찾아 친히 부처의 발자취를 드듬은 후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베끼고 거기서 죽었다. "계귀(鷄貴)의 동쪽에서 와서 용천(龍泉)의 서쪽에서 죽었다."
이 부분의 원주(原注)에는 계귀는 범어로 "쿠쿠타의설라(Kukutesvara)"며 "고려국"이라 한다. 범어로 "구구타"는 "계(鷄)"를 뜻하며, "의설라"는 "귀(貴)"를 뜻한다. "계귀"가 "고려"라 했으니 "계림"과 같은 것이다. 계귀는 "계족산," "존족산(尊足山)," "계령(鷄嶺)"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의정의 책에 왕방유는 이 부분에서 주석하기를 당 이전에 조선은 이미 계림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럴다면 그 조선은 인도에 있는 "계림"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주몽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이밀묘지명]에 의하면 주몽이 "동하(東夏-즉 동중국)에서 떠나 돌아 와서는 서역의 현자의 말을 했다(言遵西路)"고 했다. "준로"는 지혜로운 말씀이란 뜻이다. 따라서 주몽은 홀본에 개국하기 전에 몇년 동안 서역 원정길에 오르는데 그 때 부처가 탄생한 마가다(Magadha, 摩伽陀)국을 다녀 온 것이다.
당태종 정관 20년(646)에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와서 그해 7월 13일부로 당태종에게 올린 [진경론등표]가 고사본으로 남아 있다.(나진옥. [나설당선생전집]) 그 내용중에 "이로서 녹야(鹿野)의 담소가 성기(聖期)에 응하였으며, 중역(重譯)으로 계림지사(鷄林之士)가 신화를 숭앙하여 함께 왔으니," 중주(중국)에 살게 된 것이란 내용이 있다.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계림"의 인사를 데리고 왔으니 계림은 분명 인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계림"이란 지명과 "녹야"라는 지명이 같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고대 티벳어로는 무그리그(Mug-lig)라 한다는 것은 "무쿠리"란 고구려 국명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티벳어로 조선 또는 고려를 "Glingga, Galingga)"라 했다.([오체청문감]) 이것과 비슷한 말이 인도어에 남아 있다. 원래 Kling이라 쓰고 읽기는 Kalinga 또는 Kaling으로 읽는 것이 그것이다. 그 위치는 벵갈만의 테레구(Telegu)연안인 북 시르칼스(Circars)지방에 대한 고대 명칭인데 키스트나(Kistna)에서 마하나디(Mahanadi) 지방에 이르는 지역이다.([Henry Yule. [Hobson-Jobson]) 이 지방은 마게타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Mug-lig 와 Glingga 는 단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달라 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신라의 지형과 관련하여 "그 나라는 산이 연하여 수십리가 되는데 협곡이 있으니 견고하기가 철함(鐵闔)과 같다. 호칭하여 철문(鐵門)이라 한다. 신라는 활 쏘는 사람 수천명을 항상 이곳에 주둔시켜 지키게 한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이 표현을 그대로 소개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전해 들은 떠도는 얘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마디로 부인하고 있다. 물론 반도에는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 김부식은 아예 우리 역사를 반도에 한정시키기로 작정을 하고 모든 역사적 현실을 거기에 맞춘 것이다.
중국이 서역과 통하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그 북도는 [석가방지]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장안에서 부하라(縛渴羅)에 이르기 위해 인도로 가다가 파밀고원(蔥嶺)의 북쪽을 지나면 산길이 험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도달하는데 동남으로 산길 300여리를 가면 철문관(鐵門關)이 나온다. 철문관을 지나면 도화라(覩貨羅)국에 이른다. 이 철문관은 인도 북부의 중천축에 위치한 셈이다. 이 철문은 [자은전]에 의하면 "돌궐의 관색(關塞)"이라 하며, 당나라 초기에는 당의 영토 밖이 었으나 중기에는 당의 중앙세력의 공제(控制)하에 있었다.([왕방유. [대당서역구법고승전교주]) 신라의 흥기는 백제를 따라 고구려를 치다가 반도의 무리를 모아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면서 일어 났다.([한원]신라전) 즉 이것이 바로 돌궐이다. 돌궐은 신라였던 것이다. [유양잡조]에는 "신라가 구유를 바쳤기로 이것을 궁정의 두 방에 깔았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의 "구유"는 서양 카펫을 말하며 그 발음이 "구유, 구수"인 것은 [우공]에 나오는 서역지명에서 음을 빌린 것이다. 그 위치는 총령산의 서에 있은 것으로 비정된다.
오대시 한(漢)의 홍명대사의 비명에는 "녹원(鹿苑) 계림(鷄林)"은 불교가 시작한 것으로 대사가 몸소 성지를 순례했다는 표현이 있다.([남한금석지]) 녹원은 "녹야원(鹿野苑)," "선원(仙苑)"등으로도 불린다. [설인귀향묘비]에 의하면 "고려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설인귀를 계림도 총관으로 출정시킨다." 660년 전후의 일이다. 다시 함형 원년(670)에 설인귀는 계림도 총관이 된다. 호빙지의 발문은 [당회요]를 인용하면서 "정관 3년 이후로는 행군은 총관이라 부르고 본도는 도독이라 불렀다." 따라서 계림도 총관이란 "계림도 행군 총관"이란 뜻으로 정벌군 사령관이다. 계림이 지금의 경주라면 설인귀가 정복군 사령관으로 반도의 서남 까지 왔을 리가 없다.(호빙지. [산우석각총편])
"왕사성"의 서북에 "아욕달산(阿縟達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시조 단군과 관련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이란 지명이 보인다. 혹시 두 산이 같은 산이 아닌지 고려 해 볼 만 하다. 흔히 일연이 스님이었으니까 우리 역사를 불교 설화식으로 기술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설혹 앞의 두 산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조선이 원래 서방에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말로 "막리지"는 "마하하라지"였다.([한원]고려전) "마하(Maha)"는 범어로 "대(大)"란 뜻이고, "라지(Raj)"는 역시 범어로 "왕(王)"이란 뜻이다. 연개소문은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리지 연개소문은 이품(二品)이 었다. 일품은 "토졸"이란 명칭만 있지 한번도 사람이 거론된 바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는 대왕보다 높은 신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급"이어야 한다. [위서] 유연전에서는 유연의 수장 칭호는 카칸(可汗)인데 "중국의 황제와 같은 것이다"라 했다. 유연은 고구려의 또 다른 국명인 "무쿠리"국이다. 을지문덕은 실은 카칸이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의 "토졸"이었다. 그의 본성은 "을지(乙支)"가 아니라 "위지(尉遲)씨"였다.([자치통감고이]) "위지"씨는 중앙 아시아의 코탄(Khotan)국의 왕성(王姓)이다.
코롬부스가 지리상의 대 발견을 할 때 가지고 간 책이 세 권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카타란 지도], 그리고 [만데빌 유기]란 책이다. 이 마지막 책에는 중국에서 인도를 향해 가면 "카딜헤(Cadhilhe)"라는 왕국을 가게 된다고 한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이 카딜헤는 "고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 졌다.(C.W.R.D. Mosley(tr.). [The Travels of Sir John Mandeville]) 아마도 "쿠다라(Kudara)"의 음이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쿠다라"는 일본어로 백제를 뜻한다.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에 백제는 금치국, 점성(占城), 자바(瓜蛙)등과 함께 서남이(西南夷)의 한 나라였다.(E. Blochet (transc.). Rashid ed-Din. [Tarikhi Moubarrek-i Ghazni] Tome II, p. 451, note a. Blochet는 중국 문헌을 인용한 것이다.) 이 백제는 분명 인도로 가는 해상로의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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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작성시간 07.11.25 여기에 등장 하는 인도는 북천축은 현재 네팔 지역이고 나머지 동 서 중 남 천축은 모두 남지나 에 있었습니다 엣날 지도인 우공구주도 우곤 논산천도 등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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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홍진영 작성시간 07.11.25 대단하십니다...고구려가 무그리그"였다니..마고국과 같은 말이 아닐까 합니다....막리지"는...막리제"와 같은 재후가 아닌가 저도 생각했었는데...분명하군여...을지의 "지"자도...한자의 제(帝)가 아닐까 했었느데...분명해 지는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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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홍진영 작성시간 07.11.25 막리지 연개소문은... 연나라지역 제후였기에...그의 아비가 연태조라 함이고...그 관직이 승계됀게 뻔 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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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명선 작성시간 07.11.26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황제가 연씨가문의 연오개?와 왕위다툼으로 연오개를 반란군총수로 보아 처벌하게 되는데, 그 전쟁에서 연씨가문이 연나라(후연, 또는 북연)가 되어 황제와 싸우는 것이라? 고도 볼수있겠죠? 삼국사기에는 황제와 북연과의 전쟁이 몇번 나옵니다만... 연씨가문이 스카타이계로서 백인계이고 바로 연나라(고구려의 제후국) 왕족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연나라는 연씨도 있고 모씨도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