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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훈민정음(訓民正音) 이전(以前)에 우리의 ‘고유문자’가 있었겠는가?”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9.21|조회수987 목록 댓글 0

좌계 (2011-09-14 16:30:31, Hit : 79, Vote : 3
  ‘가림토’ 여오문(旅獒文)과 <訓民正音圖解叙>


“훈민정음(訓民正音) 이전(以前)에 우리의 ‘고유문자’가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는 “단군세기(檀君世紀) 3세(世) 단군 가륵(嘉勒)시절에 을보륵(乙普勒)을 통해서 그동안 배달국(倍達國)을 통해서 다양한 정음(正音)표시방법을 정리하게 하여, 정음(正音)38자를 찬술(撰述)하게 하였다.”라는 기록과 관련해서 논란(論難)이 많습니다.

일단 을보륵(乙普勒)에게 “정음(正音)체계를 바로잡으라.”는 명을 내린 단군세기(檀君世紀) 원문을 보면, 그 당시(當時)의 시속(時俗)에 대해서 아래의 [1]문단 부분에서 매우 특이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 원문(原文)
[1] 庚子二年 時俗尙不一方言 相殊 雖有象形表意之眞書 十家之邑語多不通 百里之國字難相解
: 경자(更子)2년(B.C.2181년)에 시속(時俗)이 “언어(言語)를 ‘한 지방(地方)’(=일방(一方))의 언어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숭상(崇尙)하였기에, 비록 상형(象形)하고 표의(表意)하는 진서(眞書)가 있다고 치더라도, (언어(言語)자체는) 서로 다르게(=상수(相殊)) 표현하였으므로, ‘열 집(=十家)을 단위’로 하는 읍(邑)들의 언어(言語)들과 ‘백리(百里)를 단위’로 하는 국(國)들의 글자들이 서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2] 於是命三郞 乙普勒讚正音 三十八字 是爲加臨土 其文曰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命)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밝히게 하고(=찬(讚))’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일컽게 하였으니, 그 글자는 왈(曰)....

이상하게도 위 문장을 읽을 때에, [1]부분을 정확히 해석(解釋)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림토(加臨土)에 대해서는 오해(誤解)가 많은 것입니다.

단군 3세(世)때의 시속(時俗)은 다양한 언어(言語)들이 공존(共存)하고 있을 때에, 이를 ‘한 지방(地方)의 언어(言語)’를 중심으로 해서 강제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오히려 ‘언어의 다양성’을 그대로 두는 것을 숭상(崇尙)하였다는 것이 시속상불일방언(時俗尙不一方言)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발음기호-문자’ - 이른바 정음(正音)문자가 “을보륵(乙普勒) 이전(以前)에도 있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위 문단 [1]을 보면 “있었다.”고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즉 “한 지방의 언어체계를 중심으로 강제적 통합을 하지않음을 숭상하는(時俗尙不一方言)”이란 말 다음에 상수(相殊)란 문구(文句)가 나오는데, 이는 “서로가 특수(特殊)한 발음기호 문자(=정음(正音))를 썼음”을 나타내는 문구(文句)입니다.
그다음 상형(象形)표의(表意) 문자(文字)는 단지 보조(輔助)로써 곁들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음기호 문자 - 이른바 정음(正音)체계가 통일(統一)되지 않고, 다양하게 존재한 이유는 각 언어(言語)마다 획일(劃一)된 ‘발음기호문자’로써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음가(音價)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1]문장을 해석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相殊 (*)雖有象形表意之眞書(*) 十家之邑語多不通 百里之國字難相解>에서 (*)雖有象形表意之眞書(*)가 삽입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本文)은 어디까지나 <相殊 十家之邑語多不通 百里之國字難相解>라는 것입니다.

이는 “‘열집’을 단위로 하는 읍(邑)의 언어>가 달랐다.(相殊 十家之邑語多不通)”라는 말과 ‘발음문자기호 -정음(正音)문자체계’가 “백리(百里)를 단위로 하는 나라마다 서로 이해하기에 다른 문자를 썼다(相殊 百里之國字難相解)”를 통합해서 맨 앞에 “서로 달랐다(相殊)”는 것을 공통적으로 뽑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집 마다 단위로 한 읍(邑)“이란 표현이 가능한 것은 고조선(古朝鮮)의 피라미드(pyramid)에- 좌계는 이를 서안(西安)피라미드로 보고, 이를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우리 사서(史書)에 기재(記載)하고 있다고 봅니다. - 참배(參拜)하러온 사람들이 들리는 여관(旅館)들이 열집 단위로 여로(旅路)에 <하루거리>마다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읍(邑)으로 삼았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집트(Egypt)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하루에 100리를 여행한다고 할 때에, 100리마다 ‘이집트(Egypt)언어를 사용하는 읍(邑)’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림토(加臨土)는 발음기호문자-언어인 정음(正音)언어로써 환국(桓國)-배달국(倍達國)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있었는데, 이를 통합해서 표현하는 방식으로써 고조선 3세 단군때에 정리(整理)된 것이지, 결코 ‘최초의 발음기호 문자’ - 이른바 정음(正音)언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정음(正音)문자 - <발음기호 문자>가 어찌 사용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인터넷(Internet)을 찾아보니 “훈민정음언해[신경준] 훈민정음 이전에도 고대문자 있었다.”라는 제목이 있어서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여암(旅菴)선생께서 ‘훈민정음 이전에 사용한 정음(正音)문자에 대해서 기술한 내용은 “빠져”있읍니다.

(*) “훈민정음언해[신경준] 훈민정음 이전에도 고대문자 있었다.”에 정음(正音) 이야기가 빠져있음
http://cafe.daum.net/who.am.i/GAj0/127?docid=1CrcY|GAj0|127|20110309222746&q=%BF%A9%BE%CF%20%B0%ED%C0%AF%B9%AE%C0%DA

다행히 우리 선박(船舶)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서 여암전서(旅菴全書)를 구입(購入)하였기에, 여암(旅菴)선생께서 훈민정음 이전의 우리의 정음(正音)체계에 대한 문자(文字)에 대해서 기술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에 <여암(旅菴)선생의 훈민정음도해서(訓民正音圖解叙) 전문(全文)>을 옮기고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훈민정음도해서(訓民正音圖解叙) 전문(全文)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
: 동방(東方)에 옛부터 민속(民俗)에서 사용하는 문자(文字)가 있었는데, (한 지방(地方)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수(數))’이 없고, 형태화(=형(形))하는 법도가 없어서 한 지방(地方)에서의 언어로써는 부족하였고, 한 지방(地方)에서 (문자(文字)로)사용하기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해설(解說)]
위 문장(文章)을 해석할 때에는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에서 (*)~(*)부분이 삽입구(揷入句)입니다.
삽입구를 빼고 해석하면, “동방(東方)에는 옛적부터 민속(民俗)에서 사용하는 문자(文字)가 있었는데, ‘한 지방(地方)의 말(言)이나, 한 지방의 문자(文字)로써 사용하기에는 부족(不足)하였다.”가 가장 기본적인 뜻입니다.

이 말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기록된 가림토(加臨土)라는 것이 한국어(韓國語)를 표현하는 용도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지(言只)에 ‘발음기호 문자’를 띄워놓고, 이를 보면서, ‘쌍방향으로 언어(言語)를 빨리 학습(學習)하려는 용도’로써 사용되었음을 이야기 하느 것입니다.  영어의 <coffee>를 “커피”로 써놓고, 발음기호(發音記號)를 학습키 위해서 사용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삽입구(揷入句)로 들어간 말 중에서 기수불비(其數不備)말의 해석은 “문자(文字)의 숫자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는 “뾰죽한 수(數)가 없다.”고 할 때의 수(數) - 즉  ‘구체적인 방법(=수(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가림토(加臨土)라는 것은 처음부터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의 참배객과 대화하기 위해서 ‘외국어(外國語)음가(音價)’를 표현하는 것으로 제정되었지, 순수한 고조선(古朝鮮) 언어(言語)을 발음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제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正統丙寅. 我
: 정통(正統) 병인(丙寅) [A.D1446 세종 28년)에 우리..

[해설(解說)]
훈민정음도해서(訓民正音圖解叙) 원문(原文)을  보면, 우리를 의미하는 아(我)란 글자 다음에, 아무런 글자가 없이, 그 다음 문단으로 껑충 뛰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쓰는 이유는 그 다음 단어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왕(王) 앞에 감히 다른 문장이 앞에서게 할수가 없기 때문에, 여암(旅菴)선생께서는 신하(臣下)된 도리(道理)를 다해서 예법(禮法)어린 문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 본문(本文)에 보면, 성인(聖人)이란 용어가 나오고 있는데, 이 역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성인(聖人)이란 용어를 쓸 경우는 그냥 줄을 바꾸지 않고 써도 되는 편리함도 있는 것입니다.

世宗大王 製訓民正音 其例 取半切之義 其象 用交易變易加一倍之法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지으셨으니, 사용하는 예(例)는 반절(半切)의 내용(=의(義))을 취하였고, 그 모양은 주역(周易)의 교역(交易)함에서 변역(變易)이 (소성괘(小成卦)를 )곱졸로 하는 것의 법도를 활용하였다.

其文 點畵甚簡 而淸濁闢翕初中終音聲 燦然具著 如一影子 其爲字不多 而其爲用之周 書之甚便.
: 그 문장(文章)을 이룸은 ‘점찍고 그리기’(점화(點畵))에 심(甚)히 간단하여서, 청(淸)하고 탁(濁)함을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을 ‘열어서 합침(=벽흡(闢翕)’으로써 찬연(燦然)히 구비(具備)되어 들어나게(=저(著)) 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그림자’와 같아서 글자가 많지 않으면서도, 사용하기에 주밀(周密)하면서도 ‘쓰기에(=서(書)’ 심(甚)히 편(便)하였다.

而學之甚易 千言萬語  纖悉形容 雖婦孺童騃 皆得以用之 以達其辭.
: 배우기가 심(甚)히 쉬어서 천만(千萬)의 언어(言語)라고 하더라도 가늘게(=미세(微細)하게) 다 형용(形容)할 수가 - 형태화하여 수용할 수가 있었으니, 비록 아이를 젖먹이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지식이 없는) 아낙의 어리섬음으로서도 모두가 터득하여 사용해서 그 말(=사(辭))을 진달(進達)할 수 있었다.

此古聖人之未及究得 以通天下所無者也
이는 옛 성인(聖人)이 미처 연구(硏究)해서 얻지 못한 바이어서 천하(天下)를 통 털어서 없는 것이었다.

[해설(解說)]
여기에 <옛 성인(聖人)>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바로 3세(世) 단군 가륵(嘉勒)시절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말하는 것입니다.

諸國各有所用文字 高麗忠肅王時 元公主所用畏吾兒. 未知其如何
: 여러 나리에는 제각기 사용하는 문자(文字)가 있기 때문에, 고리(高麗) 충숙왕(忠肅王)때에 원(元) 공주(公主)들은 외오아(畏吾兒: 위그루(Uyghur))-문자(文字)가 소용(所用)되었으나, (고리(高麗)사람들은) 이 ‘위그루(Uyghur) 문자’를 몰라서 어찌 할지를 몰랐다.

[해설(解說)]
여기에 보면, 고리(高麗)충숙왕(忠肅王)때 원(元) 공주(公主)들이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데, 충숙왕은 (1) 영왕(營王)야광티무르 (也光帖木兒)의 딸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역련진팔라(亦憐眞八刺)와 (2)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 딸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 (3) 경화공주(慶華公主)등의 3분의 원(元)공주(公主)들과 결혼을 합니다. 같은 고리인(高麗人)의 왕후(王后)로서는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명덕태후(明德太后)인 덕비(德妃)가 계십니다.
충숙왕(忠肅王)은 같은 고리인인 덕비(德妃)를 사랑하시어서,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역련진팔라(亦憐眞八刺)가 몹시 질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즉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갑자기 죽은 충숙왕 6년(1319)에 2년 뒤에 원 중서성(中書省)에서 보낸 선사(宣使) 이상지(李常志)가 와서는 공주의 궁녀였던 호라적(胡剌赤)여자와 요리사 한만복을 가두고 공주의 죽은 원인을 심문하게 됩니다.

이 때 한만복이 자복한 진술에 따르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난 해 8월 임금이 연경궁에서 덕비와 즐겁게 노실 때 공주가 질투하다가 왕에게 맞아서 코피가 났으며 또 9월에 왕이 유련사(妙蓮寺)에 갔을 때도 공주를 때렸는데 어선부개 등이 구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 각설(却說)
아무튼, 원(元)의 공주(公主)들이 고리(高麗)에 와서 사용한 문자는 바로 위그르(Uyghur)문자였습니다.

즉 원(元)나라는 위그르(Uyghur)문자를 빌어서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위그루’를 회흘(回紇) 혹은 회골(回鶻) 혹은 외올(畏兀) 혹은 외어얼[畏吾兒]로 표현합니다.
《고려사(高麗史)》에, “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원(元)공주(公主)들에게는 외어얼[畏吾兒]-문자가 익숙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當時)에 고리(高麗) 사람들 - 특히 고리(高麗)의 궁실(宮室)에 있는 사람들은 이 <외어얼[畏吾兒]-문자>에 능숙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무려 3명이나 되는 충숙왕(忠肅王)에게 시집온 원(元)공주(公主)들과 또 이 공주(公主)들을 모셔야하는 궁실(宮室)사람들은 어찌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를 여암(旅菴)선생께서는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而以九象胥所書旅獒文者觀之 皆不免荒亂無章 則正音不止惠我一方 而可以爲天下聲音大典也

: 이에 구상서(九象胥)로 쓰여진 여오문(旅獒文)을 보게 하였는데, 모두 황란(荒亂)함과 절도(節度)없음(=무장(無章))을 면(免)하지 못할망정, 정음(正音)이 우리 일방(一方)에만 혜택(惠澤)을 줌에 그치지 않았으니, (정음(正音)이) 천하(天下)의 ‘발음기호언어(=성음(聲音)의 대전’(大典)인 것이다.

[해설(解說)]
여기에 보면, 여오문(旅獒文)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여오(旅獒)는 “여행(旅行)할 때에, 인도(引導)하게 하는 ‘길이 잘 들린 개(=견(犬)=오(獒)’를 뜻합니다.

여행할 때의 최고의 문제는 서로 언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끼리 “어찌 의사소통을 할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리조(高麗朝) 때에는 -언지(言只)라고 표현하는 ‘헬륨 개스(gas)를 채운 고무-부구(浮具)’에 채워서 여기에 가림토(加臨土)를 적어놓아서 대화하려는 양쪽의 머리 ‘위’에 뛰워놓고, 쌍방향으로 급속(急速)하게 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이 언지(言只)에 적혀놓은 정음(正音) 문자 - 발음기호 문자를 가르켜서 ‘여오문(旅獒文)’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르는 지역에 갈 때에 인도(引渡)하는 개를 여오(旅獒)이듯이, “서로 모르는 언어의 발음기호(=정음(正音))을 인도해주는 개(=견(犬)=오(獒) 같이 든든한 문자”라는 뜻에서 여오문(旅獒文)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림토(加臨土)는 여오문(旅獒文)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오(旅獒)>는 상서(尙書)주서(周書) 제7장에 나오는<여오(旅獒)>편(編)이 있기 때문에 해석에 많은 혼란을 줍니다.
상서(尙書)의 <여오(旅獒)>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은나라를 물리치자, 옛날 중국의 서쪽에 살던 여족(旅族)들이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獒(오)」라는 큰 개를 공물로 바쳐 왔다. 이때 삼공(三公) 중의 하나인 태보(太保)의 지위에 있던 소공(召公)은 「여오(旅獒)」라는 글을 지어 변방의 오랑캐들이 바친 개와 같은 공물은 임금의 위신과 관련이 있으므로 받지 말기를 충고했다.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면 덕을 잃게 되고, 물건을 가지고 장난하면 뜻을 잃을 것이니(玩人喪德, 玩物喪志)” <여(旅)>나라 사람이 바친 공물(貢物)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천자(天子)역할을 하는 주왕(周王)이 ‘인도(引導)-견(犬)’의 도움을 받아서 자꾸 ‘떠돌이하는 신세(身世)’로 보이도록 하는 장난으로 볼수 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체통(體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여오(旅獒)의 이미지(Image)가 부정적인 관점에서 묘사한 글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리조(高麗朝)때까지 ‘가림토’로 사용된 것은 언지(言只)를 띄워서 ‘서로 모르는 언어를 인도하게 하는 정음(正音)’이기에 여오문(旅獒文)은 매우 긍정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당유고(南堂遺稿)에 의해서 언지(言只)를 띄우는 방법이 백해여칠계(白亥與七鷄) - 즉 ‘흰 돼지에 일곱개의 닭머리’가 합해진 유형(類型) 하나만 있었는 줄 알았는데, 여암(旅菴) 선생께서는 이 방법 이외에 구상서(九象胥)라는 방법이 있음을 거론(擧論)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해여칠계(白亥與七鷄)는 ‘헬륨 개스(gas)를 집어넣는 것이 <흰 돼지>모양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다양한 언지(言只)들을 결승(結繩)으로 묶은 것을 일곱개의 닭머리(=칠계(七鷄))가 끌어올리고 내리는 유형의 방식입니다.

생각컨데 이 백해여칠계(白亥與七鷄) 방식은 사용하는 문장(文章)이 매우 길때, 유용한 방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상서(九象胥)는 ‘아홉가지 모양(=상(象))이 함께(=서(胥))있다.’라는 의미인데, 아마도 주어(主語), 목적어(目的語), 동사(動詞) 등등의 문장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을 ‘9개의 어떤 모양’으로 나타내고, 각각 모양에 해당되는 문패(文貝)이자 언지(言只)를 여기에 그 때마다 부착해서 급속하게 발음(發音)을 가림토(加臨土)-정음(正音)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볼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짧은 문장’을 구사하기에는 구상서(九象胥)방법이 더 효율적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而以九象胥所書旅獒文者觀之>이란 문장은 <쌍방향 언어 학습기>인 언지(言只)를 헬륨 개스(gas)가 있는 부구(浮具)에 붙이는 식의 표현방법을 여오문(旅獒文)이라고 하는데, 이를 구상서(九象胥)방법으로 해서 원(元)공주(公主)들이 고리(高麗)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관지(觀之) ‘몽고 언어’를 직접 발음(發音)해서 말하고, 고리(高麗) 사람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가림토(加臨土)를 띄워서 보게하면서 직접 발음하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서로 언어를 소통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원(元)공주(公主)가 띄워진 여오문(旅獒文)으로 적힌 가림토(加臨土)언어를 ‘읽을 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원(元)공주는 고리(高麗)어(語)를 익히고, 이 공주(公主)에게 수발을 들어야하는 고리인(高麗人) 역시 몽고(蒙古)-어(語)를 읽히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방식은 “모두 황란(荒亂)함과 절도(節度)없음(=무장(無章))을 면(免)하지 못할망정, 정음(正音)이 우리 일방(一方)에만 혜택(惠澤)을 줌에 그치지 않았으니, (정음(正音)이) 천하(天下)의 ‘발음기호언어(=성음(聲音)의 대전’(大典)인 것이다.(皆不免荒亂無章 則正音不止惠我一方 而可以爲天下聲音大典也)”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여암(旅菴) 선생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암(旅菴)선생께서 말한 핵심은 원래 “정음(正音) 문자(文字) - 즉 ‘발음기호 문자’는 아(我) 일방(一方)에게만 혜택을 주고 멈추는(=지(止))것이 아니라(=불(不)), 천하(天下)의 모든 언어(言語)에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則正音不止惠我一方 而可以爲天下聲音大典也)”는 것에 그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然而聖人製作之義 至微且深 當時儒臣解之而未盡 後世百姓 日用而不知  其明者將復晦矣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聖人)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제작하게 된 뜻은 당시(當時)의 선비(=유신(儒臣))들이 지극히 미묘(微妙)하고, 깊은 것은 풀어내기에는 미진(未盡)하였기에, 후세(後世) 백성이 일용(日用)하면서도, 성음(聲音)자체의 길을 몰라서 (성음(聲音)을 잘 알던 사람도) 다시 어두워졌기(=회(晦)) 때문인 것이다.

[해설(解說)]
여암(旅菴)선생은 이런 훌륭한 정음(正音)체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聖人)- 다시말하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훈민정음을 제작(製作)하는 뜻은 당시(當時)의 - 이는 고리조(高麗朝)때까지 ‘가림토’를 사용해온 오랜 기간(期間)을 뜻합니다. -선비들이 정음(正音)체계를 구조화함에 있어서 미묘(微妙)한 문제는 ‘깊이’에서는 좀 미진(未盡)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후세(後世) 백성(百姓)이 나날이 사용하다가도 발음하는 방법(聲音之道)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류하는 외국인(外國人)과의 접촉빈도가 적어져서 발음기호 문자(文字)는 남아있으되, 이를 어찌 발음(發音)해야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점차 생기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용하지 않는 음가(音價)가 있기 때문에’ 한참 사용되던 가림토(加臨土) 역시 ‘모르는 음가(音價)’가 있기 때문에, ‘음가(音價)에 밝았던 사람도 다시 어두워지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음을 (其明者將復晦矣)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훈민정음(訓民正音)과 가림토(加臨土)의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풀어준 글은 만나기가 힘듭니다.


若賤臣者 何敢與知其蘊奧之萬一. 而管窺蠡測 爲此圖解 以寓於戱不
: 천(賤)한 신하(臣下)된 자로써 온축(蘊蓄)된 오묘(奧妙)한 내용을 어찌 만(萬)에 하나 감(敢)히 알 수 있으리오 만, 좀먹는 구멍 대롱(=관(管))으로 살펴서 아래(=차(此)) 도해(圖解)를 만들었으니, 희롱(戱弄)에만 머물지 마소서!!

[해설(解說)]
여기서 도해(圖解)라는 것은 초성도(初聲圖)에서 (1)이음(ㅇ)을 토후(土喉)-궁(宮)으로, 동심원(同心圓) 가장 안쪽에 그리고, 그 다음 바깥에 (2) 시옷(ㅅ)을 금치(金齒)-상(商)으로 (3) 미음(ㅁ)을 순수(脣水)-우(羽)로 (4)꼬리이음(ㅇ)을 목아(木牙)-각(角)으로, (5)니은(ㄴ)을 화설(火舌)-치(徵)로,  나타내면서 점차 3차, 4차 원(圓)으로 번져나가는 그림을 그린 것을 의미합니다.

- 이는 성음(聲音)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見解)가 있어야 해독(解讀)할 수가 있는 것이기에, 좌계가 더이상 거론할 영역이 못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훈민정음도해서(訓民正音圖解叙)에 묘사되듯이, 가림토(加臨土)정음(正音)이 고리조(高麗朝)까지 사용되었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조(朝鮮朝)때에는 어떠하였을까?
좌계의 견해로서는 조선조(朝鮮朝)때 해외(海外)에 무역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조선어(朝鮮語) 음가(音價)에는 ‘없는 발음’을 역시 가림토(加臨土)에서 취해서 이를 언지(言只)로 띄운 이른바 여오문(旅獒文)을 통해서 ‘상호학습’하면서 사용하였다고 봅니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난함선(欄檻船)가운데 금관선(金官船) 종류는 엉뚱하게도 ‘헬륨 개스(gas)’를 집어넣어서 하늘에 띄운 글자 - 이를 언지(言只)라고도 표현하고, 문패(文貝)라고도 하는데, 이를 다시 압축시켜서 다시 청동(靑銅)관(管) 속에 집어넣는 시설(施設)이 갇추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암(旅菴)선생께서 난함선(欄檻船)의 표준을 세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왜 선생께서 고리조(高麗朝) 충숙왕(忠肅王)의 원(元)공주(公主)들이 사용한 여오문(旅獒文)의 구상서(九象胥)의 사례(事例)를 유독히 뚜렷하게 인지하게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금관선(金官船)에 설치된 ‘헬륨 개스(gas) 환수 압축기’를 보면서, 이를 만든 매영(梅營)의 기술자들에게 이를 활용한 사례를 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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