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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중국어(中國語), 조선어(朝鮮語), 일본어(日本語) - <일동기유(日東記游)>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0.12.30|조회수274 목록 댓글 0

<일동기유(日東記游)> ()3()  

 

인물(人物) 12()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일본인(日本人)] (言語)은 분명(分明)치 아니하여 중()이 천수주문(千手呪文)을 읽는 것 같았으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개(大槪) 중국인(中國人)의 말(), (言語)이 곧 문자(文字)이므로 우리들 중에 능()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 글자로써 두 가지, 세 가지 음()을 내기는 하나, 한 번 알아듣기만 하면 이것을 배우기는 대단히 쉬웠으며,

우리말은 발음(發音)과 풀이()가 서로 반수(半數)나 되고 자음(字音)은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는 까닭으로, 처음에는 비록 알기가 어려우나 나중에는 또한 배우기가 쉬웠다.

 

일본인(日本人)의 말()도 또한 발음(發音)과 풀이()가 서로 반수(半數)나 되는데 발음(發音)은 중국(中國)과 같아서 두 가지 세 가지나 되고, 풀이()는 우리보다도 곱절이나 되어 지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욱 알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려워서 매양 그들과 더불어 말하게 되면, 우리말은 1~2()뿐인데도 저들 말은 5~6()이나 되었다.

역관(譯官)을 통()하여 들어보면 우리말의 1~2()은 저들 말의 5~6()이고, 저들 말의 5~6()은 곧 우리말의 1~2()이었다.

 

(言語)을 할 때는, 말을 꺼낸 곳과 말머리를 바꾸는 곳은 모두 매우 간삽[艱澁;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는 말]하여, 수없이 빨아들이고 수없이 기운(氣運)을 삼키는 것은 주창(周昌)ㆍ등애(鄧艾)의 말더듬이와 같았으며, 때로는 기운(氣運)이 다급(多急)해지고 얼굴에 붉은 빛이 나는 것은 늦철의 늙은 꾀꼬리가 목구멍과 혓바닥이 다 마른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한 번 죽 가서 잇닿은 곳은 미끄럽고 유창(流暢)하여 마치 쏟아지는 물과, 멈추지 않는 북[]과도 같았다. 다만 여자(女子)의 말(言語)은 혀끝이 굳어서 미끄럽지는 못하였다.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日東記游 卷三

 

人物 十二則

 

 

<원문(原文)>

 

전략(前略)

 

 

言語侏儷如僧諷千手呪不可解聽蓋中國人言言語便是文字我人之不能解者以一字二三音而一得解聽學之甚易我人言音釋參半而字音無一二故始雖難解而終亦易學日本人言亦音釋參半而音同華而二三釋倍我而支離所以尤難解尤難學而每與之言我言一二段彼言五六段傳譯而聽之則我之一二彼之五六而彼之五六卽我之一二

言語之時發語處更端處俱甚艱澁無數汲引無數呑氣如周氏之期期鄧家之艾艾有時氣急面發亦如晩林老鶯喉舌俱燥至一往接連處流麗如瀉水之不咽而弄梭之無停但女子言語舌頭箍硬不得滑利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참고(參考) 자료(資料)>

 

<일동기유(日東記游)>는 조선(朝鮮) 말기(末期) 고종(高宗) 13(1876)에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締結)되고 한일(韓日) 교섭(交涉)이 시작(始作)된 후(), 그 당시(當時) 수신사(修信使)로 일본(日本)에 갔다 온 김기수(金綺秀)의 일본(日本)에 대한 견문록(見聞錄)으로서, 근세(近世) 한일(韓日) 관계(關係) 연구(硏究)의 중요(重要)한 사료(史料)이다.

 

<일동기유(日東記游)>는 모두 4()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 1 : 사회(事會)ㆍ차견(差遣)ㆍ수솔(隨率)ㆍ행구(行具)ㆍ상략(商略)ㆍ별리(別離)ㆍ음청(陰晴)ㆍ헐숙(歇宿)ㆍ승선(乘船)ㆍ정박(停泊)ㆍ유관(留館)ㆍ행례(行禮)

() 2 : 완상(玩賞)ㆍ결식(結識)ㆍ연음(燕飮)ㆍ문답(問答)

() 3 : 궁실(宮室)ㆍ성곽(城郭)ㆍ인물(人物)ㆍ속상(俗尙)ㆍ정법(政法)ㆍ규조(規條)ㆍ대설(代舌)ㆍ학술(學術)ㆍ기예(技藝)ㆍ물산(物産)

() 4 : 문사(文事)ㆍ귀기(歸期)ㆍ환조(還朝)

 

다시 말해서, 한 사건(事件)을 중심(中心)으로 그 시말(始末)을 기록(記錄)하는, 이른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체재(體裁)로 서술(敍述)된 기록(記錄)이라고도 할 만하다.

 

권말(卷末)에 붙어 있는 후서()에 따르면, 이것은 그가 일본(日本)에 갔다 온 다음 해, 즉 고종(高宗) 14(1877) 2월에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군수(郡守)로 있을 때 정리(整理)한 것이라 한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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