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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 대하여...

작성자김재만|작성시간09.01.18|조회수827 목록 댓글 2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보면, 유독 이성계의 전쟁영토는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들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에서 해당지역의 정체성에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홍선생님의 아랫글에서 언급하신 '아지발도'라는 왜군의 장수에 대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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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7권, 13년(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년) 6월 29일(계미) 1번째기사
황산 비각을 개수하다

 

황산 비각(荒山碑閣) 을 개수(改修)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일찍이 그 고을 원을 지낸 사람을 통해 듣건대, 운봉현(雲峰縣) 황산(荒山) 은 바로 국초(國初) 때 승전한 고적지로서 전적(戰績)을 기록한 비석이 황산 에서 8리 떨어진 화수산(花水山) 밑에 있는데 비각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고 체제(體制) 또한 대체로 엉성하여 수호하는 사람으로 단지 승장(僧將)이란 명색만을 두었을 뿐이라 하니, 높여 받들어야 하는 사체의 뜻에 어긋남이 있다. 비각에서 서쪽으로 1백 보(步)쯤 떨어진 곳에 또 동고록(同苦錄) 과 연월일을 새긴 석벽이 있는데 고로(故老)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읍지(邑誌)에도 실려 있다고 하니, 비각이 위치한 곳의 지형을 우선 자세히 살펴보게 하라.”

하였다. 감사가 개수하는 역사를 시작했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보살피고 수호함에 있어서는 중이 속인(俗人)보다 나으니, 중 몇 십 명을 정원으로 한정하고, 곡식을 모아 봄에는 흩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여 모곡(耗穀)을 받아서 요미(料米)로 주라. 별장(別將)은 전대로 다시 설치하되 고을의 군교(軍校) 중에서 한 갈래를 골라 정하여서 오래 근무한 순서에 따라 삼망(三望)을 갖추어 감사가 병조에 보고해서 의망해 낙점을 받게 하라. 장교가 있으면 졸개가 없을 수 없고 또한 지방(支放)의 밑천도 없을 수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어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황산 은 바로 태조(太祖)아지발도(阿只拔都) 를 사로잡은 곳이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8장 B면

【영인본】 46책 42면

【분류】 *건설(建設) / *역사(歷史) / *사상(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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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조에 국초의 승전 고적지인 황산비각을 수리하였다는 간단한 내용입니다. 이중 가장 아래의 단락을 보면 황산은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사로잡은 곳이다라는 설명이 나타납니다. 왜군의 장수라는 설명은 일단 해당글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후백과를 통해서 보면, 바로 이 지역이 왜구가 출몰해오던 주요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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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1380년(우왕 9) 이성계(李成桂)가 지리산(智異山) 부근 황산에서 왜구의 대부대를 격퇴한 싸움. 고려말 왜구는 공민왕 때부터 창궐하였으나,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침략이 없다가, 1380년 8월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진포(鎭浦;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로 침투해 3도지방을 대상으로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해 최무선(崔茂宣)은 화포(火砲)를 발명해, 그 화포로 진포에서 전투를 벌여 왜구를 크게 격파하고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살아남은 왜구들이 더욱 심하게 노략질을 일삼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 3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삼아 왜구를 소탕하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雲峰)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성계군이 10배나 많은 왜구를 물리쳤고 70여 명의 왜구만 지리산 방면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 뒤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다. 1577년(선조 10) 이를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 운봉읍(雲峰邑) 화수리(花水里)에 건립되었다가 파괴되어 1977년 다시 세워졌다.

 

<출처: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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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황산(荒山)의 지리적 위치는 고려의 서남쪽, 전라도 혹은 지리산부근과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말해, 중앙의 서남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현재의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해도 절묘하게 맞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중앙조정의 입장에서 본다면, 해당 서남지역은 분명이 제가 어제 올렸던 '일한국'의 지역인 이란->이라크->터키가 있는 지역이며, 구당서의 백제의 지명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역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만약에, 이성계의 황산대첩에 나오는 '황산(荒山)'이 그 옛적, 계백이 장렬히 전사한 '황산벌전투 (黃山-戰鬪)'와 동일한 곳이라면, 고대(삼국)에서 중세(고려)를 넘어 근세(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해석에 있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계백이 죽은 황산벌도 역시 당시 중심으로부터 서남쪽의 방향이었기 때문이지요.

 

어제의 글에서 제가 야후백과를 참조하여 '돌궐의 국가'를 '일(il)'이라고 표현하다는 내용을 제시하였었습니다. 이 '일'을 음원 그대로 따라간다면, '일국'이 되며, 현재의 '일본'과도 통하는 우연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만약 해당위치가 고려말-조선초 왜의 위치였다면, 그 근거성이 더해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다. 추가적으로, 현재도 일본은 자신들의 조상을 백제인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 역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부분을 역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요약을 하면, 이성계가 여진과 왜를 정벌한 엄청난 전투적 성과를 티무루의 일대기와 그의 행적을 통해 추적해보면, 카스피해와 흑해의 윗쪽의 여진과, 그 아랫쪽의 왜라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며, 해당가설이 기타의 근거내용을 통해서도 설명되어지는 놀라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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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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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홍진영 | 작성시간 09.01.18 당시의 이란이면...말 그대로 일한국입니다...훌레그 한국이져...고려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당시 고려는 북쪽도 다 빼앗겨 사천성이나 남경으로 수도를 잠시 옮겼다 다시 타클라마칸 일대의 개성을 회복한 듯 합니다...고로 개성은 천산 근처나 서안 근처고...황산은...현 운남성의 황산이며...백제의 황산벌도 그쪽으로 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재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1.18 그쪽으로의 구도가 아닙니다.. 왜가 이란과 터키방면으로 가는 것이고, 해당지역이 일본이 되는 것이고, 고대 백제 등이 되는 구도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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