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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와 독립운동(1)

작성자한다예아빠|작성시간19.02.27|조회수1,091 목록 댓글 0

“김병조와 독립운동”


Ⅰ. 독립투사의 일대기 및 역사적 의의


1. 1919년 3·1운동 33인 민족대표
김병조(金秉祚, 1877-1950)는 1877년 1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 고아면 봉명동에서 출생했다. 1908년에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다. 191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7년 졸업했고,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병조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의주교회를 담임했다(의산노회). 1월 19일부터 열린 평북노회 정기노회(제15회, 선천)가 종료된 다음, 의산노회의 대표자격으로 평북노회의 정기노회에 참석했던 김병조, 유여대, 장덕로, 김승만 등이 양전백 목사의 집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김병조는 3·1운동 거사에 동참할 동지(同志)를 규합하고자 찾아온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의 권유로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등 4인이 3·1운동에 기 독교 대표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2월 14일 김병조는 유여대와 함께 또 다시 양전백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김병조는 자신이 의주 등지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맡았으므로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모이는 민족대표의 선언식에 참석치 못할 것을 미리 언급하면서- 이명룡에게 자신의 도장을 맡기며 이 도장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줄 것을 위임했다. 3월 1일 당일에 김병조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의주를 비롯하여 평안도 일대를 순행하며 각처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보내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2. 상해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평안도 대표로 참석
1919년 3·1운동 직후에, 국내외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당연히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중론이 일어났다. 이에 임시정부수립 작업이 착수되었다.  이때 3·1운동 주동자들이 대거 상해로 이주해왔고, 김병조도 여기에 합류했다. 이 국제도시는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독립임시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총무로 선임된 현순이 세계 각국 공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또 국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중국 내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 제공했다. 이 독립임시사무소가 ‘신한청년단’과 함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석이 되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다. 김병조는 1919년 4월 10일 개회된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평안도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얼마 후 임시정부 법제위원회에서 이사로 활동했고 또한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외교위원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대외(해외)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이 5월 12일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자, 김병조는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편 여운흥을 현장에 파견했고 또 다른 한편 국제연맹과 장로교세계연맹 총회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교회/교단에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김병조는 손정도와 함께 ‘한국 기독교 대표들이 중국 기독교에 고하는 글’을 작성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교회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했다. 이처럼 그는 의정원 의원으로서 해외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 협력을 호소하는 외교 홍보활동에 힘썼다.


그러나 1920년 이후 의정원 내에서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 대립, 이념 갈등, 출신지역 간의 대립, 임시정부의 재정부족 등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김병조는 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의 요청으로 임시정부 국무원 산하 선전위원회의 이사직을 맡아서 임시정부의 선전업무를 통괄했다. 이것 역시 대외홍보활동이 주요 업무였다.


김병조가 구상한 외교 홍보활동은 국내(한국)와 미국과 중국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이었다. 그는 국내(한국)에 내무부 특파원을 선정해서 파견했고 또한 지방선전대 조직했다. 그가 중국에서는 선전대를 조직했고 또 한국의 독립에 관한 강연회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는 친한파(親韓派) 언론인 인맥을 구성하게 하고 이들을 통해 한국 독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3. 상해 한인교회 담임목사
상해에 있는 미국 해군 청년회관에서 예배드리던 한인들은 1915년에 사천로 중국청년회 식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김종상은 귀국하였다. 1916년에 교인 수가 약 70명(전체 상해거주 한인의 수가 2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상해의 한인교회가 국내의 개신교 총회에게 전도 목사 파송을 요청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될 때, 한인교회가 임시정부의 조직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 구성원을 결속하고 조직을 체계화하는 일, 자금을 조달하고 운영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때 상해한인교회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 상해로 건너 온 인사들 가운데서 목사만 10여명 이란 점에서, 교회 발전의 배경을 짐작할 수가 있다. 김병조 목사가 교회의 담임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매주일 60-70명 예배드리는 교회에서 교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 발전에 힘입어 1920년에 상해한인교회가 교민관 사무소(프랑스 조계에 있는 하비로 강령리)로 이전했다.


1922년에 상해한인교회 교인이 187명이었다. 교회는 예배당을 확장하고 한인교회의 지(支) 교회로 강만예배소를 신설했다. 또한 상해한인교회가 남경, 천진, 소주에 있는 한인교회들을 관장했다. 이 무렵부터 상해한인교회는 상해 한인 사회의 정신적 구심체였다. 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에도 교회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


교인들이 의정원과 임시정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 담임 김병조 목사는 의정원 의원과 사료편찬위원, 송병조 목사는 임시정부의 재정총장, 손정도 목사는 의정원 의장, 정인과 목사는 의정원 부의장, 이원익 목사는 의정원 의원과 사료편찬위원, 조상섭 목사는 학무총장과 교통총장, 현순 목사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붕 장로는 의원정 의원과 거류민단장, 여운형 전도인은 의정원 의원, 선우혁 집사는 임시정부 교통차장, 한진교 집사는 의정원 의원, 서병호 집사는 의정원 의원과 신한청년당 이사장, 이승만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규식이 임시정부 외무총장, 이동휘가 임시정부 군무총장, 유동설이 임시정부 참모부총장, 신익희는 임시정부 내무차장, 조소앙이 임시정부 비서장, 김순애가 대한애국부인회장, 그리고 김철은 임시정부 군무장(軍務長)을 담당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공동체였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이주일학교와 장년주일학교를 통해 교인들의 신앙양육에 가장 우선하였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사경회를 개최했고, 또 매일 새벽기도회를 열었다. 이와 함께 교회는 부설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한인 자녀의 일반 학교교육을 담당했다.


4. 역사편찬 사업을 주관
김병조는 ‘임시사료조사편찬부’(총재 안창호, 이하 편찬부)의 위원으로 역사편찬 사업을 주관했다. 1919년 5월 12일 제4회 의정원 회의에서 역사편찬 사업을 위해 조직된 편찬부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관한 유래와 배경을 편찬하는데 집중했다. 편찬부는 한일관계의 유래와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정리했다. 일제 강점기(1910~1945) 이래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이 탄압받고 학살당한 사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해서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사료는 향후 국제연맹에 제출되어 국제 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할 자료로 축적되었다. 이 작업의 결과물로서 『한일관계사료집』 4권이 간행되었다. 이 사료집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분석 비판하였다. 구체적으로, 1919년 3·1운동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3·1운동 기간에 발생한 희생자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자세한 기록으로 남기며 정리했다. 이 사료집이 또한 국제 사회에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홍보 자료로 활용되도록 편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사료집을 국제연맹에 송부해서 한국의 식민지배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김병조는 『한국독립운동사략』을 간행했다. 이 단행본은 1894년 동학혁명으로부터 1920년까지의 한국 근대역사를 외세의 침입과 이를 막아내는 민족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전체 17장으로 구성된 이 단행본은 독립운동이 진행된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또 이 단행본은 철저한 사료 수집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fact)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다양하고 중요한 사료들이 3·1운동 독립선언서(18종)와 함께 이 책에 수록했는데, 이 사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또한 이 단행본에는 당시 국제정세의 동향과 해외 한인들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소개되었다.


김병조는 역사의 주체를 민(民)으로 인식했다. 그는 그래서 1894년 동학혁명을 한국독립운동의 시발로 보았고 또 동학혁명의 주체 세력을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민(백성)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이 관점으로 독립운동의 실상을 소개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서술 역시 그는 국내외 동포(민)에게 신뢰받는 민주 정부라는 점을 역설했다. 그런데 편찬부가 1919년 9월 8일 해산되었다. 시작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해산되었다. 편찬부가 작업하던 역사편찬 사업이 임시정부의 국무원으로 이관되었다.


5. 신한청년당에서 활동
김병조는 신한청년당에서 민족민주공화세력으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8월 20일 전후로 중국 상해 프랑스조계에 거주하는 여운형의 집에서, 그를 비롯하여 장덕수, 김철, 조동호, 한진교, 그리고 선우혁 등 6명이 발기인으로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창당의 목표는 일제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의 달성이었다. 이 정당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를 채택하였고, 이 이념 아래에서 신한청년당은 조국 해방을 위한 광복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장차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룬 그 다음에, 신한청년당은 문화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조하여 대한(大韓) 민족을 만들고,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서 실력을 양성하며,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 인류에게 위대한 행복과 번영을 주는데 힘을 쏟기로 했다. 이렇게 원대한 목표를 설정한 신한청년당은 한국의 전통 문화 풍속 도덕 등을 새롭게 연구했고, 그 연구결과물은 민족 독립을 위한 홍보물로 사용하고자 했다.


김병조는 신한청년당의 초창기부터 중추적 인물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정예로 조직하되 50명 이내로 그 인원을 제한했다. 당원의 자격은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년이어야 했다. 신한청년당은 유능한 인재로서 조국 독립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몸과 마음을 바칠 청년 동지를 엄선해서 입당시켰다. 당 가입절차는 기존 당원이 먼저 신입 당원 적임자를 물색하고, 물색한 적임자를 권유해서 그가 입당 후보로 등록하게 되면, 입당 후보자는 신한청년당 이사에게 추천된다. 그 후보를 추천하려는 이사는 그를 총회에 추천하여 총회의 승인을 얻도록 하는데, 그 후보는 총회의 승인을 통해 당원이 된다. 신한청년당의 당원은 주로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서울 경기 출신으로서 30대 청년이 주축을 이루었다. 당원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받은 자였고 대다수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국내(한국)에서 신민회 활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했던 인물들이 상해로 와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신한청년당은 적은 규모의 청년독립운동단체였다. 창립직후에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을 가장 먼저 준비하였는데 국내 및 일본 유학생들과 연결을 맺고서 3·1운동의 진원(震源)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또 신한청년당은 국내와 해외에 당원을 파견하여 그곳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자극함으로써 3·1운동 직후에 각지로부터 유력한 인사들이 상해로 집결하도록 분위기를 잡았다. 이 작업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연계되었다. 신한청년당은 1922년 해체되었다. 신한청년당은 국제 사회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또 당원을 한국과 외국에 파견하여 그곳에서 추진되는 독립운동을 독려하였다. 또 신한청년당은 국내에서 3·1운동을 일으키는 진원(震源)의 역할을 했다.


- 3.1운동 100주년기념 주간말씀묵상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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