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진짜 큰 게임' - 파미르 이서의 동학천도 태평천국 전쟁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기행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작성자한헌석|작성시간08.11.04|조회수655 목록 댓글 0

‘진짜 큰 게임’ - 파미르 이서의 동학천도 태평천국 전쟁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1836~1846년,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 


1839~1840년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냄 / 아편전쟁


1853년 7월 28일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위치한 조그만 성채 악크 메체트(Aq Mechet)를 점령 / 페리제독의 일본 강제 개항


1864년 미하일 체르니아에프(M.G.Cherniaev)는 악크 메체트를 출발해서 시르다리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아울리에 아타(Aulie Ata - 탈라스)와 침켄트(Chimkent)라는 두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는 데 성공 / 태평천국의 천경 함락됨


1865년 6월 15일 러시아의 타슈켄트로 총공세가 시작 - 6월 17일 도시의 원로들이 체르니아에프 장군을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힘


1867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호칸드(코칸트) 칸국을 없애버리고 러시아의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시킴 / 청, 좌종당의 섬서 감숙 회민 봉기 진압 시작. 일본, 대정봉환(막부 정권을 천왕에게 내 놓음)


1868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조약을 체결, 이로써 부하라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됨 / 청, 좌종당의 복주선정국 - 조선(造船) 개시. 일본, 메이지 유신 단행.


1873년 카우프만은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칸국인 히바를 점령 / 좌종당의 섬서 감숙 지방 회민봉기 완전 진압


1884년 투르크멘족의 근거지인 메르브(Merv)를 점령함으로써 드디어 러시아의 남진은 끝나게 된다. / 1878년 좌종당군의 호탄 함락으로 청의 신강 원정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사를 간단하게 아래에서 인용한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에서 뽑아서 연표로 정리했다. 어찌 그리 중국사와 연대와 내용이 비슷한지 필자가 정리해 놓고도 깜짝 놀랐다. 영국의 인도 식민사도 이 시기에 연표로 정리하면 더욱 더 놀라게 될 것이다. / 표시 오른 쪽 내용은 김호동 교수의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과 일본사연표에서 뽑았다.


조작된 역사는 카스에서의 ‘큰 게임’은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을 사이에 놓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들어가고, 영국은 서북인도를 정복해 간 결과로 벌어진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진짜 큰게임’(한헌석칼럼 33호 참조)은 위의 연표와 같이 동쪽 조선은 8개국 연합군과 청군(좌종당군)이 서쪽으로 정복해 들어가고, 러시아는 서에서 동으로 서쪽 조선을 정복해 들어가고, 영국은 인도의 동(소위 동인도 회사)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남쪽 조선을 정복해 들어가는 것이다.


세 방면의 조선쪽 주체들의 조직과 활동은 숨기거나 조작하여서 이슬람과 힌두로, 혹은 태평천국의 유사 기독교로 그려 넣었다. 이 ‘진짜 큰 게임’의 작전을 완수해서 완벽히 숨기고 조작하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 작전의 완성을 위해서 아더 맥아더가 1902년에 ‘그런 출정식의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진압군의 입장에서 사용한 ‘중앙아시아의 정복’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주체의 입장에서는 이 전쟁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동학천도의 태평천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 ‘파미르 이서의 동학천도 태평천국 전쟁.’

물론 다음 호의 제목은 파미르 이남의 동학천도 태평천국 전쟁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동학 발원지가 낙양 경주라는 2차 조작의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로 믿고, 그 현장을 간절히 확인해 보고 싶어서 혼자서 2004년 어느 봄날 일주일 계획으로 낙양을 찾아 갔다. 낙양의 남쪽 산 용문산과 용문석굴을 둘러보고, 그 당시에는 그 곳이 경주 남산이라고 생각했다. 경주 남산보다 훨씬 낮은 산에 많은 석굴을 지어 놓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석굴도 천불동에 있어야할 석굴사는 없었다.


세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낙양 주변의 상세 지도를 사 들고 과연 경주의 서북방에 있어야 할 수운 최제우의 고향 현곡 가정 구미산, 용담정 용담을 찾아 보았지만 없었다. 그 방위에 용담폭포가 지도에 나와 있었다. 가이드와 택시 기사를 데리고 물어 물어 용담폭포를 찾았다. 산을 돌고 돌아 4~50분을 택시로 달려 갔는데, 그 인근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참으로 광막한 황무지였다.


그냥 돌산과 돌 천지였다. 그 북쪽은 황하와 광막한 늪과 같은 호수지대였다. 바로 낙양의 북쪽에 이 돌산과 늪지대에는 인적이 없었다. 집도 한 채 볼 수 없었다.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묘사되어 있는 경주의 현곡은 아니었다. 용담도 아니었다.


낙양에는 모란 공원은 많이 있었지만, 동학과 조선의 흔적은 없었다. 없었다. 정말 없었다. 정말 황당한 것은 거기에 남아 있는 인민들의 삶의 모습과 유적은 순전히 왜(중국어 사용자)의 흔적밖에 없었다. 이게 뭔가?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 그냥 조선과 경주와 동학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히 청소해버렸다고 이해하면 되는가? 아니다. 거기는 동학의 터전 조선의 경주가 아니었다.


다 좋다. 거기가 2차 조작으로 조선의 경주로 심어 놓은 곳이지만, 거기서 수운 최제우가 태어나서 대각득도를 하고 동학을 폈다고 치자. 아니라면 홍수전과 최수운이 둘 다 지나의 남부에서 대각득도를 하고 각자 상제회와 동학을 따로 폈다고 치자. 그런 주장은 다 좋다. 그 근거가 제시되어서 어떤 사실이라도 하나씩 입증된다면(그리고 일면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든 역사의 실제 이 주체세력을 진압한 세력은 어쨌든 좌종당 청군이 진압하고 청소했고, 이 만청(蠻淸-滿淸, 왜, 도이)의 세력과 대결했던 주체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체 세력을 해명하면,  우리의 정체를 찾는 데, 어떤 받침돌의 기초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세력이 기독교 아류(태평천국)든 동학이든 백련교든 회민이든 정통 무슬림이든 이 세력은 좌종당의 만청세력과 싸웠다.


나는 이 주체세력을 남조선 인도에서든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서조선이든 신강 이동의 동조선이든 어디에 있었든지간에 동학천도 태평천국군이라고 본다. 각자는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조의 순결한 민중들이 대결했던 남조선의 영국과 서조선의 러시아와 동조선의 8개국연합군과 청군을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적대세력들의 ‘진짜 큰 게임’을 아더 맥아더는 이야기하고 있고, 그 ‘진짜 큰 게임’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의 역사의 실제 흐름은 남조선의 인도식민지 경략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만청(도이, 왜)세력의 중국 정복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 사실을 누가 부인하고 무시한다는 말인가? 차별성도 선명히 하고, 이 적대세력의 동일성과 객관적 사실성도 분명히 해야 하지 않는가?


소소한 차별성 때문에 이 동일성과 사실성을 흐리거나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 ‘진짜 큰 게임’의 참여자가 조선사 조작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흐리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현재의 역사조작 세력의 편이리라. 그 전쟁과 살육의 주체가 8개국 연합군과 좌종당군(만청군)과 러시아군과 영국군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면, 그들은 만청의 도이 혹은 왜의 세력의 편이리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주간조선 07.12.03

타슈켄트 거점 삼아 南으로 20년 만에 중앙아시아 정복 완성

시베리아 동진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 중앙아시아 남진은 좌절의 연속

1860년대 타슈켄트 점령해 방위선 구축… 부하라 등 차례로 점령

북방과 남방 세력 각축·실크로드 통한 동서 교류 역사는 막 내려

유라시아 내륙 러·청에 의해 분할… 2000년 역사의 물줄기 바꿔 

 

 

 

 

1853년 7월 28일 러시아군은 4일간의 치열한 공격 끝에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위치한 조그만 성채 악크 메체트(Aq Mechet)를 점령했다. 원래 현지어로 ‘백색의 사원(寺院)’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채(城砦)는 점령군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프스크(Petrovsk)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시기에는 키질 오르다(Qizil Orda·현재 카자흐공화국령), 즉 ‘붉은 군영(軍營)’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처럼 정치적 격변에 따라 그 명칭이 수난을 받은 곳이 지구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악크 메체트를 점령함으로써 카자흐스탄 초원 가장 남쪽에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의 광막한 초원을 가로질러서 시르다리아에 안착한 시르다리아 라인(Syr Darya Line)과 동북쪽의 시베리아에서 시작하여 천산(天山) 북방의 알마티(Almaty·당시 이름은 Verny)에서 끝난 시베리아 라인(Siberia Line)이 서로 만나지 못한 상태로, 남쪽의 방어 라인은 그대로 취약하게 열린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시르다리아 이남의 투르키스탄은 세 개의 ‘칸국’, 즉 칸(khan)이 지배하는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북쪽에 호칸드(Khoqand) 칸국, 남쪽에 부하라(Bukhara) 칸국, 그리고 서남쪽 아래에 위치한 히바(Khiva) 칸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호칸드와 부하라는 러시아 변경지역을 약탈하거나 혹은 러시아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카자흐 부족민들을 부추겼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입장에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호칸드의 변경도시인 악크 메체트를 점령한 것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그들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투르키스탄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려 했던 과거 러시아의 노력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로의 ‘동진’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로의 ‘남진’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아랄해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3500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카스피해 동부 연안의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물자 수송문제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거의 몰살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의 성공적 진출을 위해서 먼저 카자흐스탄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마침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카자흐족은 크게 세 개의 부족연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러시아에 복속할 것을 청해온 것이다. 즉 1731년에는 소부(小部·Kishi Juz)와 중부(中部·Orta Juz)가, 그리고 1734~1737년에는 대부(大部·Ulugh Juz)가 황제의 신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쪽에 있던 유목국가 준가르의 위협, 카자흐 지배층의 내분, 그리고 1720년대에 일어난 ‘대기근’ 등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카자흐인들의 이러한 요청을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자발적인 복속’의 의사로 간주하고 그들이 황제의 ‘신민(臣民)’이 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카자흐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카자흐인들이 궁지에 몰려 잠시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지 결코 정치적으로 영구적 종속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자발적 복속’이 있은 뒤에도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상인들을 약탈하거나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도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카자흐인들로서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1770년 러시아를 뒤흔든 푸가체프(E. Pugachev)의 반란을 카자흐인들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러시아 정부는 카자흐에 대해서 종래와 같은 정책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 방식으로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칸들을 부족민으로부터 떼어놓아 오렌부르그로 이주시킨 뒤 거기서 연금을 받으며 살도록 했다. 비록 귀족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부족민으로부터 유리된 칸들은 그저 허수아비였고 러시아 정부의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전반에는 ‘칸’이라는 지위 자체를 폐지시키고, 카자흐의 수령들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신하’임을 명시한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외무성에서 카자흐인들의 문제를 취급해오던 것을 재무성이나 관련 군구(軍區)로 이관시킴으로써 행정적으로도 카자흐의 독자성을 없애버리고 내지(內地)로의 편입을 완성시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의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러시아의 대상단(隊商團)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예가 1836~1846년에 일어난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이었다.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1839~184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참하게 괴멸되어 표트르 시대에 당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제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투르키스탄 칸국들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확실한 거점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 거점은 다름아닌 타슈켄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러시아의 타슈켄트 점령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으로만 끝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영국의 반발 가능성이었다. 즉 중앙아시아의 세 칸국의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자국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군사적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인도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를 러시아가 석권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결코 강 건너 불과 같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인도를 정복한 대부분의 세력들이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을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 정부, 특히 외무성 관리들은 가능하면 무모한 확장을 자제하고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장군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략적으로 볼 때 악크 메체트의 점령은 여전히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중앙아시아를 향해 뻗어 있는 두 개의 전략 라인을 연결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은 곧 타슈켄트 공략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로부터 그것을 허락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러시아중앙정부 역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을 뿐 암묵적으로는 남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사령관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즉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었다. 일단 러시아의 깃발이 올라가면 황제도 그것을 다시 내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하면 훈장감이지만 실패하면 불명예 제대를 각오해야 했다.


1858년 오렌부르그 합참본부에 사령관으로 부임한 미하일 체르니아에프(M.G.Cherniaev)는 바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864년 악크 메체트를 출발해서 시르다리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와 침켄트(Chimkent)라는 두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아울리에 아타는 과거 고선지 장군이 아랍군과 전투를 벌인 탈라스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탈라스’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이 두 도시를 점령한 그는 이제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완성시킬 최종 목적지 타슈켄트를 향해 내려갔다. 그러나 타슈켄트는 호칸드 칸국으로서도 결코 내어줄 수 없는 곳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남부를 연결하고 나아가 청제국 지배하의 신강(新疆)과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을 중개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이미 수도 호칸드를 능가하고 있었다. 체르니아에프의 1차 타슈켄트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호칸드 칸국 측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소왕국이 러시아 제국의 공세를 막아낸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르니아에프 장군은 그 다음해 타슈켄트를 향해 다시 내려갔다. 1865년 6월 15일 아침 3000명 정도의 병력이 투입된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칸국의 실권자인 알림 쿨리(Alim Quli)가 직접 와서 방어전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의 군대를 막아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고 있었다. 전투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알림 쿨리가 어디에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호칸드 칸국의 전열은 일거에 무너졌고,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직감한 지휘관들과 방어군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도주해 버렸다. 결국 6월 17일 도시의 원로들이 체르니아에프 장군을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체르니아에프는 ‘타슈켄트의 사자(獅子·Lev Tashkenta)’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타슈켄트 점령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방위선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러시아의 남진이 중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타슈켄트가 점령되는 와중에 부하라 칸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호칸드 칸국의 남부 도시들을 점령해버렸고, 이로 인해 러시아와 부하라의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오렌부르그에 있던 부하라 상인들을 모두 구금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하라도 당시 부하라를 방문 중이던 러시아의 사절단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1867년 호칸드 칸국을 없애버리고 러시아의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 해에 ‘투르키스탄 성(省·guverniia)’이 설치되고 초대 총독에 카우프만(von Kaufmann)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는 체르니아에프에 이어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을 완성시킨 인물이었고,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절반의 황제(Yarim Padishah)’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1868년 그는 부하라 칸국의 주요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조약을 체결했는데, 칸국의 독립은 인정되었지만 사실상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항에서 부하라의 칸이 러시아의 황제에게 ‘보호’ 받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부하라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카우프만은 1873년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칸국인 히바를 점령하고 그 군주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순종하는 신하’임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1884년 유목민족인 투르크멘족의 근거지인 메르브(Merv)를 점령함으로써 드디어 러시아의 남진은 끝나게 된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이 과연 ‘불가피’한 일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복합적인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한 것임은 분명하다. 즉 안전한 국경을 확보하기 위한 갈망, 불안정한 주변국으로부터 나오는 도발,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으로부터 밀려날지 모른다는 우려, 동시에 외교적 지렛대나 경제적 이익 혹은 군사적 영광에 대한 유혹 등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보다 약 100년 전 청나라의 건륭제가 준가르를 붕괴시키고 신강을 점령했고 이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유라시아의 내륙지역 전체가 러·청 두 제국에 의해 분할되고 국경이 최종적으로 닫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지난 2000년간 지속되어 온 역사의 수레바퀴, 즉 하나는 북방의 유목세력과 남쪽 농경세력 간의 각축, 또 하나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동서교류라는 배경을 갖고 전개되던 역사의 패턴은 멈추게 되었고, 중앙유라시아는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20세기라는 격랑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 6월 30일 타슈켄트의 귀족대표들은 12개의 성문을 여는 황금열쇠를 갖고, 거기에서 80㎞ 동북방에 떨어진 곳에 있던 체르니아에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에게 헌정했다고 한다. 12개의 황금열쇠에는 각 성문의 이름과 열쇠가 만들어진 날짜가 새겨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그 뒤 1933년 타슈켄트로 반환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국립은행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장과 왜곡이라는 포장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다분히 승리자를 미화하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작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hdkim@snu.ac.kr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