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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자조선에 관한 중국 학자의 논문 소개(장진근)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9.10|조회수1,324 목록 댓글 0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논문은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하기 위해 많은 중국 문헌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던 자료인데 그냥 사장시키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번역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출전을 메모해 두지 않아서 어데서 복사하였는지 아직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학자로는 남한의 이병도, 최남선, 정인보, 안재홍, 천관우, 김철준, 김정배, 윤내현 등을 비롯하여, 조선족 출신의 길림성 연변대학 박진석 교수, 일제 때 식민사관을 주도한 일본의 금서룡(今西龍), 그리고 중국의 학자로는 북경대 주일량(周一良) 교수, 풍가승(馮家承), 이계(李季), 김육불(金毓黻) 등 동양 삼국의 내노라하는 역사학자들이 모두 등장하여 대체로 남북한 학자와 조선족학자 들은 기자의 동래설을 부정하는 쪽이요, 일본의 학자 또한 부인하는 쪽이요, 중국의 학자들은 긍정하는 쪽으로 기자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든지 미쳐 깨닫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어떤 희열 같은 것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단군으로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역사를 신화라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해 버리고, 그렇다면 우리 역사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진다는데, 기자조선마저 부정해 버리고, 위만조선은 중국사람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고 이마저 부정해 버리고, 더군다나 한사군은 그때부터 우리 민족이 정식으로 중국의 직할통치를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전에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우리 역사》인가 무언가 하는 정확한 제목은 잘 생각이 나질 않지만  그 무슨 책에서 그냥 찢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역사라며 비감해 하셨던 글이 문득 생각난다. 나도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떻거나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릴 수는 없다. 이런 가운데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자조선에 관한 완결편이라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역자 주)





                                                                  《기자조선 연구 총술(箕子朝鮮硏究總述)》



                                                                                                 풍홍지(馮鴻志)



  《상서대전(尙書大典)》 《사기(史記)》 등 중국 고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상조(商朝) 말년에 주왕(紂王)이 무도하매 기자(箕子)가 나아가 간했다가 구금이 되었다. 대략 기원전 1207년, 주무왕( 周武王)이 군사를 일으켜 주(紂)를 벌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구금되어 있는 기자를 석방시켜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가 자기를 석방시켜 준 것을 참지 못해 조선(朝鮮)으로 달아나자, 주무왕은 바로 조선으로써 그를 봉하였는 바,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또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조선사략(朝鮮史略)》 등 조선의 사적에서도 이와 같은 류의 기록이 있으며, 고려 때에는 또한 평양에 기자묘(箕子墓)와 기자사(箕子祠)를 세운 일도 있다. 이와같이 기자조선설은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고대사상 정설로 통하는 설로 형성되었다. 다만 본세기 20~30년대로부터 일부 국내외 사가들이 (주로 중국과 조선의 학자들임) 고대 문헌과 출토 문화재와 조선어 방면의 자료에 근거하여 기자조선설에 대해 새롭게 연구토론을 해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견해를 제기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논쟁이 그치지를 않는 바, 이제까지 수집된 관련 저술에만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종합하여 개괄적으로 논술하고자 한다.



(一) 기자조선부정



1.  중국 고대 문헌 가운데 기자조선에 관한 기록에 모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남한 학자 이병도(李丙燾) 교수가 제기하기를, 《상서대전(尙書大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주무왕이 먼저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 뒤에 《홍범(洪范)》을 물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의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은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긴 다음에 기자를 찾아가자 기자는 바로 《홍범》을 간하매 무왕이 바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왕이 《홍범》을 물은 것이 먼저이고, 기자를 조선에 봉한 것은 그 나중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志)》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버렸다고 하였으니 곧 기자가 조선으로 가버린 것은 상나라가 망하기 이전이 되는 셈이다. 위와 같은 세 기록상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封箕子)"는 것과 "《홍범(洪范)》을 물었다(問洪范)"는 것은 앞뒤의 순서에 모순이 있다고 하였다.① 다만 이 분은 인용된 글에서 기자가 "다라나서 조선으로 갔다(走之朝鮮)는조선 기록이 일치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길림 연변대학 박진석(朴眞奭) 교수가 제기하기를, 기자가 구금에서 풀려난 뒤에 무왕이 "자기의 임금을 죽이고 자기를 석방시켜 준 것을 구차스럽게 어려움을 벗어난 것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해서(誅我君而釋己, 嫌苟免)", "달아나 조선으로 갔던(走之朝鮮)" 것으로 생각되며, 그 밖에 《고문상서(古文尙書)》의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상과의 싸움에서 상을 이겨 주왕(紂王)인 수(受)를 죽이고, 그의 아들 무강(武康)을 후사로 세우고(武王勝殷, 殺受, 立武康)" 그 다음에 "기자를 데리고 돌아와서(以箕子歸)", 사관이 《홍범(洪范)》을 짓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는 바, 이는 곧 기자를 주나라의 서울 호경으로 압송하여 무왕에게 《홍범(洪范範》을 진술케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기자가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走之朝鮮)"라는 설명과 그 다음에 나오는 "기자를 데리고 돌아왔다(以箕子歸)"라는 기록과는 서로 모순된다고 하였다.②

  이병도와 박진석이 또 제기하기를, 《상서대전(尙書大典)》의 기록에, "기자가 구금에서 풀려난 일(釋箕子之囚)"은 무왕 13년이거니와 동쪽 조선으로 달아난 기자가 또 "13년에 주나라에 내조하였다(于十三祀來朝周)"라고 하는데 기자가 같은 한 해 사이에 조선과 호경(鎬京) 두 지역을 왔다갔다 했다는 것은 교통수단이 몹씨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나라가 자기를 석방해주었던 것을 참지 못했기(不忍爲周之釋)" 때문에 다라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기자가 "주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은(受周之封)" 뒤 더욱이나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어(不得無臣禮)" 주나라에 내조했다는 것 또한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이라고 하였다.③ 조선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전사》 제2권에서 제기하기를,  《사기(史記) · 송세가(宋世家)》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단지 그 가운데 주석일 뿐이며 또 "기(箕)는 국명이요, 자(子)는 작위명이다"라고 하였으며,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는 바, 주석의 내용으로 보아, 기자는 결코 인명이 아니요, 만약 인명이라면 그가 죽은 뒤에도 중국 경내에 묻혀 있어야 하는 것이요, 이러한 것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④



2.   기자조선설은 후세인들의 부회 혹은 날조라고 생각한다.



  일본 학자 금서룡(今西龍)은이 낙랑군(樂浪郡)의 한씨(韓氏)들이 자기들의 문벌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들이 기자의 후손이라고 사칭하였고, 그뒤 고조선 땅을 차지한 고구려 또한 기자를 신으로 숭배하였으며, 고려왕조에서는 이러한 풍습을 이어받고 발전시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사(箕子祠)를 세웠으며,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주자학이 또한 정치. 문화에 있어서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갑짜기 기자에 가탁(假托)하여 그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⑤

  남한 학자 최남선(崔南善)은 평양에 있는 기자묘와 기자의 정전(井田) 유적지는 고려 중기 이후에 부회하여 만들어졌던 것으로서 중국 사람들은 일종의 전통적인 습관으로 인해 항상 자기들 주변 종족의 선조와 중국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하는 경향이 있어 그 주변의 민족들도 다 이와 같이 한 것이요, 따라서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異民)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하였다.⑥

  북경대학 주일량(周一良) 교수는 지적하기를,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말한, "주무왕이 상을 멸한 뒤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周武王滅商後, 封箕子于朝鮮)"라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긍정할 수는 없다고 하겠으나 기자가 개국(開國)하였다는 말은 아마도 후인들의 부회가 아닌가 모르겠다고 하였다.⑦

  《조선전사》 제2권의 작자가 지적하기를, 기원전 3세기 전후에 중국의 《역경(易經)》 중에 처음으로 "기자가 명이로 갔다(箕子之鳴夷)"는 말이 나오는 바, "명이(鳴夷)"는 본래 그 뜻이 뚜렷한 것을 감추어 평범한 것으로 처리했다는 말하며, 다시 말하면 기자가 상나라 주왕의 폭정 아래에서도 담담하게 처신을 하면서 그 절개를 굳게 지켰던 것인데도 한조의 어용 주석자들이 오히려 왜곡시켜 기자가 "이(夷)"에게 광명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와 동시에 더욱이 "이(夷)"를 고조선으로 비유하고 더나아가 기가가 조선을 교화시켰다고까지 해석한 것이다. 《사기(史記)》의 작가는 한나라와 고조선의 종속관계를 미화하기 위해 《상서대전(尙書大典)》을 가지고 그 가운데 맨 처음 날조된 기자조선설을 더욱 터무니없이 가공한 것이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 지리지(地理地)》의 작자는 기자의 공적을 다시 덧붙여 분식시켰으며,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의 작자는 또 고조선왕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손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이른바 기자가 생존한 때로부터 근 1천여년이 지난 뒤에 날조해 낸 기자조선설로서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정복하고 그들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전사》 제2권의 작자는 또 제기하기를, 사대주의에 물든 고려왕조에서는 중국 봉건통치자들이 후세에 날조한 기자동래지설에 근거해서 더욱더 터무니 없이 "기자묘"와 "기자사"를 거짓으로 꾸며냈다고 하였다.⑧



(二) 역사상 기자조선은 존재하였으나 주무왕이 봉했던 기자조선은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에도 다른 두 종류가 있다.



1.  역사상 기자국, 즉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한의 학자 천관우(千寬宇)가 제기하기를, 기자족은 원래 산서(山西) 태곡현(太谷縣) 일대에서 살면서 기자국을 세워,  상조 말기에 상왕실의 후국(侯國)으로 되었는데 주나라의 신흥세에 밀려나서 동쪽으로 하북성(河北省) 난하(滦下) 하류까지 이동하여 정착하기에 이르렀는 바, 이게 바로 기자조선이요, 그 후 계속 동쪽으로 옮겨가서 요서, 요동을 거쳐 평양에 이르렀다고 하였다.⑨

  남한 학자 김철준(金哲竣)이 제기하기를, 동이 가운데 숙신족(肅愼族)은 원래 중국 화북 지구에서 살아오다가 그후 동이족은 화북으로부터 요녕을 거쳐 조선반도 대동강 일대까지 흘러 들어가 나라를 세웠는데 속칭 기자조선이라 하였다. 기자 혹은 기자 후손들은 처음 산동 방면으로 망명한 동이족으로서 그 후 동이족 특히 예맥족의 이동에 따라 기자신을 숭배하는 신앙도 조선반도로 전해지게 되었으며, 예맥계인 고구려 또한 기자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은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하여 상당히 강성했던 나라로서 당시 이 나라가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하나인 연(燕)나라를 맞받아 치려고(逆擊) 한 적도 있었다고 하였다.⑩

  남한 학자 윤내현(尹乃鉉)이 제기하기를, 고대에 기자국이 있었는데 원래 산서성(山西省)에 살았으며, 나중에 하남(河南) 산서(山西) 쪽으로 이동하였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뒤 하북성 난하 서쪽에 정착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왕에 이를 때까지 줄곧 거기에 살았으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에게 공벌을 당하여 바다로 달아나 한땅(韓地)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으로 불렀다.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왕 노관(盧绾)이 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을 패수(浿水)로 정하게 되었는 바, 조선은 바로 기자국이요, 패수는 곧 오늘날의 난하라는 것이다. 기자는 중국 경내에 정착했던 기자후국(箕子侯國)이지, 조선국의 왕이 아니며, 정권을 찬탈한 위만(衛滿)도 조선의 왕이 아닌데 중국 사적에서는 이미 난하 이동 조선 지구로 옮겨 들어간 기자를 조선의 기자로 쓴 것이라고 하였다.⑪



2.  해씨조선(解氏朝鮮) 등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대신해서 일컬어 진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남한 학자 최남선(崔南善)은 생각하기를, 고조선족은 "gai족"으로 단군(檀君)이 왕위에 오른 뒤 마침내 "gai-a-ji"로 불려졌는 바, 그 의미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기자의 발음과 서로 비슷하며, 난을 피해 고조선으로 도망해 온 중국 사람들이 바로 "gai족"의 선조를 부회하여 기자로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와 같이 일단 부회된 칭호를 피드백하여 사적 중에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기록된 것이나 "gai-a-ji조선"의 한자표기는 해씨조선(解氏朝鮮)이며, 따라서 기자조선을 고쳐서 해씨조선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해씨(解氏)의 후예는 오늘날의 기씨(奇氏)이니 "기씨조선(奇氏朝鮮)"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⑫

  남한 학자 정인보(鄭寅普)는 생각하기를, "기(箕)"자는 조선글 "검(儉)"자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요, "검(儉)"은 고조선 최고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니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다. 옛날의 "기(箕)" · "개(蓋)" · "해(海)"자는 모두 음이 같고, " 검(儉)" 혹은 "험(險)"의 음사(音寫)이니 기자조선은 마땅히 "검조선(儉朝鮮)"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⑬

  남한 학자 안재홍(安在鴻)은 생각하기를, 고조선어 가운데 "Ken", "Han"은 크다는 뜻이요, "Ji"의 의미는 수장. 대인이며, 그 전음은 "gi' "qi"인 바, 공후(公侯)라는 뜻이다. "Ken-qi" "Han-gi"는 한자를 사용하여 구태(仇台) · 근지(近支) · 한기(韓岐) · 신지(臣支)로 표기하였는 바, 한문으로 번역하면 대공(大公)이 되는만큼 고조선은 응당 대공조선(大公朝鮮)으로 불려져야 하며,중국 고문헌 가운데 곤지조선(昆支朝鮮) · 견지조선(遣指朝鮮) · 근지조선(近支朝鮮) 혹은 금경국(금경국) · 감지국(钳知國) · 건길국(鞯吉國) · 근시국(勤蓍國) 등 한자로 표기된 것은 이러한 국명이 중국 사람들에게는 어음이 비슷한 기자조선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다.⑭

  남한 학자 이병도(李丙燾)는 생각하기를, 고조선의 준왕은 성이 한(韓)이지 기(箕)씨 성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준왕이 위만의 침습을 받아 남으로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 한땅(韓地)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을 자처했다. 한왕(韓王)이란 한땅(韓地)의 왕이란 뜻이 아니라 한씨(韓氏) 성의 왕이란 말이다. 《잠부론(潛夫論)》에 기록하기를 옛날에 주선왕(周宣王) 때에도 한후(韓侯)가 있었으며 그 나라는 연(燕)나라에 가까웠다. 그후 한(韓)의 서쪽에도 한씨 성이 있었는데 위만에게 공벌을 당해 해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위만에게 공벌을 당해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던 준왕도 역씨 성씨가 한이며, 이런 때문에 준왕은 한준(韓準)이지 기준(箕準)은 아니며 따라서 응당 "한씨조선(韓氏朝鮮)"이라 해야 한다고 하였다.⑮

  남한 한자 김정배(金貞培)가 제기하기를, 무문토기와 청동기문화를 창조한 사람은 예맥족으로 이러한 문화는 시베리아 청동기와 초기철기문화로부터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아, 그 가운데는 중국문화적 요소가 결코 없으며 따라서 응당 기자조선은 "예맥조선(濊貊朝鮮)"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16



(三)  기자조선설에 대해 아직까지 정론이 없거나 혹은 회의론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세 종류가 있다.



1.  중국 학자 풍가승(馮家昇)이 제기하기를 고고학상으로는 기자가 조선을 열었다는 전설을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고고학상으로도 어떻게 그런 것이 있었는지 증명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라고 하였다.17

2.  북경대학 부교수인 양통방(楊通方)은 제시하기를 기자가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고고학 분야에서 아직까지 직접적인 실증을 얻지 못해 현재는 전설로 밖에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또  제기하기를, 관련이 있는 조선의 고고학 성과에 의해 증명된 바에 의하면 대략 기원전 10세기 무렵 고조선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진입하였고, 이런 시기에 발견된 문화재와 중국 요녕에서 발견된 것들은 그 형태와 제작기법이 일치하고 있으며, 전국시대의 연나라 명도전(明刀錢)이 조선 북부 각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어 많은 것은 한꺼번에 1천여 개에 달한다고 하는 바, 이는 중국과 고조선이 문화에 있어서 확실하게 연계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발해, 황해연안은 옛날 동이지역으로서 이들에게는 똑 같이 난생신화(卵生神話)를 가지고 있다. 상조가 멸망하자, 기자는 동이인이기 때문에 달아나서 동이지역인 조선으로 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18

3. 황염배(黃炎培)가 생각하기를, 《동사(東史》:(《조선사략(朝鮮史略)》을 가리킴)에 기자가 조선으로 다라나면서 5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특별히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기자를 조선에 봉한 일은 문자의 기록 외에는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있는 고적이 아직까지 없다. 바로 이런 때문에 일본의 시라도리(白鳥) 박사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기자를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현철(賢哲)로 여겨, 자기 가문의 문벌을 드높이기 위해 기자를 빌어 그 계보를 장식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논의는 핵심을 잃은 것같기도 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긴가민가 믿지를 못하는 것이니 스스로 반대되는 증거를 널리 구해야 할 것이나 이러한 증거를 얻기 전이라 하더라도 최대한 존의(存疑: 의문으로 남겨둔다는 뜻)에 붙여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독단(獨斷)과 맹목적 추종에 흘러 균형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四)  무왕이 봉한 기자조선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제멋대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 학자 이계(李季)가 제기하기를, 기자가 무왕이 은과 싸워 승리한 틈을 타서 은나라 백성 5천을 데리고 도피해 조선으로 가서 바로 나라를 세웠는 바, 이는 중국 고적상의 기록에서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은나라와 주나라와의 전쟁을 겪은 기간은 매우 짧지만 주(紂)의 군사 일부가 희생이 되자, 기자는 은나라의 태사(太師)로서 또 은나라 조정의 "세 사람의 어진 사람(三仁)"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강대한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패잔병과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 은나라 백생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갔던 것은 《조선사략(朝鮮史略)》에서 "중국인 5천 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헛된 말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기자는 오랜 동안 맥족(貊族)의 삶의 터전이었던 조선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한 반객위주(反客爲主: 주객이 전도됨)되어 성립된 나라에서 임금노릇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20 중국 학자 왕국유(王國維). 오택(吳澤). 이종무(李宗武), 대만 학자 이내양(李內揚), 일본 학자 임태보(林泰輔) 등도 모두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중국학자 김육불(金毓黻)이 제기하기를, 기자라는 이름은 《역경(易經)》에 처음 나오고 또 《좌전(左典)》에도 보이는데, 다시 《상서대전(尙書大典)》으로써 검증해 보면, 기자를 동쪽 조선에 봉한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몸소 그 땅을 밟았고 확실이 그러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봉해진 곳을 상고해 보면 오늘날의 압록강 우안의 일부분으로 생각되거나 혹은 그가 거느렸던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가 수봉(受封)하여 한 나라의 군왕이 된 이상 반드시 은나라의 유민들이 따라와서 함께 갔을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 동이예전(東夷濊傳)》의 기록에 의하면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조선으로 수만 구가 피해왔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은말의 혼란에 당하여 한족들이 난을 피해 동쪽으로 간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은나라가 망한 뒤 그 유민들과 동이가 결합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주나라 사람들은 은의 유민을 일컬어 "이(夷)"라고 했던 것이다. 기자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유독 조선으로 가게 된 것도 역시 그 족속이 평소에 동이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2 

  하얼빈 사대 동만륜(董萬倫)은 생각하기를, 무왕이 상을 이기고 기자가 구속된 것을 석방시켜주자, 기자는 고향인 요서 대릉하 상류 객좌현(喀左縣) 일대로 돌아 갔으나 그는 망국지민(亡國之民)이 되기를 원치않아 동쪽으로 요수를 건넜는데 은나라 백성으로서 따르는 자가 5천 명이었다고 하였다. 기자가 동쪽으로 옮겨간 지역에 도달해서 나라를 세웠는데 뒤늦게 무왕이 가봉(加封)을 하매, 역사에서 말하는 기자조선이며, 왕검성(王儉城)에 도읍을 하였는 바, 지금의 요양(遼陽)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여러 대를 거쳐 연나라의 위협을 받아 또다시 도성 왕검성을 동쪽으로 오늘날의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의 고적에 기록된 기씨조선의 국도 왕검성은 나중에 나라의 도읍지였던 평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제기하기를, 기자가 동쪽에 봉해진 뒤 서주(西周)의 후국(侯國) 가운데 하나로 되었는 바, 예전의 중국 고적 중에는 아직까지 기자가 당시 명확하게 조선후(朝鮮侯)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기자의 후손이 조선후"라는 기록은 있다고 하였다. 《위략(魏略)》에 기록하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미함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으로 되어 동쪽 땅을 약탈하고자 하므로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으로 자처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逆擊)하여 주왕실을 높이려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후도 연후(燕侯)와 마찬 가지로 주조(周朝)의 제후국의 일원이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나중에 전국시대에 이르러 칠웅(七雄)이 패권을 다투면서 제각기 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자, 조선후도 연나라를 본따 후를 고쳐 왕으로 일컫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23

  귀주 안순사전(安順師專) 구세서(邱世緖)가 제기하기를, 주나라 초기, 주왕실의 근친을 분봉한 외에 전통적인 귀족 가운데도 몇 사람이 제후로 봉해졌는데 기자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기자가 조선반도에 들어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조선은 당시 청동기시대로서 사유제와 서로 연관된 철기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원시사회에서 노예제사회로 가는 과도기인 군사민주제(軍事民主制) 단계에 있어 근본적으로 국가의 성격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자는 아직 조선에서 나라를 세웠던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24

  길림성 사회과학원부연구원 유영지(劉永智)가 제기하기를, 《고문상서(古文尙書) · 홍범(洪范)》이라는 기록에 "무왕이 은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주왕(紂王)인 수(受)를 죽이고 그의 아들 무강(武康)을 후사로 세운 뒤 기자를 데리고 호경으로 돌아와서 사관이 《홍범(洪范)》을 지었다(武王勝殷, 殺受, 立武康, 以箕子歸)"라고 하였는데 인용문에서 "이기자귀(以箕子歸)"를 "기자를 압송하여 은나라 서울 호경에 이른 것(押送箕子至鎬京)"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면 "기자가 달아나서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箕子走之朝鮮)"는 근거가 부정하는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상서(尙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증을 거친 뒤에 일치된 견해는 다음과 같이 《고문상서 · 홍범》 가운데의 이와 같은 말은 《상서(尙書)》에 원래 있는 글이 아니라 유흠(劉歆)이라는 사람이 공자의 이름을 가탁하여 《사기(史記) · 주본기(周本紀)》와 《사기(史記) · 송세가(宋世家)》에 근거해서 《상서(尙書) · 서(序)》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말을, 공자님께서 《상서(尙書)》를 편산(編刪)할 때 역사에서 일부 시기의 중요한 문장만을 단지 수록하였을 뿐 결코 서를 쓴 일도 없으며 더욱이 단독으로 《홍범》 편에서만 서문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기(史記)》의 사료에 근거해서 서문을 쓰게 된 이상, 《사기》의 원문의 뜻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이기자귀(以箕子歸)"라는 본래의 의미는 "기자가 돌아옴으로 인해서(因箕子歸)"라는 뜻으로서 이는 바로 기자가 달아나서 조선으로 갔다는 설명이 된다 할 것이다. 그는 또 제기하기를, 봉함을 받고서 홍범을 썼다고 하는 선후 관계의 문제는 단지 순서상으로 뒤바뀌었을 뿐, 기자가 달아나서 조선으로 갔다는 실질상의 내용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상서대전(尙書大典)》의 작자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나이가 90을 훨씬 지난 사람이 본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구두로 전수했다"라고 하는 바, 개별적인 문구상의 소루(疎漏) 혹은 당시의 죽간의 전도(轉倒)라든가 전초(傳抄)로 인해 생긴 착오는 면치 못할 것으로 된다. 사마천은 복생이 저술한 것을 잘 알고 있어 교정을 하였는 바, 곧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시켜 주었으나, 기자는 은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달아나서 조선으로 가버린 것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의 명현(名賢)이기 때문에 무왕은 그를 초청하여 호경으로 오도록 해서,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물었더니 기자는 《홍범(洪范)》을 진술하게 된 것이며, 무왕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한 나머지 기자에게 봉호(封號)를 더해 준 것이다.  

  유영지는 고고학 사료를 근거로 해서 제기하기를, 1973~1974년 요녕성 객좌현 북동촌에서 출토한 청동방정(靑銅方鼎) 상에 기후(기侯) 즉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은말주초에 기족의 지예(支裔)들이 연나라의 통제를 받고 있는 요녕지구에서 생활한 것이 확실함은 증명하여, 기자는 구금에서 풀려난 뒤에 연나라 영역인 기족 고지에 되돌아 왔으나, 그곳은 이미 소공(召公)에게 점거된 바 있어 다시 동쪽으로 조선으로 가게 된 것이며, 그래서 《회남자(淮南子) · 도덕훈(道德訓)》에  "섭나무(柴)는 기자의 문이다(柴, 箕子之門)"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 주석하기를 "주왕이 죽자, 기자는 도망하여 조선으로 가게 되게 그가 살던 옛 집은 텅비게 되었고 그래서 섭나무로 이를 보호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기자가 기족지구에 머물지 않고 조선으로 떠났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영지는 또 제기하기를, 《상서(尙書)》라고 하는 책 1권에는 원시자료가 3000여 편이나 된다. 복생이 《상서(尙書)》 숙독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상서대전(尙書大典)》은 몇몇 문헌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 역대 사가들로부터 양사(良史: 훌륭한 사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일컬어졌던 사마천은 《상서대전》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사료에 근거해서 교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조의 사가들이 "기자조선"을 날조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유영지는 제기하기를, 조선의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 박사는 비록 기자가 조선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전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인하고 있다. 조선에 기씨성(箕氏姓)을 가진 종족이 있는 이상, 이 기족(箕族)이 만약 기자의 후대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기자와 가까운 겨레의 지예(支裔)였을 것이며, 이것도 기자가 석방이 된 뒤에 오늘날의 하북 요녕의 기족지구를 거쳐서 직접 조선의 북부에 있는 기자족지역에 이르렀다는 가능성은 충분이 있다. 그는 또 제기하기를, 《사기탐원(史記探源)》에 기록된 바, 《사기(史記) · 주본기(周本紀)》에 "주나라가 천명을 받은 9년에는, 무왕이 필(畢)에서 상제를 지냈으며, 11년에는,  주왕을 벌하고 은나라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2년 뒤에 기자에게 천도(天道)를 물었다고 하였고, 《상서대전(尙書大典)》에 기록하기를, 무왕이 갇혀 있는 기자를 석방하였고……(기자)가 13년에 내조를 하매, 무왕은 그가 내조한 것을 틈을 타서 《홍범》을 물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용문은 기자가 풀려나서부터 《홈범》을 짓기까지는 3년간에 있었던 일이지 1년 내에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이 아니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바, 설사 1년 내라고 하더라도 기자가 두 장소를 왔다갔다 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24

  이계(李季)도 역시 제기하기를,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하여, "무왕이 주(紂)를 멸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와 호시를 바쳤으며, 강왕(康王) 때 숙신이 다시 왔다"고 하였는 바, 숙신은 기자조선 이북 혹은 이서에 있으면서도 숙신은 능히 먼 길을 와서 주나라 수도에 이르렀으니 기자도 당연히 도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고, 하물며 기자가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되었을 때 도성이 만약 요동에 있었다면 더욱 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25 (끝)


미주로 된 원문 주석 부분을 덧붙여 이 방면의 연구를 위한 독자들의 편의에 공하고자 한다.다만, 이 편집기로는 원호 특수문자가 15까지 밖에 지원되지 않아 16부터는 원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①③⑪⑫⑬⑭⑮  尹乃鉉, 《箕子新考》, 載 《韓國史硏究》 第41期12, 42, 9-12页。

②  延邊大學朴眞奭, 《关于古朝鲜的几个问题》,载朝鲜史研究讯 1981年第3期。

④⑧  朝鲜社会科学历史研究所 著 《朝鲜全史》 第2卷,1979年朝文版第25,26-27页。

⑤  日本学者今西龙,《箕子朝鲜考》, 载支那学第2卷,大正 11年(1922)。

⑥  南韩学者崔南善,《崔南善全集》第2卷,玄岩社,1973年版第366-374页(原载《怪奇》月刊第2号,1929年)。

⑦  北京大学周一良,《亚洲各国古代史》上册,高等教育出版社1958年2月,第56-57页。

⑨  南韩学者千贯宇, 《箕子考》,载东方学志 15辑。

⑩  千贯宇遍 《韩国上古史争点》, 一潮阁出版社 1975年,第193页,南韩学者金哲峻见解。

16.  同第15页并参见第155页, 南韩学者金贞培的见解。

17.  中国学者冯家升,《日人在东北的考古》, 载燕京大学学报1933年,第19期。

18.  周一良主编 《中外文化交流史》,河南人民出版社937年,第350页,杨通方撰写的“源远流长的中朝文化交流篇。

19.  中国学者黄炎培, 《朝鲜》,商务出版社1927年,第36页及60页。

20. 25.  中国学者李季,《二千年中日关系发展史》,学用社1938年11月,第147-148页及该书序言第22页。

21.  中国学者金毓黻, 《东北通史》上编,社会科学战线杂志社1930年翻印本,第54-57页。

22.  哈尔滨师范大学董万伦,《东北史纲要》,黑龙人民出版社1937年,第23-25页。

23.  邱世绪, 《古朝鲜探索》,贵州安顺师专学报,1983年第1期, 第27-32页。

24.  吉林省社会科学院刘永智, 《箕子朝鲜不应任意否定》, 载史界史论文集 1981年第1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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