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과 돌궐(突闕) 구성(九姓)
○ 오늘은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던 고구려(高句驪)와 연계(連繫)되는 지명(地名)과 돌궐 구성(九姓)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십시다.
● 회원(懷遠)현 또는 회원(懷遠)진, 또는 회원(懷遠)에 대한 사서(史書)를 보면 ;
(1)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구려본기 제 8 / 영양왕
《二十五年,春二月,帝詔百寮,議伐高句麗,數日無敢言.詔復徵天下兵,百道俱進. : 25년 봄 2월, (수)양제(煬帝)가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고구려(高句麗)를 공격(攻擊)하는 문제를 의논케 했으나, 수일(數日)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煬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다시 천하(天下)군사를 소집하여, 여러 길로 일시에 나아가게 하였다. 秋七月,車駕次懷遠鎭.時,天下已亂,所徵兵多失期不至,吾國亦困弊.來護兒至卑奢城,我兵逆戰.護兒擊克之,將趣平壤. : 가을 7월, 어가(御駕)가 회원(懷遠)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천하(天下)가 이미 혼란하여, 징집한 군사(軍士)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아국(我國 : 고구려)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래 호아(來 護 兒 : 수나라 장수)가 비사 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군사가 공격을 받고 나아가 싸웠으나, 래 호아(來 護 兒)가 승리하자, 평양(平壤)으로 향하려 하였다. 王懼,遣使乞降,因送斛斯政.帝大悅,遣使持節,召護兒還.八月,帝自懷遠鎭班師. :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 사정(斛 斯 政)을 돌려보냈다. 제(帝)가 크게 기뻐하여, 신표(信標)을 가진 사신을 보내어, 래 호아(來 護 兒)를 소환하였다. 8월, 제(帝)가 회원(懷遠)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冬十月,帝還西京,以我使者及斛斯政,告太廟,仍徵王入朝,王竟不從.勑將帥嚴裝,更圖後擧,竟不果行.: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에 돌아가, 우리 사신과 곡 사정(斛 斯 政)에 대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고구려)에게 입조(入朝)하라 하였으나, 왕(고구려)이 끝내 듣지 않았다.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재차 거사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 곡 사정 (斛 斯 政) / 수(隋)의 병부시랑으로 <양 현감>의 난에 참여했다가 고구려(高句驪)로 피신(避身)하였으나,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高句驪) 침략(侵略)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高句驪)는 그를 수양제(隋煬帝)에게 돌려보낸다. 곡 사정 (斛 斯 政)은 수양제(隋煬帝)에게 처참한 형벌(刑罰)을 받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 백과사전 / 양 현감 (楊 玄 感 ? ~ 613년) : 『수(隋) 조정에서 절대적인 권세를 떨쳤던 재상 양소(楊素)의 아들로 그의 작위를 세습(世襲)받아 초국 공(楚 國 公)이 되었으며, 영주자사(靈 州 刺 使),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대업 9년 수양제(隋 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여 양(黎 陽)에 주둔하여, 군량운반을 감독하라는 명령을 받으나, 613년, 양제(煬帝)가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었을 때, 동도(東 都) 낙양 근처의 여 양(黎 陽)에서 이 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10만 여명을 이끌고 낙양(洛 陽)을 포위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양제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동생 양적선(楊 積 善)에게 자신을 죽일 것을 명하고 그의 손에 죽었다. 그의 시체는 낙양 거리에서 3일 동안 효수된 채로 방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보장왕(寶藏王)
《四年,春正月,李世勣軍,至幽州.三月,帝至定州,謂侍臣曰:『遼東本中國之地,隋氏四出師,而不能得.朕今東征,欲爲中國報子弟之讎,高句麗雪君父之恥耳.且方隅大定,唯此未平,故及朕之未老,用士大夫餘力,以取之.』 : 4년, 봄 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이르렀다. 3월, 제(帝)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여, 시위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동(遼東)은 본래 중국(中國)의 땅인데, 수씨(隋氏 : 수나라를 말함)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얻지 못하였다. 짐(朕)이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中國)을 위해서는 전사(戰死)한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죽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유일하게 평정되지 않았으니, 짐(朕)이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의 여력을 빌어, 이곳을 취하려는 것이다.』라 하였다. 帝發定州,親佩弓矢,手結雨衣於鞍後.李世勣軍發柳城,多張形勢,若出懷遠鎭者,而潛師北趣甬道,出我不意. : 제(帝)가 정주(定州)를 출발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懷遠)진을 향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몰래 북쪽 길로 나아가, 우리(고구려)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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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치통감181권 / 隋 煬 皇 帝 / 大 業 八 年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於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右翊衛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右御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御衛虎賁郎將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좌 효 위 대장군 ‘형 원 항’은 요동도로, 우익위장군 ‘설 세웅’은 옥저도로, 우 둔위장군 ‘신 세웅’은 현토도로, 우 어 위 장군 ‘장근’은 양평도로, 우무(위)장군 ‘조 효 재’는 갈 석 도로, 탁 군 태수 검교 좌 무위장군 ‘최 홍 철’은 수성도로, 검교 우 어 위 호 분 랑 장 ‘위 문승’은 증지도로 나가는데, 모두 압록서 서쪽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述等兵自瀘河,懷遠二鎮,人馬皆給百日糧,又給排甲,槍槊並衣資,戎具,火幕,人別三石已上 : 술(우문술)등은 병사와 함께 노하. 회원 두 진(鎭)에서, 병사와 말에게 모두 백일분의 양식, 또 비갑(排 甲), 창 삭(槍 槊 : 자루가 1장 8척 정도 되는 창) 및 옷, 병기. 화 막(火幕)등을 지급하였는데, 병사별로 세 섬 이상이 되었다.》
大 業 十 年 : 《 秋, 七 月, 癸 丑, 車 駕 次 懷 遠 鎮. : 가을 7월, 거가(車駕)가 회원진에 행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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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보다시피 조선사(朝鮮史)에도, 대륙 사(大陸史)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 지명이 “회원(懷遠)진”이다. 『회 원 진(懷 遠 鎭)』은 『회 원 현(懷遠縣)』으로써 영하와 섬서 변경(邊境)에 있었으며, 옛 부평(富平)현의 땅을 말한다. 대륙사의 기록으로 보면, 북지군(北地郡)의 땅으로 황하(黃河)의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다.
● 《舊唐書 志 第 十 八 地 理 一>를 보면 “령 주 대도독부”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 ;<靈 州 大 都 督 府> : 隋靈武郡.武德元年,改為靈州總管府,領回樂,弘靜,懷遠,靈武,鳴沙五縣. 二年,以鳴沙縣屬西會州.貞觀四年,於回樂縣置回,環二州,並屬靈武都督府.十三年,廢回,環二州,靈州都督入靈,填二州。二十年,鐵勒歸附,於州界置皋蘭,高麗,祁連三州,並屬靈州都督府.永徽元年,廢皋蘭等三州.調露元年,又置魯,麗,塞,含,依,契等六州,總為六胡州. : <령 주 대 도 독 부> : 수(隋)의 “령 무(靈武)”군이다. 무덕(武德) 원년에 “령 주 (靈 州)”총관부로 고치고, <회 락. 홍정. 회원. 령 무. 명사> 5 현을 령으로 하였다. 2 년에 “명사 현”을 “서 회주(西會州)”에 속하게 하였다. 정관(貞觀) 4 년에, “회 락 현”에 “회주(回州). 환주(環州)” 2 주를 설치하고, 나란히 “령 무 도독부”에 속하게 했다. 13년, “회주(回州). 환주”(環州)의 두 주를 폐하고, “령 주(靈 州)와 전주(塡州)” 2 주는 “령 주 (靈 州)도독”에 편입하였다. 20년에, 철륵(鐵勒)이 귀부(歸附)하자, 주(州) 지경에 “고란 주(皐蘭州). 고려 주(高麗州). 기련 주(祁連州)”를 설치하고, 나란히 령 주(靈 州)도독부에 속하게 하였다. 영 휘 6년에 고란(皐蘭)등 3 주(州)를 폐하였다. 또 노(魯)주. 려(麗)주. 새(塞)주. 함(含)주. 의(依)주. 글(契)주등 6 주를 설치하였는데, 이 모두는 여섯 개의 호주 (胡 州 : 오랑캐 마을)였다.》
➊ 위의 글에서, “령 주 대 도 독 부(靈 州 大 都 督 府)”의 지경은 대단히 광활했다고 보아진다. 현 지형으로 보면, 영하(寧夏)성을 흐르는 황하(黃河)의 서북(西北)안 지대로 “철륵(鐵勒)”이 귀부했다고 하니, 그 지경은 황하(黃河)의 서쪽과 서북쪽 내, 외몽고 지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헷갈려 하는 것은 주현(州縣)을 너무 자주 바꾸다보니 어느 곳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20년【정관 20년은 647년이다.】에, 철륵(鐵勒)이 의지해오자, 지경의 경계지역에 “고란 주(皐蘭州). 고려 주(高麗州). 기련 주(祁連州)”등의 3 주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지명으로 보면, 기련 주(祁連州)는 기련 산 주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란(皐蘭)이나 고려(高麗)주』는 도대체 왜 이곳에 설치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사서에서 설명하기를,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驪)를 말한다.』 이때 고려(高麗)는 막강(莫强)한 힘으로 주위의 나라들을 힘으로 압박(壓迫)하며, 밀어붙일 때이다. 이러한 시절에 당(唐) 태종은 반도(半島) 고구려(高句驪) 땅으로부터 5-7천리쯤 서쪽지방에 “고려(高麗)”주를 설치했다?
➋ 수당(隋唐)!!!!!!!!!이들은 고구려(高句驪)와 백년전쟁(百年戰爭)을 치룬 당사자(當事者)들이다. 수양제(隋煬帝)시절, 그들은 황도(皇都)를 떠나, 고구려(高句驪) 국경(國境)으로 향하던 중 “회원(懷遠)진” 에서 잠시 군영(軍營)을 차리고, 병사(兵士)들과 말들을 쉬게 하고, 이곳에서 마지막 전략회의를 마치면서 병사(兵士)들에게 식량(食糧)과 모든 군사용 무기(武器)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이곳이 고구려(高句驪)로 가는 길목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 중요한 전략(戰略) 거점(據點)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 땅 『회 원 진 (懷 遠 鎭)』이 어떻게 대륙의 서북방 황하 서북(西北)안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도 『반도조선의 회원 진(懷遠鎭)과 대륙의 회원 진(懷遠鎭)이 존재한다.』고 설명할까? 반도사관(半島史觀)이나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조선사(朝鮮史)를 설명할 때, 불가능한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꼭 이분법을 적용시켜, 조선(朝鮮)이나 만주(滿洲)의 봉천(奉天)과 대륙(大陸)의 섬서(陝西) 봉천(奉天)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論理)는 원전(原典)과 사실적 역사관을 무시한 『창작(創作)의 역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조선사(朝鮮史)의 망국사관(亡國史觀)이다.
➌ 또 중요한 것은 “철륵【 鐵勒 : 칙 륵(勅勒)이라고도 하며, 후대의 회골(回鶻)이라고도 한다.】” 이 귀부【歸附 : 스스로 찾아와서 복종하는 것】하자, 이들이 있던 곳에 “고려(高麗)”주를 설치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철륵(鐵勒)』은 『고려(高麗 : 고구려)』라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상황, 어떤 사건 때문에 돌궐(突闕)이 당 태종에게 귀부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것은 현재 알 수 없으나, 이들이 복속(復屬)을 자처하자, 이곳에 “고려(高麗 : 고구려)”마을을 설치(設置)했다는 것은 이들이 “고려(高麗 : 고구려)의 일원이었다.” 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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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元初廢,復置東皋蘭,燕然,燕山,雞田,雞鹿,燭龍等六州,並寄靈州界,屬靈州都督府.天寶元年,改靈州為靈武郡.至德元年七月,肅宗即位於靈武,升為大都督府.乾元元年,復為靈州.舊領縣五,戶四千六百四十,口二萬一千四百六十二.天寶領縣六,戶一萬一千四百五十六,口五萬三千一百六十三.在京師西北一千二百五十裡,至東都二千里. : 개원(開元)초에 폐하였는데, 동고란(東皐蘭). 연연(燕然). 연산(燕山). 계전(鷄田). 계 록(鷄鹿). 촉 룡(燭龍) 등 6 주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령 주(靈 州)지경에 나란히 붙였다. 천보(天寶)원년, 령 주(靈 州)를 령 무(靈武)군으로 고쳤다. 지덕(至德) 원년 7년, 숙종(肅宗)이 령 무(靈武)에서 즉위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시켰다. 건원(乾元) 원년에, 다시 령 주(靈 州)로 하였는데, 옛 령이 다섯 현(縣)이었다. 4,640호(戶)에 인구가 21,462명이었다. 천보(天寶)때에는 영 현(縣)이 여섯으로, 11,456호에, 53,163 인이었다. 경사(京師) 서북(西北) 1,250리이며, 동도(東都)로부터 2,000 리에 이른다.》
雞 鹿 州 : 寄 在 回 樂 縣 界, 突 厥 九 姓 部 落 所 處. - 계 록 주 : ‘회 낙 현’ 지경에 붙였는데, 돌궐 9 성 부락이 살고 있는 곳이다.
雞 田 州 : 寄 在 回 樂 縣 界, 突 厥 九 姓 部 落 所 處. - 계 전 주 : ‘회 낙 현’ 지경에 붙였는데, 돌궐 9 성 부락이 살고 있는 곳이다.
東 皋 蘭 州 : 寄 在 鳴 沙 界, 九 姓 所 處. - 동 고 란 주 : 명사(鳴沙)현 지경에 붙였는데, 구성(九姓)이 살고 있는 곳이다.
燕 山 州 : 在 溫 池 縣 界, 亦 九 姓 所 處. - 연 산 주 : 온지(溫池)현 지경에 붙였는데, 역시 구성(九姓)이 살고 있는 곳이다. 【연산(燕山)주는 연산(燕山)이 있는 곳이라는 것에 유의】
燭 龍 州 在 溫 池 界, 亦 九 姓 所 處. - 촉 룡 주는 온지(溫池)현 지경으로, 역시 구성(九姓)이 살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돌궐(突闕) 구성(九姓)의 정체는 무엇일까>가 중요한 포인트다. 이는 곧 『회골(回鶻)과 돌궐(突 厥)을 가리키는 말이다.』
➊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33 설인귀(薛仁貴) 편을 보면 ; 《尋又領兵擊九姓突厥於天山.中略.時九姓有眾十餘萬.中略.令驍健數十人逆來挑戰,仁貴發三矢射殺三人,自餘一時下馬請降.仁貴恐為後患,並坑殺之.更就磧北安撫餘眾,擒其偽葉護兄弟三人而還.軍中歌曰:將軍三箭定天山,戰士長歌入漢關.九姓自此衰弱,不復更為邊患. : 또 령 병(領 兵)으로 천산(天山)에서 구성(九姓). 돌궐(突 厥)을 쳤다. (중략). 이때 구성(九姓)은 십여만 무리가 있었다. (중략). 명받은 날래고 용감한 건아 십 수인이 역으로 도전하여 오자, 설인귀는 3개의 화살로 3사람의 전사를 사살하니, 나머지 무리들이 일시 말에서 내려 항복하자, 설인귀는 후환을 두려워하여, 나란히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재차 적 북【磧 北 : 천산산맥의 북쪽지방】의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安 撫)하고, 속인 엽호(葉護) 삼 형제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군중에서 노래하기를, 장군의 세 개의 화살대가 천산을 평정하였네, 하면서 전사(戰士)들은 긴 노래를 부르면서 한관(漢 關 : 한나라 관 곧 당나라의 진지)으로 들어왔다. 구성(九 姓)은 이것으로 쇠약해져, 다시 변경의 우환이 되지 않았다. 》하였으며,
➋ 또《卿又北伐九姓,東擊高麗.漠北.遼東咸遵聲敎者,竝卿之力也.卿雖有過,豈可相忘?有人云卿烏海城下自不擊賊,致使失利,朕所恨者,唯此事耳.今西邊不靜,瓜.沙路絶,卿豈可高枕鄕邑,不爲朕指揮耶.中略. : 경(설인귀)은 또 북쪽의 구성(九姓)을 토벌하고, ➡동쪽으로 고구려. 막북. 요동을 치니, 모두 성교를 따르는 것은, 모두 그대의 힘이다. 경(설인귀)에게 비록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경(설인귀)이 오해 성【烏 海 城 : 청해(靑海)성의 청해 남쪽주변에 있음】 아래에서 적들을 공격하지 않아, 이득을 잃어버려 짐 (朕 : 당 황제) 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오직 이 일이라고 한다. 지금 서쪽 변방이 불안정하고, 과주로(瓜 州 路)와 사주로(沙 州 路)는 길이 끊어졌으니, 그대는 어찌 고향에서 베개를 높이 베고 지내며, 짐(朕)의 지휘를 받지 않겠는가? 》하였다.
➌ 당시 구성(九 姓)은 『강(康)·조(曹)·석(石)·미(米)·하(何)·심(芯)·무지(戊 地)·사(史)·안(安)』성(姓)을 말한다고 하는데, 한 두 성(姓)은 학자마다 다른 것도 있다. 또한 『安 國. 何 國. 曹 國. 史 國. 米 國. 穆 國. 石 國』등에서 살아가는 종족(種族)들을 말하기도 한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성돌궐(九 姓 突 厥)』이라고 하는데, 회골(回鶻)도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현 신강(新疆)성 천산북로의 서쪽지방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투르크메니스탄등지의 <흑해. 카스피 해. 발 하 수 호. 아랄 해> 사이에서 살아가던 종족들이었다. (이것은 그 때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이들 구성(九 姓)을 <소그드인>들이라고도 설명하며, 파미르(총령)의 서쪽지방에 사는 종족(種族)들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➍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로 “호(胡)”이며, “호인(胡人)”이라고 하는 종족들이며, 이들이 바로 본래의 몽고족(蒙古族)이다.『몽고(蒙古)인의 생김새는 신체가 크고, 잔인하며, 더럽고, 청안(靑眼=색목인)이었으며, 구레 나루와 수염이 붉은 색이었으며, 원숭이와 같은 형상이었다.』 고 기록해 놓고 있다. 몽고(蒙古)인과 대비달자 곧 러시아인과는 넓은 의미로 보면 같은 종족(種族)들이다.
➡ 따라서 위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된 회원(懷遠)진 또는 회원 현(懷遠縣) 등은 최소한 “신강(新疆)지방” 쯤 에나 있어야 할 지명(地名)이다.
➡ 이는 곧 당시 “수당(隋唐)이란 나라”는 이곳의 서(西)쪽과 서남(西南)지방에 있어야 역사서의 기록에 부합된다.
➎ 위 본문(本文) 해설본과 원문(原文) 편에,
《居于烏桓之北.與畏羅,乃蠻,九姓,回鶻故城,和林接壤. : 오환(烏桓)의 북쪽에 살며, 내만(乃 蠻)ㆍ외라(畏 羅)ㆍ구성(九 姓)ㆍ회골(回鶻) 고성(故 城). 화림(和 林)과 땅이 접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옛 역사서(歷史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사(朝鮮史)”를 재구성해 보면, 『선비(鮮卑)족인 오환(烏桓)과 똑같은 선비(鮮卑)족 모용(慕容)씨는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되었으니, 그 백성(百姓)과 땅은 고구려(高句驪)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땅은 대륙(大陸)의 최 서쪽 신강(新疆)성의 서쪽일부까지였다.』고 볼 수 있다. 【오환(烏桓)이 한 참 흥성(興盛)할 때는 후한(後漢)시절이다. 이땐 고구려(高句驪)도 흥성(興盛)하여 결국 오환(烏桓)은 고구려(高句驪)에 흡수(吸收)되었다.】
2011년 08월 2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