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기유(日東記游)> 제(第)3권(卷)
인물(人物) 12칙(則)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일본인(日本人)의] 말(言語)은 분명(分明)치 아니하여 중(僧)이 천수주문(千手呪文)을 읽는 것 같았으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개(大槪) 중국인(中國人)의 말(言)은, 말(言語)이 곧 문자(文字)이므로 우리들 중에 능(能)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 글자로써 두 가지, 세 가지 음(音)을 내기는 하나, 한 번 알아듣기만 하면 이것을 배우기는 대단히 쉬웠으며,
우리말은 발음(發音)과 풀이(釋)가 서로 반수(半數)나 되고 자음(字音)은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는 까닭으로, 처음에는 비록 알기가 어려우나 나중에는 또한 배우기가 쉬웠다.
일본인(日本人)의 말(言)도 또한 발음(發音)과 풀이(釋)가 서로 반수(半數)나 되는데 발음(發音)은 중국(中國)과 같아서 두 가지 세 가지나 되고, 풀이(釋)는 우리보다도 곱절이나 되어 지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욱 알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려워서 매양 그들과 더불어 말하게 되면, 우리말은 1~2단(段)뿐인데도 저들 말은 5~6단(段)이나 되었다.
역관(譯官)을 통(通)하여 들어보면 우리말의 1~2단(段)은 저들 말의 5~6단(段)이고, 저들 말의 5~6단(段)은 곧 우리말의 1~2단(段)이었다.
말(言語)을 할 때는, 말을 꺼낸 곳과 말머리를 바꾸는 곳은 모두 매우 간삽[艱澁; 막혀서 통(通)하지 않는다는 말]하여, 수없이 빨아들이고 수없이 기운(氣運)을 삼키는 것은 주창(周昌)ㆍ등애(鄧艾)의 말더듬이와 같았으며, 때로는 기운(氣運)이 다급(多急)해지고 얼굴에 붉은 빛이 나는 것은 늦철의 늙은 꾀꼬리가 목구멍과 혓바닥이 다 마른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한 번 죽 가서 잇닿은 곳은 미끄럽고 유창(流暢)하여 마치 쏟아지는 물과, 멈추지 않는 북[梭]과도 같았다. 다만 여자(女子)의 말(言語)은 혀끝이 굳어서 미끄럽지는 못하였다.
후략(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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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東記游 卷三
人物 十二則
<원문(原文)>
전략(前略)
言語侏儷,如僧諷千手呪,不可解聽,蓋中國人言,言語便是文字,我人之不能解者,以一字二三音,而一得解聽,學之甚易,我人言,音釋參半,而字音無一二,故始雖難解,而終亦易學,日本人言,亦音釋參半,而音同華而二三,釋倍我而支離,所以尤難解,尤難學,而每與之言,我言一二段,彼言五六段,傳譯而聽之,則我之一二,彼之五六,而彼之五六,卽我之一二。
言語之時,發語處更端處,俱甚艱澁,無數汲引,無數呑氣,如周氏之期期,鄧家之艾艾,有時氣急面發,亦如晩林老鶯,喉舌俱燥,至一往接連處,伶俜流麗,如瀉水之不咽,而弄梭之無停,但女子言語,舌頭箍硬,不得滑利。
후략(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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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參考) 자료(資料)>
<일동기유(日東記游)>는 조선(朝鮮) 말기(末期) 고종(高宗) 13년(1876년)에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締結)되고 한일(韓日) 교섭(交涉)이 시작(始作)된 후(後), 그 당시(當時) 수신사(修信使)로 일본(日本)에 갔다 온 김기수(金綺秀)의 일본(日本)에 대한 견문록(見聞錄)으로서, 근세(近世) 한일(韓日) 관계(關係) 연구(硏究)의 중요(重要)한 사료(史料)이다.
<일동기유(日東記游)>는 모두 4권(卷)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권(卷) 1 : 사회(事會)ㆍ차견(差遣)ㆍ수솔(隨率)ㆍ행구(行具)ㆍ상략(商略)ㆍ별리(別離)ㆍ음청(陰晴)ㆍ헐숙(歇宿)ㆍ승선(乘船)ㆍ정박(停泊)ㆍ유관(留館)ㆍ행례(行禮)
권(卷) 2 : 완상(玩賞)ㆍ결식(結識)ㆍ연음(燕飮)ㆍ문답(問答)
권(卷) 3 : 궁실(宮室)ㆍ성곽(城郭)ㆍ인물(人物)ㆍ속상(俗尙)ㆍ정법(政法)ㆍ규조(規條)ㆍ대설(代舌)ㆍ학술(學術)ㆍ기예(技藝)ㆍ물산(物産)
권(卷) 4 : 문사(文事)ㆍ귀기(歸期)ㆍ환조(還朝)
다시 말해서, 한 사건(事件)을 중심(中心)으로 그 시말(始末)을 기록(記錄)하는, 이른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체재(體裁)로 서술(敍述)된 기록(記錄)이라고도 할 만하다.
권말(卷末)에 붙어 있는 후서(後叙)에 따르면, 이것은 그가 일본(日本)에 갔다 온 다음 해, 즉 고종(高宗) 14년(1877년) 2월에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군수(郡守)로 있을 때 정리(整理)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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