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 보니 요금이 1위엔으로 8년전이나 똑같다. 버스비 빼고는 다른 물가는 많이 올라 있었다. 택시의 기본요금이 10위엔이다. 요즘 한화로 2000원 정도가 되니 한국보다 비싼편이다.
관광은 비싼 택시보다도 버스를 타면 높은 곳에서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므로 주변을 관찰하기가 더 좋다.
작년 북경올림픽 이후 생긴 것인지, 시티투어 버스가 다니는데 3위엔이다. 맨하튼 시티투어는 25불이니 이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싸다고 할 수 있다. 시설은 2층버스로 한국보다 좋다.
이 버스는 자금성의 맨 앞에 있는 문인 전문(前門)에서부터 출발하여 자금성- 징산공원 - 지단(地壇) - 꿔루(鼓樓)올림픽경기장 등을 남북으로 횡단한다. 버스배차 간격이 너무 긴 것이 흠이다. 한번 타보려고 기다렸으나 20분정도를 기다려도 안오는 바람에 이용을 못하였다. 이층에서 조망할 수 있으니, 북경 의 주요 문화유적지를 유람하는데에 편리할 것 같다.
징샨공원의 입장료는 2원으로 북경에서의 관람료 증 제일 싼 것 같다. 한국의 패키지관광에서는 대부분 이 코스를 시간 제약상인지 빼놓는 것 같으나, 나는 북경에 올 때마다 이 곳을 찾는다.
북경은 평지에 만든 도시라 고층빌딩에 올라 가지 않으면 북경의 스카이 라인과 내가 있는 위치의 동서남북을 잘 알 수가 없다. 이 징샨은 해발 40m로 북경시내에서는 제일 높은 지형지물이다.
실은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 산이다. 북경의 여름은 강우량이 지극히 적어 대단히 무덥기 때문에 자금성 서쪽에 인공 호수를 만들어 북쪽은 '북해'로, 남쪽은 '중남해'라 부르는데, 이 때 공사시 나온 흙으로 징샨을 만들었다.
자금성 북문 바로 뒤편에 조성되어 있어서 자금성 및 북경시내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아주 좋다.
이번에는 날씨가 흐려서 자금성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으나, 스모그인지 또는 안개인지 알 수 없으나 이 광경도 괜찮아 보인다. 희미하게마나 구중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편에는 북해가 있고 그 가운데 북해공원이 보인다. 라마식 사탑이 인상적이다. 청말 서태후가 자신의 아들인 광서제가 개혁적 지식인들의 '변법자강'운동에 동조하여 조정을 개혁하려고 하자 이 공원에 유폐시킨 곳이기도 하다.
뒤편 북쪽으로는 꿔루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장군들이 외적을 토벌하고 개선을 할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동쪽아래에는 장사치들이 만들어 놓은 황제의 용상에서 아가씨들이 황후 비빈의 옷을 입고 애교어린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이 용상에 세겨진 '정대광명'이라는 현판에 얽힌 일화가 있다.
청대의 최고의 황제는 강희자전을 만들었던 강희제를 들 수 있는데, 이 황제는 중국을 통치하는 최고권력자이지만,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황태자를 두 번씩이나 폐위 복권을 반복하고, 결국에는 죽이게 되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수 십명의 황자들이 황태자가 되기 위한 골육의 암투를 벌이게 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二月河라는 중국 소설가 쓴 <옹정제>라는 대하소설에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가가 쓴 소설로는 <건륭제>도 있다. 이 소설가는 이 책들로 중국 최고의 인세 수입을 올리는 작가이다. 한국에서도 각 각 20여권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우여곡절 끝에 4째 아들로서 황제에 오른 옹정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본인이 살았을 때 황태자를 미리 선택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한 장은 자기의 몸에 항상 가지고 다니고, 한 장은 이 편액 뒤의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황제가 붕어하면 대신의 입회하에 두 장을 확인하여 다음 황제를 선택하게 하였다.
내가 청나라 역사를 재미있게 읽은 책은 미국에서 최고의 중국사 연구가인 조너던 스펜서의 <현대중국을 찾아서> 1,2권을 읽고 나서 부터이다. 조나던 스펜서는 저서를 논문식으로 철저한 고증을 하여 각주를 일일이 달면서도, 소설처럼 드라마틱하게 서술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저서들를 영어권 독자들이 읽고 중국 전통문화의 매력에 빠지기도 하고, 또 북경를 짖접 찾아 오기도 하게 하여 중국 홍보에 톡톡히 일조를 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일본대사를 역임한 랴이사워교수의 일본사에 대한 저술과 벌써 60여년 전에 일본문화를 해부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등의 저서가 일본을 미스틱하고 낭만적인 나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어권에서의 이러한 명저들이 없는 것이 내내 아쉽다. 미국에서의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한국전쟁부터로 거의 60여년이 되어 가니 이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징샨공원의 전경과 함께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산서지방 농민반란군인 이자성의 반란군에 쫒겨 황궁의 북문을 탈출하여 건너편 이곳에 들어와 나무에 목매달아 죽음으로써, 조선이 그렇게 떠 받들던 명제국이 사라졌다.
이 때가 1644년 숭정 17년이었다. 명은 사라졌으나, 조선에서의 노론세력은 명이 임진왜란 때에 군대를 보내주어 조선을 살린 은혜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하여 명나라 황제들의 제사를 조선말까지 지내 주었고, 노론 사대부들은 없어진 나라인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으로 연도를 표기하였다.
조선은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명 황제들의 제사를 지내는 정통성을 네세워 소위 '소중화'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의식을 넘어서서, 청을 발전된 문화를 인정하고, 이러한 문물을 받아 들이자는 일파가 노론들에 의해 실권한 기호 남인 실학파 중 북학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각은 정조대에 잠깐 반짝하고 정조사후 노론의 집권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다시 돌아 오면 명을 무너뜨린 이자성은 3개월 후 청의 침입으로 집권은 무위에 그친다. 그러나 모택동이 이 이자성을 역사상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목하면서 중국에서 긍정적 인물로 재평가되었다. 만리장성을 가다보면 한 장군의 동상을 보게 되는데 이 인물이 이자성이다.
나는 작년 10월 연변에 학술대회에 갔다가 헌책방에 가니 이 <이자성>이란 대하소설이 한글로 번역되어 5권으로 출판되어 있어서 사 가지고 와서 일부를 읽었다.
청의 북경 공략시 누루하치는 청에 볼모로 심양에 잡혀 와 있던 소현세자를 데리고 와서, 청의 위용을 보여 주었다. 이 후 소현세자는 조선에 포교를 하려는 예수회 소속의 신부 아담 샬을 만나게 되어 서학과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알게 되고, 귀국시 조선에 아담 샬과 동행하고자 하기 까지 했다.
소현세자는 귀국시 서학과 서양과학 문물들을 가지고 와서 오늘날 역사책에 이 사실이 기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현세자가 귀국 후 3개월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시아버지인 인조에 소현세자빈인 강씨가 사약을 받게 되고,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그 할아버지인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아들이 둘이었는데, 한 아들은 사형집행인이 죽이지 않고, 죽였다고 보고하여, 사도세자 후손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이 사실을 보고 한 역사가가 소현세자가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고, 궁중의 암투로 독살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그 분은 내 지도교수인 고 김용덕교수님이신데, 이 사실을 <소현세자연구>에서 논증하였다. 이 이후 소현세자의 독살설이 정설이 되었다.
김교수께서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소현세자가 임금이 되었으면 서양의 과학기술이 발전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선이 문호를 일찍 개방할 수 있었을텐데 궁중의 암투속에서 우리의 역사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안타까움에서 이 주제를 연구하셨다고 하는 말씀을 생전에 들었다.
소현세자는 청의 인질이지만, 심양왕으로 봉해졌다. 일종의 재중국조선대사라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사신이 오면 심양왕의 안내로 청의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청의 고위층과 소현세자가 자연히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의 고위층과 소현세자가 가깝게 지낸다는 정보를 사신들을 통해 인조가 들었다. 정상적인 임금이라면 이 인맥을 활용하여 청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좋아할텐데, 인조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쿠데타로 왕이 되었고, 청과의 호란으로 청의 사신에게 삼전도에서 무릅을 꿇은 왕이었던 것이다. 즉 자기의 임금자리가 위태하다고 느낀 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책봉국가로 중국에서 임금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던 체제였기 때문이다. 불행의 씨앗은 부자관계도 몰라보는 권력욕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의 나라 비극의 현장에 와서 내 나라의 비극까지 떠올리다니...
왕징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 오는데 띠탄(地壇)에서 설이라 서커스 말타기 활쏘기 등 전통놀이를 공연하는 묘회(廟會)를 열고 있었다. 대단히 화려하다.
2001년 작은 아들과 같이 구경을 온 적이 있다. 이 때 돌아 오는 길에 전기 버스가 고장이 나서 한시간 가량 떨고 있다가 겨우 집에 온 기억이 떠오른다.
이러 저러한 잡념중에 어느새 북경에서의 이튼 날이 저물고 있었다. 북경의 이틀 답사가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