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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답사보고서]20070386최유미

작성자최유미|작성시간07.10.04|조회수110 목록 댓글 3
 

20070386 역사학과 최유미

2007추계답사보고서


  이번 추계답사 전까지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3번 방문했었다. 물론 대학생이 되어 공부의 차원으로 가는 답사와는 달리 친구들과 선생님들과의 추억 만들기 위주의 방문이었지만 한차례 씩 오면서 그 유적에 대한지식을 알게 되고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꼈다. 이것은 이번 추계 답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날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왔다. 산뜻하게 출발하고 싶었지만 날씨 때문인지 약간 아쉬웠다.  버스에 오른 뒤 한참을 달려 경주에 도착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갔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유물을 통해 경주의 역사, 신라의 역사 전반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곳이어서 예습을 한 듯, 이후 가게 된 유적, 유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수도권에 살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서울 역사박물관과 달리 경주 박물관은 멀어서 자주 다니기 힘들다. 그래서 이번에 온 김에 제대로 둘러보고 가리라고 마음먹고 전시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교과서에 나온 유물들이 많았다. 교과서 작은 사진 속에서 찍힌 유물들과 실제 유물들은 느낌이 달랐다. 불교 공인의 이차돈 순교비는 생각과는 달리 크고 조각이 섬세했으며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정말 미니사이즈였다.  

 박물관에는 유난히 석불이 많았다. 그런데 온전한 것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목이 잘려나가 있었다. 조선의 숭유억불정핵으로 불상들의 목이 잘려나갔고 심지어 야외에 전시되어있던 불상의 머리들 일부는 목이 잘린 후 우물에 빠뜨렸던 것을 건져 올린 것이라고 한다. 또 남아있는 몸체도 손목이 잘려 있는 것들도 많았다. 온전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삼키며 머릿속으로 잘려나간 얼굴과 몸을 이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2시간을 관람한 후 버스를 타고 약 5분정도를 달려 분황사에 도착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진으로만 봤던 모전석탑인 분황사탑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벽돌로 쌓은 탑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해서 이리보고 저리보고 주위를 돌면서 인왕상, 사자상, 물개상, 벽돌들을 살펴봤다. 전탑의 벽돌처럼 흙을 구운 것이 아니라 일일이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았다고 하니 부처님도 그 정성에 감동하지 않았을까. 7~9층이었다고 추측되는 분황사탑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다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이후 조선의 중이 이 탑을 수리하려다가 도리어 더 파손시켰다고 한다. 의도는 참 좋았지만 섭하게 됐다.  

 황룡사 터는 제대로 보지 못해서 경주박물관에서 본 황룡사 모형과 거대한 치미로 만족해야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안압지로 갔다. 안압지는 인공호수로 신라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여주는데 경주박물관의 안압지에서 출토된 벌칙이 새겨진 주사위가 예이다. 어수룩해질 무렵 호수는 맑지는 않았지만  넓게 펼쳐져 있었고 물가의 조명이 잔잔히 출렁이는 것이 정말 아름다웠다. 풍족했던 신라의 지배층들도 이곳에서 풍취를 즐겼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두워 질 때 까지 있고 싶었지만 다음 코스인 대릉원으로 갔다. 버스에 내려 거대한 고분들 사이를 걸어 천마총에 도착했다. 천마총 안을 전시실처럼 해 놓아서 금관, 금 허리띠 목걸이 등과 그 유명한 천마도를 봤다. 과거에 여러  번 봤음에도 그 중요성을 모른 채 그저 대충 훑고 지나가 후회했었는데 이번기회에 다시 자세히 보게 되어 다행이었다.


 둘째 날은 주로 사찰위주의 답사를 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장항사지. 장항사지는 정확한 사찰 이름을 몰라 마을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개울 위 다리를 건너고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가니 탑 2개가 나란히 서있었다. 왼쪽의 탑은 보수 중이어서 전체적인 모습은 볼 수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봤다. 1층의 인왕상이 인성적이었다. 반면 오른쪽 탑은 외양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기단부는 없고 맨 밑에 1층 몸돌 위에 지붕돌로 쌓아놓았기 때문이었다. 탑의 모양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1층 몸돌의 인왕상은 왼쪽의 탑보다 더 강하고 늠름해보였다.

 장항사지를 내려와 골굴암 마애불로 향했다. 경사진 언덕을 힘들게 한참을 올라간 후 나무그늘에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들은 그 장소가 끝인 줄 알았다. 헌데 옆으로 돌계단이 나있었고 눈으로 돌계단을 훑어 올라가가니 저 바위벽에 투명한 보호대가 설치되어있었다. 설명을 들은 후 또 한참을 계단을 올라가 밧줄을 타고 골굴암에 도착했다. 골굴암 바로 뒤에는 낭떠러지에다 변변한 보호 장치가 없어 아찔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자세를 잡고 골굴암을 바라보았다. 너무 높이 깎아 놓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 옛날에 저 높은 곳에 조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골굴암에서 숨을 돌리며 천천히 내려온 후 바로 기림사로 향했다. 기림사는 전의 골굴암과는 달리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편안히 실내에 앉아서 설명을 듣고 둘러봤다. 기림사는 굉장히 넓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관음전의 천수관세음보살상이었는데 일일이세보지는 않았지만 눈대중으로 보아도 천개는 충분히 되고도 남을 만큼 손이 많았고 머리위에 작은 머리들이 모자처럼 둥글게 쌓여 있었다. 안쪽에는 작은 손들이 뻗어 나와 있었고 바깥쪽 손에는 칼, 도끼, 종, 작은 부처, 삼지창, 밧줄, 화살 무슨 심지어 포도까지 있었다. 비로자나불과 삼층석탑 그리고 사찰내의 박물관을 둘러본 후 내려와 비빔밥을 먹고 감은사지로 갔다. 감은사지는 문무왕이 간간히 침략하는 왜에 대항하여 부처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바다 근처에 직접 터를 정하여 짓기 시작했는데 문무왕당시에 완공되지 못하고 신문왕 때 완공되었다.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바다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감은사지 금당 터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실제로 용이 드나들지는 않았겠지만 이야기와 실제 이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춘계답사 때 미륵사지 창건에 대해서도 못을 메꾸어 사찰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실제로 미륵사지터의 흙속에서 연꽃의 씨가 발견되어 못을 메꿨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실화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한 것이 문득 생각났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웅장했다. 탑 꼭대기에는 찰주가 남아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웅장해 보였다.

버스를 타고 이견대와 대왕암에 갔다. 이견대는 동해바다의 용이 되겠다던 문무왕이 용이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던 곳이자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은 곳이다. 난간에 기대어 너른 바다가 보여 시원했다. 이견대에서 조금 가니 바로 대왕암이 있었다. 파란 동해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니 피곤함이 가시는 듯했다.


셋째 날은 포석정과 남산. 남산이 매우 가파르고 위험해서 조심해야 한다. 오르내리기 너무 힘들다. 등등의 소문을 듣고 긴장된 마음으로 출발했다. 가볍게 포석정을 시작으로 해서 남산으로 향했다.

흙길을 따라 몇 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보니 낮은 담장 안에 전각이 보였고 그 안에는 3등신정도의 어린아이 같은 배리삼존석불입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날은 맑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높은 나무들과 전각 때문인지 습하고 어두웠다. 전에는 석불위에 전각이 없었다가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전각을 세운 것이라 한다. 진 교수님께서 석불은 노천에서 봐야 아름답다고 하셨는데  좀 아쉬웠다. 전에 TV프로그램에서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가 빛에 따라 변화되는 것을 보니 신비롭고 아름다웠었는데 아마 이런 것을  때문에 노천에서 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신 듯싶었다. 

 배리삼존불에서 나와 도로 옆을 한참을 걸어 가 남산계곡 입구의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왕릉 세 개를 보고 돌이 널려있는 완만한 계곡을 오르자 목 없는 석불좌상이 있었다. 얼핏 봤을 때 얼굴과 손이 없어 둥글둥글하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러나 앉아 쉬면서 복부터 찬찬히 살펴보니 매듭과 옷 주름이 굉장히 섬세하고 체구가 좋고 당당했다 아마 사라진 얼굴도 늠름하지 않았을까 싶다.

 계속 산을 올라가 마애관음보살상에서 한숨 돌리고 다시 개울을 건너고 나무뿌리계단을 오르니 앉아 쉴 수 있는 바위 앞에 거대한 암벽이 있었다. 지금까지 본불상과는 달리 암벽에는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 듯 불상을 깎아놓았다. 날이 맑아 너무 선명하게 보였는지 암벽의 원래 금과 파낸 선이 겹쳐 뚜렷하게 선이 보이지 않고 조금 조잡해 보이기도 했다.

앞쪽 바위는 본존불이 있고 양 옆에 협시보살이 본존을 향해 연꽃을 바치고 있으며 뒤쪽 바위는 본존에 두광 신광이 두 개의 둥근 원으로 그려지고 양옆에 협시보살이 새겨져있었다.

선각 육존 불에서 잠시 밑의 계곡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고 다시 산을 올랐다. 가파른 바위가 길이 되면서 산을 타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올라가 중간에 물을 뜨고 다시 바위를 잡고 나무를 잡아 간신히 선각여래좌상에 도착했다. 뒤에는 절벽이라 조금 오싹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잠시 쉴 수 있었다. 이 불상은 왠지 친근하고 정겨웠다. 입술이 두툼하고 코가 길고 볼 살이 올라 눈이 치켜 올라가서 투박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몸은 선각인데 얼굴을 돋을새김을 해서 얼굴만 도드라져 보였다. 생긴 것이 예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또 한참을 올라가니 남산에서 제일 높은 암자에 위치한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이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상 앞에는 약간의 터가 있고 그 뒤는 마찬가지로 낭떠러지다. 암자의 마애석가좌상처럼 내려다보니 주변의 들과 산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이었다. 날씨가 맑아서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전에 본 선각여래좌상과 마찬가지로 얼굴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선각을 했다. 그러나 얼굴을 이분이 훨씬 아름다우셨다. 볼 살과 턱살, 둥근 눈썹, 가늘게 뜬 눈을 자비로움을 느끼게 했다.

이곳을 내려와 산길을 따라 금오봉에서 휴식을 갖고 다시 용장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장사지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용장사지 삼층석탑이다. 바닥의 자연석을 하층기단으로 삼아 꼭대기에 우뚝 서있었다.  이런 산꼭대기에 탑을 세운 신라인들이 정말 위대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석불좌상 용장사지 터를 둘러보고 남산을 내려왔다.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3박4일 답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답사지 였다.

마지막 날의 답사는 불국사였다. 불국사는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여름의 불국사를 방문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봄의, 이번에는 가을의 불국사를 봤는데 계절마다 보는 맛이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을에 보는 불국사가 제일인 것 같다. 새파란 하늘아래 다보탑과 석가탑이 더 높고 단아하게 보였다.

불국사를 끝으로 답사가 끝났다. 이 곳 경주는 몇 번 왔다고 해서 익숙한 곳이 아니라 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지식을 주는 곳임을 다시금 알게 됐다. 그것은 아마 수학여행과 같이 유적이나 유물을 대충 많이 훑어보기에 급급했던 과거와는 달리 신라의 유적과 유물들을 배우고 느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답사에 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더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번에 보지 못했던 경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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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천현창 | 작성시간 07.10.04 답사지를 하나하나 훑으면서 간략한 설명과 느낀 점들을 서술하는 것이 참 깔끔하게 잘 되어 있어 좋군요.
  • 작성자최성원 | 작성시간 07.10.05 간결한 느낌과 설명이 잘 나왔네요. 불상이 목이 잘린것은 아쉬웠지만 그것을 꼭 숭유억불의 폐혜였다고 현대식으로 단정을 짓기는 그르다고 봅니다. 불상이 그정도로 목이 잘릴정도였다면 정부나 대중에게 불교가 어떤 이미지였는지를 알수있는 하나의 사례라 볼수있다고도 봅니다. 당시의 상황도 고려해봐야겠지요. 잘봤습니다.
  • 작성자최준희 | 작성시간 07.10.22 답사일정을 따라서 보기 좋고 깔끔하게 쓰신거 같습니다. 자신의 느낌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썼으면 어땠을까요. 물론 잘 쓰셨어요. 느끼신게 많았을텐데 깔끔한것도 좋지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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