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인용(引用)된 문장(文章)은 순종(純宗) 3년(1910년) 곧 융희(隆熙) 4년 8월 29일(陽曆)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원문’(原文)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원문(原文)은 한문(漢文)으로 작성(作成)되었습니다.
그러나 필자(筆者)가 아래에 소개(紹介)한 내용(內容)은 <순종실록(純宗實錄)>의 맨 마지막 기사(記事)이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事例)인데 이른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를 국가(國家)의 표준(標準)으로 삼았을까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문자(文字) 곧 언자(諺字)가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에 창제(創製)되었는데도 불구(不拘)하고, 그 이후(以後)에도 조선(朝鮮)의 정사(正史) 기록(記錄)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무슨 이유(理由)로 줄곧 한문(漢文)을 고집(固執)하였을까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각종(各種) 문집(文集)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當時)의 조선인(朝鮮人)들에게는 기존(旣存)의 전통적(傳統的) 한문(漢文)보다는 현실(現實)의 구어(口語)와 어순(語順) 및 문법(文法)이 비슷한 이른바 언문(諺文)이 더 편리(便利)하고 이해(理解)하기 쉬웠을 터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모든 조선인(朝鮮人)들이 한문(漢文)에 능통(能通)한 것은 분명(分明)히 아니었습니다.
사전(辭典)에서는 언문(諺文)이든 언자(諺字)이든 모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필자(筆者)의 경우(境遇) 언문(諺文)은 한문(漢文)에 대응(對應)하는 낱말로, 언자(諺字)는 한자(漢字)에 상응(相應)하는 낱말로 사용(使用)하였습니다.
하여간(何如間) 역사(歷史)의 진실(眞實) 규명(糾明)에 있어서도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에 관(關)하여 더 깊게 연구(硏究)할 필요(必要)가 있다고 보입니다.
순종(純宗) 3년(1910년) 곧 융희(隆熙) 4년 8월 29일(陽曆)
<일본국(日本國) 황제(皇帝)에게 한국(韓國) 통치권(統治權)을 양도(讓渡)하다>
<원문(原文)>
皇帝若曰: “朕이 否德으로 艱大 業을 承야 臨御以後로 今日에 至도록 維新政令에 關야 亟圖고 備試야 用力이 未嘗不至로 由來로 積弱이 成痼고 疲弊가 極處에 到야 時日間에 挽回 施措無望니 中夜憂慮에 善後 策이 茫然지라。 此를 任야 支離益甚면 終局에 收拾을 不得기에 自底진 則無寧히 大任을 人에게 托야 完全 方法과 革新 功效 奏케만 不如 故로, 朕이 於是에 瞿然히 內省고 廓然히 自斷야 玆에 韓國의 統治權을 從前으로 親信依仰든 隣國大日本皇帝陛下게 讓與야 外으로 東洋의 平和를 鞏固케고 內으로 八域民生을 保全케노니, 惟爾大小臣民은 國勢와 時宜를 深察야 勿爲煩擾고 各安其業야 日本帝國文明新政을 服從야 幸福을 共受라。 朕의 今日此擧 爾有衆을 忘이아니라 爾有衆을 救活쟈 至意에 亶出이니 爾臣民等은 朕의 此意를 克體라。”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번역문(飜譯文)>
황제(皇帝)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業)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政令)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關)하여 누차(累次) 도모(圖謀)하고 갖추어 시험(試驗)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元來) 허약(虛弱)한 것이 쌓여서 고질(痼疾)이 되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시일(時日) 간(間)에 만회(挽回)할 시책(施策)을 행할 가망(可望)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憂慮)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茫然)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甚)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收拾)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完全)하게 할 방법(方法)과 혁신(革新)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朕)이 이에 결연(決然)히 내성(內省)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결단(決斷)을 내려 이에 한국(韓國)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從前)부터 친근(親近)하게 믿고 의지(依支)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大日本) 황제(皇帝) 폐하(陛下)에게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平和)를 공고(鞏固)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民生)을 보전(保全)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大小) 신민(臣民)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騷亂)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職業)에 안주(安住)하여 일본(日本) 제국(帝國)의 문명(文明)한 새 정치(政治)에 복종(服從)하여 행복(幸福)을 함께 받으라.
짐(朕)의 오늘의 이 조치(措置)는 그대들 민중(民衆)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民衆)을 구원(救援)하려고 하는 지극(至極)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臣民)들은 짐(朕)의 이 뜻을 능(能)히 헤아리라”하였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참고(參考) 자료(資料)>
皇城新聞(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大韓 光武 二年 九月 五日 月曜日)
社說(사설)
昔我東方에 檀君이 初降 人文이 未創야 其傳來 文獻이 足히 徵 無하더니 箕子셔 八條 設샤 人民을 敎育시니 可히 我東의 初出頭 第一個聖人이라 謂지라 其後에 人民이 開明고 書冊이 稍聚야 羅朝의 巨擘과 麗廷의 名士가 不多이아니로 固陋寡聞 歎이 尙多더니 太祖大王셔 艱大신 業을 定시고 右文 治 先샤 一世의 民을 敺야 文明의 域애 進케시니 百餘年間에 天下의 聖經賢傳과 遺文古事가 無不畢集지라 於是乎賢人이 輩出고 文章이 並世야 其作興 氣像이 可히 天下에 侔擬만나 然나 瓦金이 質이 異고 齒角이 俱키 難야 能히 人人마다 學業에 就키 難으로 惟我 世宗大王셔 別노 一種文字 創造샤 愚夫愚婦로 無不開明케시니 曰國文이라 其文이 克簡克易야 雖童穉兒女라도 時月의 工을 推면 可히 平生의 用이 足지라 是로 以야 一世에 傳習 者十에 五六에 至더니 欽惟 大皇帝陛下셔 甲午中興之會 適際샤 自主獨立시 基礎 確定시고 一新更張 政令을 頒布실 特이 箕聖의 遺傅신 文字와 先王의 創造신 文字로 並行코져샤 公私文牒을 國漢文으로 混用라신 勅敎 下시니 百揆가 職을 率야 奔走奉行니 近日에 官報와 各府郡의 訓令指令과 各郡에 請願書報告書가 是라 現今에 本社에셔도 新聞을 擴張몬져 國漢文을 交用거 尃혀 大皇帝陛下의 聖勅을 式遵 本意오 其次 古文과 今文을 幷傳코져이오 其次 僉君子의 供覽시 便易을 取이로라
[출처=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