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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小中華)라는 표현(表現)의 유래(由來)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2.24|조회수495 목록 댓글 0

<임하필기(林下筆記)> 12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

 

 

<번역문(飜譯文)>

 

박초(朴礎)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경인년(庚寅年)[1170, 의종(毅宗) 24]과 계사년(癸巳年)[1173, 명종(明宗) 3] 이전(以前)까지는 유신(儒臣)과 명사(名士)들이 중국(中國)보다도 많았다.

그래서 당() 나라는 우리 나라를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하였으며 송() 나라는문물(文物)과 예의(禮義)가 있는 나라라고 하면서 저들 나라에 있는 우리 나라 사신(使臣)들의 하마소(下馬所)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이라고 써 붙였다하였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원문(原文)>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참고(參考) 자료(資料) - 1>

 

<임하필기(林下筆記)>는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문신(文臣)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文集)이다.  

 

필사본(筆寫本). 39 33. 규장각(奎章閣) 도서(圖書).

 

1871년 곧 고종(高宗) 8년 조선(朝鮮)과 중국(中國)의 사물(事物)에 대하여 고증(考證)한 내용(內容)이다.

광범위(廣範圍)한 분야(分野)에 걸쳐 저자(著者)의 해박(該博)한 식견(識見)을 펼쳐놓은 저술(著述)로서, (((()을 비롯하여 조선(朝鮮)의 전고(典故역사(歷史지리(地理산물(産物서화(書畵전적(典籍시문(詩文가사(歌辭정치(政治외교(外交제도(制度궁중비사(宮中秘史) 등 각() 부문(部門)을 사료적(史料的)인 입장(立場)에서 백과사전식(百科事典式)으로 엮어 놓았다.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다사다난(多事多難)하던 시대(時代)에 중신(重臣)으로서 그의 견문(見聞)과 체험(體驗)을 기록(記錄)한 이 책()은 측면사(側面史)로서의 문헌적(文獻的) 가치(價値)가 크며,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비견(比肩)할 만한 저술(著述)이다.

 

() 머리에 정기세(鄭基世)의 서문(序文)이 있고, () 끝에 임하노인(林下老人)과 윤성진(尹成鎭)의 발문(跋文)이 있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영인(影印)하여 간행(刊行)하였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참고(參考) 자료(資料) - 2>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

 

공양왕 2(恭讓王 二)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우리 국가(國家)가 경인(庚寅)ㆍ계사년(癸巳年) 이전(以前)에는 통유(通儒)와 명사(名士)가 중국(中國)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 나라에서군자(君子)의 나라라고 하였으며, () 나라에서는문물(文物)ㆍ예악(禮樂)의 나라라고 하여 본국(本國)의 사신(使臣)이 유숙(留宿)하는 곳에 쓰기를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인(庚寅)ㆍ계사년(癸巳年) 이후(以後)에는 병란(兵亂)에 죽지 않으면 산림(山林)으로 도망(逃亡)해 들어갔으므로 통유(通儒)와 명사(名士)가 백()에 한두 명()도 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원문(原文)>

 

전략(前略)

 

我國家,自庚寅癸巳以上,通儒名士,多於中國,故唐家以爲君子之國,宋朝以爲文物禮樂之邦,題本國使臣下馬所曰,小中華之館,自庚癸以後,不死兵亂,則逃入山林,通儒名士,百無一二存者。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참고(參考) 자료(資料) - 3>

 

무신정변(武臣政變)은 고려(高麗) 시대(時代) 의종(毅宗) 24년 곧 11708월에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의 휘하(麾下) 장수(將帥)들이 보현원(普賢院)에서 일으킨 쿠데타이다.

 

무신(武臣)의 난() 또는 경인(庚寅)의 난()이라고도 하며 정변(政變)의 주도적(主導的)인 역할(役割)을 한 정중부(鄭仲夫)의 이름을 따서 정중부(鄭仲夫)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170년 이후(以後) 계속(繼續)된 무신(武臣) 정권(政權) 100년 후() 1270, 마지막 무신(武臣) 집권자(執權者)인 임유무(林惟茂)가 살해(殺害) 당하기까지 100년간(年間) 존속(存續)되었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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