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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구려 의 부소갑(扶蘇岬) 이다. 신라 가 고구려 를 합친 후 송악군(松岳郡) 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2년 기묘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5년. 정월에 도읍을 송악(松岳) 남쪽에 정하고 개주(開州) 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개성부(開城府) 로 고쳤고,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 글안(契丹) 성종 황제(聖宗皇帝) 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開京) 에 들어와서 궁궐과 시민의 집을 불태워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 현종 〉 9년 무오에 개성부 를 파하고 현령(縣令) 을 두어, 정주(貞州) · 덕수(德水) · 강음(江陰) 의 3현(縣)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 현종 〉 20년 기사에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7년.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 이 서울에 성(城) 쌓기를 청하니, 임금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 등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만 8천 9백 38인과 공장(工匠) 8천 4백 50인을 모아 나성(羅城)4881) 을 쌓으니, 둘레가 1만 6천 60보(步), 높이가 27척이며, 대문(大門)이 4이니, 동문(東門)을 숭인(崇仁) , 남문(南門)을 회빈(會賓) , 서문(西門)을 선의(宣義) , 동남문(東南門)을 보정(保定) 이라 한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로 승격하고, 김지(金沚) 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 에 이르기를, “임인4882)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 · 덕수(德水) · 강음현(江陰縣) · 정주(貞州) · 장단(長湍) · 임강(臨江) · 토산(兎山) · 임진(臨津) · 송림(松林) · 마전(麻田) · 적성(積城) · 파평현(坡平縣) 을 관할하였다.”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개성부(開城府) 로 승격시켜 부윤(府尹) 이하를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따로 개성 현령(開城縣令) 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2년 계유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6년. 내성(內城)을 쌓았으니, 둘레가 20리 42보이다.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漢陽) 에 옮기고, 4년 을해에 옛 서울을 고쳐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 로 하고 유후(留後) · 부유후(副留後) · 단사관(斷事官) · 경력(經歷) · 도사(都事) 를 각각 1인씩 두고, 개성 현령(開城縣令) 을 파하였다.속칭 송도(松都) 또는 개경(開京) 이라 한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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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鎭山)은 송악(松岳) 이다.일명(一名) 숭악(崧岳) 이다. 송나라 서긍(徐兢) 의 《봉사도경(奉使圖經)》 에 이르되, “경성(京城)의 진산은 숭산(崧山) 이라 하는데, 꼭대기에 사당 셋이 있으니,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첫째는 성황당(城隍堂) 이요, 둘째는 대왕당(大王堂) 이요, 세째는 국사당(國師堂) 이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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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 한우물[大井] 선의문(宣義門) 밖 11리에 있다. 물이 솟아나오는데, 그 깊이가 2척 남짓하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가뭄을 만나면 박연(朴淵) · 덕진(德津) 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며, 세 곳 용왕(龍王)이라 한다. 속설에 “우물물이 붉게 흐리면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다.”고 한다. 경덕궁(敬德宮) 중부(中部) 남계방(南溪坊) 에 있다. 속칭 추동(楸洞) 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 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매 더 넓혀서 지었다. 목청전(穆淸殿) 숭인문(崇仁門) 안쪽 안정방(安定坊) 에 있다. 속칭 어배동(於背洞) 이라 하는데, 곧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의 잠저(潛邸) 때 옛집이다. 태종(太宗) 18년 무술에 구도[ 개성 ]에 거둥하여 전우(殿宇)를 짓도록 하고, 태조 의 화상을 모시고 전직(殿直) 2인을 두며, 전우 옆에 숭효사(崇孝寺) 를 세우고 명복을 빌게 하며,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과 노비 35명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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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궁 옛터[延慶宮舊基] 송악 남쪽에 있는데, 지금 서울 사람들이 본대궐(本大闕)이라 일컫는다. 수창궁 옛터[壽昌宮舊基] 도성(都城) 북판에 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현릉(顯陵) 선의문(宣義門) 밖 서쪽의 보통사(普通寺) 서쪽 오동방(梧桐坊) 에 있는데, 수릉(守陵) 8호를 두었다. 문묘(文廟) 송악 동쪽의 마암(馬巖) 북쪽에 있다. 제전(祭田) 6결 및 섬학전(贍學田) 1백 50결을 두고, 또 교수관(敎授官) 1인을 두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데, 액수를 50명으로 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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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경계[四方界域]동쪽으로 송림(松林) 판적천(板積川) 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 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해풍(海豐) 후근석(朽斤石) 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왕흥산동(王興山洞) 에 이르기 31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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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都城) 호수는 4천 8백 19호, 인구는 8천 3백 72명이요, 순작패 군정(巡綽牌軍丁)이 1천명이며, 속현(屬縣) 개성(開城) 의 호수는 8백 44호, 인구는 2천 21명이요, 마군(馬軍)이 68명, 보군(步軍)이 5명, 선군(船軍)이 좌·우령(左右領) 아울러 20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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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土姓)이 5이니, 고(高) · 김(金) · 왕(王) · 강(康) · 전(田) 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이(李)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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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전(墾田)이 5천 3백 57결이다.논[水田]이 10분의 3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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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전(西籍田) 보정문(保定門) 밖 시루못[甑池] 동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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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驛)이 2이니, 청교(靑郊) 와 산예(狻猊) 이다. 봉화(烽火)가 3곳이니, 송악(松岳) 남쪽으로 해풍(海豐) 덕적산(德積山) 의 봉화에 응한다. · 수갑산(首岬山) 북쪽으로 송악 의 봉화에 응하고, 남쪽으로 해풍(海豐) 둔민달(芚民達) 에 봉화에 응한다. · 개성 신당(開城神堂) 이다.서쪽으로 수갑산 의 봉화에 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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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산(龍岫山) 도성 정남쪽에 있다. 진봉산(進鳳山) 도성 동남쪽에 있다. 자하동(紫霞洞) 곧 송악 남쪽의 골짜기이니, 세상 사람들이 연하동(烟霞洞) 으로서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악부(樂府) 에 자하동곡(紫霞洞曲) 이 있다. 동강(東江) 보정문(保定門) 남쪽 30리에 있다. 해풍군(海豐郡) 경계에 남도(藍島) 4883) 가 있다. 서강(西江) 곧 예성강(禮成江) 이니, 선의문(宣義門) 서남쪽 17리에 있다. 모두 예전에 배로 실어 온 곡식을 내리던 곳이다. 벽란도(碧瀾渡) 선의문 서쪽 30리에 있다. 도승(渡丞) 이 있으니, 우도 수참 전운 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 이 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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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사(廣明寺) 연경궁(延慶宮)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 고려 태조 의 옛집인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연복사(演福寺) 도성 복판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65결을 주었다. 신암사(神岩寺) 도성 정동쪽에 있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감로사(甘露寺) 벽란도(碧瀾渡) 동쪽에 있는데, 강물이 내려다 보이어 매우 절경이다.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2백 결을 주었다. 관음굴(觀音屈) 성밖 동북쪽에 있다. 선종에 붙이고, 밭 2백 50결을 주었다. 운암사(雲岩寺) 비(碑)가 있고, 옛 이름을 광암(光岩) 이라 하는데, 선의문 밖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이 비(妃) 노국 공주(魯國公主) 를 절 동쪽에 장사지내고,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극히 장엄하고 화려하게 해서, 이른바 운암(雲岩)의 금벽(金碧)4884) 이 산골짜기를 환하게 비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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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팔경(松都八景) 자하동의 중 찾기[紫洞尋僧], 청교의 손님 보내기[靑郊送客], 북산의 연기와 비[北山烟雨], 서강의 바람과 눈[西江風雪], 백악의 갠구름[白岳晴雲],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 장단의 돌벽[長湍石壁], 박연 폭포(朴淵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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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고려 의 선대 아간(阿干) 강충(康忠) 이 집을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 정하고 살았다. 그 증손 작제건(作帝建) 이 서해(西海) 용왕(龍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龍女)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하여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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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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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 후에 작제건 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 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黃龍)으로 화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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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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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태조 가 왕위에 오르매, 추존(追尊)하여 작제건 을 의조(懿祖) 로, 용녀를 경헌 왕후(景獻王后) 로 하고, 그 집을 희사하여 광명사(廣明寺) 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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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본】 5책 61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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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52책 148권 2장 B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