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대학교수 망언 "일본 총독부가 한글 가르쳤다"-머니투데이 배소진 인턴기자 2010.08.19 14:57>라는 기사제목으로 18일자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에 타쿠쇼쿠대학(拓殖大學) 객원교수 후지오카 노부카츠의 '일본이 한글을 학교에서 가르쳤다'는 글을 인용했다.
또한 “15세기에 발명된 한글을 재발견하고, 일본의 한자가 섞인 문장을 본떠 한자와 한글을 혼합한 문장을 고안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주장했으며,
또 "조선총독부가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칠 교과서를 준비하고, 일본이 세운 5200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말을 빼앗기는커녕 조선인들이 모국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문자를 정비했다"고도 주장했다.~~ 는 기사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년 1월 10일 - 1901년 2월 3일) 는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이며, 또한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 유길준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김옥균과도 관계가 있다. 그의 행적은 현재 나와 있는 많은 자료에서 참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화기의 유길준의 스승이라.. 어떤 관계가 있기에....
위의 기사대로라면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의 한글을 재조합하여 국한문 혼용체를 만들었으며 조선총독부가 그것을 기초로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교육시켰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글이 정립되기 전에 국한문 혼용체의 운용을 유키치가 정립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개화기 교과서( 한문, 국한문 혼용,한글) 이 시기에 다량으로 출판된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진실이던 거짓이던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인테넷에 있는 백과사전에서 유길준을 검색하면 많은 자료들이 나온다.
그중에 유키치와 관련된 많은 부분도 있다. 한번 인용해 보자
.......... 유길준은 1881년 어윤중을 따라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접한 서양문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1883년엔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한 외교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 보빙사는 2개월간 미 대륙을 횡단한 뒤 귀국했지만 민영익의 권고로 유길준 혼자 미국에 남아 1년 반 동안 고교 과정을 밟았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유럽에 들러 1년을 더 보냈다. <서유견문>은 그 결과물이다.
<서유견문>은 1895년 4월1일 일본 고쥰샤에서 국한문혼용체로 나왔다. 고쥰샤는 일본의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출판사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쓰면서 후쿠자와의 <서양사정>(1866)을 참고했다. 다만 <서양사정>이 일본에서 수십만부 팔렸다면, 자비로 1000부만 찍은 <서유견문>은 조선에서 많이 팔리지 못했다.
[西遊見聞]
1895년 일본 도쿄[東京] 교순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냈다. 유길준은 1883년(고종 20) 사절단으로 미국에 건너가 E. S. 모스 박사의 주선으로 메사추세츠 주의 더머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1885년 미국을 출발해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했다. 이때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으로 전2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서양의 역사·지리·산업·정치·풍속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국한문혼용체로 근대 언문일치 문장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82년 7월 23일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약 3개월 뒤인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여야의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 그는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1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박영효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한동안 외아문주사를 지내고, 박영효의 부탁으로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으나 여의치 않았다. 곧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의 수원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그 부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4개월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의 원고를 썼고, 1895년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 었다.
1895년 7월 반역음모사건으로 박영효가 해외로 망명하고 10월 8일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난 뒤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단발령 공포로 춘천·원주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함에 따라 서울을 지키는 군대가 대부분 지방에 내려가고,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저서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영법로토(영국-프랑스-러시아-터키) 제국 가리미아(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노동야학독본》《대한문전(大韓文典)》《구당시초(矩堂詩抄)》《구당선생집》
《세계대세편》《정치학》《평화광복책》《이태리 독립전사》《파란(波蘭) 쇠망전사》
《구당서간집》《서유견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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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치와 유길준은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혹시 한사람을 분리하였을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국한문 혼용체의 선구적인 글이라면 유키치의 한자와 한글 혼합문장을 고안하였다는 사실이 맞을까?
유키치도 서구의 유람과 여행을 하였고 유길준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 나와 있다. 유길준이 짧은 기간의 여행으로 서양사를 저술할 정도로 언어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유길준의 저서중에 《보로사국(프로이센) 후례대익(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영법로토(영국-프랑스-러시아-터키) 제국 가리미아(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가 있는데 혹시 이곳과 관련이 없을까?
많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