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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경영학과 20072652 최은아 - 교육제도와 성격,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

작성자최은아|작성시간12.05.28|조회수324 목록 댓글 0

 

교육제도와 성격,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

 

경영학과 20072652 최은아

 

Ⅰ. 서론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을 가치 기준과 생활양식의 근거로 삼는 숭유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따라 유교이념이 교육 정책 또는 유학사상을 가르치고 실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최고 교육행정 기관은 예조였으며, 예조에서는 성균관, 사부학당 등 직할 학교를 유지 운영하는 일을 관여하였다. 지방에서는 도 관찰사 밑에 육방의 하나인 예방이 있어 교육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교육 기관은 관학인 향교와 사부학당, 그리고 성균관이 있었고, 사학에는 서당과 서원이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향교(鄕校), 사부학당(四部學堂, 四學), 성균관(成均館), 서당(書堂), 서원(書院)을 대상하여 개별 교육기관의 연구와 더불어 서로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가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 관학(官學)

 

1. 향교(鄕校)

 

 가. 향교의 제도와 성격

 

  향교는 교육 내용의 난이도를 기준으로 할 때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보다는 조금 낮은 오늘날 중등수준 단계의 교육기관이었다. 설립 및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향교는 공교육기관이었고, 제도상으로는 국가적 교육제도를 시행하며 정부의 지시와 감독을 받도록 법에 규정된 교육기관이었다. 교육행정체계의 측면에서는 예조에 소속되어 있는 기관이었으나, 일차적 책임은 지방수령이 지도록 규정되어 있다. 향교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교관요원은 전원이 관인이었으며 교원 조직에는 교수관, 훈도관, 제독관, 교도관, 교양관, 학장들이 있었다.

 향교의 교생은 평균 16세 전후였으며, 학력에 대한 제한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신분에 대한 제한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향교에서 가르친 교과로는 때에 따라 비중의 차이를 달리하기는 하였어도 조선 초기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중요시한 것은 『소학(小學)』이었다. 『소학(小學)』은 인륜세도에 지극히 필요한 교재로 인정되었다는 것과 관학의 학령으로 삼았을 정도의 필수적인 교재였다. 이러한 『소학(小學)』에는 사람이 특히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에서 시작해서 성인이 되어 자시 자신은 물론 천하를 다스리게 되기까지의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향교의 교관은 우선 『소학(小學)』을 교육하여 향원들로 하여금 생활의 기본예절을 익히게 하고, 그 다음으로 『효경(孝經)』을 가르쳐서 효의 실천을 보다 깊게 하였으며,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 성리학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는 교재들을 가르쳐 유학적 사유를 지닌 인간이 되도록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 교육과정

 

 

첨부파일 20072652 최은아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hwp

지방민 교육기능 – 태조는 관학교육을 통하여 문무 양과의 인재를 양성하고, 동시에 사상적으로 유학 중심의 국가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성균관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지방에서는 향교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였다. 허나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에 필요한 관료를 확보하려 한 것은 향교보다는 성균관에 기대한 것으로 판단되며, 향교는 그것보다는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기능에 비중을 더 두었다고 하겠다. 이는 향교가 학교 제도상으로 중앙의 성균관에 직결되는 하급단계의 교육기관이 아니고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교육 기관이었던 점으로도 관료양성의 목적보다는 화민성속에 그 설치의 의의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국의 300여 군(郡), 현(縣)에 일시에 향교를 건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향교가 새로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대개 불사나 정사를 강학소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강학소로 사용할 적당한 장소가 없었던 데 원인이 있었겠지만 종래의 불교 강학소를 유교 강학소로 전환함으로써 억불숭유정책의 일단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2. 사학(四學)

 

 가. 사학의 제도와 성격

 

  조선시대 서울에는 국립유학 교육기관으로 성균관과 사학이 설립되어 있었다. 사학 역시 서당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교육제도를 잇고 있다. 사학은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중등 정도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관학이었다. 사학의 입학 자격에 대해서 성균관처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백히 규정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사학의 현실적 목적이 성균관 진학 및 과거 응시에 있었기 때문에 성균관의 입학자격에 따라 사학의 입학 자격을 결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체로 15세를 전후한 연령의 학생이면서 서민과 양반의 자제가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사학은 중앙에 있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국가의 지도를 받는 관인의 교육기관이었음이 밝혀졌다. 사학의 교관은 모두 관인이었으며 성균관 교관이 겸직하기도 하였고, 후에 전임 교관이 임명되었다.

 

 나. 교육과정

 

  1) 기본 소양 교육 – 사부학당은 본래 고려 말 유학 진흥의 현실적 요청에 의하여 설치되었고 조선조에 이르러 그 체계가 확고히 되었다. 사학은 체제 면에서는 중앙에 위치한 성균관의 예속학교였다. 그리고 교육정도에 있어서는 성균관은 「대학지도」를 교육시킨데 비해, 사학은 그 기초지식인 「소학지도」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한편, 사학은 지방의 향교와는 동급의 교육 기관이나 향교가 성균관의 축소 형태로서 성현을 모시는 문묘(文廟)를 설치하여 ‘제향(祭享)’과 ‘교육’의 양대 기능을 담당한 것에 반해, 사학은 독립된 문묘가 없이 성균관의 문묘를 공동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2) 예비 관리 양성 교육 – 평가의 방법은 강경과 제술을 사용하였다. 강경은 경서의 대의를 묻는 것으로 구의라고 하는 일종의 구술시험으로서 두 종류가 있었다. 제술은 문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일종의 필답고사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9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사학의 제술은 과거의 제술을 준용했다.

 

 

3. 성균관(成均館)

 

 가. 성균관의 제도와 성격

 

  조선의 성균관은 고려의 성균관[고려말에 국자감(國子監)이 성균관으로 명칭이 개칭됨]의 전통을 계승하여 설립된 중앙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의 기원은 고려가 성종 11년(992)에 당(唐)의 학제를 모방하여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대학 교육을 실시한데서 출발하였다. 그 후 국자감은 국학, 성균감, 성균관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공민왕 11년에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는 개국 후 고려의 제도에 따라 성균관 직제 역시 그대로 계승하였다.

성균관 교관들의 직무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유생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성균관에서 시행되는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일이었다. 대사성(大司成)은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성균관 정록소에서 과거시험에 필요한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교관은 시관(試官)이 되었다. 유생의 생활지도를 담당하는 것 역시 교관의 직무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령과 각종학규에 의해 학교생활을 하였는데, 교관은 유생을 지도하고 그 결과를 선악적에 기재하였고, 이것은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할 때 예조에 보고하여 합격 여부에 반영시켰다. 교관은 또 성균관 문묘에서 제향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무가 있었다. 이밖에 교관들은 성균관의 행정업무를 담당하였고, 사학·종학의 교관을 겸임하였다.

 성균관의 유생이 되는 것도 엄격한 입학자격이 요구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입학자격이 법제화되어 있다. 즉, 성균관의 정원은 200명이었으며, 자격은 생원·진사로 하였다. 정원에 미달될 때에는 사학 생도 중에서 나이가 15세 이상인 자로 『소학(小學)』이나 사서(四書) 중 1경을 통하는 자, 공음(功蔭)이 있는 집 적자손으로 『소학(小學)』에 능통한자, 문과나 생원·진사의 향시나 한성시에 급제한 자 등이 보결 입학할 자격을 얻었다. 더욱이 성균관 유생의 신분은 대체로 사족이었으며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성균관에 취학하였고, 심지어 원자(元子)까지도 성균관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성균관은 당시 최고 수준의 중앙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교육과정

 

  성균관은 자연스럽게 조선 건국 후에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며, 수호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과거제도의 정착으로 인해 성균관의 기능은 관리양성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교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학의 기본서인 사서오경(四書五經)이다. 사서오경은 성균관유생의 교육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교재였으며 또한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목의 하나였다. 사서오경은 조선 건국 초에 제정한 승재법에 성균관 유생 교육의 기본교육 과정으로 명문화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사기 진작의 차원에서 과시특전과 공천을 부여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성균관의 인재등용의 기능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Ⅲ. 조선시대 사학(私學)

 

1. 서당(書堂)

 

 가. 서당의 제도와 성격

 

  서당은 대체로 서대를 전신으로 하는 기초교육기관이며 개인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사설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서당은 16세기에 이르러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그 사회적 의미가 증대되었다.

서당은 특히 향촌사외에 생활근거를 둔 사족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面)·동(洞)·리(里)를 기본당위로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서당의 설립 자체가 국가의 지원이나 간섭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나라가 요구하는 훈장에 대한 일정한 자격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서당의 학생들은 사족(士族)이나 상민(常民)의 자제를 구분하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서당의 학도들은 학력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훈장이 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서당의 교육은 설립과정에 자유롭고, 훈장의 자격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입학하는 학생들이 다양한 계층의 제한이 없이 입학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는 서당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만큼 자율적인 교육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서당의 걸립, 교과과정, 평가 등의 전 교육과정이 거의 훈장의 자율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 교육과정

 

  1) 기초 문자 교육 - 서당은 비록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은 받지 못했으나 동몽(童蒙)의 교육기관으로서 사족(士族)와 평민의 자제를 입학시켜 한자 교육과 윤리 교육의 보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당의 교재는 학습 단계에 따라 문자 교육용 교재와 훈석 단계의 교재로 구분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것은『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훈몽자회(訓蒙字會)』등이다. 서당의 학과로는 강독(講讀)·제술(製述) 및 습자(習字)의 3과가 있었다.

 

  2) 기본생활습관의 형성을 통한 인성교육 - 서당에서는 기본적 문자 교육 이외에 유교관상을 바탕으로 윤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는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윤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는 ‘인간의 선악 구별, 자연과 인간의 섭리 이해, 자기반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함양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효경(孝經)』에서는 효를 인간 도리의 근본으로 하여 유교관상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인성교육은 학과교육과 생활지도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세부적으로는 강독·제술·습자를 통해 숙독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학생들로 하여금 배운 바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였기에, 이러한 학과 공부를 통해 학생들은 자연히 유교윤리를 체득하여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었다.

 

 

2. 서원(書院)

 

 가. 서원의 제도와 성격

 

  조선시대 서원은 선현·선사를 봉사하는 ‘사(飼)’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되어 성립되었다. 서원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사림파 계층에서는 교육이 주로 가학·서재·정사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의 대립에서 사상적 기반을 확보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적 조류에 편승해서 서원이 설립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관학의 쇠퇴도 서원의 성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숭유정책은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을, 지방으로는 향교 등을 장려하여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 및 향풍교화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관학이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고, 관료자제들의 출세 도구화하면서 그 한계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나. 교육과정

 

  조선의 서원 교육내용은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의 교학에 주로 전념하였다. 그 중에서도 주제는 우주론, 심리학, 윤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원은 주자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 모델로 하고 있어서, 대부분 백운동서원의 원규를 기본으로 하여 서원의 교육방침을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백운동 서원의 원규 가운데 오교지목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이었다.

 

 

Ⅳ. 결론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각각 그 교육 내용이나 방법상에 차이가 있고 교육담당자 역시도 객관적인 자격 기준이 상이했다. 즉, 시대적 상황이나 각급 교육기관의 사정에 따라 교육목표, 교육내용, 교육방법, 평가, 교관의 요건 등에서 여러 가지 기준이 상존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서 교관의 요건은 공통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이 적용되었다. 그 첫째는 학식이 있고 경서에 밝아야 했으며, 둘째는 덕망이 있고 예를 갖추어야 했고, 마지막으로 시대적 사명의식을 지닌 노성지사이어야 했다.

 또한 당시 각각의 교육기관에서 공통적인 교육목표 차원은 ‘국가 인재 양성’, 교육내용과 방법은 ‘문자  이해 교육’, ‘인성 교육’, 교육제도 운영차원에서는 ‘관학과 사학의 차별성·상보성’을 실천하고 있었다. 즉, 관학의 주요 교육목표는 유교정신에 투철한 국가에 필요한 인재양성, 교육내용은 유교경전인 사서오경 중심, 교육방법은 강(講)과 제(製), 서(書)가 중심이었고, 엄격한 국가관리가 이루어졌으나 사학인 서당과 서원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은 설립의 자유,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자유, 학교 입학대상도 많은 자율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요약논문 정보>

 

제115회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 이성호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실제와 현대적 시사점 연구

-교육제도와 성격,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교육사·철학 전공

 

한민석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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