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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예성강'과 '벽란도'에 대하여...

작성자김재만|작성시간08.08.29|조회수915 목록 댓글 0
1) 예성강
황해북도 곡산군(谷山郡) 서부의 대각산(大角山)에서 발원하여 경기도·황해도의 경계를 지나 황해로 흐르는 강. 길이 174㎞. 대각산에서 발원하여 언진천(彦眞川) 및 지석천(支石川)과 합류, 한강 하구로 흘러든다. 이 유역은 고대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였고, 뒤에 대방군(帶方郡)에 귀속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다시 광개토왕의 경략으로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예성강은 안북하(安北河) 또는 북하라고도 하였는데, 고려시대 연안의 하항 벽란도(碧瀾渡)는 개성(開城)의 문호로서 송(宋)나라와의 교통상 관문 구실을 하여 번영을 누렸다. 강의 상류는 신계군(新溪郡)·평산군(平山郡)·금천군(金川郡)·연안군(延安郡) 등지를 관류하며, 수안(遂安)·신계·평산분지의 연안농경지 관개에 이용된다. 강 하류유역에는 연백평야(延白平野)가 펼쳐져 있다. 유역의 주요도시로는 금천·남천(南川)·한포(汗浦)가 있는데, 금천은 평산군·금천군·연안군 일대의 농산물집산지 기능을 하며, 특히 금천군의 대두(大豆)는 유명하다. 남천은 평산군의 행정·산업·교통의 중심지로서, 그 지방으로 통하는 물자의 집산지이며 동부 산지로의 문호가 된다. 한포는 금천 북쪽 예성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예성강 수운의 소항점(遡航點)으로서 부근일대의 농산물 수송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예성강유역의 교통은 경의선(京義線) 외에도 토성리(土城里)∼해주(海州)를 잇는 토해선이 있고, 1번 국도가 경의선과 나란히 뻗어 있다. <야후백과>
 
1)-1 조선왕조 세종실록/지리지/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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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구려부소갑(扶蘇岬) 이다. 신라고구려 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 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2년 기묘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5년. 정월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개주(開州) 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개성부(開城府) 로 고쳤고,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글안(契丹) 성종 황제(聖宗皇帝) 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開京) 에 들어와서 궁궐과 시민의 집을 불태워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 현종 〉 9년 무오에 개성부 를 파하고 현령(縣令) 을 두어, 정주(貞州) · 덕수(德水) · 강음(江陰) 의 3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 현종 〉 20년 기사에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7년.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 이 서울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임금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 등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인과 공장(工匠) 8천 4백 50인을 모아 나성(羅城)4881) 을 쌓으니, 둘레가 1만 6천 60보(步), 높이가 27척이며, 대문(大門)이 4이니, 동문(東門)을 숭인(崇仁) , 남문(南門)을 회빈(會賓) , 서문(西門)을 선의(宣義) , 동남문(東南門)을 보정(保定) 이라 한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로 승격하고, 김지(金沚) 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 에 이르기를, “임인4882)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 · 덕수(德水) · 강음현(江陰縣) · 정주(貞州) · 장단(長湍) · 임강(臨江) · 토산(兎山) · 임진(臨津) · 송림(松林) · 마전(麻田) · 적성(積城) · 파평현(坡平縣) 을 관할하였다.”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개성부(開城府) 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이하를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따로 개성 현령(開城縣令) 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6년.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 42보이다.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漢陽) 에 옮기고, 4년 을해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 로 하고 유후(留後) · 부유후(副留後) · 단사관(斷事官) · 경력(經歷) · 도사(都事) 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 현령(開城縣令) 을 파하였다.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 이라 한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진산(鎭山)은 송악(松岳) 이다.일명(一名) 숭악(崧岳) 이다. 송나라 서긍(徐兢)《봉사도경(奉使圖經)》 에 이르되, “경성(京城)의 진산은 숭산(崧山) 이라 하는데, 꼭대기에 사당 셋이 있으니,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첫째는 성황당(城隍堂) 이요, 둘째는 대왕당(大王堂) 이요, 세째는 국사당(國師堂) 이다.” 하였다.

개성(開城) 한우물[大井] 선의문(宣義門) 밖 11리에 있다. 물이 솟아나오는데, 그 깊이가 2척 남짓하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가뭄을 만나면 박연(朴淵) · 덕진(德津) 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며,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한다. 속설에 “우물물이 붉게 흐리면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다.”고 한다. 경덕궁(敬德宮) 중부(中部) 남계방(南溪坊) 에 있다. 속칭 추동(楸洞) 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 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매 더 넓혀서 지었다. 목청전(穆淸殿) 숭인문(崇仁門) 안쪽 안정방(安定坊) 에 있다. 속칭 어배동(於背洞) 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태종(太宗) 18년 무술에 구도[ 개성 ]에 거둥하여 전우(殿宇)를 짓도록 하고, 태조 의 화상을 모시고 전직(殿直) 2인을 두며, 전우 옆에 숭효사(崇孝寺) 를 세우고 명복을 빌게 하며,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과 노비 35명을 주었다.

연경궁 옛터[延慶宮舊基] 송악 남쪽에 있는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본대궐(本大闕)이라 일컫는다. 수창궁 옛터[壽昌宮舊基] 도성(都城) 북판에 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현릉(顯陵) 선의문(宣義門) 밖 서쪽의 보통사(普通寺) 서쪽 오동방(梧桐坊) 에 있는데, 수릉(守陵) 8호를 두었다. 문묘(文廟) 송악 동쪽의 마암(馬巖) 북쪽에 있다. 제전(祭田) 6결 및 섬학전(贍學田) 1백 50결을 두고, 또 교수관(敎授官) 1인을 두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데, 액수를 50명으로 정하였다.

사방 경계[四方界域]동쪽으로 송림(松林) 판적천(板積川) 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 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해풍(海豐) 후근석(朽斤石) 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왕흥산동(王興山洞) 에 이르기 31리이다.

도성(都城) 호수는 4천 8백 19호, 인구는 8천 3백 72명이요, 순작패 군정(巡綽牌軍丁)이 1천명이며, 속현(屬縣) 개성(開城) 의 호수는 8백 44호, 인구는 2천 21명이요, 마군(馬軍)이 68명, 보군(步軍)이 5명, 선군(船軍)이 좌·우령(左右領) 아울러 20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고(高) · 김(金) · 왕(王) · 강(康) · 전(田) 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이(李) 이다.

간전(墾田)이 5천 3백 57결이다.논[水田]이 10분의 3이 된다.

서적전(西籍田) 보정문(保定門)시루못[甑池] 동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청교(靑郊)산예(狻猊) 이다. 봉화(烽火)가 3곳이니, 송악(松岳) 남쪽으로 해풍(海豐) 덕적산(德積山) 의 봉화에 응한다. · 수갑산(首岬山) 북쪽으로 송악 의 봉화에 응하고, 남쪽으로 해풍(海豐) 둔민달(芚民達) 에 봉화에 응한다. · 개성 신당(開城神堂) 이다.서쪽으로 수갑산 의 봉화에 응한다.

용수산(龍岫山) 도성 정남쪽에 있다. 진봉산(進鳳山) 도성 동남쪽에 있다. 자하동(紫霞洞) 송악 남쪽의 골짜기이니, 세상 사람들이 연하동(烟霞洞) 으로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악부(樂府)자하동곡(紫霞洞曲) 이 있다. 동강(東江) 보정문(保定門) 남쪽 30리에 있다. 해풍군(海豐郡) 경계에 남도(藍島) 4883) 가 있다. 서강(西江) 예성강(禮成江) 이니, 선의문(宣義門) 서남쪽 17리에 있다. 모두 예전에 배로 실어 온 곡식을 내리던 곳이다. 벽란도(碧瀾渡) 선의문 서쪽 30리에 있다. 도승(渡丞) 이 있으니, 우도 수참 전운 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 이 겸한다.

광명사(廣明寺) 연경궁(延慶宮)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 고려 태조 의 옛집인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연복사(演福寺) 도성 복판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65결을 주었다. 신암사(神岩寺) 도성 정동쪽에 있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감로사(甘露寺) 벽란도(碧瀾渡) 동쪽에 있는데, 강물이 내려다 보이어 매우 절경이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관음굴(觀音屈) 성밖 동북쪽에 있다. 선종에 붙이고, 밭 2백 50결을 주었다. 운암사(雲岩寺) 비(碑)가 있고, 옛 이름을 광암(光岩) 이라 하는데, 선의문 밖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이 비(妃) 노국 공주(魯國公主) 를 절 동쪽에 장사지내고,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극히 장엄하고 화려하게 해서, 이른바 운암(雲岩)의 금벽(金碧)4884) 이 산골짜기를 환하게 비친다고 할 수 있다.

송도 팔경(松都八景) 자하동의 중 찾기[紫洞尋僧], 청교의 손님 보내기[靑郊送客], 북산의 연기와 비[北山烟雨], 서강의 바람과 눈[西江風雪], 백악의 갠구름[白岳晴雲],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 장단의 돌벽[長湍石壁], 박연 폭포(朴淵瀑布).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고려 의 선대 아간(阿干) 강충(康忠) 이 집을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 정하고 살았다. 그 증손 작제건(作帝建) 이 서해(西海) 용왕(龍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龍女)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하여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하였다. 그 후에 작제건 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 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黃龍)으로 화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태조 가 왕위에 오르매, 추존(追尊)하여 작제건의조(懿祖) 로, 용녀를 경헌 왕후(景獻王后) 로 하고, 그 집을 희사하여 광명사(廣明寺) 를 만들었다.

【영인본】 5책 613면

【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장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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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벽란도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 예성강 하류에 있던 나루터.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예성강은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가까웠으므로 고려시대 제일의 나루이자 실질적인 국제항구로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송(宋)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면서 교역을 했던 항구였다. 그러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하자, 그 역할은 거의 상실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 일행이 묵었다.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이었으나 이 벽란정으로부터 이름을 따서 벽란도로 바꾸었다.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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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종실록 지리지 구도개성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에 따르면 개성은 본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는 지역으로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송악군'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 14년(송나라 태종 원년)에 '개성부'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개성은 고려 현종 원년(송나라 진종 3년)에 '거란'의 성종황제가 개성으로 들어와 궁궐과 민가를 모두 불을 내어, 한번 사라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 현종 20년(송나라 인종 7년)에 시중 '강감찬'이 성을 쌓아 재건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태조시절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내성을 쌓는 공사도 진행하였었습니다.
 
개성은 송악산이란 명산인 위치해 있는 절경이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송악(松岳)은 본디 진산(鎭山)으로 숭악(崧岳)으로도 불리며 숭산(崧山)과 같다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꼭대기에는 성황당, 대황당, 국사당의 3개의 사당이 있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설명합니다.연경궁의 경우는 송악의 남쪽에 위치하며, 조선의 사람들은 '본대궐'로 불렀었다고 합니다. 또한, 개성은 벽란도와 30리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해안도시가 됩니다. 이 벽란도는 처음에 주로 송나라와의 무역의 필요로 개항되었으나, 이후, 일본, 남양, 서역상인들까지 모이는 고려의 제1항구이자, 국제도시로 번성 하였습니다. 
 
벽란도는 고려의 서쪽에 위치해있고,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성강은 '서강(西江)'이라는 것입니다.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됩니다. 또한, 예성강의 다른 명칭은 '안북하(安北河)' 또는 '북하'로 중조의 기준에서 볼 때, 북쪽에 위치하여야 합니다. 요약하면, 중조의 북쪽에 위치하면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예성강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성'은 조선시대 '한양'의 윗쪽에 위치한 지역적 특징을 갖고, 그 가까이 흐르는 예성강은 서쪽으로 흘러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China대륙보다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설명했을 때, 더 적합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하강과 양자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 동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제 1항구인, 벽란도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그 기능이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한양은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고려의 수도 개성과는 사뭇달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조선태종시절 해상무역을 금지시켜, 벽란도를 비롯한 해양무역을 원천 봉쇄한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공존한 곳에 위치하였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고려말 '삼별초의 항쟁'으로 기억되는 역사는 고려가 해전의 능력이 상당히 우수한 집단이었던 것을 추측케 해 줍니다.
 
만약, 고려가 동유럽또는 예전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지역에 위치하였다면, 고려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산들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려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는 해안가에 위치하였고, 동시에 제사를 지낼수 있는 영험한 산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산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코카서스산맥의 남쪽지역도 하나의 후보지로 검토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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